[GL] 내 절교를 받아라 - The Diary (외전)
"저, 저기 괜찮아?!"
뭐 이런 찹쌀떡같이 생긴 애가 다 있어, 라고 생각했어. 그때 네가 물었지. 중간고산지 기말고산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시험이란 거에 목숨을 거는 애 치고는 되게 표정이 신기했어. 우리 교복 재킷, 하얗잖아. 근데 나는 네 얼굴이 더 하얗고 뽀얘서, 뭐 이런 찹쌀떡같이 생긴 애가 다 있지, 하고 생각했는데...
"이왕 죽을 거면 예쁘게 죽고 싶어. 아직 손봐야 할 년들이 많은데... "
그때 나, 사실 좀 아팠거든. 살림해주는 아주머니가 갑작스럽게 일이 생겨서 밥을 안 해줬는데 밥 차려 먹는 건 귀찮고... 그래서 며칠 굶었더니 지나가는 강아지 새끼에 부딪혀도 넘어지는 지경이 되었나 봐. 근데, 나는 정말 이왕 죽을 거면 예쁘게 죽고 싶었어. 왜냐면 아직 손봐야 할 년들이 적어도 ㅇㅇ고 일진 다운 주검이다, 라고 생각할 수 있도록. 특히 ㅇㅇ여상 임진아. 그년에게만큼은 영양실조로 쓰러졌다며 비웃음을 당하긴 싫었어.
근데 너는 내 말에 눈이 더 커다래졌어. 신기하다. 왜 그렇게 찹쌀떡 같은 표정을 하고서, 눈썹을 팔자로 만들고서, 마치... 처음 보는 내가 걱정이 되어 죽겠다는 듯 어찌할 줄을 모르는 걸까. 근데 너 진짜 아담하다. 볼이 햄스터 같다. 진짜 찹쌀떡 같아. 한 번도 먹어본 적은 없지만 한번 먹어보고 싶어. 꼭 먹어봐야지.
첫눈에 반한다는 게 있을까?
그때 누군가 내게 그렇게 물었던 것 같아. 내 머릿속에 사는 누군가가, 나를 콕콕 찌르면서 속삭였던 것 같아.
찹쌀떡,
찹쌀떡,
찹쌀떡,
첫눈에 반한다는 게 있을까?
내 절교를 받아라 외전
The Diary
07. 12. 23
정수현이 며칠 전부터 문자로 불렀다. 추워서 나가기 싫다고 했다. 게다가 얼마 전에 목도리를 잃어버려서 더 나가기 싫었다. 아끼던 목도리였는데. 수능을 망친 이후 되는 게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도 정수현은 곧 크리스마스이브라고 놀러를 가자고 했다. 한대 때리고 싶었다. 너 때문에 수능 망해서 눈칫밥 먹고 집에 짜져있는 거 안 보이냐고 말하고 싶었다.
오늘 안돼, 미안해. 문자를 하고 다시 침대에 누웠다. 몸에 힘이 들어가지지 않았다. 배가 고파도 밖에 나가고 싶어도 마음이 무거워서 그렇게 할 수 없다. 재수하고 싶다. 오빠만 아니면 재수하고 싶다. 가만히 침대에 누워있는데 다시 문자가 왔다. 집 앞이니 나오라는 정수현의 문자였다. 싫다고 답장했더니 전화가 왔다. "당장 튀어나와아-" 했다. 지극히 엥엥거리지만 말의 높낮이가 없어서 나는 본능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그제야 내가 왜 이 또라이에게 개겼나 싶어서 후닥닥 집 밖으로 나갔다.
집 밖으로 나가자마자 코트 깃에 얼굴을 파묻고 고개를 숙이고 있던 정수현이 보였다. 내가 나가자마자 정수현이 씨익 웃더니 자기 코트를 풀더니 안에서 하얀 목도리를 꺼내 내 목에 둘러 주었다. "찹쌀떡. 첫눈이야." 진짜 눈이 왔다. 하얀 눈송이가 폴폴 내리고 있었다. 제법 두툼한 눈송이였다. 함박눈이네, 하니까 정수현이 "너처럼 생겼어."하더니 손을 잡았다. 정수현에게 받은 목도리가 따뜻했다. 딱히 선물을 받아서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밖으로 나오니까 기분이 좀 나아졌다.
08. 9. 4
정수현이 영화를 보자고 했다. 나는 해리포터가 아니면 보지 않겠다고 했다. 이러면 정수현이 영화를 보자고 하지 않겠지 싶었기 때문이었다. 아 근데 이 또라이가 웬일로 흔쾌히 들어주는 것이었다. 평소에 내가 해리포터를 보자고 하면 무슨 대학생이 그딴 애들 영화를 보냐고 구시렁대던 정수현이었는데... 나는 해리포터와 불사조 기사단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걸 꼭 봐야겠다고 했다.
