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비 가면

돌아갈 자리

이것은 우리의 숙명인가요

이우는 밤 by 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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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학의 이해와 감상 ] 과제 ◇

<셰익스피어 소네트 시집>, 피천득 역, 98면

(C)떨리고설레다 2023


나는 동트기 전에 여길 떠나리라.

간밤을 꼬박 새워 가며 결심했던 것. 결코 변할 일 없겠다 믿었던 다짐이 순식간에 무너집니다. 당신은 너무나도 쉽게, 말 한마디 혹은 손끝 하나조차 사용하지 않고 나를 무장 해제시킵니다. 생각해 보면 늘 그랬지요. 바보 같으니! 뭔가 대비책을 마련해 왔어야 했습니다. 차마 당신의 얼굴을 쳐다볼 용기가 없어 눈을 감습니다. 그러나 헛된 노력입니다. 나는 이미 오래전 내 눈꺼풀 안쪽을 당신으로 장식했습니다.

그것은 낡은 그림입니다. 보통의 여름날보다 더웠고, 거기에 축제의 열기가 더해져 물 깊은 곳까지 뜨거움이 전해진 날이에요. 그래서 어느 어린 인어가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수면을 보러 올라간 밤입니다. 그 저녁에 인어는 어둠이 그렇게도 아름다울 수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당신도 알고 있겠지요. 언젠가 내가 거기부터 당신을 사랑하기 시작했노라 고백한 적이 있으니까요. 

그때 당신은 웃었습니다. 그래 당신이 정말 아름답다는 말을 내가 저번에 했던가요. 물 위의 여인 중 가장 귀한 이와 물 위의 사내 중 가장 귀한 이가 낳은 아들. 당신은 태양으로 빚은 도자기 인형 같은 사람입니다. 황금실로 머리털을 삼고 사파이어로 눈알을 박은 인형장이의 역작이지요. 내가 사랑한 그 얼굴로 당신이 뭐라 말했는지 기억하나요. 당신은 웃었습니다. 등불을 무색하게 만드는 환한 미소를 가득 띠어 방 안을 밝히면서 그랬지요. 너도 나를 사랑한다니 참 좋구나.

내가 좋게 보는 이가 나를 좋게 여기는 것보다 더한 행운이 없다.

그러니 결코 나를 사랑한 적 없다 하시는 말씀은 거짓말입니다.

숨이 막혀서 눈을 뜹니다. 당신은 내가 비킬 것을 기다리며 계속 자리를 지키고 섰습니다. 상황이 조금 우습기도 합니다. 이 성에서 내가 감히 당신의 앞을 막아설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인 적도 있었지요. 당신은 웃으며, 귀여워하며 기꺼이 나를 위해 시간을 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요. 나는 여전히 당신의 시간을 낭비하지만 이제 당신의 표정은 다르군요. 영영 지지 않을 불꽃을 피웠던 눈동자가 차갑게 식고, 꿀보다 달고 진하게 사랑을 새기던 입술은 무언의 저주를 뱉습니다. 아, 숨 쉬고 싶어 되돌아왔건만 여기도 산소는 없는가요. 코끝이 알알하고 목구멍이 쓰립니다. 입을 열어도 아무 소리도 말이 되어 나오지 못합니다. 경멸은 익숙해질 듯 익숙해지지 않고, 혀에 닿는 공기만 떫습니다. 

당신이 나를 세상에서 가장 귀이 여기던 시절도 있었지요. 

그러나 전부 옛날 일입니다.

당신은 나를 가리켜 결코 아내라 칭하지 않았습니다. 매일 밤 내 머리카락을 빗고 입 맞추면서도 왕비의 의자는 한 번도 내어 주지 않았어요. 나는 상관없었습니다. 사람의 몸을 입고 있을지라도 내 영혼은 본디 물 아래의 것. 인간의 규칙에서는 벗어나 있으니 이에 상처받지도 않았지요. 당신이 옆 나라의 공주로 신부를 삼겠다 하여도 괜찮았습니다. 당신의 아버지가 그랬듯, 또 그 아버지가 그랬듯. 사내의 옆자리에는 격에 맞는 여인이 앉아야 하는 법이니 내가 함부로 끼어들 수야 없지요.

그러므로 내가 무너진 것은 그때가 아닙니다. 아시나요? 궁전에는 어디에나 귀가 있고 또 입이 있답니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주위의 돌아가는 사정을 듣게 된다는 말이에요. 당신이 만인을 앞에 두고 나는 이제 당신의 시선조차 받을 자격이 없노라 선언하신 것도, 나는 만인에 포함되지 않았지만 그래서 알 수 있었습니다. 그 말에 내가 얼마나 죽었는지 아시나요. 녹슨 톱으로 심장을 도려내고 놋쇠 망치로 온몸을 두들겨맞은 것마냥 아팠습니다. 나는 골방에 틀어박혀 혼자 이불을 뒤집어쓰고 울었습니다. 나는 다만 당신의 마음이면 족했을 뿐인데, 그 한 자락마저 저 지체 높은 여인이 훔쳐갔잖아요. 그래요, 저 고귀한 여자가 당신의 눈을 얼어붙게 만들었어요.

당신은 그에 만족하지 못하고 나를 찾아와 굳이 못을 박으셨지요. 더 예쁘고 보기 좋은 것이 생겼으니 더는 너를 필요로 하지 않노라, 말하는 눈빛에는 한 치의 거짓도 보이지 않았더랬죠. 눈물을 삼키고 피를 막아요. 떠나간 당신의 뒤에 대고 내가 흘린 마음을 다 합하면, 물 아래의 궁전을 가져오기에도 충분할 겁니다.

