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L] 추억의 단편선

[GL] 내 절교를 받아라 - 8화

봄쌀 by 봄쌀




최근에 자꾸 같은 꿈을 꾼다. 꿈속에서 나는 교복을 입고 있었고, 내 옆엔 자꾸만 정수현이 쫄레쫄레 붙어서 빵 셔틀, 우유 셔틀, 스타킹 셔틀 등을 시켰다. 악몽이었다. 그렇지만 늘 당했던 거라서 딱히 악몽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고 다만 그 시절의 꿈을 꾸는 게 너무 황당하고 이상해서 깰 때마다 기분이 묘해졌다. 




꿈속에서 정수현은 자꾸만 나를 불러댄다. 괴롭힐 때도, 괴롭힐 때도, 괴롭힐 때도... 찹쌀떡, 찹쌀떡, 찹쌀떡... 하고 불러댔다. 




가끔씩 이 꿈 때문에 새벽에 깰 때도 있었다. 이상했다. 현실에서조차 생각하기 싫은 또라이가, 게다가 요즘은 24시간 내내 마주치는 또라이 정수현이 꿈에서 계속 나오니까. 혹시 나쁜 일의 징조일까. 괜스레 걱정이 되기도 해서 진지하게 이걸 해몽해봐야 하나,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푸르스름한 새벽에 두 무릎을 끌어모으며 잠시 생각을 정리하다가 슬쩍 옆을 바라보면 곤히 잠든 정수현이 있었다. 세상이 다 변해도 절대로 변하지 않을 것 같은 얼굴을 하고선. 




"......" 




잘 잔다. 늘 잘 쳐잔다. 희한하게도 잠은 많아서는, 베개에 머리만 뉘면 잠에 들어버리는 정수현이었다. 새삼 늘 혼자 있던 곳에 정수현이 있으니까 기분이 묘했다. 사실은 지금처럼 같이 살지 않았어도 정수현은 종종 우리 집에 왔었는데. 왜 새삼스럽게 정수현의 자는 모습이 신기한 걸까. 




그러다가 문득 정수현에게도 고등학교 때가 있었구나, 싶었다. 그리고 그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다가 이런 질문이 피어오른다. 




먼 훗날, 내가 너를 떠올릴 때. 


그때도 너는 여전히 또라이 정수현으로 남아있을까. 





고개를 들어 달력을 본다. 




6년에서 7년째로 향하고 있었다. 




내가 절교를 하기로 다짐한지. 




그리고... 




정수현이라는 또라이와 친구가 된지. 






내 절교를 받아라 8화 


8. 그 사람 





"애 아빠는..." 




정수현의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렸다. 




그래, 누구냐고. 




꼴깍, 나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물론 나는 모르는 사람이겠지만... 그래도... 혹시 정수현의 아기가 조금 자라서 나한테 "아줌마, 우리 아빠는 누구일까요?"하고 물으러 올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러면 철딱서니 없는 엄마인 정수현을 대신해 내가 알아서 잘 설명해 줘야 할지도 모르니까... 




"음...이름으로 말해줘야 해?" 


"어?" 




한창 뜸을 들이다가 김이 팍 센다. 그러다가 생각해보니 그렇기도 하다. 이름이라... 어차피 이름 들어봤자 내가 모르는 사람일 가능성이 높긴 하니까. 




"음... 이름 말고 그냥 어떤 사람인지 말해봐." 


"알았어. 잘 들어봐." 


"응." 




뭘 잘 들을 것까지야... 싶었는데 정수현이 기다렸다는 듯이 조잘조잘, 재잘재잘, 놀라울 정도로 조곤 거리며 풀어놓는 말에 나는 조금 놀랐다. 정말 애정을 가득 담아서 말하는 목소리였다. 




