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한
침묵은 그의 최후의 패이자 가장 강력한 무기다.
저벅.
낙엽이 짓밟히는 소리가 들린다. 밤하늘이 깔린 숲에는 나뭇잎과 가지가 서로 부딪히며 노래했다.
은발의 소년은 숲의 끝에 당도했다. 어딘가 익숙한 공기와 분위기였다. 그는 그에 반응하듯이 멍하게 숲을 둘러보았다. 이 숲에서 그의 기억 속과 달라진 건 단 하나 뿐이었다.
어쩌면 그의 죄책감과 미련, 동시에 그래서 멈추길 바랬던 단 하나뿐인 친구. 옛날에는 데리트 케임브리흐라고 불렸지만, 지금은 기괴한 별명만 붙여진 소년. 폴룩스 폰 캄파넬라.
그가 어떤 작은 묘지 앞에 서있었다.
예상했지만, 사실 마주하고 싶지 않았지만 저 소년이 변한 원인이 여기에 있었다.
레라지에는 그의 뒷모습을 보더니 심호흡하는듯이 침을 몇 번 삼키고는 입을 열었다.
“ 안녕 데리트. ”
“ …안녕, 레라지에. ”
정말 오랜만이었다. 그가 가출하고 난 지 3년 뒤었나, 그동안 보지 못했으니까. 소식조차 듣지 못했으니까. 그는 뭔지 모를 감정을 억누르고 계속 말을 이어갔다.
“ 아스트리에에게 왜 온거야? ”
“ 몰라서 묻는거야? ”
“ …아니. ”
“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너는 내가 왜 이러는지 ‘이해'할 수는 있겠지. ”
“ 그게 무슨 말이야? ”
“ …돌려말하지마. ”
숨이 턱 막히는 느낌에 레라지에는 자신도 모르게 입을 닫았다. 그 후 이 숲에는 고요한 적막만이 감돌았다. 마치 어딘가에서 본 폭풍전야 같았다.
레라지에는 다시 숨을 내쉬고 소년을 보았다.
소년은 작은 묘지 앞에 서 있었다. 이름도 없는 묘지의 앞에는 작은 꽃들이 있었다. 꽃다발이 아니지만, 누군가가 마음을 쓰면서까지 둔 달맞이꽃들이.
“ …다른 사람들은 이거 알고있어? ”
“ 알고는 싶긴할까? ”
“ 그래, 흔한 일이라고 다들 의아해하겠지. ”
“ 그리고 흔한 일이라고 마음대로 짓밟고. ”
“ 너답지 않아. ”
“ 왜 나답지 않다고 네 마음대로 지껄이는거지? ”
“ …. ”
레라지에의 기억과 다르게 지금의 폴룩스는 확실히 날이 서있었다. 이유가 합당한가 안 합당한가를 넘어, 소년이 해왔고, 앞으로도 하려는 짓은 명백했다.
모든 별들을 무너트리는 것. 그리고 그것은 이 세계에 멸망도 못한 파멸을 가져올것이다. 그 파멸에는 자신도 휘말릴것이고.
하지만 레라지에는 소년을 굳이 막고싶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이제야 이해했다. 이건 어쩌면 ‘반드시’ 일어났어야 할 이야기일지도 몰랐으니까. 그는 소년이 했던 질문에 대한 대답 대신 담배를 꺼내서 불을 붙였다.
“ 언제부터 숨겼어? ”
배우가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지금에야 깨달아버린 것이다. 폴룩스는 그 질문을 듣고선 예전처럼 표정이 누그러졌다.
“ 너는 다 알고 묻는거 진짜 악취미라고 말했지? ”
“ 그럼 네가 하는 짓은 악취미 아니고? 어이가 없어서.. 됐다, 읊어봐. 나라도 알아야할거 아니냐. ”
“ 내가 너의 뭘 믿고? ”
“ ..아스트리에를 걸고. ”
“ ..치사한 새끼. ”
“ 어쩌겠어, 나는 니보다 더 나쁜 놈인걸. ”
소년이 자신의 친구의 곁에 앉았다. 어두운 밤에서 외로운 달만이 소년들을 비춰주었다. 잠깐의 침묵 뒤로 환상인지 아니면 회상인지 모를 광경들이 스쳐지나갔다.
