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티나의 악녀 (4)
004. 예쁜 얼굴로 못된 말만 하네.
루시안.
그 뒤에 붙는 긴 이름은 생략하고, '플라티나'의 유명 인사라고 하면 그녀를 빼놓을 수가 없었다.
귀족 특유의 와인색 머리칼과 눈동자. 여우같이 날렵하게 올라간 눈꼬리, 자칭타칭 플라티나의 간판.
하루 일과의 대부분을 손님들과 도박게임을 하는 '플라티나'의 종업원이자 간부인 그녀는 괴이를 혐오하기로 유명했다. 때문에 이레시아가 플라티나에 들어오는 걸 누구보다도 크게 반대 했던 게 루시안이었다.
나라서 좋아서 여기 들어온 게 아닌데 말이지.
"한 번만 더 그딴식으로 부르기만 해봐... 진짜 죽여버릴 거야."
"자기가 먼저 괴물이라고 불렀잖아."
내 이름이 뭔지 알긴 하는 거지? 어떻게 처음 봤을 때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이름을 제대로 부른 적이 없는지.
이레시아는 바닥에 나뒹구는 카드를 주우며 덧붙였다.
"스페이스 A. 하물며 이런 종이 쪼가리 하나에도 이름이 있는 법인데."
"괴물한테 이름이 필요해?"
삐딱하긴.
그렇게 나올 줄 알았다는 듯 이레시아는 주워든 카드를 만지작거렸다.
"... 예쁜 얼굴로 못된 말만 하네."
"네가 눈앞에 알짱거리지만 않으면 그렇지도 않아. 의뢰 때문이면 빨리 꺼져버리던가."
뒈져버리면 더 좋고.
혐오가 잔뜩 찬 악담에도 이레시아는 시종일관 여유 있게 웃는 낯이었다. 그게 더 루시안의 속을 긁어서 주먹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게임판에 멋대로 끼어든 것도 마음에 들지 않는데, 이번엔 도대체 무슨 말로 제 속을 긁어놓으려고.
"나가기 전에 인사도 할 겸, 저번 의뢰 완수 대가로 내가 부탁한 물건을 받으러 왔어."
"하, 물건? 무슨 물건."
루시안이 삐딱하게 팔짱을 끼며 코웃음을 쳤다. 아무래도 곱게 내 줄 마음이 없어 보였다. 오히려 순순히 주는 게 더 이상했을 테지만...
"저번 달에 내가 말했던..."
"글쎄. 모르겠는데?"
또 왜 이럴까 이 아이가.
이레시아의 입가에 걸려있던 미소가 지워졌다.
"... 진짜 이럴 거야?"
저번 달 완수했던 고블린 소탕 의뢰에 꽤나 골머리를 썩였던 그녀로서는 기분이 저조해지는 일이었다.
"너 같은 이단한테 구해다 줄 물건 같은 건 없어. 그렇게 필요한 물건이면 니가 직접 구해보던가."
이레시아가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버릇 없이 구는 건 귀엽게 봐줄 수 있어도, 이런 식으로 나오는 건 영 좋게 봐줄 수 없는데 말이지. 그 물건을 구해다 주는 대가로 저번 의뢰 때 그녀가 얼마나 고생을 했던가.
포커판에 있는 눈들이 힐끔 거리며 루시안을 쳐다봤다. 아무리 둘 사이가 앙숙이라지만 일에 대한 대가를 받지 못한다면 이레시아 역시 가만히 있지 않을 텐데.
이레시아가 정말 화가 나서 치고받으면 어쩌려고 그러는 건지, 걱정 어린 시선들이 쏟아졌다.
그러든지 말든지. 루시안은 미소가 사라진 이레시아의 얼굴을 싸늘히 노려볼 뿐이었다.
"공과 사는 구분할 줄 아는 줄 알았는데..."
