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원의 산 1
아무렇게나 싼 소설
산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려온다. 커다란 나무들이 하늘 높이 솟아 파란 하늘을 덧칠한다. 고요한 산들바람이 불어오는 소리, 냇가의 냇물이 흘러가는 소리…… 나른하고 포근한 분위기 속에 몸을 뉘인다. 송송 뚫린 구멍 사이로 들어오는 따사로운 햇살이 싫지만은 않은 느낌이다. 다람쥐가 배 위를 지나가고, 참새가 머리 위로 날아들어도 아리안느는 꼼짝없이 누워있다. 눈을 감고 나른하게 온 몸을 자연 속에 맡긴다.
“헉, 헉…!”
누군가 급하게 뛰어오는 소리가 들려온다. 거친 숨소리로 봐서는 먼 곳에서부터 여기까지 뛰어온 모양이다.
“당신이…! 무슨 소원이든 들어준다는 은색 머리 엘프…… 아리안느, 맞죠?”
“…….” 그녀는 자신의 이름이 들려오자 잠깐 움찔하다가도, 이내 평안을 되찾고 안정된 호흡을 내쉰다.
“무시하지 마시고요! 큰 일이 났다고요!” 산 아래 마을의 남자아이가 깨우려고 작정이라도 한 듯 크게 소리쳤다.
“오크 군단이…… 마을을 습격했다고요!”
공기 좋고 경치 좋은 시골 마을 옆에는 거대한 산이 하나 있다. 산 아래 마을에서는 그 산을 ‘소원의 산’이라 불렀다. ‘어느 날 산을 오른 젊은이가 산 속의 엘프에게 소원을 빌고 팔자를 폈다’는 소문이 마을 안에서 입소문을 탄 탓이었다. 그 이후로 마을 사람들이 소문의 엘프에게 소원을 빌러 몇 번을 산에 올라도 그 엘프를 본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기에 마을 사람들은 그 소문이 가짜라고 믿었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을의 한 소년이 말했다.
“저 산 위에서 엘프를 봤어요! 그 소문의 엘프요!” 물론, 이 말은 거짓말이었다. 그 거짓에 속아 넘어간 마을 사람들이 헐레벌떡 산에 올랐지만 엘프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소년은 마을의 유명한 장난꾸러기였고 지금껏 많은 거짓말을 해온 탓에 더 이상 그 거짓말에 속는 사람은 없었다. 마치 양치기 소년마냥 마을 사람들은 그 이후로 소년의 말을 점점 안 믿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에 오크가 쳐들어온 것이다. 소년은 오크를 발견하자마자 마을의 종을 울리며 습격을 알렸지만…… 아무도 소년의 말을 믿지 않았고, 갑작스러운 습격에 마을 사람들은 하나둘씩 죽어나가기 시작했다. 한발 늦었음을 알고 있었지만 사람들은 오크에 맞서 싸웠고 패닉에 빠진 소년은 헐레벌떡 산 위로 올라온 것이다.
“저희 마을좀 도와주세요! 오크들이 끝없이 몰려오고 있다고요!”
“…….”
“아리안느님! 제발요!”
“…… 그게 오크의 생활방식이잖아. 주변 생물들을 사냥하거나 약탈하는. 직접 사냥하는 법을 터득할 정도로 똑똑한 애들은 아니니까 약탈을 하는 거지. 주로 인간들을…….”
“그게 중요해요?! 사람들이 죽고 있다니까요!”
“중요하지, 꼬마. 네가 아랫마을에 내 존재를 실컷 떠들어댄 덕분에 귀찮은 일이 많아졌잖아. 더 움직이기 싫단 말이야…….”
“제발…… 뭐든지 할게요. 제발 마을 사람들 좀 구해주세요!”
“그게 네 소원이니?”
“네! 말하시는 뭐든지 제가!”
“약속이야.” 그러면서 그녀는 자리에서 슬슬 일어난다. 하늘하늘한 원피스에 붙은 나뭇가지를 몇 번 털어내고는 터덜터덜 산 아래로 내려가는 길을 따라 걸어가기 시작한다. 그렇게 느긋하게 잠결에 깬 것 마냥 피곤하게 움직이는 그녀가 답답했는지 소년은 아리안느의 팔을 잡고 냅다 달려 산을 내려간다.
마을에 도착한 소년은 절망감에 자리에 주저앉았다. 건물은 무너지고, 바닥에는 사람 피가 낭자했으며 식량 창고의 문은 박살이 나 있었다. 소년은 눈물을 흘렸다.
“이…… 이게…….”
“못 구하게 됐네. 안타까워라.” 심드렁하게 말하던 아리안느는 자리에 쭈그려 앉아 흐느끼는 소년의 머리를 한번 쓰다듬는다.
“걱정하지 마. 내가 누구라고 했더라?”
“…… 소원의 엘프…….”
“그래. 네 소원이 뭐라고 했지?”
“마을 사람들을…… 구해달라….”
“그치? 근데 그 뒤에 뭐가 더 있었잖아.”
“…… 뭐든지 한다고 했죠….”
“내 소원에는 대가가 필요해. 뭐든 내가 흥미로워할 걸 내게 주면 소원을 들어주거든. 근데 꼬마 시종이라…… 충분히 흥미로운걸?”
“……!”
“네 소원을 들어주지, 꼬마 시종.” 그 말을 끝으로 아리안느는 두 손을 맞잡더니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한다. 주변의 사물이 파괴되기 전으로 돌아가고, 바닥의 피는 사라졌으며 사람들의 시체는 점점 원래 모습을 찾아가더니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하나둘씩 일어나기 시작한다. 소년은 눈물맺힌 퉁퉁 부은 눈으로 아리안느를 올려다본다.
‘이게…… 소원을 들어주는 엘프의 힘?!’
“어, 어떻게 된 일이지? 분명 오크들이…!”
“당신은? …설마!”
“소원을 들어주는 소문 속의 엘프인가봐! 옆에는…… 마르코?”
“저 거짓말쟁이가 한 말이…… 사실이었다고?”
아리안느는 사람들을 슬쩍 살피더니 소년을 내려다보며—
“울보, 마을에서 거짓말 좀 치고 다녔나 봐?” 라며 키득댄다.
“누가 울보라는 거에요!”
“여러분, 이 꼬마가 절 데려와서 소원으로 여러분을 살렸습니다.”
그녀는 마르코의 등을 떠밀어 마을 사람들에게 보냈다. 소년은 잠시 망설이다가도 그들에게 다가가 사과하며 고개를 숙인다. 아리안느는 잠시동안 떠들썩한 마을 분위기를 보며 미소를 띄다가도 슬슬 피곤해졌는지 다시 몽롱하게 비틀거린다.
“그럼 꼬마 시종…… 산으로 돌아가자…….”
“아, 네!”
“마르코, 시종이라니?”
“아하하…… 소원을 비는 대가로 뭐든 다 하겠다고 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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