이 세계에서 낮은 신분이 사고를 치면 벌레만도 못하게 죽어버린다. 그리고 그 사실은 아주 옛날부터 당연시되어왔던 사실이었다. 레라지에도 그렇게 생각했었다.
하지만 자신의 친구 데리트만은, 그 규칙에 대해 의아함을 표출했다. 신분이 뭐길래 벌레만도 못하게 죽어야할까. 자신의 모든 것을 빼앗기고, 위의 것들에게 평생 기어가며 살아가야할까. 그리고 이것을 깨달은 계기는 슬프게도 저 묘지의 주인 때문일 것이다.
그렇기에 레라지에는 이제라도 자신의 친구를 이해할 수 있었다. 저 묘지의 주인은 떠오르기만해도 괴로운데다 그립고, 그럼에도 사랑하는 자신의 옛 친구였으니까. 그리고 그건 폴룩스에게도 마찬가지였겠지.
이 소년들의 차이점은 낡은 규칙에 굴복하느냐, 아니면 그 규칙에 원한과 복수의 검의 들었냐의 차이였을 뿐이었다.
생각을 마친 레라지에가 담뱃불을 껐다. 폴룩스도 하고싶은 말이 있는지 자신의 친구를 보았다.
“ 뭘 숨기고 있지? ”
“ 똑똑한 너도 상상 못하는 것이라고 말해두지. ”
“ ..정말 상상이 안 가는데. 1성 2성이야 잔머리로 죽인다쳐도, 3성은 궤가 다르잖아. 할 수 있겠어? ”
“ 그거 알아? ”
“ 뭐. ”
“ 입 닫고만 있으면 관중들이 이상한 소문을 많이 내준다는거. ”
“ 그런데 그게 왜? ”
“ 그래서 상상 못하는거지. 그 소문이 진짜인줄 아니까. ”
“ 뭔 이상한 소리를.… ”
“ 무적인것처럼 연출하면 진짜 무적인줄 알고, 내가 그런 것처럼 연기하면 진짜 그런 것처럼 아는거야. ”
“ …. ”
“ 레라지에, 난 그렇게 강한 사람 아니야. 네가 잘 알잖아. 하지만 그럼에도 하는 이유는 아스트리에도, 왕관 때문도 아니야. ”
…
잠깐, 왕관?
그가 식겁한 표정으로 폴룩스를 보았다. 그런 반응이 나올 줄 알았다는듯, 그는 시큰둥하게 그를 마주보았다.
“ 복수는 핑계지 내가 진짜 원하는건 단 하나야. ”
“ … .. … ..너 설마. ”
누군가는 이 놈의 멱살이라도 잡아서 진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물었어야했다. 아니면 어떤 패를 가지고 있는지, 어떤 것을 알고있는지라도. 혹은 왜 자신의 멀쩡한 이름을 두고 폴룩스 폰 캄파넬라라는 이름으로 다니는지라도 말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가 단순히 복수나 더 높은 곳으로 가고싶다고 착각했고, 이건 이 세계의 가장 큰 실수가 될 것이다.
소년이 한 침묵은 이 세계의 금기이자 동시에 가장 위험한 힘을 숨기기에 아주 충분했으니까.
“ 하얀.. 별을.. .. … ”
“ 이미 늦었어. ”
“ 그리고 너도 알고있었구나? 카스트로는 진짜 왕이 아니라는 사실 말이야. ”
최초의 6성, 별들의 왕이자 동시에 이 세계의 왕인 카스트로에게는 쌍둥이 동생이 있다. 하지만 아주 옛날에 그 동생은 죽었다라고만 기록되었지, 왜 죽었는지는 자세히 알려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 쌍둥이 동생의 이름은 이러하였다.
폴룩스.
드디어 썩은 세계 속에서 영원히 침묵할뻔한 진실이 한 소년의 손에 의하여 끄집어내진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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