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파의 메두사 (17)

021. 나랑 해서 좋은 게... 싫은가?

햄스터 이야기를 할 거면 하지도 않았을 거다.

"햄스터가 서로 농담 따먹기는 하지 않지."

그래서 더 미치겠는 거지. 도저히 말이 안 통한다고! 히아센은 어쩐지 점점 머리에 열이 오르는 것 같았다.

"그래 놓고는 다른 사람은 절대 못 건들게 한다니까?"

프리실라는 어쩐지 땀이 삐질 나는 것 같아 말없이 웃음만 흘렸다. 고민 상담 같은 건가, 이거?

"저..."

"알아, 재미없는 이야기라는 거. 그냥 듣기라도 해줘. 둘 사이에 껴서 답답해 미치겠거든."

히아센이 한숨을 쉬며 덧붙였다. 프리실라의 입술이 달싹였다.

"... 그냥 듣기만 해도 괜찮은 일인가요."

"털어놓는 걸로도 기분이 좀 나아지니까."

아무튼 내가 샌드위치도 아니고 말이지. 히아센이 툴툴거렸다.

"둘 사이에서 아무렇지도 않은 건 쥰 뿐이라니까?"

아이린과 함께 크라켄 다리를 뜯어먹던 쥰이 왜 자기 이름을 부르냐는 듯 히아센을 올려다봤다.

"아니야. 많이 먹어."

히아센이 쥰의 머리를 토닥였다. 프리실라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애증... 인가요?"

"비슷한데 좀 더 상위버전?"

"마님과 그 분이 그런 관계인 줄은 몰랐어요. 저는 그냥 고용된 용병이신 줄만 알았는데..."

"그딴 자식은 용병으로 마음껏 부려 먹으라고 줘도 고용 안 해."

히아센이 질색인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누구라고 말도 안 했는데 눈치 빠르네."

"저는 두 분 다 허물 없이 이야기 하셔서 친한 줄 알았어요. 그... 식당에서도 그러셨고..."

프리실라의 머릿 속에 몇 일전 로비 식당에서 새우를 받아먹던 두 사람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때는 숨겨둔 정부인 건가 싶어, 순간 저도 모르게 못 본 척 고개를 돌려버렸는데.

"뭐, 가끔 둘이 티키타카 하는걸 보면 그래 보이긴 해."

그렇게 깜빡 잊다가도 살벌하게 둘이 이빨을 드러내고 싸울 때면 장난이 아니란 말이지.

"지금쯤 서로 싸우다 화해하다 하고 있을지도 모르지."

히아센이 제 4구역 광산이 있는 숲 쪽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아무쪼록 둘 다 아무 일 없이 살아 돌아오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

"흐응!"

달뜬 신음소리와 함께 두 인영이 엉켜있었다. 굴곡 진 허리를 거칠게 끌어당기자 이레시아가 속수무책으로 그에게로 다시 끌려갔다.

새하얀 나신이 불긋불긋한 울혈과 잇자국으로 엉망이었다.

"하아!"

세된 신음과 함께 다시금 늑대가 그녀 안으로 파고들었다.

"아,... 으!"

엉금엉금 기어 도망가려던 팔이 기어코 상체를 지탱하지 못하고 바닥에 무너져내렸다. 허벅지를 적시고 그의 다리까지 적힌 정사의 흔적들이 꽤나 오래 그녀를 괴롭혔다는 걸 보여주고 있음에도 늑대는 그녀를 놓아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아, 잠깐만... 으흑! 아... 아아... 아!"

그녀의 새된 울음소리가 광산 안에서 작게 울렸다.

자꾸만 허리를 비틀며 벗어나려는 모양새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그녀의 상체가 억지로 들리더니 그의 허벅지 위로 앉혔다.

잘근잘근 그녀의 어깨를 깨물어대며 무자비하게 들이박히는 자극에 이레시아는 헐떡거리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제발. 천천히.

거의 울다시피 그녀가 늑대의 팔을 붙잡고 흐느꼈다. 자극이 너무 강해서 정신이 나가 버릴 것 같았다.

아니, 이미 울고 있나? 자극을 이기지 못하고 온몸이 계속 파드득 떨리고 있었다.

"... 천천히라고?"

"하읏...!"

머릿속에서 번개가 터지는 기분에 턱이 달달 떨렸다. 생리적 눈물이 눈가를 타고 흘렀다.

"이렇게 계속 단내를 내뿜으면서?"

"하아! 하으읏..."

바르르 떨리는 몸을 부서지게 안으면서 늑대가 피가 나도록 물어뜯던 그녀의 어깨에서 고개를 들며 물었다.

쾌락에 완전히 잠겨 탁해진 붉은 눈이 그에게 축 늘어져 숨을 골랐다. 온몸에 그의 흔적을 달고 머릿속은 온통 그에게 푹 절여진 모습이 미치도록 마음에 들어서, 피도 눈물도 모두 그가 핥아먹었다.

