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빌데 야크트
“저기, 너희들.”
마우리스가 그렇게 말을 꺼낸 것은 여름을 다 지나 슬슬 추워지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나가 볼 생각 없니?”
“내쫓는 거야?”
“아니, 그런 건 아니고, 부탁할 것이 있어서. 외출을 제안하는 거야. 코라 너, 열네 살부터 쭉 여기서 나가지 않았잖니? 바깥이 그리울까 생각했단다.”
마우리스의 말은 맞았다. 여기서 나가지 않은 지도 벌써 열두 해. 하지만 그의 추측대로 바깥이 그립지는 않았다. 인간들의 세상에서는 좋지 못한 일만 있었다. 그들 중 그 누구도 나를 동등한 존재로 대하지 않았다. 지리멸렬한 날들이었다. 어느 날 나는 식량만 축내는 애새끼가 되었다가 어느 날은 신기하게 생긴 구경거리가 되었다가 또 어느 날은 불길한 마녀가 되었다. 그들은 내게 원하지 않는 역할을 요구했다-아니, 마녀가 된 것은 내 선택이었지만-진정한 나를-하지만 나는 누구지?-보려 하지 않았다. 멸시받을 바에는 혼자가 나았다. 어디를 가도 똑같으리라고 생각했다.
“나가고 싶은 마음은 딱히 없는데. 근데 뭔데? 꿍꿍이라도 있어?”
“음, 비슷하지. 나는 너희가 내 부탁을 하나 들어주었으면 해.”
“부탁?”
오르피아가 묻자 마우리스가 대답했다.
“산 너머의 도시에서 수확제가 열린단다. 민속 신앙을 곁들인 종교적인 행사지. 그 도시에 가려면 산을 넘어야 하니......너희가 살던 마을과는 꽤 거리가 있기에, 너흴 알아볼 사람이 있어 보이진 않아.
그냥 가서 수확제를 즐기고 축제의 모습에 대해 말해주면 돼. 자료를 모았는데 현장 조사를 갈 여력이 되지 않아서.”
“결국은 가서 놀다 오면 되는 거네?”
“뭐, 그렇지. 하룻밤 정도?”
오르피아가 으음, 하는 소리를 내더니 나를 바라보았다.
“어때, 갈래? 괜찮은 것 같은데. 내 생각엔, 당신도 좀 나가서 사람을 만나 볼 필요가 있어. 당신이 간다면 나도 갈게.”
사람이라면 질색이었다. 시끌벅적한 축제 분위기도. 하지만 오르피아는 기대에 찬 눈빛이었다. 그 표정을 바라보자 어쩌면 오랜만의 외출도 괜찮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
마우리스는 어디선가 망토를 가져와 내게 씌웠다. 내 외모는 좀 눈에 띈다면서. 망토를 쓴다고 가려질까 싶었지만 나는 일단은 그의 말을 들었다. 오르피아는, 어차피 자긴 평범하게 생겼으니 괜찮으리라며 망토를 쓰길 거부했다.
“어떻게 나가는 거야?”
“통로를 만들어 두었단다. 숲으로 들어가 적당히 한 방향으로 걸어가다 보면 바깥으로 나가질 거야. 내일 정오까지는 들어오렴.”
오르피아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내 손을 잡고 걸어나가기 시작했다. 얼마나 걸었을까,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눈이 시리도록 밝은 아침이었다. 하늘은 공포스러우리만치 푸르렀고 무심코 올려다본 태양은 작열하며 빛났다. 한 번도 내게 허락된 적이 없었던 광명. 저 빛이 두려워서 지금껏 피해왔다는 사실이 기억났다-신전은 항상 안온하고 따스한 밤이었기에. 눈이 시리고 피부가 따가웠다. 내리쬐는 빛줄기가 내 이름을 부르는 듯했다. 태양이 점점 내게 가까이 다가오면서-
“코라?”
오르피아의 목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내 눈에서는 생리적인 눈물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여전히 눈이 시렸고 하늘은 새파랬지만 태양은 나와 거리를 둔 상태 그대로였다. 오르피아가 걱정스러운 듯이 날 바라봤다.
“힘들다면 돌아가도-”
“됐어. 오랜만에 태양을 봐서 그래. 눈이 시려워서.”
