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파의 메두사 (16)

020. 혐관이라고 들어 봤어?

이레시아가 숨을 헐떡거리며 돌무더기 위로 흠뻑 젖은 모습을 드러냈다. 다른 한 손에는 축 늘어져 간헐적으로 기침을 내뱉는 늑대의 뒷덜미를 잡고 있었다.

... 하여튼.

이레시아가 이를 악물고 그를 돌 위로 질질 끌어올렸다.

뭐가 아래는 물이라서 다행이라는 거야?

"콜록! 콜록!"

이레시아는 늑대의 옆에 주저앉아 거칠게 기침을 하며 물을 토했다.

바보 아니야?

"흐윽..."

그녀는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이마를 바닥에 처박았다. 메두사 세 마리의 목을 절단낸 것까지는 좋았는데...

물살이 생각보다 빨라서 멀어진 거리에 족쇄의 주술이 미약하게 발동했다.

"읏..!"

심장이 터질 거 같아 입술을 깨물었다.

온몸이 난자당하는 고통까지는 아니지만, 바늘 따위가 피부 아래에 빼곡히 들어찬 것 같은 고통이었다.

안 그래도 혹사시키고 있는 몸이 비명을 지르고 있는 것 같았다.

마지막쯤 독사에게 물린 팔뚝은 피가 줄줄이고, 인대가 나간 발목 역시 욱신거렸다. 더 이상 자력으로 나을 힘이 없다는 뜻이었다. 드레스 자락은 너덜거렸고 물에 빠져 온통 엉망진창이었다.

"헉, 허억..."

몸은 차갑고 머리는 뜨겁게 핑핑 돌았다. 고통에 절은 눈이 움직여 늑대를 노려봤다.

처음엔 구하기 위해 절벽 아래로 떠밀었고, 살리기 위해 물에서 건져냈는데. 이제는 자신이 왜 그런 멍청한 짓을 한 건가 싶었다.

그녀의 머릿속이 고통 속에서 정상적인 사고에서 벗어났다 돌아오길 반복했다. 멍청하긴.

"처음부터..."

떨리는 양손이 로만칼라를 붙잡는가 싶더니 그의 목을 움켜쥐었다. 그러자 아직도 뿌연 안개에 갇혀 허우적거리는 그의 눈과 마주쳤다.

"죽게 놔뒀으면 좋았을 텐데."

고통에 달궈진 뜨거운 숨이 터져 나왔다. 메두사의 눈을 간접적으로 봐버렸고, 절벽 아래로 떨어졌으니 이대로 죽는다고 해도 이상할 건 없는 일이었다.

이대로 목을 졸라 죽여버리면 족쇄의 주술에 더 이상 묶여있을 필요도 없었다. 그리고 이 고통에서도...

그리고...

"... !!"

아프게 바르르 떨리던 턱이 일순 뺨에 닿는 체온에 멈췄다. 흐리멍덩한 그의 눈에 초점이 돌아왔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그럼에도 그의 입술은 계속해서 더듬거리고 있었다.

"또...... 울고, 있나...?"

"... 뭐?"

그녀의 물음이 끝나기도 전에 뿌연 눈이 다시 감겨버렸다. 힘을 잃은 손은 바닥으로 추락했다. 차가운 입김을 뱉으며 다시 정신을 잃은 늑대를 보며 이레시아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방금...

그녀가 천천히 손을 내려 그의 심장 위를 어루만졌다.

쿵. 쿵.

심장 박동이 느껴졌다.

"... 하하."

어이없는 웃음을 흘렸다.

방금까지 죽이려고 해놓고, 뭘 확인하는거람?

늑대의 몸 위로 올라탄 그녀의 머리카락에서 물이 계속 뚝뚝 떨어졌다. 붉은 눈이 건조하게 식었다.

"... 그래..."

시시할정도로 약해진 남자를 이런 식으로 죽여봤자 무슨 재미가 있을까?

