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파의 메두사 (22)

026. 메두사의 기원

"저것 좀 봐, 쥰아."

저런 건 처음 봐.

아이린이 하늘로 치솟아 오르는 불기둥을 가리켰다. 도시 경비원들이 허둥지둥 그곳으로 인원을 충당하는 모습도 보였다. 벌써 한 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꺼지지 않고 계속 타오르고 있었다.

"뭐지? 마법인가?"

쾅...!

그러다 느닷 없이 열리는 문에 화들짝 놀라 동화책을 떨어트렸다. 뚱한 얼굴로 함께 있던 쥰 역시 히익! 겁을 집어먹으며 이불 속으로 숨어들었다.

"아이린."

"어?"

익숙한 목소리에 쥰이 다시 고개를 빼 들었다.

"이, 이레님?"

아이린이 당황한 얼굴로 그녀를 쳐다봤다.

어린 아이린의 눈에도 이레시아는 볼 때마다 너무 완벽하고 아름다워서 흐트러진 모습은 상상도 되지 않았는데, 지금 그녀는 잔뜩 구겨지고 흙투성이가 된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거기다가 원래는 흰색이었을 레이스가 붉게 물든 것을 본 아이린의 얼굴이 더욱 창백해졌다.

"설마 그거, 피예요?"

"... 이레님..."

쥰의 얼굴도 덩달아 울상 지어졌다.

이레시아는 아이린의 방을 빠르게 눈으로 훑었다. 아기자기한 장식들로 가득한 작은 방 안은 영락 없는 그 또래의 방이었다.

무엇보다도 이 방은 티파의 도시에 거주하는 '사람'이라면 응당 가지고 있어야 할 물건들이 있었다.

프리실라가 유력한 용의선상에 오른 뒤, 그다음 떠오르는 건 다름 아닌 그녀의 동생인 아이린이었다.

아닐거라 생각하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빈민가에서 이곳까지 다급하게 달려온 이유가 그것이었다.

'아이린 오르테즈'는 평범한 인간이다.

그녀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프리실라의 방은 어디지?"

"여, 옆 방이요..."

놀란 아이린이 눈망울을 글썽거리며 대답했다.

두 꼬맹이들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달래줄 시간이 없었다.

"내가 허락할 때까지, 둘 다 이 방 밖으로 나오지 말렴."

"이레ㄴ..."

두 아이가 뭐라 말할 새도 없이 이레시아는 아이린의 방문을 굳게 잠근 뒤 프리실라의 방으로 향했다.

피를 토한 위장에 속이 쓰려 저도 모르게 주먹을 움켜쥐었다. 프리실라의 방은 잠금장치 하나 없이 부드럽게 열렸다.

가지런히 정리 정돈된 이불부터 옷가지까지 깔끔한 방 안을 이레시아가 훑었다.

역시...

주인 없는 방으로 거침없이 들어선 그녀가 서랍장을 열어젖혔다. 잡동사니들이 이레시아의 손에 끄집어 나와 바닥을 나뒹굴었다. 그다음 서랍장도, 책장도, 옷장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찾고 있는 물건은 나오지 않았다.

문을 열어둔 복도 밖이 소란스러운 것이 히아센과 늑대가 때 맞춰 돌아온 모양이었지만, 이레시아는 침대 이불가지와 커튼 한 자락까지 모두 들춰냈다.

"마님?!"

혼비백산한 얼굴로 뛰어 들어온 히아센의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그녀는 방을 뒤지는 것을 멈추었다. 도둑이라도 들이친 것처럼 어지러운 방 한복판에 홀연히 서 있는 이레시아를 살폈다.

"다쳤어?! 어디 좀 봐!"

"별거 아니야."

"별것 아니긴! 이 핏자국은 다 뭐야?"

얼굴은 백지장처럼 변해서 히아센이 호들갑을 떨었다. 뒤늦게 도착한 늑대가 그녀의 손목을 잡아 올렸다.

"... 사이드 이펙트인가."

바르르 떨림이 멈추지 않는 손이 대답을 대신했다. 고개를 든 붉은 두 눈이 한기 어린 빛을 띄고 있었다.

"늑대씨."

"뭘 찾고 있던 거야, 도대체."

"... 없어. 단 하나도."

"없다니 뭐가."

아티펙트.

한번만이라도 프리실라의 방을 둘러봤다면 금방 알 수 있었을 텐데. 아직 어린 아이린의 방에서도 차고 넘치는 아티펙트가 프리실라의 방에는 단 한 개 조차 없었다.