남자는 액세서리쯤으로 치부하던 정수현이 새삼 아이를 낳겠다고 결심한 까닭이 조금 이해가 될 정도로 목소리가 들떠 있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숨을 죽이고 정수현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이거 너한테만 말하는 거야, 찹쌀떡. 애 아빠는... 진짜 좋은 사람이야. 수현이가 무슨 말을 해도 다 잘 받아줘. 내가 거짓말을 해도 진짠 줄 알아. 되게 순진하고 막 그래. 그래서 다른 남자들보다 좋았어. 처음으로 잤던 날. 사실은 내가 너무너무 그 사람이랑 자고 싶어서 한참 동안 그 사람의 등을 바라봤어. 그 사람은 생각보다 작고 아담한 등을 가진 사람이야. 문득 눈을 떴는데, 날 등지고 있는 그 어깨와 등이 너무 작고 따뜻해 보이는 거야. 생각해보면 늘 내 옆에 있어줬던 그 등과 어깨였는데... 그때는 잘 몰랐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한참 바라보고 있었던 것 같아. 그냥 만져보고 싶었어. 그래서 수현이가 먼저 만졌지. 근데 그 사람이 되게 수줍음을 타는 거야. 처음이었어. 수현이가 먼저 만진 사람도 처음. 수현이가 만져도 거부했던 사람도 처음." 


"......" 




헐. 얘가 이렇게 말이 많은 애였구나. 지금 저렇게 말하는 게 정수현이 맞나, 싶었다. 정수현이, 정말, 사랑에 빠졌구나, 하는 생각. 그 느낌은 뭔가 묘한 기분이었다. 좋은 기분도 나쁜 기분도 아닌.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복잡한 심정이었다. 




사랑에 빠진 친구들의 애인 자랑을 지겹게 들어왔지만 정수현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내 생애 처음으로 복잡한 심경을 안겨주었다. 




왜일까? 스스로에게 질문하기도 무서울 정도로 느낌이 묘해서 나는 말없이 그냥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정수현의 말을 듣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 사람은 바보 같을 정도로 착해. 처음엔 너무 착해서 바보 같았어. 그래서 내가 많이 괴롭혔어. 그런데 내가 괴롭히고 또 괴롭혀도 수현일 내치지 않았어. 맨날 툴툴대면서도 결국엔 마지못해 받아주었어." 




정수현의 목소리가 천천히, 그러나 분명하게 조곤조곤 나를 향했다. 나는 그냥 가만히 있었다.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았으니까. 아니, 듣고 싶지도 듣기 싫지도 않은 이야기였지만 그냥 정수현이 진지하게 무언가를 말하는 모습이 내겐 너무 낯선 것이어서 단지 그 이유 때문에 가만히 있었다. 




"처음엔 그냥 그 사람의 호의가 신기해서 다가갔어. 나중엔 그냥 만지고 싶고, 말 걸고 싶고, 괴롭히고 싶고, 만지고 싶어서. 아니, 그렇게 하지 않으면 불안해졌어. 그런데 갑자기, 어느 날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드는 거야. 다른 사람에게도 그렇게 된다면? 내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만져지고 괴롭혀지고 관심받고 그렇게 된다면?" 




갑자기 정수현은 내 가슴을 만지던 손을 스르르 거두고는 내 배를 쓸어만지기 시작했다. 자연스럽고, 조금 애틋한 느낌이긴 했는데...그냥 부들부들 살결을 만지는 수준이어서 나는 딱히 거부감이 들진 않았다. 




게다가 정수현을 알게 된 6년 중에 사실상 제일 진지한 순간이 아닐 수 없어서 스킨십에 대한 불쾌감을 느낄 겨를이 없었다. 




"당연히 내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걸 최근에야 깨닫게 되었거든. 근데 그런 상상을 하니까 갑자기 너무 슬픈 거야..."




정수현은 잠시 뜸을 들였다. 그리고 조곤조곤 잇대었다.




"그리고 사람들을 만나도 자꾸만 그 사람을 떠올리게 되었어. 그래서 그랬을까? 그 사람말고 다른 사람을 만났을 때의 기억들은 그닥 꺼내고 싶지 않아. 나한테 그 사람은 그런 존재야. 근데 있잖아. 그런데 말이야아. 그런데에..."




그 사람은 둔해서 몰라. 내가 이렇게 생각할 거라고는. 꿈에도 모를지 몰라. 진짜 둔해.




그 말을 끝으로 한동안 정수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배를 가만히 어루만지던 손을 멈췄다. 나로 말하자면, 나름대로 신선한 충격을 받고 있었다. 지금 내 뒤에서 조곤조곤 말해오는 애가 정수현이 맞나 싶어서. 




....괜히 물었던 걸까? 