영화관에서 하는 게 아니어서 우리는 DVD방으로 갔다. 그런데 처음 가봤다. 되게 아늑하고 좀 요상한 분위기였다. 한쪽 벽면에 커다랗게 있는 텔레비전이 신기해 내가 한참 동안 보고 있으니까, 정수현이 텔레비전 처음 보냐고 나를 놀렸다. 이런 건 처음 봐, 라고 하니까 정수현이 가만히 있더니 말했다. "나는 너처럼 하얗고 쪼그마한 앤 처음 봐."했다. 정수현은 이상하다. 가끔씩 좀 이상한 말을 한다. 세 시간 동안 나는 입을 헤벌리고 있었다. 영화가 재밌다는 생각은 들지 않고 그냥 잡생각에 빠져있었던 것 같다. 해리는 근데 왜 키가 안 크는 걸까. 뭔가 영화 속의 배우에게 동질감이 느껴져 측은했다.
그런데 갑자기 어깨에 툭, 뭔가가 떨어져 돌아봤더니 정수현이 잠들어 있었다. 재미가 없던 걸까. 영화가 시작한 지 8분 밖에 지나지 않았다. 툭, 내 무릎 위로 정수현의 손이 떨어졌다. 작고 여린 손가락이 새삼 또라이의 손가락치고는 너무 예뻐 보였다. 나도 모르게 슬쩍 잡아보았다. 벚꽃잎 같은 손톱이랑 손목의 뼈가 드러나 보이는 팔뚝. 그러고 보면 정수현도 참 못 챙겨 먹는다. 정수현은 부자다. 그치만 하는 행동만 보면 부자보다는 정신 나간 거지 같고, 부모님이 바빠서 늘 혼자 있는 걸 보면 좀 안쓰럽기도 하다. 아무튼 슬쩍 정수현의 손가락을 만져보는데 덥석, 정수현이 손을 잡더니 잠에서 깬 듯 부스스 내 어깨에 묻었던 고개를 들어 나를 빤히 바라봤다.
반쯤 감긴 눈동자랑 멍한 표정이었다. 나는 정수현의 무방비한 표정이 신기해서 같이 멍하니 쳐다보았다. 한참 동안 서로 마주 봤다. 좀 민망했는데, 음. 정수현이 너무 맹하게 쳐다봐서 난 그냥 얘가 왜 이러나, 싶었을 뿐이었다. 한참 나를 빤히 쳐다보던 정수현이 이내 다시 내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쳐자기 시작했다.
영화를 다 보고 나오자 어깨에 침이 흥건했다. 아주 침을 흘려대면서 잘 자길래 차마 도중에 깨우질 못 했다. 딱히 내 손을 덥석 잡은 정수현 때문은 아니었다. 그런데 영화 내용이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 나중에 따로 빌려봐야지.
09. 3. 9
정수현이 생일선물로 자길 주겠다며 술이 떡이 돼서 열두시에 자취방으로 들이닥쳤다. 사람은 정말 떡이 될 수 있구나 싶었다. 문을 열자마자 온몸을 던져 내 위로 쓰러지더니 자기 핸드백을 더듬어 내 얼굴 위로 뭔갈 퍽, 던졌다. 프랑스 어디에서 직수입해온 선크림이라고 했다. "봄볕... 이... 생각보다... 따가...워어어......찹쌀뜨억." 하고 땅바닥에 떨어진 시루떡처럼 잠들어 버렸다. 그냥 옷만 벗겨 재우려다가 낯선 향수 냄새가 나서 정수현의 얼굴을 사정없이 씻겼다.
09. 4. 18
정수현이 생일선물을 받겠다며 또 술이 떡이 돼서 열두시에 자취방으로 들이닥쳤다. 너 술꾼이야? 버럭 소리를 질러도 알아듣지 못할 만큼 취해있었다. 도대체 자취방까진 어떻게 찾아온 건지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열두시에, 으슥한 골목에, 술에 만취한 여대생이 얼마나 위험한 타겟인지 누누이 말해도 알아듣질 못하는 정수현이었다. '택쉬를 톼고 와쒀...모범퉥쉬...'라고 변명을 주저리주저리 했지만 어쨌든 이번엔 제법 화를 내니까 정수현도 양심은 있는지 가만히 닥치고 있었다.
"생일인데 남자친구랑 보내지 왜 왔어?"라고 하니까 정수현이 배시시 웃는다. 그리고는 그대로 잠들었다. 도대체 왜 이러는지 알 수가 없다. 또 대충 씻겨서 침대에 던져놨다. 간밤에 술 냄새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잠을 못 자고 베란다 문을 여는데 뒤에서 내 티셔츠를 쭈욱 끌어당기며 정수현이 잠이 덜 깬 목소리로 말했다. "숸물...선물...내놔..." 기가 막혔다. "너 선물 받을 정신은 있어?!"하고 쏘아주고는 옷을 챙겨 입었다. 24시간 대형마트로 택시를 타고 가서 미역국 재료를 사 왔다. 다음날 아침 정수현이 변기통을 잡고 한참 동안 속을 게워낼 때 나는 미역국을 끓였다. 정수현은 두 그릇을 먹고 다시 쳐잤다.