히아센이 플라티나의 정보원이라면, 루시안은 의뢰의 대가를 지불하고 원하는 물건을 대신 구해다 주는 이른바 장물아비 같은 거였다. 아니. 고작 장물아비라고 하기에는 너무 간추린 설명일 테지만, 아무튼 그녀는 의뢰를 완수한 대가를 지불해주는 이였다.
의뢰 완수비의 상당 부분을 지불하면 불법인 물건이든, 도난 물건이든, 암시장에 나도는 걸 구해다 주는 것이 그녀의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이렇게나 철없이 굴어서야..."
이레시아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뭐라고?!"
"루시안님."
새빨게진 얼굴로 목소리를 높이는 루시안의 등 뒤에서 인자한 목소리가 들렸다.
움찔.
루시안의 어깨가 떨렸다. 백발의 집사가 루시안을 보며 짐짓 엄한 얼굴로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루시안, 가브리엘 화났나 봐. 그냥 줘버려."
"맞아. 저번처럼 또 로비가 반쯤 날려버리면 가브리엘 이번엔 진짜 뒷목 잡고 쓰러져..."
포커판에서 몇몇이 루시안에게 속삭였다. 스스로도 유치하게 군것이 맞았기에 루시안은 제 입술을 짓이겨 씹었다. 그리고 인정하기 싫지만 이레시아가 플라티나의 의뢰 전반에 꽤나 도움이 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진짜 짜증 나는 여자!'
루시안이 홱 그녀를 지나쳐 카운터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곧이어 손에 작은 종이봉투를 들고나와 그녀의 치맛자락에 집어던졌다.
"갖고 꺼져버려!"
루시안이 결국 버럭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주변에서 또 다시 숨을 집어먹는 소리가 들렸다.
"참 예쁘게도 주는구나..."
이레시아가 바닥에 나뒹구는 봉투를 집어 들었다. 이래 봬도 마탑에 의뢰해서 어렵게 구한 물건일 텐데. 정말이지. 생긴 건 귀엽게 생겨먹어서 행동은 망나니가 따로 없네.
성격 나쁜 내가 봤을 때도 저 정도면 심하긴 한 것 같은데. 그래도 고분고분 제가 부탁한 물건을 들여오는 것에는 칭찬을 해야 할까?
봉투 안에 담긴 작은 은팔찌를 보며 이레시아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걸렸다. 평범한 액세서리 같아 보이지만 마력으로 세밀하게 가공한 물건이었다.
"대금은..."
"네 의뢰비에서 어련히 제외할 거거든?!"
어련히 또 곱절 값으로 떼어갈 테지만, 이 정도면 뭐. 만족스러운 물건이었다. 착용자가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위치를 알 수 있게 하는 고위 수식어가 붙은 팔찌였으니까.
"선물 사 올게, 루시."
"제발 좀 닥치고 꺼져 시발!!"
진저리를 치는 욕지거리에 '픽' 하고 웃음이 튀어나왔다. 이 상황이 뭐가 재밌어서 웃는지 알 수 없는 사람들은 살얼음판 같은 분위기에 일제히 주머니에서 판돈을 꺼내 늑대에게 내밀었다. 늑대는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그 돈을 내려다봤다.
"야, 받아. 네가 고생이 많다."
"그럼 그럼. 둘이 붙을 때마다 로비가 반파 되지 않는 게 어디냐."
"맞아. 반파되는 대신에 그 스트레스 다 너한테 풀 텐데. 채찍으로 맞은 곳은 괜찮고?"
당사자들만 모르는 내기의 판돈이 제 앞에 쌓이는 것을 본 늑대는 들리지 않게 한숨을 내쉬었다.
+++++
플라티나의 지하 1층.
반쯤 무너진 지하 감옥을 지나 그 안쪽으로 들어서자 이끼가 잔뜩 낀 넓은 공터가 나타났다. 그리고 그 가운데는 몇세기 전에나 만들어 졌을 법한 낡고 커다란 워프 포인트가 자리 잡고 있었다.
