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파의 메두사 (1)
005. 티파의 도시
쥰이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축축하게 물들어가는 드레스를 소매로 문질렀다. 그러나 오히려 이레시아의 옷자락을 더욱 번지게 할 뿐이었다.
'... 토했다.'
토해버렸어. 한 번도 이런 적 없었는데.
따끔따끔한 목이 쌔액거리는 소리를 내었다. 흔들리는 두 눈이 공포심에 물들며 옛 기억이 고개를 들었다.
'성가시니까 그만 따라붙어!'
저를 향해 버럭 짜증을 내던 목소리가 떠올라 쥰의 몸이 딱딱하게 움츠러들었다.
"자, 잘... 모..."
우욱...!
그러나 말을 채 끝마치기도 전에 다시 헛구역질이 올라왔다.
아.
쥰이 이젠 턱까지 바들바들 떨며 그녀를 쳐다봤다. 금방이라도 놀라 까무러칠 것 같은 눈과 마주치자 이레시아는 당황했던 얼굴을 갈무리했다.
실수했다는 걸 안 건지 얼굴이 잔뜩 창백해 보였다. 게다가 제가 화를 낼까 봐 잔뜩 겁을 집어먹은 모양새였다.
뭐, 예전 같았으면 나도 내가 어떻게 행동했을지 장담 못했겠지만. 그때는 그녀 조차도 플라티나의 낯선 환경에 적응하랴, 주변을 경계하랴 날이 잔뜩 서 있을 때였으니까.
이레시아가 손을 내밀자 늑대가 눈치 빠르게 손수건을 건네주었다.
"조금 놀라서 그런 게 아니었네."
줄곧 입을 다물고 있던 그녀에게서 흘러나온 나긋한 음성에 경비원들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얼굴을 가린 너울 모자를 당장에라도 벗겨내서 확인해보고 싶을 정도로 달큰한 음성이었다. 얼마나 뚫어지게 보는지 다들 넋을 잃고 쳐다보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놀랐니, 아가? 왜 이렇게 떨어."
별일 아니라는 듯 다정한 음성으로 그녀가 쥰의 입가와 손을 닦아냈다. 쥰의 떨림이 천천히 잦아들었다. 대신 눈시울이 붉어지면서 입술을 달싹거렸다.
"자알... 못..."
"사과하지 마. 아픈 거로는 사과하는 게 아니야."
역시 멀미약을 먹이고 데려올걸 그랬네.
"늑대씨."
"근처에 쉴만한 곳은?"
늑대가 그녀가 원하는 질문을 재깍 경비원에게 던졌다. 그러자 넋을 잃고 있던 경비원들이 화들짝 놀라며 자세를 다시 꼿꼿하게 고쳐 세웠다.
"아, 시내에 여관이 몇 군데 있습니다! 안내해 드릴까요?!"
"아니. 됐어."
늑대는 가짜 신분패를 다시 받아들었다. 경비원 한명이 허둥지둥 수건을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
"기, 길을 따라 쭉 가시면 바로 시내가 나오니까 어렵지 않게 찾으실 수 있을 겁니다."
"고마워."
너울 모자 뒤로 아름다운 얼굴이 미소 짓는 상상을 한 경비원이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였다.
수건으로 대충 옷의 얼룩을 닦아낸 그녀는 늑대의 뒤를 따라나섰다.
+++++
커다란 호수를 중심으로 형성된 도시는 예로부터 물자가 풍부해 거리는 상인들의 인파로 넘쳐났다.
티파의 도시.
드래곤이 사랑했다는 소녀의 이름을 딴 도시였다. 드래곤은 소녀와 늘 함께 있었고, 죽어서도 그녀를 지키기 위해 도시를 온몸으로 감싸 안고 잠들었다고 했다.
이레시아는 도시를 견고하게 감싸고 있는 산맥들을 둘러봤다. 동시에 신경이 날카롭게 곤두섰다. 무언가 있었다. 그것이 용의 심장 파편이라고 불리는 '록하트' 때문인지, 다른 미지의 것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아니, 애당초 산맥에서 느껴지는 기운인지 조차 확신할 수 없었다. 그녀는 작게 한숨을 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자잘한 아티펙트와 성물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까다롭네. 이래서야 메두사던 뭐던 찾을 수 있을까 몰라."
그녀와 상반되는 기운이 너무 많아서인지 몸까지 축 처지는 기분까지 들었다. 그런 상태를 눈치챈 늑대가 쥰에게 손을 내밀었다.
"쥰, 이리와."
"당신 옷까지 더러워질 거야."
굳이 두 사람 다 옷을 더럽힐 필요는 없었다.
"성물과 아티펙트가 즐비한 도시야. 괜한 고집 피울 필요가 있나?"
"이까짓 성물과 아티펙트는 나한테 별다른 영향을 주지 못해."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건 아니군. 영 좋지 않다면 말해. 조금은 힘을 풀어도..."
"그건 건드리지 말랬지."
