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설란 (龍舌蘭)

[채햄] 용설란 (龍舌蘭) - 3/10

1부: 순백의 산신

용설란 (龍舌蘭)

1부: 순백의 산신

w. 주인장

형원은 외출할 채비를 마치고 기현의 침소로 향한다. 그에게로 향하는 걸음 하나하나가 무거웠으나, 결국 자신의 선택이며 그것이 그에게도 더 나은 일일 것이라 스스로 되뇌어 본다. 형원이 기현의 침소 앞에 다다라서 심호흡을 하고 문을 열면, 꼭 그 앞에서 기다리고 서 있었다는 듯이 기현이 맑은 얼굴로 은은한 미소를 띈 채 저를 바라보고 있다. 기현은 평소와 비슷한 듯 조금은 다른 형원의 모습에 의아해 하며 입을 연다.

"어디 가십니까?"

"간만에 산 아래로 내려갈 일이 있어 다녀 오겠다 인사 드리러 들었습니다."

기현은 내심 아쉬운 마음에 작게 '아….' 소리를 내고서는, 고개를 숙였다가 다시 고개를 들어 형원을 바라본다.

"언제쯤 오십니까? 날이 저물기 전에 돌아오십니까?"

형원은 저를 향한 기현의 물음에도 괜히 속에서 뜨거운 것이 차오르는 듯함을 느낀다. 무겁게 팔을 들어 올려 그의 머리를 찬찬히 쓰다듬어 주면, 이제는 기분 좋은 얼굴을 해 보이는 기현이다.

"노을이 질 즈음에 돌아오겠습니다."

"…더 빨리 오실 수는 없는 것이지요?"

기현도 알고 있었다. 원체 응석 부릴 줄 모르는 자신이었기에 이러한 제 모습이 저조차도 낯설다는 것을. 그래도 이 별채에서 항상 함께 지내던 그가 잠시 자리를 비우는 것조차도 제게는 버겁게만 느껴지는 것이다. 그가 없는 시간이면, 이 호화로운 공간에서 지독하게 외로웠을 형원이 떠올랐으니까. 기현은 자신이 형원의 한 켠에 머무르고 싶다는 생각이 짙어지는 것을 굳이 막아내지 않았다. 되려 생애 첫 연정을 달갑게 받아들이기로 한 것이다. 기현은 제 머리 위에 얹힌 손을 잡아 내려 괜히 만지작거린다.

"미안합니다. 응석이 과했습니다."

"괜찮습니다. 그대가 지루하지 않게 속히 다녀오겠습니다."

형원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기현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이내 제 손을 빼내고 등을 돌린다. 저 유약한 이를 안아 주고 싶다는 마음도, 저 말간 이마에 입 맞추고 싶다는 마음도, 모두 제 지나친 욕심이기에 겨우 모든 것들을 삼켜 낸다. 형원이 앞뜰의 수풀을 걷으면 강녕전의 구석진 곳에 위치한 방이 드러나고, 이내 그 안으로 한 발 내딛는다. 얼마 만에 궁으로 걸음 한 것인지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였다. 역시나, 이 인간 내음 가득한 욕망뿐인 공간은 언제나 제 속을 역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형원은 느린 걸음을 옮기며 임금의 침소로 걸음을 옮긴다. 형원의 기척을 그 누구도 느끼지 못하는 까닭은 그가 부채를 접지 않아서일 것이다. 임금의 침소 앞에서 형원이 부채를 접으니, 제 앞을 지나치던 궁녀 하나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뒷걸음질 친다. 형원이 그 여인을 바라보며 입술 앞에 검지를 가져다 대자 여인은 고개를 조아린다.

"금상께서는 어디 계신가?"

"저… 전하께서는… 편전에서 국사를 돌보고 계십니다…. 헌데, 뉘신지요…?"

"얼른 걸음 하여 금상께 산에서 귀인이 왔다 전하거라."

형원은 그렇게 말하고서 거리낌 없이 침전에 들어 푹신한 이불을 깔고 앉는다. 침전에 놓인 난을 무심한 얼굴로 바라보던 형원은 조심히 밀어 열리는 문에 고개를 돌린다. 노쇠하여 잿빛의 수염이 난 붉은 의복을 입은 이가 들어오자 뒤에 문이 닫히고, 이내 그는 형원의 앞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다.