아직도 심장이 두근거렸다. 내가 본 건 뭐였지? 분명 태양은......그게 아니었는데. 태양이 내게로 다가오는 환상을 봤다고 하면 오르피아가 걱정하겠지. 입을 다물었다.
“오늘따라 햇빛이 세긴 하다. 당신은 해를 본 지도 오래되었지? 그곳은 항상 밤이었으니까.”
“응. 생각보다 낮이란 게.......인공적인 불빛보다는 밝네.”
*
얼마나 걸었을까, 마우리스가 말한 도시가 나타났다. 마을은 활기를 띄고 있었다. 아이들의 웃는 소리, 장사꾼들의 호객 행위, 돼지 울음소리...... 그러다 신기한 것이 눈에 띄었다. 밀짚으로 만든 거대한 동상 같은 것이 광장에 있었다. 여자의 드레스가 입혀진 채로 머리에는 사슴 뿔 장식이 씌워져 있었다. 발 근처에는 수확물들이 가득했다. 마치 신에게 공물을 바치듯이. 오르피아가 마을 사람들 중 몇몇에게 다가가 무어라 이야기를 나누다가 내 쪽으로 돌아왔다.
“내 생각이 맞았어. 홀다를 꾸며낸 거구나. 그의 신앙이 아직까지 존속하리라곤 생각지 않았는데.”
“홀다? 어디서 들어봤던 것 같은데.”
“다른 이름으론 헤로디아나 헤로디아스, 혹은 디아나. 디아나는 익숙하지? 아르테미스의 라틴 신격. 마우리스가 왜 이 축제에 대해 조사해달랬는지 이제 알겠네. 빌데 야크트와 관련된 것 같은데.”
내가 멀뚱멀뚱 오르피아를 바라보자 그가 웃으며 설명했다.
“빌데 야크트는 일종의 전설 같은 건데, 그런 거야. 신이 인간이 아닌 추종자들을 데리고 밤하늘을 질주한다는 이야기.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는 신은 지역마다 다른데, 이곳에서는 홀다인 거고. 그들은 가끔 지상에 내려와 인간들과 만나곤 하지. 순전한 호기심으로. 그렇게 찾아온 존재들을 잘 대접하면 한 해 동안은 행운이 찾아온단 얘기가 있어. 하지만, 잘못하다간 그들에게 홀려 행렬의 일부가 되고, 돌아가지 못하고 영원히 인세를 떠도는 거야.“
오르피아가 씩 웃었다.
“그럼 홀다를 기리는 축제 같은 거구나, 이건. 교회가 싫어할 텐데?”
“당연하지, 그들은 민간 신앙을 인정하지 않아. 기적을 일으키는 신성한 존재는 오직 유일신이라고 보니까. 당신을 마녀라고 박해한 신부는 그것조차 모를 정도로 멍청했던 거지. 그래도 교회기 막는다 한들 수백 년을 지속되어 온 민간 신앙이 쉬이 사라지지는 않는 거야. 믿음은 강력한 힘이거든. 여긴 유달리 민간 신앙이 득세했던 지역 같네.”
오르피아는 날 데리곤 홀다의 모습을 한 밀짚 장식물 앞으로 가 발밑에 쌓인 물건들을 가리켰다.
”아까 남자가 말하길 홀다에게 바치는 공물이랬어. 공물을 바치고 행운을 달라는 기도를 한다고. 어때, 우리도?”
“바칠 게 있나?”
“기도라도.”
“그래.”
나는 기도를 해 본 적이 없었으므로 오르피아가 하는 것을 따라했다. 왜인지 태양빛이 날 향해 더욱 따갑게 내리쬐는 기분이 들었다.
기도를 마친 후 오르피아는 나를 데리고 여관으로 들어가 방을 잡았다. 그가 여관 주인과 흥정하는 모습은 퍽 상인같았다. 오르피아는 귀족인데, 직접 거래를 해 본 적이 있긴 한가? 왜 저리 능숙하지? 결국에 그는 방을 절반의 가격으로 깎는 데 성공하고 내게 미소지어 보였다.
“돈은 어디서 난 거야?”
“마우리스가 줬어. 내가 관리하는 게 나을 것 같다고. 돈은 충분해, 하룻밤 놀다 가기엔. 그러니 신경쓰지 마. 아직 날이 밝으니 도시 구경이라도 할래?”