그럼에도 나를 가리켜 당신이 표현하신 모든 단어를, 하나도 부인하거나 변명하지는 않습니다. 사랑하는 이를 어찌 거짓말쟁이라 매도합니까. 하늘 아래 온전한 것이야 없다지만 나의 사랑은 다릅니다. 당신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인간. 신이 있다면 그의 축복을 한몸에 받았음이 분명한 존재입니다. 그러니 잘못되었다면 당신이 아니라 나이겠지요. 

당신의 하신 말씀이 전부 맞습니다. 나는 못생기고 나이 많고 매력도 없어요. 가장 고귀한 인간의 곁에는, 개라고 할지라도 가장 훌륭한 품종이 머물러야지요. 

당신은 나를 절름발이라 부르셨고 그래서 나는 그렇게 합니다. 실상 내가 발을 절었던 것은 처음 다리를 얻어 익숙치 않았던 그 잠시뿐이지만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당신은 내가 눈에도 띄지 않길 원하셨고 그래서 나는 사라지려 했습니다.

그랬죠, 나는 동트기 전에 여길 뜨려 했었지요.

당신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그 결심이 서서히 사그라들었습니다. 녹아내린 다짐이 외칩니다. 나는 성에 남고 싶어요. 벽과 바닥을 이룬 돌이 차갑고 단단하게 조여들더라도, 전부 견딜 수 있어요. 당신의 근처에 살고 싶어요. 그러나 그것은 당신이 바라는 바가 아니고, 나에게 나보다 우선시할 대상은 당신의 뜻. 어금니를 악물고 목끝까지 차오른 단어들을 삼켜냅니다. 나는 가야만 합니다.

마지막 자비를 베풀어 잠깐의 시간을 주세요.

꼿꼿이 나를 향한 당신의 눈동자에는 미동도, 감정도 없지만 분명한 허락입니다.

저는 성을 떠납니다.

담장을 나서는 순간 당신을 잊겠습니다.

잊겠습니다. 하고 입속말로 되뇌입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얘기를 누구에게도 하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당신도 똑같이 하셔도 좋습니다. 말하면서도 나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아마 당신은 나를 잊으시겠지요. 그러나 나는 영영 잊지 못할 겁니다. 당신의 얘기를 누구에게도 하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되새김질하겠지요. 

비밀을 지키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잊지 못한다면 가지고 다녀야 합니다.

나는 영원히 당신과 함께한 기억으로 살아갈 겁니다.

슬쩍 고개를 들어 내 앞의 당신을 올려다봅니다. 당신의 표정에는 여전히 변화가 없습니다. 나는 실망합니다. 그리고 스스로 꾸짖습니다. 내심 나를 붙잡아 주기를 바라는 것도 어리석은 오만입니다.

나는 성을 떠납니다. 네, 나는 가요. 어디로? 그건 알 수 없습니다. 나조차도요.

나를 그저 선상 파티의 참가자로 알고 있는 당신은 그러므로 마녀와의 거래도 모르겠지요. 인어는 성인이 되면 심장을 적출합니다. 심장을 모아 둔 방에서 멀리 있을 때에는 무엇도 사랑할 수 없게 됩니다. 그것이 성인이 된 인어에게만 물 위 구경이 허락되는 까닭입니다.

내가 알기로 이제껏 이 규칙을 어긴 인어는 둘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물 아래 내 형제들은 그 중 하나만 기억할 겁니다.

두 다리로 당신과 함께 걷고 싶어 내가 마녀에게 무엇을 바쳤는지 아시나요.

나는 인어로서의 삶을 주었습니다.

내 자리는 사라졌고 형제들은 나의 존재 자체를 잊어버렸습니다.

무슨 말인지 아세요? 나는 돌아갈 곳이 없습니다.

그러니 머물 자리를 찾아 헤매어야겠죠.

나는 이 성에서 당신을 가장 오래 모셔 왔죠. 다르게 말하면 나는 당신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에요. 입 밖에 내어도 돌리기에는 늦은 마음이라. 정신을 어지럽히지 않도록 내 비밀은 혀 아래에 고이 간직해요.

당신은 무결하니 이것은 내 짐입니다.

나의 선택이고 나의 책임입니다.

내가 사랑한 죕니다.

낡은 이야기 속, 사랑에 찢기어 물거품으로 화했다는 어떤 인어를 떠올립니다.

사랑하는 자는 그 사랑 때문에 모든 것을 내던지니.

사랑은 우리에게 죄였어요.

그러나 나는 사랑할 수밖에 없었어요.

오래된 자매여, 이것은 우리의 숙명인가요.

새벽 바람이 찹니다.

돌 복도의 냉기에 발이 시리지는 않으신지요.

감히 물러납니다.

외람되이 바라건대 부디 건강하소서.

마지막으로 길게 읍하고 돌아섭니다. 뒤의 당신은 미동도 없습니다. 서릿발처럼 차가운 시선이 등을 꿰뚫는 것이 느껴질 듯합니다.

그 눈빛이 애정을 품은 시절을 기억합니다.

그러니 결코 나를 사랑한 적 없다 하시는 말씀은 거짓말입니다.

그리고 나는 그것만으로 충분합니다.

작별입니다.

부디 안녕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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