"삶이 불행하고 불안할수록 부적이든 아티펙트든 끌어안게 되는 게 인간이야."

그녀에게 정말 삶을 영위할 생각이 있었다면.

그런데 프리실라는 딱 하나의 아티펙트만 가지고 있었다. 약지 손가락에 끼고 있던 반지.

아마도 그게 그녀를 사람의 모습으로 바꾸어 주는 물건이였을테지.

"감쪽 같이 속아 넘어간 거지."

아둔하기는.

처음부터 약혼자와 조부를 잃은 피해자 정도로 치부하고 있던 게 잘못이었다.

떨림이 멈추지 않는 손을 애써 주먹 쥐며 이레시아는 입술을 곱씹었다. 히아센의 표정도 덩달아 어두워졌다.

"그럼 프리실라는 지금..."

"카일과 함께 광산에 있겠지."

메두사 무리에게 던져줄지, 제 손으로 숨통을 끊어놓을지는 프리실라만 알고 있을 것이다.

이제는 정말 시간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남은 메두사가 넷, 지금은 프리실라까지 해서 총 다섯이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늑대가 가진 피어싱으로는 아마 한 번의 시선을 피하는 게 한계일터.

쓰레기 같은 짓을 저지른 남자지만 이대로 죽게 할 수는 없었다. 사제가 만든 가짜 '현자의 돌'의 위치를 유일하게 알고 있을 테니까.

어디까지나 이번 일은 메두사의 소탕과 더불어, 가짜 '현자의 돌'까지 회수해야 했다. 그렇지 않고는 몇 번이고 반복되는 일이었다.

돌 다리가 더 이상 놓이지 않으니, 결국에는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칠흑 같은 강물 속으로 들어가야 했다.

이레시아가 지긋이 두 눈을 감았다. 자책과 더불어 불필요한 감정들이 그녀를 흔들었다. 그러나 지금 필요한 건 그런 감정들이 아니였다.

잠시 후 다시 눈을 떴을 땐, 그녀의 눈은 마치 잔잔한 호수처럼 고요했다.

"히아. 해줘야 할 일이 있어."

"해줘야 할 일?"

"미끼가 필요해."

"미끼?"

히아센의 시선이 저도 모르게 옆 방으로 향했다. 그의 눈이 거세게 흔들렸다.

"... 마님, 설마..."

끝까지 이 모든 일들의 지휘자가 프리실라라는 걸 알아채지 못했다면 하지 않을 짓이었지만, 그녀에게는 미안하게도 프리실라의 약점은 그들 손에 있었다.

+++++

"피부는 돌처럼 딱딱하고, 머리카락 대신 살아 있는 뱀이 꿈틀거리고, 눈이 마주치면 돌이 된다는 것 말고..."

"............."

"메두사의 기원에 대해 알고 있어?"

피떡이 된 카일에게 프리실라가 물었다. 손에는 피에 절은 한쪽 귀가 뭉개져 있었다. 산채로 귀를 잡아 뜯긴 카일을 신음 하나 제대로 내지 못하고 꺽꺽거리며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었다.

돌처럼 회색빛 피부에 이질감 넘치는 상냥한 미소가 걸렸다.

"좋은 얼굴을 하고 있으니 알려줄게 카일."

정답은,

"힘 있는 자에게 강간 당한 여자가 메두사 돼버린 거야."

힘, 권력, 명예. 그 모든 걸 가진 '포세이돈'이 죄 없는 여자를 제멋대로 희롱했던 게 처음 메두사의 기원이었다. 인망 넘치던 도시 경비원 단장에게 결국 몹쓸 일을 당한 그녀처럼.

"나는 너와 네 무리에게 희롱당하고 죽어가던 그때 그런 생각을 했어. 너희를 저주하는 게 아닌, 내가 도대체 뭘 잘 못했는지를."

웃긴 일이다.

몇 천번을 고민해도 잘못한 것이 없는 일인데, 그것을 죽기 직전까지 고민했다.

그리고 운이였는지, 바램이었는지.

그녀는 다른 이들처럼 죽지 않고 살았고, 대신 더 이상 인간이 아니게 되어버렸다.

"하다못해 바닥을 기는 벌레들조차 내 눈을 보면 돌이 돼버렸어. 죽지 않고 살아도 나는 이 광산 안을 벗어날 수 없게 돼버린 거야."

이곳을 나가는 순간, 어찌 될지는 불 보듯 뻔한 일이었기에...

광산 바닥을 굴러다니는 기묘하게 빛나는 그 반지를 발견하기 전까지만 해도.