거절할 이유도 없었기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을 한가운데 위치한 여관에서 나오니 도시가 한눈에 보였다. 노상 점포들과 축제 장식과 즐거워 보이는 사람들. 오르피아도 들뜬 듯이 콧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나는...... 붕 뜬 기분이었다. 가위로 잘라낸 듯이 세상에서 떨어져 나가 하늘을 부유하는 느낌이었다.
그들의 기쁨에 함께할 수 없었다. 수확제였지, 풍년을 기원하고 안녕을 비는 축제. 하지만 풍년이 들어서 배불리 먹든 흉년이 들어서 쫄쫄 굶든 그게 행복과 무슨 상관이지? 나는 신전에 오기 전 매일같이 배를 곯을 때든 신전에 와서 마음껏 먹을 수 있게 된 때든 특별히 행복하다고 느껴 본 적 없다. 아니면 마을의 분위기가 그들에게 행복을 가져다주나? 그럼 오르피아와 함께하는 나는 지금 행복해야 할 텐데. 그토록 갈구하던 이해자를 얻지 않았던가? 왜 나는......
“무슨 문제라도 있어, 코라?”
오르피아가 물어왔다. 오르피아의 말에는 항상 사람을 안정시키는 묘한 힘이 있었다. 난 거기에 기대고 싶었던 걸지도 몰랐다.
“지금 무슨 기분인지 모르겠어. 다들 기뻐 보이는데 아무런 감정도 안 들어. 넌 지금 행복해?”
오르피아가 잠시 생각하더니 답했다.
“즐겁다라, 그래. 즐거워. 도시 전체가 디아나를 기리는 방식이 흥미롭고 인간들의 들뜬 분위기가 좋아. 그리고 무엇보다 당신과 함께라서 좋아. 왜 그래?”
“내가 여기 있으면 안 된단 기분이 들어. 내 자리가 여기가 아닌 것 같아. 왜 다들 즐거워하는지 모르겠어. 그래야 하는 거야?”
“사람마다 다르지. 시끌벅적한 분위기를 싫어하는 사람도 있는걸. ......있잖아. 당신은 어떨 때 즐거워?”
“생각해 본 적 없어.”
“그럼 지금부터 찾아보자.”
그렇게 말하며 오르피아는 나를 이끌고 도시를 누볐다. 장신구를 파는 노상 점포에서 내게 헤어밴드를 씌워 보거나 귀걸이를 대 보다가 그는 레이스가 달린 리본 끈을 사 내 머리를 묶어 주었다.
그 다음에 그는 광대-남녀 한 쌍이었는데, 둘 다 가면을 썼지만 가면 사이로 불타오를 듯한 빨간 머리가 보였다-의 공연장으로 날 데려갔다. 유치한 풍자극이었지만 둘의 입담은 꽤 화려해 들을 만했다.
공연이 끝나니 노을이 하늘에 드리우고 있었다. 그는 저녁으로 파이를 사 가자며 나를 끌고 정육점에 갔다.
“어땠어, 공연?”
“글쎄다.”
“오늘 즐거웠어?”
“솔직히 잘 모르겠어.”
“몰라도 괜찮아. 언젠가 찾을 날이 오겠지. 그도 그럴 게, 내가 망가졌을 때 다시 즐거움을 느끼도록 도와준 사람이 당신이었는걸.”
뭐?
“뭐?”
“기억하지 못해도 괜찮아. 내가 기억하니까. 아, 파이 당신이 계산해 볼래? 혼자 물건 사본 적 없잖아.”
나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그에게 밀려 매대 앞에 섰다. 그가 쥐어 준 동전 몇 닢으로 파이를 고르고 계산을 하려는 찰나 나는 무심코 주인과 눈을 마주쳤다.
......익숙한 얼굴이었다. 갈색 머리에 푸른 눈의 여자. 그도 나를 알아본 듯 나와 오르피아를 두고 번갈아 눈을 굴리더니, 경악하는 표정을 지었다.
“영주분의 누이동생, 그리고 세상에, 너.......”
나는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이런 곳에서 과거의 인연을 미주하고 싶지 않았는데.
“테레제.”