피곤에 젖은 눈이 기절한 그의 얼굴을 잠시 응시했다. 뒤이어 이레시아는 물에 젖은 그의 사제복 단추를 풀어냈다.

뒤디어 달달 떨리는 손이 스스로 드레스를 벗어냈다.

이대로라면 그는 저체온증으로 비명횡사하고, 자신은 주술의 통증으로 언제 미쳐버린다 해도 이상하지 않았으니까.

나신이 된 그녀의 몸이 늑대의 위로 겹쳐 들었다.

이 남자를 죽이는 건 언제든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게 그저 오늘이 아닐 뿐이었다.

+++++

"... 늦네."

히아센이 동이 터오는 창을 보며 중얼거렸다.

"무슨 일 생긴 건 아니겠지?"

어련히 잘하지 않을까 싶다가도 메두사는 처음이니 고전하고 있는 게 아닐지 걱정됐다.

한번이라도 삐끗하는 순간 돌로 변해버리는 저주에 걸릴걸 알면서도.

"어떻게 인사도 없이 가버리냐, 둘 다."

아무리 제가 속이 좋지 않아 잠시 자리를 비웠다고 해도, 사람 일 모르는 것 아닌가?

나도 메두사만 아니면 따라가는 건데. 늘 마음 졸이는 건 기다리는 쪽이라는 걸 둘은 모르는 게 분명했다.

"어라?'

히아센이 괜스레 서운한 마음에 입술을 삐죽이는데 창밖으로 익숙한 실루엣이 보였다.

프리실라와 아이린이였다.

이 시간에 어디를 가는 거래. 동이 트고 있으니 어딘가 새벽 장터라도 여는 모양인가?

신나는 얼굴로 제 언니의 손을 잡고 재잘거리는 아이린의 얼굴이 보였다.

"부지런도 하네."

난 티파의 도시에서 제대로 구경한 곳은 속옷 가게가 전부인데...

히아센이 턱을 괸 채 프리실라의 뒷모습을 눈길로 좇았다. 심심하니 따라가고도 싶었지만 쥰을 혼자 둘 수 없으니 어쩔 수 없었다. 아마 혼자 뒀다가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마님이 난리 난리...

어? 잠깐...

혼자 안 두면 되는 일 아닌가?

"오, 나 천재인가?"

히아센이 급히 잠이 든 쥰을 흔들어 깨웠다.

"쥰, 일어나아~ 쥰!"

"... 흐에에엥..."

쥰이 칭얼거리며 잠투정을 부렸다.

그러게 어제 일찍 자라니까. 쪼끄만 게 두 사람이 언제 돌아올 줄 알고 기다린다고 버텨.

히아센이 쥰을 다시 흔들며 치근거렸다.

"새벽 장터 구경하러 가자, 쥰."

쥰은 미동도 없이 이불 속에 머리를 처박고 움직이지 않았다. 히아센이 눈을 가늘게 떴다.

이렇게 나온다 이거지?

결국 숨겨둔 비장의 카드를 쓰기로 했다.

"아쉽네, 새벽 장터에서 선물을 사다 주면 마님이 좋아할 텐데."

"....... 이레님...?"

이불 속에서 잠에 취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옳거니. 역시 효과 하나는 확실했다. 히아센이 세상 선량한 웃음을 지으면서 이불을 슬쩍 걷었다.

"마님 선물 사러 갈 거야?"

잠에 취해 자꾸만 꺼떡꺼떡 넘어가는 눈을 비비적 거리며 쥰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먹을 걸로 꼬시는 유괴범의 기분을 조금 알 것 같아 양심이 쑤셨지만... 마음이 바뀌기 전에 히아센은 얼른 쥰을 안아 들었다.

+++++

"프리실라 언니."

아이린이 제 앞에 옷을 가져다 대고 눈대중으로 사이즈를 재고 있는 프리실라를 불렀다. 아름다운 그녀의 언니는 왜 부르냐는 눈으로 아이린을 쳐다봤다.