"... 그래서?"

그래서 싫어?

늑대는 서늘한 목소리로 물었다.

항상 짓궂게 굴어놓고 늘 묻는 질문. 얼굴은 잔뜩 찡그린 채 그녀가 싫어 죽겠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러자 숨을 고르던 이레시아가 하, 헛웃음을 내뱉었다. 어느새 그를 밀어 눕히고는 그를 위에서 내려다보며 웃었다.

"일부로 그러는 거야? 싫어 죽겠다는 그 얼굴. 왜? 나 같은 괴물이랑 몸을 섞는 게 그렇게나 싫어?"

이레시아가 진득하게 미소 지으며 그에게 몸을 낮췄다. 아니면...

"나랑 해서 좋은 게... 싫은가?"

늑대가 번쩍 정신이 든 눈을 떴다. 곧이어 강렬한 두통이 번졌다.

"윽?"

늑대가 한 손으로 머리를 부여잡았다. 머릿속이 마치 한번 얼었다가 녹은 것 같았다.

빌어먹을.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지.

늑대가 인상을 구기며 고개를 돌렸다가 저도 모르게 몸을 딱딱하게 굳혔다. 바로 코 앞에서 잠들어 있는 이레시아의 얼굴이 보였다.

왜. 설마 꿈이...

늑대의 시선이 자연스레 그녀의 나신을 따라 내려갔다가 입가가 뻣뻣하게 굳었다.

아까 꾼 꿈이 다시금 떠올랐다. 늑대가 턱을 악물며 이마를 짚었다.

"미친..."

그러니까 아까 그 꿈은 서큐버스의 피가 흐르는 이레시아가 옆에 있어서...

"시발."

미친 새끼. 서큐버스의 꿈은 꾸는 자의 욕망을 비추어 주는 것이니, 방금 전의 꿈은...

늑대는 당장이라도 제 머리를 깨버리고 싶어서 욕지거리를 뱉었다. 물론 제 손으로 깨지 않아도 지금도 충분히 윙윙거리면서 울리고 있지만 말이다.

늑대는 눈을 굴려 주변을 빠르게 스캔했다.

처음 보는 곳이지만 분명 그들이 들어온 그 광산이었다. 한쪽에는 물에 젖은 옷가지들이 눈에 들어왔다.

아.

대충 상황 정리가 된 듯 늑대가 다시 서늘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그러고보니 절벽에서 떨어졌지. 그다음에 어떻게 됐더라.

늑대의 눈길이 다시 이레시아의 얼굴 위로 떨어졌다. 따뜻한 온기와 더불어 늑대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 이레시아?"

그가 별안간 몸을 일으키자 어찌 된 영문인지 반대로 이레시아가 축 늘어졌다.

"무슨..."

그제서야 독에 절어져 검게 물이 든 팔과 보기만 해도 상처가 훤히 드러난 발목이 보였다. 독니에 구멍이 난 팔뚝은 느린 속도로 아물고 있는 반면에 발목의 상처는 보다 더디게 낫고 있었다. 설마하니...

"너 또...?!"

상대로 하여금 제 치유력을 나눠주는 대신 고통을 인계하는 주술을 사용한 게 분명했다.

늑대의 눈매가 일그러졌다. 상처를 보아하니 메두사의 눈을 보고 정신을 잃은 사이에 일어난 일인 모양이었다.

이 꼴을 하고서 나를 강에서 끌어올리고 그 난리를 피운 건가? 미련한 여자. 제 상처부터 살필 것이지.

늑대가 나뒹구는 겉옷을 끌어다 이레시아의 위에 덮었다. 그때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이 떨리며 감춰진 붉은 눈동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 뭐 하는 거야."

바싹 갈라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 상처들은 어떻게 된 거지?"

"... 그냥 둬. 이 정도로 안 죽어."

그녀가 느릿느릿 답했다. 아직도 잠에 취해 있는 건지 몽롱한 눈이 두어번 느리게 깜빡였다.

아니, 열 때문인가?

"이 지경이 됐는데, 아픈지도 모르나 보지?"

저도 모르게 위협적인 목소리가 튀어 나갔다.

더 깊게 베였으면 뼈까지 드러났을 상처임에도 태연자약한 모습에 뱃속이 꿈틀거렸다. 늑대는 입고 있던 바지 밑단을 뜯어냈다.

"그거, 방금전까지 죽을뻔한 사람이 할 말인가? 윽!"

키득거리며 비아냥거리려던 이레시아가 일순 고통 어린 신음을 터트렸다. 뜯어낸 밑단이 벌어진 상처를 아프게 동여맸다.

"아읏... 아, 아파!"

"입 다물어."