내게 말을 건 여자의 이름은 테레제였다. 마을에서 하나뿐이던 내 또래 아이. 퍽 다정한 성격이었지만 역시나 그도 마을 사람이었다, 오르피아가 특이한 거지. 그는 처음 나와 동갑이면서도 그보다 훨씬 깡마르고 작았던 나를 꽤 챙겨줬지만 음, 그게 진심은 아니었을 것이다. 내가 마녀로 불리기 시작하자 그는 나를 무시했으니까.
“아니, 너....... 이름이 뭐였지?”
“왜. 그냥 너희들이 부르던 대로 마녀라고 부르지 그래?”
“.......”
“아, 농담이야, 테레제. 왜 그런 표정을 짓고 그래. 코라, 코라라고 불러.”
“……너, 살아 있었어? 세상에, 신이시여, 옆의 영양분께선-틀림없어. 당신 소렌탈이죠? 그……. 어어……. 홀려 사라졌단 말이-”
“입 닥치지 그래? 계산이나 해.”
내가 쏘아붙이자 테레제는 입을 다물었다. 그래, 그런 소문이 진짜로 퍼졌단 말이지. 그리고 쟤는 그 말도 안 되는 선동에 넘어간 거고. 그렇다면 나도 마땅히 응해 줘야지.
“테레제, 내가 마을에서 왜 쫓겨났는지는 알지.”
테레제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오르피아는 흥미롭단 듯이 우리 둘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와 오르피아 소렌탈이 여기 있단 걸 불면 너, 흐음, 아니-네 자식까지 죽은 목숨이야. 오늘 밤 홀다의 무리가 마을을 지나간다지. 자식을 홀다에게 뺏기고 싶진 않겠지?”
“…….”
그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후드를 꾹 눌러쓰고 오르피아와 함께 정육점을 빠져나왔다.
*
“방금 멋졌어. 다시 반해버릴 뻔 했어-정말로.”
“먹힐 거라곤 생각 안 했는데 쟤가 멍청했던 거지.”
“그렇긴 하더라. 자식이 있는 건 어떻게 알았어?”
“때려맞췄어, 그냥. 스물여섯이나 되었는데 어련히 없을까.”
*
오르피아가 방을 잡으면서 고려하지 않았던 것이 있었는데, 침대의 개수였다. 방에는 침대가 하나뿐이었다. 오르피아는 은근히 나와 같이 자고 싶다는 기색을 내비쳤지만 나는 그러기 싫었다.
“난 의자에서 잘 거야. 너 누워.”
“부담스러워하지 마. 이상한 짓 안 할게. 앉아 자는 거 힘들잖아. 허리 다 나갈걸. 응? 진짜로.”
“.......”
결국 나는 오르피아와 나란히 한 침대에 누웠다. 생각보다 같은 침대에 누가 함께 있단 건...... 그래,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안정되는 기분이었다.
“눕길 잘했지?”
“그래.”
“코라, 행복해-지금? 비록 마지막에 가서 일이 좀 그렇게 되기는 했지만.”
나는 하루를 떠올렸다. 오르피아에 이끌려 도시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고, 오르피아의 환하게 웃는 미소와 내 손을 통해 느껴지는 그의 체온....... 나는 아주 오랜만에, 내가 지금 행복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행복이란 그리 특별한 게 아닐지도 모른다고.
“어쩌면.”
“다행이야. 좋은 꿈 꾸길, 내 사랑.”
“막판에 초를 치는 재주가 있구나.”
“잠깐, 그런 표정 짓지 마! 일어나지도 마! ......진짜 입 닫을게. 잘 자.”
오르피아는 그 이후로 정말 잠에 든 것인지 조용해졌다. 이렇게 많이 돌아다닌 것은 오랜만이었기에 나도 곧 몰려오는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
-코라.
얼마나 잤을까, 나는 날 부르는 목소리에 눈을 떴다. 그 유령이었다. 그것은 암흑 속에서도 하얗게 빛났다.
-밖에 나가자. 아마도 재밌는 게 있을 거야. 네가 좋아할 만한.
“재미있는 거라고? 밖?”
-홀다-그러니까, 좀 다른 이름으로는 말야, 디아나의 추종자들이 지금 지상에 내려왔어. 몇백 년에나 한 번 볼 수 있는 진귀한 광경이지. 오르피아는 깨우지 말고 날 따라와. 그 애는 나가지 말라고 할 거야.