"용설란께서 어찌 이 먼 곳까지 걸음 해 주셨나이까."

"내가 이곳까지 걸음 하는 일이 드물기는 하지. 주상, 내 하나만 묻겠소."

"하문하시옵소서."

"어찌 세자도 아닌 그대의 혈육을 내게 보낸 것인가."

"그것은 제가 총애하는 아들놈의 건강이 호전되지 않아, 아비 된 도리로 용설란께 보낸 것이옵니다."

"그래…? 그렇게 내게 팽개쳐 두고 그대의 장남의 눈치를 본 것은 아니고?"

"어찌 그런! 천부당만부당한 일이옵니다."

"그래…. 자네의 뜻이 그러하다면 알겠네. 영민한 그대가 나를 속일 리도 없으니."

형원은 그의 속내를 꿰뚫어 보면서도 아닌 척 부드럽게 말을 이어 갔다. 남자가 슬쩍 올려다 본 형원의 얼굴에는 빙긋 미소가 피어 있었으나, 그것이 필시 호의를 담은 것은 아니리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내일 가마를 보내거라."

"내일… 말씀이시옵니까?"

"그래, 내일. 이 궁에서 가장 호화로운 가마를 보내거라. 그대의 아들인데 편치 않게 환궁할 수 있겠는가."

"헌데, 양현의 건강이 그리 쉬이,"

"많이 호전되셨네. 뜀박질도 하시니 얼마나 다행인가."

남자는 여전히 고개를 조아린 채로 조용히 숨을 고를 뿐이었다. 기현이 다시 궁으로 돌아온다면 꽤나 시끄러워질 것이 분명했다. 그것은 물론 기현 때문이 아니라, 제 장남인 세자 때문일 것이다. 또 얼마나 저를 피곤하게 만들고 제 피를 말릴 것일지. 그러나 제 앞에 앉은 백 살 넘은 젊은이의 말을 거스르자니 필시 제게 불행이 닥칠 것이 뻔했다.

"다시 한번 고하겠네. 양현께서 환궁하실 때까지 불편함이 없도록 최고로 크고 호화로운 가마를 준비하거라."

"알겠사옵니다. 어찌 용설란의 말을 거스를 수 있겠습니까. 허나, 만에 하나 양현의 건강이 또 악화된다면 다시 용설란께 보내도 되겠습니까?"

형원은 작게 미간을 찌푸린다. 저 자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다. 물론 저라고 그를 보내고 싶어 보내는 것은 아니었으나, 저리 환영하지 못하는 꼴이라니.

"그때는 하늘의 뜻일 것이니, 내게 보내도 소용 없을 것이다."

아니, 만에 하나 그리 된다면 나는 필시 그를 살려 낼 것이다.

"문을 열거라. 늦기 전에 돌아가 봐야 하니."

형원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남자는 허겁지겁 자리에서 일어나 문으로 손을 옮기고, 문이 열리는 찰나에 맞춰 형원이 부채를 펼치자 그의 기척이 온데간데없더라.

형원은 조용히 복도를 걸어 가며 그가 나왔던 방으로 들어가 다시 그림 속으로 들어간다. 다행히 날이 저물기 전에 도착했구나. 형원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돌바닥 위에 걸음을 내딛다, 용설란을 들여다 보고 있는 작은 등에 걸음을 멈춘다. 제 기척을 느낀 것인지 기현은 뒤돌아 형원을 보며 해맑게 웃어 보였고, 제 쪽으로 오라 손짓한다. 어쩌다 그대마저 나를 마음에 품어서, 그대에게 몹쓸 짓을 하게 만드는지. 저를 죽음으로 내모는 이 연정이 참으로 지독하다 생각하는 형원이다. 형원이 보폭을 넓혀 기현의 곁으로 다가가자 기현은 형원의 백색 의복을 잡아 당기며 밝게 말을 꺼낸다.

"형원, 이것 보십시오."

"무슨 일이길래 이리 신이 나셨습니까?"

"용설란이 꽃을 피우려나 봅니다. 작게 꽃망울이 피어 오른 것 보십시오."