늑대가 낮게 으르렁거리며 그녀를 노려봤다. 통증에 인상을 찌푸리던 이레시아가 기가 차다는 표정을 지었다.

"... 얼어 죽을까 봐 체온을 나눠준 이에게 할 말이 그것뿐이야?"

"해달라고 한적 없어."

"하아, 그냥 죽게 내버려 둘걸 그랬네."

그래, 내가 뭘 바라고 그랬나 몰라.

이레시아가 이마를 짚으며 어이없는 웃음을 터트렸다. 다른 때 같으면 뺨이라도 한 대 쳐올렸을 텐데, 어쩐지 몸에 힘이 쭉 빠졌다. 그의 내상까지 떠맡은 몸이 무거웠다. 졸음이 자꾸만 눈꺼풀을 끌어내리려고 했다.

"... 죽을 줄 알았는데 살았네?"

"누구 좋으라고."

"말이나 못 하면... 내 옷은?"

말대꾸 하는 걸 보면 살 만한가 봐?

픽하고 웃으며 그녀가 뒤늦게 주위를 둘러봤다. 그러다 넝마가 되어버린 드레스 자락이 눈에 들어왔다. 독에 해졌다 싶었는데 잠깐 자고 일어난 사이 반 이상 녹아버린 천자락만 남아있었다.

"... 새삼 나한테 라미아의 피가 흘러서 다행이다 싶네."

저도 모르게 짧은 감상평이 흘렀다. 그때 머리 위로 늑대의 셔츠가 떨어졌다. 놀란 이레시아가 상의를 훤히 드러내놓고 있는 늑대를 올려다봤다. 탄탄하게 잘 잡힌 근육이 보기 좋았다.

"당신, 그러고 돌아다니려고?"

나야 보기는 좋은데 말이지.

"네가 할 소린가?"

실오라기 하나도 안 걸치고 있는 주제에.

그나마 둘 다 기절해 있는 동안 그의 옷들은 어느 정도 말라서 다행이었다.

"... 옷이 너무 큰데."

손끝이 겨우 내비치는 소매를 보며 이레시아가 불평했다.

"저기 있는 저 걸레짝이라도 주워 입을 거면 그러던가."

"그건 좀... 어? 뭐 하는...?!"

피할새도 없이 몸이 붕 떴다. 졸지에 그의 옷을 뺏어 입고 품에 안기게 된 이레시아가 끄응 이마를 짚었다.

"아니, 이 정도는 내 발로 걸을 수 있는데 말이지."

"내 검은 어딨지?"

"저 절벽 위에 어딘가 있겠지."

당시 목숨 하나 챙겨주기도 버거웠는데, 그것까지 챙길 여력이 어딨겠어.

이레시아의 손끝이 금이 간 그의 피어싱에 닿았다.

"하여간 내구성이 이렇게 떨어져서야..."

아니, 내구성의 문제는 둘째치고, 수가 너무 많았다고 보는 게 맞았다. 이레시아가 혀를 차며 금이 간 피어싱에 다시 마력을 부어 넣었다. 피어싱이 작게 빛을 내더니 곧 다시 원래의 매끄러운 모습으로 돌아왔다.

한번 금이 갔으니, 다음번엔 아주 산산조각이 날 수도 있었다. 이대로 또 다시 메두사를 마주치면 곤란한데.

"이젠 어쩔 생각이지?"

"나가는 길을 찾아야지. 메두사를 피해서."

"나간다고?"

뜻밖의 대답에 늑대가 되물었다.

"한 두 마리도 아니고, 이대로는 승산이 없어."

나도 이제 힘들어 죽겠고. 기절한 당신을 끌고 도저히 입구까지 갈 힘은 더더욱 없고.

이레시아가 이제는 편안히 그에게 몸을 맡기며 덧붙였다.

"광산 안쪽에 단 한 번도 움직임이 없던 메두사가 있었어. 아마 이 무리의 우두머리 아닐까?"

"우두머리..."

늑대가 조용히 읊조리며 절벽 위쪽을 응시했다. 위에서는 그들을 찾고 있는 모양인지 독사들이 꾸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설마 다시 갈 생각은 아니겠지? 더는 죽으러 가는 것 밖에는 안돼."

"그 죽는다는 거에 나만 포함되어 있나?"

정곡을 찌르는 질문에 이레시아가 피곤한 웃음 지었다.

"그렇지. 하물며 내가 저런 하등 괴이들 손에 죽을까."

정 목숨이 위험하거든 그녀도 정말 가만히 당하고 있지만은 않을 테니까.

하지만 그는 달랐다. 그는 인간이고, 괴이와 인간 사이에는 힘의 차이가 분명히 존재했다. 그런데도 이 남자는 어딘가 그녀의 심기를 거슬리게 만드는 부분이 있었다.

"... 당신, 인간 주제에 너무 건방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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