“…….“
다짜고짜 유령을 따라가라니, 미친 소리였지만 나는 유령을 향해 멍하니 고개를 끄덕이고는 일어섰다. 지금 생각해 보건대, 그때의 나는 무언가에 홀린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조용한 발걸음으로 유령을 따라 나섰다.
여관의 안부터 안개가 자욱했다. 한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오직 유령만이 희멀겋게 빛났다. 이런 경험을 해 본 적이 있었나? 왜인지 익숙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두렵지 않았다. 나는 자연스럽게 유령을 따라갔다.
조용한 여관을 나와 광장에 다다르자 제일 먼저 들린 것은 높고 날카로운 웃음소리였다. 인간의 것도 아니고, 한두 명의 것도 아니었다. 곧 근원을 찾을 수 있었다. 초록, 분홍, 노랑, 보라. 형형색색의 머리카락을 풀어헤친 여자들이 맨발로 뛰어다니고 있었다. 머리카락들은-마치 나무와 꽃의 빛깔 같았다. 그래, 그들은 요정들이었다. 머리색뿐만이 아니라, 인간과 다른 분위기를 풍겼다. 왜일까, 문득 내가 저기에 낀다면 그들과 날 구별하지 못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요정과 마녀. 잘 어울리는 한 쌍의 조합 아니겠는가?
그리고 야생동물들이 가득했다. 사슴, 양, 늑대, 사자와 호랑이까지. 온갖 새들과 나비도. 말과 염소의 하반신을 가진 남자들. 팔 대신 조류의 날개가 달린 여자들과 날아다니는 인어. 광장에 인간이 아닌 이들이 가득했다. 그들은 인간이 쌓아올린 문명을 비웃기라도 하듯 물건을 부수고 기이한 현상들을 일으키고 있었다. 건물들은 자욱한 안개, 그리고 이끼와 나무덩쿨로 뒤덮여 있었다. 자연이 인간의 세상을 침범한 듯했다. 그 때문이었을까, 비현실적이고 이질적인 존재들이 한 곳에 모여 있었음에도 어색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이, 원래의 자리를 찾은 듯이 보여 기뻤다.
-저들에게 홀리진 마. 진짜 구경거리는 따로 있으니까.
유령이 그렇게 말하며 산으로 걸어갔다. 숲 속으로. 계속 깊이. 이상하게도, 안개가 있을 리 없는 여관 안에서는 뿌앴던 풍경이 산으로 들어갈수록 명료해졌다. 나는무슨, 유령이 내는 희멀건 빛이 생명줄이라도 되듯이 맹목적으로 유령을 따라갔다. 그리고 산 한가운데서 나는 그 여자를 보았다.
진주의 광채처럼 오색으로 빛나는 하얀 튜닉을 입고 활을 맨 채였다. 우유빛 피부를 가졌고 달빛 머리카락은 산발로 풀어헤쳐 굽이굽이 바닥까지 닿았다. 여자에게서는 언젠가 맡아 본 밤의 향기가 났다. 그리고 숲의 향기와 피냄새 약간이. 그의 바로 옆에는 금빛 뿔을 가진 흰 사슴이 서 있었다. 여자가 내게 짐승처럼 미소지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디아나. 달과 야생과 사냥의 신.“
여자가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구슬이 은쟁반을 두드리는 듯 또랑또랑했다.
“신기해, 너 같은 인간은 처음 봐. 영혼이 조각나 있고, 죽음의 냄새가 풀풀 나는데 살아 있네. 내 남동생이 내게 관심을 가졌던 것도 이상치 않지.”
“오라비라면 아폴로?”
문득 작열하던 태양이 생각났다. 눈이 시릴 정도로 푸르던 낮의 하늘. 그게 아폴로의 힘이었나? 왜 나를? 영혼이 조각났다는 것은 대체 무슨 뜻이지? 하지만 그 의문들조차 제대로 떠오르지 않았다. 생각들이 머리를 부유해 어느 하나 명료한 것이 없었다. 어쨌거나 디아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와 같이 가자, 아이야. 네겐 자격이 있어.”
내밀어진 여자의 손은 흉터 하나 없이 하얗고 고왔다. 마치 대리석 조각 같았다.
-잠깐 유흥에 어울리는 것도 나쁘지 않지. 어차피 네겐 언제든지 쫓아와 잡아줄 존재가 있으니까. 정말로 위험해지면 그가 와줄 거야.