각 영토마다 이동의 편의성을 위해 설치된 워프는 그 값에 맞는 수식과 약간의 마력을 주입한다면 아무리 먼 거리여도 이동할 수 있었다.
"도대체 루시안을 왜 자꾸 건드려 마님."
걔 성격 뻔히 알면서.
히아센이 질린다는 얼굴로 워프 수식을 확인하며 한숨 쉬었다. 머리 위로 얼굴을 가리는 천이 달린 너울 모자를 눌러 쓴 이레시아가 푸스스 웃어 보였다.
"재밌잖아. 귀엽고."
"어딜 봐서..."
물론 생김새로 따지면 루시안이 썩 귀여워 보이는 외모이긴 하지만 입만 열면 육두문자를 쏟아내는 데...
게다가 루시안은 '플라티나'의 제일가는 다혈질이고 말이다. 서빙으로 깨 먹는 접시보다 도박에 져서 집어던지는 접시 개수가 압도적으로 많은걸 다들 알고 있는데.
"솔직한 게 마음에 들어."
"날 이런 식으로 대한 여자는 네가 처음이야. 뭐 그런 거야?"
히아센이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속 모르겠는 얼굴로 칼 꽂는 사람보다는 나으니까."
그러며 이레시아가 늑대를 쳐다봤다.
"안 그래?"
"... 제발 1절만 해주라."
히아센은 제 명에 못 살 것 같은 기분에 울상을 지었다.
"그냥 빨리 둘, 아니 세 사람 다 일하러 가버려."
히아센이 확인 작업을 마친 워프 수식을 입력했다. 자칫 수식을 잘못 입력했다가는 엄한 곳으로 떨어질 수 있으니 꼼꼼한 가브리엘에게 미리 부탁해 둔 수식이였다.
"아가. 이리 온."
밖으로 나갈 생각에 신나서 뛰어다니기 바쁜 쥰을 그녀가 불러세웠다. 부르기가 무섭게 쥰이 이레시아의 치마폭으로 안겨들었다.
귀여워라. 그녀는 헝클어진 쥰의 머리칼 위로 습관처럼 짧은 키스를 떨어트렸다. 그런 두 사람을 보던 히아센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정말 쥰도 같이 데려가려고?"
"티파의 도시는 안전하니 걱정 마."
"아니, 그건 잘 알지만..."
혹여나 또 상태가 나빠질까 걱정이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열감기를 호되게 앓았는데. 아니, 또 상태가 나빠져도 어련히 두 사람이 알아서 잘하겠지. 게다가 쥰이 저렇게 좋아하는데 이제 와서 나가지 말라 하기도 뭐하고.
"같이 바람 쐬러 안 갈래, 히아센?"
"난 처리할 일들이 남아서 나중에. 조심해서 다녀오기나 해들."
차마 저들 사이에 끼어들 자신이 없다는 말은 접어두고 히아센이 손을 흔들었다.
우우우웅...!
대기가 진동하는 소리와 함께 워프가 가동했다. 푸른 빛의 마력이 세 사람 주위를 맴돌았다.
"그럼, 다녀올게 히아."
"몸 조심해."
히아센의 말을 마지막으로 푸른빛과 함께 사라졌다. 그 빛이 사라질 때까지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히아센은 뻐근한 목덜미를 주물렀다.
"아, 목말라..."
시한폭탄들이 사라졌으니 시원한 맥주라도 마셔야지.
+++++
티파의 도시 상공을 수직으로 가르는 푸른빛이 워프 위로 끊임없이 쏟아졌다. 광산과 아트펙트로 유명한 도시답게 상인들의 행렬이 이어지고 있었다.
플라티나의 낡고 이끼가 낀 워프에 있던 이레시아가 다시 눈을 떴을 땐, 온갖 화려한 보석을 갖다 박은 워프 위였다. 대륙의 동쪽 끝의 영토, 티파의 도시에 도착한 것이었다.