그러게. 아니길 바랐건만, 실로 이 망할 것이 꽃을 피우려 하는구나. 내가 그대를 참 마음 깊이 연모하고 있었구나.

"대군."

형원이 낮게 부르는 목소리에 기현은 형원을 향해 고개를 돌린다. 한 뼘도 채 되지 않을 거리에 제 눈 바로 앞에 위치한 형원의 도톰한 입술을 보고 마른 침을 삼켰다가 그의 눈을 마주 본다. 형원은 그저 기현을 가만히 바라볼 뿐이었다. 이 가슴팍에 욱신거리는 통증은 개화통인가, 아니면 이별의 아픔인가.

"하실 말씀 있으십니까?"

"…내일 궁에서 가마가 올 것입니다."

"네?"

"환궁하실 때가 되었습니다."

형원은 기현의 동공이 잘게 떨리는 것까지 놓치지 않고 그를 바라봤다. 기현은 애써 웃어 보이며 한 발짝 물러서 그의 옆에 선다.

"그렇지요. 건강이 호전되었으니 가 봐야겠지요. 모두 그대 덕분입니다."

"…."

"이리 떠난다 하여도, 가끔 기별을 전하거나 찾아 뵈어도 될는지요?"

"이곳은 제가 문을 열어야만 걸음 하실 수 있습니다."

"그게 무슨…."

"대군께서는 궁에서 제 몫을 다하소서."

"형원."

"이곳에서 있었던 일들은 모두 꿈이라 생각하시고,"

"그것들이 어찌 다 꿈이란 말입니까."

점점 무너지는 기현의 얼굴을 계속 마주할수록 제 가슴이 미어지는 듯하여 미소도 띄지 않고 딱딱한 얼굴을 한 채 형원은 말을 이어 간다.

"환궁하시고 바삐 지내시면 모두 잊힐 것입니다."

"싫습니다."

"…."

"내 그대의 외로움을 모르는 것도 아니며, 그리고 나는,"

기현은 차마 그에게 제 마음을 고백할 수도 없었다. 이리 저를 내치는 이에게 제 마음을 있는 그대로 보여 주기란 쉬운 일은 아니었다. 기현은 하고픈 말은 삼켜 두고 다시 입꼬리를 올려 본다.

"종종 걸음 하도록 허해 주세요."

"저는,"

"…."

"그대가 떠나고 나면 문을 걸어 잠그고 누구도 들이지 않을 것입니다."

그대는 돌아가서 나를 잊고 편히 남은 생을 살아라. 나는 이 지독한 외로움에 그대를 그리며, 그대의 마음에 짐이 되지 않도록 홀로 쓸쓸히 꽃을 피워 갈 테니.

"내일 가마가 오거든 문을 열어 드릴 테니, 그대의 모든 것들을 챙겨 떠나세요."

"형원…."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형원은 차마 떨어지지 않는 걸음에 조금이라도 기현을 더 눈에 담았다가 천천히 등을 돌려 걸음을 나선다.

세 발짝 정도 걸었을까. 제 등 뒤로 온기가 느껴지며 제 허리를 끌어안는 팔을 내려다본다. 아, 진정으로 저놈이 꽃을 피우려나 보다. 이리도 가슴이 저린 것을 보면.

"좋아해요."

"…."

"그대를,"

"시간이 다 잊게 해 줄 것입니다."

"형원, 제발…."

"내일 길이 고될 것이니 일찍 쉬세요."

형원은 기현의 손을 잡고서 그의 팔을 떼어낸다. 형원은 제 침소로 향하는 길이 멀게만 느껴졌다. 욱신거리는 통증에 벽에 기대었다가, 다시 몸을 일으켜 제 침소로 들어가자마자 바닥에 엎어져서 몸을 웅크리고 개화통을 조금이라도 잠재우려는 듯 제 왼쪽 가슴팍을 주먹으로 퍽퍽 내려친다.

언젠가 당신의 온기가 그리워질 때가 오겠지. 그럼에도 나는 홀로 견디고 추억하며 묵묵히 그대를 향한 연정을 피울 것이니, 그대는 나라는 것이 애초에 없었다는 듯, 그저 설화 중 하나였던 것으로 기억해 주기를. 그렇게 내가 이 세상에서 사라지더라도 그대는 품고 갈 수 있기를.