"일주일 만에 광산 안을 나가게 됐을 때 내 머릿속에서 뭐라고 속삭였는지 알아?"

일주일만에 인간의 모습으로 밝은 해를 보게 됐을 때.

그 반지가 무슨 이유에서 그곳에 있었든지, 인간의 모습을 하게 된 것에 얼마큼의 대가를 치러야 되는지도 궁금하지 않았다.

그저...

"너희 무리가 어디서 사는지가 너무 궁금했어. 나를 이렇게 만든 너희를 나랑 똑같이 만들어주고 싶어서 미칠 것 같았어."

살아도 산 게 아니게.

사랑하는 가족, 연인, 그 모든 걸로부터 동떨어지게. 다시는 만날 수 없다는 고통에 시달리면서.

사랑하는 이를 만나는 순간, 돌로 변하게 만드는 자신을 저주하도록.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온 그녀는 한명, 한명, 저를 희롱했던 남자를 찾아가 광산으로 끌어들인 뒤 똑같이 만들어주었다.

자신과 똑같이.

다시는 빛을 보지 못하도록.

다시는 사랑하는 사람을 보지 못하도록.

다시는 인간의 삶을 꿈꾸지 못하도록.

평생토록 스스로를 저주하고 살도록.

그러니 결국 광산 안에는 죽고 싶어 안달이 나있는 메두사들이 그득하게 된 것이 그 이유였다.

그들 모두가 그녀를 희롱했던 남자들이었다. 사랑하는 가족을, 친구를, 연인을 돌로 만들어버린 얼간이들이었다.

... 단 한명만 빼고 말이다.

"너희는 너희를 찾으러 온 가족들과 친구들을 돌로 만든 눈을 저주한다면, 나는 마주치는 모든 이들을 메두사로 만드는 내 눈을 저주해."

그녀의 조부가 실종됐던 자신을 찾으러 광산으로 들어왔던 때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윽?!'

덜렁거리는 손톱이 박힌 손이 거칠게 카일의 목을 두손으로 움켜쥐었다. 카일이 숨이 막혀 버둥거렸다.

"겨우 네 친구를 꼬드겨 너를 만났는데, 내 눈을 봐도 메두사로 변하지 않았던 너를 봤을 땐 내가 어떤 생각을 했을 것 같아?"

눈밑까지 찢어진 입꼬리로 피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신은 없다."

신이 있다면 이럴 수는 없다.

카일의 목을 움켜쥔 손에 힘줄이 불거졌다.

"신 따위는 죽었다. 생각했어."

신이 있다면. 나를 이렇게 만든 신 따위... 엿이나 먹으라지.

나는 정말 운이 더럽게 없었지만,

"나는 운이 좋아 카일."

너라는 남자를 이렇게 내 손으로 끝을 낼 수 있으니까. 너라는 염원을 내 손으로 끝장내고 죽어버릴 수 있으니까.

프리실라에게 목을 졸린 카일이 그대로 허공으로 들어 올려졌다. 곧이어 다른 한 손이 그의 심장을 뽑으러 움직이려는 그때였다.

"... ?!"

칼날바람이 프리실라의 팔을 스치고 지나갔다. 목을 옮아매던 손이 풀어져 카일이 다시 바닥으로 나뒹굴었다.

"우웩!! 콜록, 콜록...!!"

카일이 바닥을 뒹굴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프리실라가 재빨리 인기척이 느껴지는 뒤를 돌아봤다.

"... 프리실라."

이윽코 광산 저 끝 어둠 속에서 이레시아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그 뒤로 푸른 피어싱을 한 늑대까지.

프리실라의 눈이 번뜩였다.

"마님...!"

"아니, 메두사."

이레시아가 이 사건의 지휘자이자 살아있는 절망과 눈을 마주쳤다. 생각지 못한 이의 등장에 프리실리가 주춤거렸다.

"왜... 왜 여기에..."

"왜라니. 여기까지 징검다리를 놓아준 건 너였잖아?"

방금 전,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이제는 모든 게 이해가 갔다.

"우리를 이곳으로 인도한 건 여기 있는 메두사들이 우리 손에 죽더라도, 너는 아무렇지도 않아서 였던거겠지. 아니 오히려 더 기꺼웠던가?"

네 원수들을 저와 똑같은 메두사로 만들고, 인간들의 적으로써 죽게 만들고 싶었을 테니까.

깜찍하게도, 우리를 자신의 장기 말로 쓸 생각을 했을 줄이야.

솔직히.

"칭찬해주고 싶을 정도야 프리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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