뭔가, 이것저것 잡다한 기운이 득실거리는 도시네. 아티펙트와 성물이 넘쳐나는 곳이어서 그런가?
나랑은 영 맞지 않을 것 같은데.
"우욱...!"
그때 쥰이 헛구역질을 하며 이레시아에게 매달렸다.
"아, 이런..."
"후에엥..."
쥰이 우는 소리를 내며 이레시아의 목을 끌어안았다. 간혹 워프에 적응하지 못하고 멀미를 하는 어린 아이가 있고는 한데, 쥰이 그 경우였다.
"괜찮나?"
늑대가 이레시아에게 안겨든 쥰을 살피며 물었다.
"심하진 않는데, 오랜만이어서 좀 놀란 거 같아. 물 좀 줄래, 늑대씨?"
최근에는 함께 나갈 일이 좀처럼 없었지. 작은 등을 토닥이며 이레시아가 쥰을 달랬다. 컵에 담긴 물을 한 모금 마신 쥰은 다시 고개를 꼬꾸라 트렸다.
"흐욱..."
"내가 안는 게 낫지 않나?"
물 먹은 솜처럼 축 늘어진 쥰을 보며 늑대가 물었다. 그러자 쥰이 작게 고개를 저으며 칭얼거렸다.
"이레니이임..."
"나보고 계속 안으라네."
이 꼬맹이가 누구를 부려 먹는지 알긴 하는 건지.
그래도 구명줄처럼 목을 끌어안는 고사리손이 귀여워서 이레시아는 쥰을 편하게 고쳐 안았다.
"어딘가 잠시 쉴 곳이 있으면 좋겠는데..."
"무슨 문제 있으십니까?"
경비원들이 세 사람에게 다가왔다.
"별거 아니다. 아이가 멀미를 해서 그런 것 뿐이니까."
"아아. 워프에 멀미하는 어린 아이가 간혹 있긴 하죠."
늑대의 말에 경비원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들의 행색을 살폈다.
"용병이십니까?"
늑대는 태연한 얼굴로 미리 준비한 위조 신분패를 내밀었다.
"아, 리플의 용병이시군요."
경비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신분패를 확인했다. 그러자 그의 등 뒤에서 이레시아가 쿡쿡거리며 웃음을 흘렸다. 늑대는 시끄럽다는 듯이 눈매를 구기며 이레시아를 노려봤다.
'플라티나'의 의뢰 수행은 기본적으로 비밀리에 움직여야 하는 일이었기에 히아센이 제작해준 가짜 신분패였다.
"그럼 저 분은..."
얼굴을 흐릿하게 가리는 모자 덕분에 여자의 얼굴은 알 수 없지만 차려입은 드레스가 꽤나 고급스러워 경비원들이 힐끔거리며 주시했다.
"비밀리 호위하라는 의뢰를 받았다. 신분은 내가 보증하지. 문제 일으키는 일은 없을 거다."
거짓말.
먼지도 털어봐야 안다고. 광산 속에 숨어 있는 것의 정체를 알기 위해 이곳에 온 이상, 소란스럽지 않을 수 없을 텐데. 백이면 백. 도시가 한바탕 떠들썩해질 테지.
그런 그녀의 생각을 읽은 것 마냥 경비원이 곤란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하지만 신분증을..."
"우욱...!"
"............."
뭐라 말을 하려던 경비원의 입이 그대로 얼어붙었다.
툭. 투둑...
".........."
"..........."
잠시 잠깐 그들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바닥으로 토사물이 떨어지는 소리에 늑대의 고개가 천천히 돌아갔다. 답지 않게 당황한 얼굴로 쥰을 내려다보고 있는 이레시아가 보였다.
"아..."
그리고 종잇장 처럼 창백한 얼굴로 더럽혀진 그녀의 드레스를 쳐다보는 쥰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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