동이 트는 것이 이리 야속한 일이 있었던가. 기현은 긴 밤 잠을 설치고서도 일찍 눈이 떠진 탓에 한참을 이불 속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그의 공간에서 떠나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에 기현은 괜히 울적해져서 이불을 머리 끝까지 뒤집어쓰고 그저 가만히 눈을 감고 있을 뿐이었다. 저리 매몰차게 말했어도 본심은 그것이 아니겠지. 떠나는 제 발걸음의 무게를 조금이라도 가볍게 하기 위해서 한 말이겠지. 다시금 내가 찾아 온다면 반갑게 맞아 주겠지. 기현은 입을 삐죽거리면서도 스스로 좋은 생각들을 되뇌인다. 얼마가 지났을까. 그의 목소리가 문 너머에서 들리는 듯 제가 덮어 쓴 이불을 넘어 희미하게 들려 온다.

"대군, 가마가 도착했습니다."

기현은 그 목소리에도 한달음에 달려 나가지 않았다. 이리 버티면 그가 저 문을 열고 침소로 들어오지 않을까. 헛된 기대를 하면서 몸을 더 웅크렸으나, 기대는 기대였을 뿐이었다.

"대군, 어서 채비를 마치시고 가마에 오르소서."

기현은 덤덤한 그 말투에 이불을 확 걷어 내고 침상에서 내려와 성큼성큼 걸어가서는 문을 확 밀어 열어 젖힌다. 야속한 마음에 그를 마주보면, 어제보다 훨씬 수척해진 얼굴이 미소도 띄지 않은 채로 무던히 저를 바라보고 있다. 기현의 속에서 속상함은 이내 제게 떠나라 재촉하는 이에게서, 그의 상한 얼굴로 향한다.

"간밤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것입니까? 안색이 좋지 않으십니다."

"무탈히 긴 밤 잘 보냈습니다. 채비는 다 끝나셨습니까?"

"아픈 데는 없으십니까?"

"제 걱정은 마시고 어서,"

"자꾸 떠나라 하지 마세요."

"…."

"더 머무르고 싶어집니다."

기현은 말을 멈추고 입을 닫는 형원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오른손을 들어 그의 왼뺨을 천천히 쓰다듬어 본다. 벌써부터 차오르는 그리운 마음은 한 켠에 담아 두고 견딜 수 없을 때 꼭 다시 그를 찾아와야지 생각하면서.

"형원, 부디 건강히, 편히 지내세요."

"…."

"제가 오거든, 꼭 문을 열어 주세요."

좋은 이별 뒤에는 필시 재회가 있을 것이라 기현은 생각하며 형원에게 잠시 양해를 구하고는 챙겨 갈 물건들을 하나씩 품에 안는다. 애초에 챙겨온 것이라고는 없었으나, 그가 담아 준 매화꽃밭의 그림과 일전에 그와 거닐었던 해변에서 주웠던 영롱한 소라 껍데기를 쥐고서 다시 그의 앞에 선다. 형원은 제 뒤에서 제 걸음에 맞춰 따라오는 발걸음 소리에 마음이 깊은 지하로 꺼지는 듯한 느낌이 든다. 그래도 그대가 밝은 낯으로 가는 것이 다행이라 해야 하는데, 그 얼굴에 다시 붙잡고 싶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앞뜰로 나와 나란히 걷다가, 언젠가 형원이 그랬듯이 수풀을 걷어 내면 기현의 기억 속에 있던 울창한 숲 속이 드러난다. 기현이 아쉬움에 형원을 뒤돌아보면, 빙긋이 아픈 미소를 띄고 있는 형원이 있다. 기현은 한 걸음 떼려다가, 몸을 돌려 그의 입술에 짧게 입맞추고는 한 걸음 물러선다.

"또 찾아 뵙겠습니다."