이레시아가 서리 낀 눈으로 그의 말을 잘라냈다. 족쇄의 주술에 진절머리를 치면서도 왜 내가 그 힘을 사용하지 않는 건데. 자칫 잘못했다가 내가 여기 있다는걸 들킨다면... 지금까지 숨죽인 채 도망쳐 다니는 이유가 없어지는 것을.
다시 잡힌다면 아마...
'... 도망쳐.'
불현듯 스쳐 지나가는 음성이 그녀를 등 뒤에서 감싸 안았다. 누구의 목소리인지 떠올리기도 전에 온몸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
퍼뜩 놀란 이레시아가 눈매를 좁히며 뒤돌아봤다. 그러나 등 뒤에는 사람들의 인파만 바쁘게 지나가고 있었다. 뭐지... 방금? 터질 것 같이 빠르게 뛰는 심장 박동을 애써 무시하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이레시아?"
어깨에 닿는 온기에 움찔 어깨가 떨렸다.
"무슨 일이지? 표정이 좋지 않은데."
검은 천 안쪽으로 작디작은 동요를 숨기며 이레시아가 고개를 저었다.
"... 아니. 아무 것도 아니야."
성물과 아티펙트 기운 때문에 쓸데없이 예민해진 모양이었다. 심중을 읽으려는 듯 늑대는 잠시 가만히 그녀를 응시했다. 하루에도 몇번씩이나 종잡을 수 없는 여자는 이번에도 무슨 이유 때문인지 예측할 수가 없었다.
"너라는 여자는 매번 사람 종잡을 수 없게 만드는 게 취미인가?"
"하... 당신만 할까."
어이가 없는 소리에 이레시아의 입가에 냉소가 배어 나왔다. 종잡을 수 없는 게 누군데. 그저 목소리 하나만으로도 넋을 잃던 경비원들이 떠올랐다.
혹시라도 제 얼굴을 봤다면, 머리 속에 온갖 유희가 펼쳐지며 침을 흘리겠지. 마음만 먹으면 그들을 무릎 꿇리고, 발 끝을 핥게 하는 것 정도는 그녀에게 일도 아니였다.
그런데 왜 유독 이 남자만 뜻대로 되지 않는 걸까? 아니, 평소에는 저를 닭, 개 보듯이 반응 하나 보이지 않으면서. 왜 이럴 때만 귀신같이...
"... 당신 말이야."
'플라티나'의 인간들은 그녀가 흘리는 매혹의 힘에 어느 정도 저항력을 가지고 있는 것 같긴 하지만. 특히 이 남자에게는... 거의 통하지 않는다고 봐야 하나?
늑대는 아무 말 없이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 아니다. 됐으니까 앞장이나 서."
정말 제게 동하지 않느냐는 질문을 해서 무엇하리. 이미 그동안 질리도록 물어봤던 질문인 것을.
다른 것도 아니고, 이 내가 더 안달 나서 매달리는 남자가 있을 줄이야. 오버(Over)의 땅에서 지낼 때는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는데. 모두 그녀를 원하고, 갖고 싶어 했으니까. 그녀의 마음에 들기 위해 다들 제가 가진 것들을 아낌없이 내어주었다.
살 곳을 내주고, 재물과 직위를 내주고, 충성심과 마음까지도 내주었는데 말이다.
하물며,
"이레시아."
... 이름까지도.
늑대의 불음에 이레시아가 상념 속에서 고개를 들었다. 그의 시선이 좁은 골목에 머물고 있었다. 덩달아 그곳으로 그녀의 시선이 따라붙었다.
"왜 네가 버젓이 여길 돌아다니냐는 말이야!!"
"네 약혼자가 죽을 때 확 따라 죽어버리지!!"
사내들의 고성이 한 여자에게 쏟아지고 있었다.
벽에 내몰린 여자의 뒤에는 어린 아이가 바닥에 넘어진 채 대성통곡을 하고 있었다. 여자는 온몸으로 사내들을 막아서며 그들을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하여간 어디를 가나 저런 한심한 것들이..."
짧은 상념을 털어버린 이레시아가 한숨을 내쉬었다. 사내들의 고함에 놀란 쥰이 바들바들 떨었다. 이레시아는 그 작은 등을 토닥거리며 늑대에게 눈짓했다. 그가 눈 깜짝할 새에 골목으로 뛰어들었다.
"재수 없으니까 이제 그만 뒈져버려!!"
사내가 치켜든 몽둥이를 여자를 향해 휘둘렀다.
"흡...?!"
여자가 반사적으로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나 곧이어 이어진 건 사내들의 비명소리였다.
"아악!!"
"끄어억!!"
언제 어떻게 당한 지도 모른 채 사내들이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여자는 당황한 얼굴로 제 앞을 막아선 낯선 남자를 쳐다봤다. 나뒹굴던 사내 중 한명이 소리쳤다.
"너, 넌 뭐야?!"
"여자 둘을 상대로 쓰레기 같은 짓을 하는군."
"네가 상관할 일이 아니니까 저리 꺼져! 저 계집이... 으억!"