그치만 생각지도 못 했다. 정말 애 아빠라는 사람을 이렇게 진지하게 사랑하고 있었다는걸. 새삼 정수현의 일거수일투족을, 아니 적어도 정수현이라는 영역만큼은 완벽히 꿰고 있다고(절대로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생각했는데 내가 모르는 정수현의 모습을 보게 되어 기분이 정말 묘해졌다.  




"듣고 있어?" 


"응." 




불편하면 그만 이야기해도 된다고, 말하려고 했는데 다시금 정수현의 말이 이어졌다. 




"그 사람을 보면 있지, 이런 생각이 들어." 




이 말을 끝으로 정수현은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하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평생 내 마음을 몰라도 좋으니까, 늘 지금처럼만 내 옆에 있어주면 좋겠다는 생각. 내가 잠들어 있을 때, 그 사람이 입을 맞춰준다면 참 좋을 거란 생각. 나 때문에 속상하고 화가 나서라도 내 생각을 해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 내 차와 똑같은 차를 볼 때마다, 나와 함께 있었던 카페를 지나갈 때마다, 어딘가에서 내가 바르는 로션향을 맡을 때마다, 어떻게든 나를 한번 더 떠올려 줬으면 좋겠다는 생각." 




정수현은 놀라울 정도로 담담하게 말했다. 조용한 노래를 부르듯, 조곤조곤 들리는 목소리가 마치 자장가같이 들렸다. 재우기 위함이 아니라, 마치 평온한 요람 속에 아기가 깨지 않게, 그래, 재우는 게 아니라 깨우지 않도록 들려주는 편안하고, 그렇지만 불안하고, 한편으론 묘하게 위안이 되는 듯한 이상한 말투였다. 




"한동안 만나지 못해도 어제 본 것처럼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 나를 찾아올 때나, 내가 찾아갈 때나 그 사람과 늘 같은 거리에 있어서 둘 중 누가 움직여도 결국엔 중간지점에서 만나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 내가 지금쯤 무엇을 하고 있을 지 상상을 할 때, 열 번 중에 일곱 번은 맞춰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 언제나 내 거짓말을 진짜처럼 받아들여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 그래서 항상 그 사람에게만은 거짓말을 하는 게 나쁜 짓이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 




새삼 정수현의 손바닥이 따뜻하고 보드라운 촉감이라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늘 지금처럼..." 




말이 흐려졌다. 그리고 정수현은 한번 침을 삼키며 숨을 들이켰다. 내 손에서 땀이 나는 것 같았다. 




"뜬금 없이, 어떤 이유로든..." 




.....어...? 




목이 메는 걸까. 갑자기 정수현의 목울대가 꿀렁거리는 소리와 함께 나지막이 한숨을 쉬는 소리가 들렸다. 뒤에서 듣는 정수현의 목소리는 조금 걱정이 될 정도로 애절해서 뒤를 돌아봐야 하나, 걱정이 되었다. 




".... 너를 찾아와도..." 




응? 




"되는 것처럼." 




... ? 




툭. 내 어깨에 정수현이 이마를 콩콩 맞댄다. 그리고는 배를 슬어만졌던 손을 거둔다. 갑작스러운 공허함에 나는 나도 모르게 정수현이 쓸어만졌던 내 배에 손을 얹고 가만히 있었다. 




"얼마나 행복할까. 내가 그 사람을 생각하고 있지 않을 때, 그 사람이 나를 생각해 준다면." 


"......" 


"아니, 내가 생각하는 반만큼만 나를 생각해줘도 기쁠 거야." 


"... 응." 


"끝이야." 


"... 어?" 




갑자기 끝난 이야기. 한창 달리던 자동차의 시동이 갑자기 꺼지듯 정지된 이야기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슬쩍 들었다. 내 숨소리인지 정수현의 숨소리인지만 고요하게 들렸다. 




나는 눈을 내리깔았다가 다시금 어둠 속의 허공을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이내 숨을 한번 들이키고 결국 몸을 돌렸다. 처연히 내리깐 눈동자에 드리워진 속눈썹이, 새삼 정수현이구나 싶었다. 




"그 사람은 자기 아이란 걸 알아?"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 


"그게 왜 안 중요해?" 


"내가 사랑하니까." 




나는 그날 처음으로, 정수현의 미소가 서글퍼 보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사랑하니까, 하는 그 말투와 눈빛. 6년. 결코 짧지 않은 그 세월동안 징하게 또라이짓을 했던 포커페이스의 정수현이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내가 사랑하니까,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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