유령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렸다. 디아나가 나를 붙잡더니 끌고 하늘로 올라갔다. 이렇게 끌려가면 나도 영영 그들의 일원이 되어 하늘을 떠돌게 되는 걸까? 님프들과 켄타우로스들과 사티로스들과 하피들과 세이렌들과 함께 노래부르고 춤추며? 어쩌면 그것도 나쁘지 않을 거야. 인간세상에서는 환영받지 못하는 몸-
“그래, 결정했다. 빼앗고 싶어졌어-그분이 눈독 들이는 인간이라니. 내 추종자가 되렴. 너는 약해서 사냥은 못 하겠지만 특별히 봐 주지. 내 무리에 한 명 쯤은 예외를 둘 수도 있으니까. 날 따라가면 넌 영생을 누릴 수 있어. 산과 들을 뛰어다니고 매일 밤마다 하늘을 달리며 노래하고 춤추는 거야. 인간에겐 더없는 영예란다, 내게 속하게 되는 것은.”
‘그분’이라는 것은 무슨 말일까? 중요하지 않아. 저 자는 내게 기회를 주고 있어. 이 지리멸렬한 세계에서 벗어날 기회. 그래. 그래도 좋을 것 같아. 디아나에게 가자. 그렇게 하자.
“나는-”
마저 대답하려는 찰나 무언가가 내 발목을 붙잡았다. 보드랍고 작고 가녀린 손. 하지만 따뜻하고 부드러운. 대리석 같은 디아나의 손과는 달랐다.
“코라!”
그건 오르피아의 목소리였다. 발목을 붙잡은 손도 그의 것이었다. 나는 아래를 내려다봤다. 잔뜩 헝클어진, 어두운 먹구름을 담은 금발이 바람에 나부꼈다. 그가 나를 끌어내렸다. 둘의 무게를 감당할 정도로 부유력이 강하지 않았던 탓인지, 결국 우리는 낙하하면서 산바닥을 굴렀다. 오르피아가 날 받아낸 덕에 다친 곳은 없었다.
그러자 정신이 들었다. 산까지 따라온 탓에 잔뜩 까진 발바닥이 그제서야 아팠다. 머릿속에 떠돌던 생각들이 다시 콕콕 박히며 내가 얼마나 바보같은 짓을 하려고 했었는지 깨달았다. 난생 처음 보는 신을 따라가려 하다니, 나 방금 무슨 짓을 하려고 했던 거지?
오르피아가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가 떨리는 손으로 나를 꽉 끌어안았다. 오르피아는 금빛의 두 눈동자로-어째서일까, 그의 눈동자는 누가 봐도 명확한 회색이었음에도 나는 문득 그의 눈동자에서 황금을 본 것만 같았다-디아나를 똑바로 응시하며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내뱉었다.
“코라는 아무에게도 못 넘겨. 돌아가, 디아나 네모렌시스.”
나는 혼란스러운 기분으로 오르피아의 품 속에서 멍하니 디아나의 짐승 같은 동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가 눈을 몇 번 깜빡이더니 이내 씨익 웃었다.
“아아, 우리들의 주인이시여. 결국 오셨군요. 당신이 발견해내기 전에 채갈 생각이었는데. 아쉽지만 그대가 원하신다면 응당히 물러나 드려야겠지요. 나는 당신 없이는 존재하지 못할 몸이니.”
디아나가 미소와 함께 휘익 하고 휘파람을 불자 인세를 떠돌던 온갖 존재들이 우리 주위로 모여들었다. 나는 그들이 우리를 공격하리라 생각해 조금 긴장했으나, 그들은 깔깔거리며 디아나를 따라 하늘로 사라졌다.
웃음소리는 곧 들리지 않게 되었다. 다시 조용해지고, 우리 둘만 남았다.
“미쳤어? 어딜 겁도 없이 한밤중에 나가! 나 아니었으면 당신 그대로 홀려서 납치당했어!”
오르피아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는 거의 울먹이고 있었다.
“미안해.”
“난 당신이 그대로 사라져버리는 줄만 알았어....... 제발, 어디에도 가지 말아줘, 인간으로 남아줘. 내가 당신을 얼마나....... 제발 나를 떠나지 말아줘.......”
그가 내 어깨에 얼굴을 묻고 훌쩍거렸다. 나는 할 말이 없어 그냥 조용히 그의 등을 토닥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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