고개 숙여 인사한 기현이 제 뒤로 들리는 사락거리는 풀소리에 뒤를 돌아보면 형원의 자취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꼭 자신이 약 한 달 간 머물렀던 그곳이 진정 꿈이었던가 하는 착각이 일 정도로 지독한 현실과 마주한다. 그것이 꿈이 아니었다는 것을 증명할 길은 제 품에 있는 그림과 손에 쥔 소라 껍데기가 전부였다. 몇 걸음도 가지 못해 그리움이 커지고, 다시 뒤를 돌아보려 했을 때는 뒤에서 저를 부르는 장정의 목소리가 들린다. 기현이 그 목소리에 주저하며 몸을 돌렸을 때는, 처음 이곳에 타고 왔던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호화로운 가마가 바닥에 놓여 있었다. 어찌 전하께서 이리 중한 걸 제게 내리시는가. 기현이 푹신한 방석에 몸을 기대자 가마는 요동도 없이, 마치 평지를 다니는 듯 고요했다. 기현은 창을 열어 산길이 눈에 익도록 나무의 배열과 바위의 크기까지 상세히 눈에 담는다. 이리 한다 하여 제 기억 속에 이 길이 기억에 남을까 싶다만, 그것이 제가 돌아오기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산길을 지나자 낯설기까지 한 도성이 눈앞에 나타나고, 인파 속을 지나가 커다란 대문을 넘으면 순식간에 고요해지며 궁 내부가 창밖으로 드리워진다. 익숙한 길이 눈 앞에 나타나자 기현은 삽시간에 기분이 땅으로 꺼지는 듯한 기분이 든다.

결국 돌아왔구나. 아무도 나를 반기지 않는 곳으로. 가마에서 내린 기현에게 상궁은 짐을 받으려 하였으나, 기현은 직접 가져다 놓겠다 하며 제 방으로 향한다. 곧장 아비에게 향해야 하는 것이 마땅하였으나, 제 품에 안긴 것은 귀중한 것이라 제 손으로 가져다 놓아야 마음이 편한 것이었다. 제 침소로 들어 책상 위에 잘 말린 그림을 펼쳐 보았다가, 기현은 괜히 속에서 울컥 차오르는 것을 가까스로 억누른다. 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정자에서 누구에게도 하지 못했던 말들을 주고 받았었는데. 저보다 더 쓸쓸함이 클 텐데도 내 말에 머리를 쓰다듬어 준 이가 그곳에 있을 텐데. 기현은 다시 그림을 잘 말아 이불 안에 소라 껍데기와 함께 잘 넣어 두고서 편전으로 향한다. 고운 돌바닥이 아닌 잘 정돈된 흙바닥을 걸을 때마다 흙먼지가 제 폐부로 들어오는 듯해 잔기침을 내뱉는다.

기이한 일이었다. 형원의 공간에서는 잔기침은 커녕, 뜀박질까지 해댔었는데 어찌 환궁하기 무섭게 가슴이 조여드는 것 같은지. 기현은 겨우 편전에 도착하고서 임금의 앞에 고개를 숙이며 예를 갖춘다.

"전하, 소자 전하의 은혜를 받아 요양지에 다녀온 후 환궁하였사옵니다."

"그래. 몸은 좀 어떠하느냐?"

"전하께서 덕을 베풀어 주셨기에 많이 호전되었습니다."

남자는 기현의 말 중간중간에 섞이는 잔기침에 의아하다는 듯 그를 빤히 바라본다. 분명, 용설란께서는 제 아들의 건강이 많이 나아졌다 하였거늘. 남자는 선인과의 대화가 떠오르며 제 속을 꿰뚫듯 말했던 것이 생각나 시선을 거두고 상소로 시선을 옮긴다.

"그래. 그렇다면 되었다. 이만 물러가 보거라."

기현은 제 예상과 한 치도 다름이 없는 것에 웃음도 나지 않았다.

그럼 그렇지. 그가 총애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나의 어미였으니. 나는 그저 고약한 세자의 성질을 돋우기만 할 애물단지일 테니.

기현은 편전에서 현비께서 계실 별궁으로 가는 길 내내 세자를 마주치지 않길 바라는 마음과, 형원의 수척했던 모습에 대한 염려가 머릿속을 혼란하게 만들어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떠 낸다.

기현은 현비의 앞에 인사를 올리고 앉아 미소 지어 보인다. 그 자신도 눈치 채지 못했겠지만, 그 미소는 형원의 것과 아주 많이 닮아 있었음이라.