"갑자기 무슨 일이야? 한동안 새벽 장터는 안 나간댔잖아 위험하다고."

"음... 이제는 괜찮을 거 같아서."

프리실라가 잠깐 뜸을 들이더니 말을 돌렸다.

카일이 웬 강도한테 옷가지가 탈탈 털려서 한동안 집 밖으로는 나다니지 못할 테니 안전하다는 말은 차마 할 수가 없었다.

그 강도의 주동자가 제 동생이 동화책을 읽어주기로 약속한 마님이라는 말은 더더욱.

"왜? 오랜만에 나와서 신나 했잖아, 아이린."

"신나긴 하지만..."

아이린은 어딘가 불안한 눈으로 주변을 계속 돌아봤다. 그도 그럴 것이 요 몇 달 동안 밤은 물론 낮에도 좋지 않은 사람들에게 시달렸으니 어쩔 수 없었다.

그 모든 일이 자신 때문에 벌어진 일이기에 프리실라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녀의 손이 작은 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걱정하지 마 아이린. 이제 더는 아무도 우리를 건드리지 않을 거야."

"그걸 프리실라 언니가 어떻게 알아?"

아이린이 볼을 부풀리며 툴툴거렸다.

"... 언니는 알아."

프리실라가 미소 지으며 빵빵한 볼을 만지작거렸다. 어린 아이 취급에 좀 더 툴툴거리려던 아이린은 오랜만에 속 시원한 얼굴로 웃음 짓는 프리실라를 보고 입을 다물었다.

'이레님도 예쁘지만, 역시 우리 언니도 예뻐.'

애정 어린 시선이 부끄러워서 아이린은 괜스레 시선을 피했다.

"... 나 옷은 됐으니까, 크라켄 구이 먹고 싶어."

"크라켄? 이따가 아침 먹어야지 아이린."

"크라겐! 크라켄 구이 먹고 싶어!"

아이린이 볼을 빵빵하게 부풀리며 투정을 부렸다. 프리실라가 어쩔 수 없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음... 그럼 아침 먹어야 하니까 딱 하나만 먹기다?"

"당연하지! 내가 뭐 어린 아이인가?"

볼을 발그래 물들이며 아이린이 배시시 웃었다.

누가 봐도 영락없이 신난 어린 아이인데. 프리실라가 쓰게 웃으며 뒷말을 집어삼켰다.

"오? 프리실라양, 오랜만이네?"

크라켄 장난감이 주렁주렁 달린 옷을 입은 꼬치 구이집 주인이 호탕하게 웃으며 알은체했다.

"크라켄 구이 하나만 주세요, 아저씨."

"세 개."

그때 불쑥.

하얀 고양이 가면을 쓴 남자가 프리실라 옆에서 튀어나왔다. 깜짝 놀란 프리실라는 순간 소리를 지를뻔했다.

"... 아저씨 크라켄 구이 세 개 줘요."

고양이 가면은 지금도 무언가를 먹고 있는 듯 입을 우물거리며 돈을 내밀었다. 프리실라와 아이린이 놀란 눈을 깜빡이며 남자를 쳐다봤다.

"누, 누구..."

일순 경계심이 올라오려던 때, 남자의 품에 안겨서 아직도 비몽사몽한 아이가 눈에 들어왔다.

"쥰?"

아이린이 먼저 아이를 알아보고 이름을 불렀다. 잠옷 차림으로 눈을 끔뻑거리고 있던 쥰이 고개를 돌려 아이린을 내려다봤다.

두 눈에는 졸음이 가득했다.

프리실라는 그제서야 고양이 가면을 쓰고 있는 남자를 알아봤다. 밝은 갈색 머리 남자라면 그때 분명 카일을 손 봐준 남자였다.

가면 너머 눈이 빙긋 웃었다.

"방해한 게 아니라면 새벽 장터 안내 좀 해줄래요?"