"너 생일 이렇게 보내도 돼?" 라고 쏘아주니까 감고 있던 눈을 부릅 뜨더니 "선물 내놔!"한다. "미역국 먹었잖아.", "뭐야?! 지금 미역국으로 퉁치겠다는거야? 죽고 싶어 찹쌀떡? 으워어어억."
속이 안 좋으면 안 좋다고 말을 하지. 예민한 피부 때문에 큰맘 먹고 구입한 20만 원짜리 양모이불 위로 정수현이 두 그릇의 미역국을 게워냈다. 더 이상 정수현은 생일 선물을 강요하지 않고 얌전한 고양이가 되었다.
09. 10. 7
임신이 아니었다. 다행이다. 미웠다가... 안 미웠다가 한다.
09. 11. 30
이번 남자는 지금까지 봤던 남자 중에 최악이었다. 슬쩍 이번 남자 별로야, 라고 말했더니 정수현이 "왜?", "왜?", "왜?"하고 끈덕지게 물어온다. 그냥 별로인 거 같아서, 라고 하니까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더니 이내 기분 좋은 얼굴이 돼서는 갑자기 전화기를 꺼냈다. 그리고 놀랍게도 내가 보는 앞에서 전화로 이별 통보를 했다. "헤어져.", 하는 소리가 나한테 "밥 내놔", 하면서 자취방에 들어오는 목소리처럼 지극히 아무렇지도 않아서 내가 놀라 쳐다보고 있으니까 어깨를 으쓱하며 만족스러운 얼굴을 짓는다. 근데 좀 이상한 말을 한 게 마음에 걸린다. "네가 좀 더 나한테 이런 말을 해줬으면 좋겠어." 도대체 무슨 말이지.
11. 5. 7
가슴... 을 왜 자꾸 만지는 걸까.
12. 3. 9
자취방 현관문을 여는데 문 앞에 정수현이 잠들어 있었다. 진짜 깜짝 놀랐다. 정말 죽은 듯이 잠들어 있어서 몸을 흔들어 깨우니까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뭐라고 웅얼웅얼 거리면서 내 옷을 잡아 끌었다. 얘가 왜 이러나 싶어 "괜찮아?" 하고 몸을 흔들며 일으켜 세우려는데 자꾸만 "... 아... 어디 갔지...으으..."하면서 제정신이 아닌듯한 손놀림으로 흐느적흐느적 핸드백을 뒤지더니 퍽, 또 내 얼굴 위로 뭔갈 던졌다.
피부에 민감한 사람에게 좋다던 이태리 직수입 선크림이었다. "이거 주려고 왔어? 너 술은 또 어디서 얼마나 마신 거야? 지금 아침이야, 이 멍청아." 하고 겨우 질질 끌어 집안에 들여놓았더니 그제야 구두를 축구공 차듯이 벗어재끼고는 두 다리를 뻗고 쳐자기 시작했다. 대충 이불을 덮어주고 집을 나서려고 현관문 손잡이를 잡는데 정수현의 잠꼬대가 들렸다.
"생일... 축하해... 김하여 어언."
12. 5. 23
알바하는데 자꾸 찾아오는 정수현 때문에 사장님이 화가 났다. 그만 좀 찾아오라니까 정수현이 자꾸만 이상한 말을 해대서 자꾸 이러면 이번엔 진짜 절교하겠다고 선언했다. 내 말에 정수현은 멍하니 있더니 이내 조금 화난 표정으로 벌떡 일어섰다. 심장이 덜덜 떨렸다. 왕년에 좀 노셨던 개또라이 정수현이 좀 무서워져서.
정수현은 "핑계가 있으면 찾아와도 돼?"하는 요상한 말을 남기고는 홱- 나가버렸다. 화가 난 것도 삐진 것도 아닌 이상한 표정이었다.
12. 7. 6
너무 더워서 밖에 나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영화나 다운받아서 봐야지 하는데 정수현이 좀비물을 보자고 했다. 임산부에게 그런 건 안된다고 소리를 질렀다. 도대체 정신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모르겠다. "아, 그럼 포켓몬스터라도 볼까, 찹쌀떡?"하고 툴툴 거리는 정수현 때문에 결국 감동적이되, 멜로. 멜로이되 아름다운 음악이 있는 영화를. 이왕이면 잘생기고 예쁜 배우들이 나오면 더 좋으니 그런 영화를 고르라고 했다. 그런 영화가 어딨나 싶었다. 결국 정수현의 아이를 위해 그런 영화를 검색하기 시작했다. 결국 클래식을 봤다. 딱히 인성 선배와 닮은 배우가 나와서는 아니었다. 영화 내내 나는 정수현 몰래 숨죽여 울었다. 정수현은 무표정이었다. "유치해. 재미없어." 어쩌고 저쩌고 하더니 결국 내 어깨에 고개를 기대었다. 자려나 보다. 내가 살짝 볼륨을 낮추고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보는데, 잠든 줄 알았던 정수현이 나지막이 물었다.
"첫눈에 반한다는 게 있을까?"
2007. 3. 2
드디어 잡았다.
찹쌀떡, 같은 하얗고 동글동글한 김아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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