늑대의 발이 시끄러운 사내의 가슴팍을 발로 짓눌렀다.
"시끄러워."
"켁!! ㅁ, 뭐?!"
"쥰이 울기라도 하면 저 여자의 기분이 언짢아지거든."
"별안간 끼어들어서 도대체 무슨 개소리야?!"
"앗, 이봐 저기...!"
골목 입구를 가리키며 사내들 중 한명이 소리쳤다. 고급스러운 네이비색 드레스에 얼굴을 가린 너울 모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이리로 보나, 저리로 보나, 그녀는 직위 높은 귀족의 차림새였다.
"어떻게 할까?"
늑대의 물음에 이레시아는 어깨를 한번 으쓱하더니 한걸음 옆으로 비키며 길을 내주었다. 마치 도망칠 거면 지금뿐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사내들은 절로 이를 갈았다.
"이것들이 쌍으로..."
하지만 남자의 실력도 실력이거니와, 귀족을 건드리면 여러 뭐로 좋지 않은 꼴을 당할걸 알고 있었다. 사내들 중 리더인 남자는 잔뜩 성난 얼굴로 여자를 노려봤다.
"프리실라! 이걸로 끝이라고 착각하지 마!!"
일단은 후퇴하기로 한 건지, 사내는 여자를 향해 엄포를 놓고는 일행들과 비틀거리며 골목을 빠져나갔다. 이레시아는 멀어져가는 사내들을 눈으로 뒤쫓았다.
'분명 모르는 이들일 텐데, 벌레만도 못한 것들이 어딘가 눈에 익네.'
어디서 봤더라. 이레시아가 기억을 더듬으며 골목길 안으로 들어섰다.
+++++
어두운 골목길에 가려진 여자의 얼굴이 뒤늦게 눈에 들어왔다. 이레시아는 저도 모르게 알 것 같다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흐응..."
과연, 티파의 도시인가?
아티펙트와 광물, 그리고 미인이 많은 도시의 명성답게 프리실라라는 여자는 꽤나 미인이었다. 헝클어진 갈색 머리칼조차 그녀를 처연하고 안타깝게 만들어주고 있었으니까. 여자는 어지간히 분한 건지 주먹을 바르르 떨며 입술을 깨물었다.
"... 감사... 합니다."
"인사는 됐어. 이 아이가 시끄러운 소리에 예민해서 그런 거니까."
쥰은 고사리 같은 손으로 두 귀를 틀어막고 고개를 파묻고 있었다. 이레시아는 쥰을 가볍게 어르고는 넘어져 있는 여자아이를 살폈다. 넘어진 무릎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이레시아는 상처 위로 조심스레 손을 올렸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 위에 수학 공식 따위가 피어올랐다.
"Animatio(활기. 생명력)."
붉은 빛이 상처 위로 아른거리다가 사라졌다.
"와아..."
잠시 후, 여자아이가 눈을 반짝거리며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리고는 상처 하나 없는 무릎을 보며 아이가 소리쳤다.
"언니! 이것 봐, 상처가 다 나았어!"
"... 동생이었나?"
어딘가 닮은 것 같다더니. 어린 아이가 눈을 반짝였다.
"마법! 마법사님이세요?"
"아닌데, 마법사."
엄밀히 말하자면 그녀가 사용한 건 마법이 아니라 주술이지만, 모르는 이가 보면 그렇게 보일만도 했다. 마력을 운용하는 방법이 전혀 다르지만 멀리서 보면 언뜻 비슷해 보이는 일이니까.
물론 인간보다 월등히 뛰어난 회복력을 가진 그녀에게는 그다지 유용한 주술은 아니었다. 하지만 쥰을 비롯해 인간들의 상처에는 꽤나 유용한 주술이었다.
"아,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뭐라고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프리실라가 말끔히 나은 동생의 상처를 보며 연신 고개를 숙였다.
"됐어. 아까도 말했다시피 시끄러운 소리가 거슬려서 끼어든 일이니 그렇게 고개 숙일 필요 없어."
"아..."
프리실라가 뒤늦게 고개를 들었다. 한눈에 봐도 얼굴이 창백한 아이와 얼룩진 드레스가 눈에 들어왔다.
"늑대씨, 이만 가자."
볼 일은 끝났다는 듯 이레시아가 발걸음을 돌렸다. 그때 프리실라가 입술을 더듬거렸다.
"... 저, 저기 혹시... 쉴 곳을 찾고 계신가요?"
"그러한데."
골목길을 빠져나가려던 이레시아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저희 여관이 근처에 있어요! 거... 거기라도 괜찮으시다면 안내해드릴게요!"
여전히 축 늘어져 있는 쥰을 내려다 보던 이레시아가 시선을 내리깔았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이긴 한데. 어딘가 조금 기묘한 예감이 드는 건 기분 탓일까. 하지만 아픈 아이를 데리고 계속 헤매는 것 보다야...
"... 좋아. 안내를 부탁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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