어느덧 아침 해가 떠오르고 쥰이 눈을 반쯤 뜬 채 크라켄 구이를 오물거렸다. 그 옆에서 아이린이 키득거리며 쥰의 고양이 머리띠를 힐끔거렸다.

"그 가면은 도대체 뭐예요?"

프리실라는 얼굴의 반을 가리는 고양이 가면이 역시 신경 쓰였는지 히아센에게 물었다.

"음, 귀여우라고?"

겸사 겸사 얼굴 노출도 막고 말이다.

카일 그 남자가 아무리 쓰레기라고 해도 전 경비원 단장인데, 범인 몽타주 한 두 장은 돌지 않을까 싶었다.

사실 들킨다고 해도 이 도시에 오래 머물건 아니니 딱히 상관은 없지만.

"맛있네, 크라켄. 근데 진짜 크라켄 구이는 아니겠죠?"

히아센은 거대한 바다 괴물의 모습을 떠올리며 커다란 오징어 다리를 우물거렸다.

"설마요. 그냥 대왕오징어예요."

별 엉뚱한 소리를 한다는 듯 프리실라가 정정해주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바싹 메말라 죽은 나뭇가지 같아 보였는데, 이렇게 웃을 수도 있구나 싶었다. 입가에 걸린 작은 미소를 보며 히아센도 덩달아 씨익 웃어 보였다.

"속이 좀 시원한가?"

"... 덕분에요."

프리실라가 어딘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바람에 홀연히 날아가 버릴 것 같은 얼굴로 저 멀리 날아드는 민들레 홀씨 따위를 올려다봤다.

민들레 홀씨가 바람에 날려 두둥실 떠올라 하늘 위로 흩날렸다.

"봄이네."

"그러네요. 봄이네요..."

프리실라가 떠오른 민들레 홀씨를 좇았다. 민들레 홀씨가 내려앉은 들판 위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 심정을 닮은 웃음으로 프리실라가 히아센에게 고개를 숙였다.

"정말, 히아센님과 마님께는 감사하고 있어요. 그리고... 죄송하다는 말도 함께요."

"인사는 마님이 돌아오거든 해. 난 시킨 대로 한 것 뿐이니까."

"... 아마 곧 돌아오실 거예요."

"하여간, 기다리는 건 항상 내 몫이지."

히아센이 뒷머리를 박박 긁으며 투덜거렸다. 프리실라가 옆에서 쿡쿡 웃음을 흘렸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누가 위로하지 않아도 그럴 셈이었다. 평소 같으면 그럴 셈이었는데...

히아센이 끄응 머리 아픈 소리를 흘렸다.

"그런데 아가씨, 내가 궁금한 게 하나 있어서 그러는데, 물어봐도 되나?"

히아센이 남은 크라켄 구이를 전부 입 속으로 털어 넣으며 덧붙였다. 뜬금없는 남자네 싶어 프리실라는 눈을 깜빡였다.

"아가씨는 약간 세상 다 산 거 같이 해탈한 면이 있어서 내가 묻는 거야."

"세상 다 산..."

묻고 싶은 게 뭐냐는 듯 프리실라가 멋쩍게 웃음 지었다.

"혐관이라고 들어 봤어?"

"네?"

"혐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프리실라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서로 싫어 죽겠어서 평소에도 아주 물어 뜯고 난리인데, 이게 또 가만보면 서로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야."

내 말 이해 돼?

"이게 가만 놔뒀다가는 유혈 사태라도 일으킬 거 같아서 서로 떨어트려 놓을까 하다가도! 돌아서 보면 서로 선 넘는 농담 따먹기나 하고 있다니까?"

"어... 햄스터 이야기 인가요?"

설치류들이 가끔 같은 우리 안에 있는 동족을 물어뜯고 잡아먹으려 드는 경우가 있는데...

프리실라가 어쩐지 흥분한 히아센을 보며 땀을 흘리며 대답했다. 물론 그럴 리는 없지만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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