"요양은 편히 다녀 오셨습니까?"

"예, 전하께서 귀한 곳으로 보내 주시어 황송하게도 호강을 누리고 돌아왔습니다."

"제게 이야기를 들려 주시겠습니까?"

기현은 제가 겪었던 모든 것들을 차마 말할 수 없었기에 주저하다가 무겁게 입을 연다.

"산속에 근사한 별채가 있었습니다. 우기인데도, 그곳에 있는 내내 비도 한 번 내리지 않았습니다."

"신기합니다. 이 궁에서는 지난 삼 일 동안 비가 끊이질 않았었지요."

그럼 그곳에 비가 내리지 않았던 것도 다 형원 때문이었을까.

"별채의 주인께서 매일 밤낮으로 탕약을 달여 올려 주시었고, 산해진미로 상을 올려 주시니 몸이 많이 나을 수 있었습니다."

기현은 그 말을 꺼내며 그와 마주보고 식사했던 기억과 탕약이 먹기 싫어 주저하면 저를 장난스레 놀리던 그 얼굴을 기억해 낸다. 이 궁에는 없는, 그리워도 쉬이 볼 수 없는 그 얼굴을.

"귀인이십니다. 전하께서 친히 부르시어 얼굴이라도 뵐 수 있다면 좋으련만."

소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머니. 할 수만 있다면 매일 그를 보고 싶습니다. 매일 함께 산책하고, 매일 함께 식사를 들고, 그가 보여 주는 진귀한 절경 속에 그와 함께 있고 싶습니다. 어찌 하면 그가 걸음 해 주실까요.

기현의 지긋지긋한 일상 속에서 낙이라고 한다면 형원을 그리는 것뿐이었다. 늘상 백의를 입고 있던 연분홍빛 머리의 사내. 그가 제게 극락을 보여 준 것인지, 그와 함께 한 것이 극락과도 같았던 것인지. 기현은 글공부를 하다가도 멍하니 그를 떠올리며 작게 미소 짓곤 했다. 어쩌다 고개를 돌려 창밖을 내다 보면 꼭 형원이 저 멀리 서서 저를 보고 있는 듯한 환각이 이는 듯도 했다. 매일 마셔대는 탕약임에도, 단 주전부리가 함께 올라오지 않는 것에 형원이 그리웠다. 어쩌면 궁에서 마시는 탕약이 유독 더 쓰게 느껴진 까닭도 이 때문이었을지 모른다. 거짓말처럼 탕약의 쓴맛이 가시는 때면 이 또한 형원 때문인가 하며 정신 나간 생각을 하기도 했다. 매일 밤 형태를 바꾸는 달을 보며 내일은 그가 저를 보러 와 주실까 생각하다 잠에 들었고, 어떤 날 밤 꿈에 형원이 나올 때면 꿈속에서 그와 함께 뒤뜰로 나가 생전 처음 보는 꽃밭 위에서 그와 도란도란 시간을 보내기도 하였다.

기현은 지금에 와서야 꿈이라는 것은 참 잔인하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기현은 해가 머리 위에 떠 있는 밝은 낮에 서책을 읽다가, 그리움을 이기지 못하고 입 밖으로 작게 그를 불러 본다.

"용설란이라…."

제 중얼거림에 어린 궁녀가 바닥을 닦다 와서는 기현의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입을 연다.

"예, 대군. 용설란에 대해 물으셨습니까?"

기현은 소녀의 말에 의아한 기색을 띄며 아이를 빤히 쳐다본다.

"어찌 용설란을 아느냐?"

"그야, 지금보다도 더 어렸을 적에 어미에게서 들은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미에게서 들었다…?"

"예, 용설란 이야기라며 달밤에 들려 주시곤 하였습니다."

기현은 타인의 입을 통해 듣는 그 이름마저 반가워서 펼쳐 두었던 서책을 덮고서는 몸을 당겨 앉아 아이에게 손짓한다.

"이리 와서 내게도 그 이야기를 들려 주겠느냐?"

아이는 주변 눈치를 살피다가 손에 걸레를 든 채로 총총 걸어와 기현의 앞에 고개를 숙이고 앉는다.

"용설란은 불로불사의 몸을 가진 선인이라 들었습니다."

이 나라의 왕이 네 번 바뀔 때까지, 그저 살아 있기에 살 뿐이라고 했는데.

"본디 성품이 선하시나, 악인에게는 명을 뺏는 것으로 단죄하시고 착한 이에게는 숨을 불어 넣어 명을 늘려 준다 하였습니다. 허나, 깊은 숲 속에 숨어 사시는 데다가 그 기척을 알아채기 어려워 그를 본 이는 거의 드물다 합니다."

깊은 숲 속에 자신의 터를 만들어 외로이 홀로 지내던 이였는데.

"그의 생김새는 어떠한가?"

"아, 순백에 하얀 옷을 입고 있으며 그의 머리칼은 보통 사람과는 달리 연꽃색을 띈다 하였습니다."

돌아보면 백의자락이 보였는데. 나를 향해 미소 짓고 있는 그 얼굴 위에는 연분홍 머리칼이 자리하고 있었는데. 기현은 제 머리에 또렷이 자리한 형원을 추억하며 작게 웃음 짓는다.

"그래…. 꼭 만나 뵙고 싶은 선인이구나."

"아참, 그리고 중한 것이 있사옵니다."

"무엇이냐?"

여즉까지는 다 제가 알고 있는 형원이었으나, 자신이 모르는 것이 있던가 하는 생각에 소녀에게 말을 재촉한다.

"용설란은 진실된 사랑을 하면 그에게서 꽃이 핀다고 하는데, 이 꽃이 만개할 때 하늘로 승천한다 하였습니다."

"…뭐라?"

"헌데 그 꽃을 피우기가 어렵고, 꽃이 필 때 개화통이 극심하여,"

"승천이라니 무슨 뜻이냐?"

"예…?"

"승천이라 하지 않았느냐. 꽃이 피면 승천한다는 것이 무슨 뜻이냐 물은 것이다."

제가 생각하는 그런 것이라면 절대 아니 될 일이었다. 용설란에 꽃망울이 맺혀 있었는데. 그런데….

소녀는 자신이 말실수라도 한 것인가 하는 생각에 고개를 더 깊이 숙이며 울상 짓는다. 입술을 덜덜 떠는 것은 비단 소녀뿐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소녀는 보지 못했으나, 기현도 금세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으니.

"요, 용설란은 불로불사의 몸이라 하나… 꽃이 피면 승천하는데, 이는 곧, 그의 죽음을 뜻하는 것이라 합니다."

안 된다. 아니 될 일이다. 기현은 잔뜩 수척했던 그의 마지막 얼굴을 떠올린다. 언젠가부터 아파 보였으나 내색하지 않았던 모습들까지 모든 조각들이 들어 맞으면서 기현은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다가 굵은 눈물 방울을 툭 하고 뺨 위로 떨군다.

"대… 대군, 어찌 우십니까?"

그 꽃을 피우게 한 것이 나일까. 나를 실로 연모하는 것일까. 이런 기대를 하는 것 또한 이기심이지. 그 말인 즉, 내가 그를 사지로 내몰고 있다는 말이니. 그의 죽음이 나 때문이라는 것이니. 그간 내가 그를 그리워 한 것 또한 그가 죽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을 것이라 생각하니 기현은 속 편히 슬퍼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이만… 물러가 보거라."

그래서 나를 그리 매정히 떠난 보낸 것이었구나. 그대는 지긋지긋하다 했던 삶이나 이어 가고 싶었던 것이구나. 기현은 물기 가득한 목소리로 소녀를 물리고서 스스로 아픈 다짐을 해 본다. 나는 그대의 죽음을 원치 않으니, 이 사무치는 연정을 접어 두는 것이 맞겠지. 그대가 그랬듯이, 내가 매몰차게 그대를 기억에서 잊고 마음에서 밀어내야겠지.

그리고 기현은 아무도 들을 수 없게 속으로 간곡히 청해 본다. 몸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지. 부디 그대의 마음에서도 내가 멀어지기를. 연정을 쉽사리 끊어 내기란 쉽지 않으나, 나는 이대로라도 살아갈 테니 그대 또한 나를 마음에서도 기억에서도 잊으시고 남은 생 더 이어 나가 주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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