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파의 메두사 (2)
006. 내가 성물 알레르기가 있어서.
프리실라가 안내한 여관은 낡았지만, 부지런히 관리해서인지 그럭저럭 나쁘지 않았다. 전망이 잘 보이는 큰 창문부터, 삐걱거리는 소리가 조금 나지만 깔끔한 침대까지.
아마 이 여관에서 가장 큰 방을 내어준 게 분명했다.
간단히 샤워를 맞힌 이레시아는 샤워 가운을 걸친 채 욕실에서 나왔다.
분명 몇 시간 전에도 샤워를 한 것 같은데. 몇 번을 하던 크게 상관은 없다만, 옷을 벗고 갈아입는 일은 귀찮은 일이었다.
그녀는 물기를 닦아내던 수건을 아무렇게나 바닥에 버려두고는 탁상에 놓인 와인을 잔에 가득 따라냈다. 그리고 그것을 단숨에 들이마셨다.
시큼한 포도 향이 입술을 적시며 목뒤로 넘어갔다. 뒷 맛이 살짝 떫은 것이 그다지 고급 와인은 아니었지만 마른 목을 축이기에는 충분했다.
이레시아는 다시금 와인잔을 가득 채운 뒤 습관처럼 붉은 파이프를 집어 들었다.
"Brevis(간략한). Lampas(등불)."
부싯돌이 부딪히듯이 파이프 담배 끝에 불이 붙었다.
그녀는 깊게 파이프 담배를 한 모금 빨아들이고는 창가로 다가갔다. 여전히 밖은 시끌벅적했다. 상인들 뿐만 아니라 관광객도 많이 방문하는 도시답게 사람들이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커튼 끝에 걸린 장식이 손끝에 걸렸다. 과연 보석의 도시답게 반짝이는 장신구들이 그들의 손이나 옷자락에서 빛을 바라고 있었다.
"후우..."
이내 내뱉어진 뿌연 연기가 안개처럼 창문을 가렸다. 붉은 눈동자 위에 저조한 기분이 내려앉았다. 그와 동시에 우드득! 소리를 내며 손에 잡힌 장식이 뜯겨 바닥에 나뒹굴었다.
"나쁘진 않은데..."
이런 하찮은 커튼의 장식들 조차 온통 아티펙트 효과를 가진 물건들 뿐이었다. 불운이나 악한 것을 좇는 힘부터, 정화나 여신의 작은 축복을 담은 성물들까지.
"... 쓸데없는 물건들이 너무 많네."
물론 이런 조무래기 장난감들로 그녀를 어찌하지는 못할 테지만, 불쾌한 기분이 드는 것까진 어쩔 수 없었다.
모조리 불 구덩이 속으로 처박아버리고 싶을 정도로. 붉은 눈에 서늘함이 번져 번뜩거렸다.
똑똑.
때마침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와."
눈살을 찌푸린 것과는 반대로 그녀의 입에서는 태연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생각보다 빨리 왔네. 안 그래도 혼자 옷을 갈아입을 생각에 까마득했는데.
"아가는 좀 어때?"
오랜만에 바깥 바람 쐬러 나온 건데, 아파서 어째. 이레시아가 안쓰러운 웃음을 흘리며 돌아섰다.
"아..."
"?"
그러나 늑대라고 생각했던 곳에는 낯선 이가 서 있었다.
"프리실라? 왜 당신이..."
"아... 저, 그, 그게..."
프리실라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이 새하얗게 질린 얼굴이었다. 무슨 일이냐고 물으려던 순간 그녀는 아차 싶었다.
"아 이런..."
이레시아는 제 눈가를 지긋이 눌렀다. 저도 모르게 예민해져서인가? 억눌러둔 힘이 조금 흘러나온 모양이었다.
플라티나의 인간들은 그녀의 힘에 기본적으로 훈련이 돼 있는 반면, 그렇지 못한 일반인들에게는 꽤나 강하게 작용하곤 했다.
설마 괴이인걸 들킨 건 아니겠지. 그럼 일이 시끄러워지는데...
조용히 힘을 갈무리한 이레시아가 다시 눈을 떴다. 여전히 프리실라는 얼어붙은 듯 그 자리에 못 박혀 서 있었다.
딱...!
넋이 나가버린 정신을 깨우듯 이레시아가 손가락을 부딪혀 마찰음을 냈다. 그러자 프리실라의 어깨가 움찔 떨리며 넋이 나가 있던 눈에 초점이 돌아온 게 보였다.
'뭐, 다행히 완전히 홀리진 않은 모양이네.'
이레시아가 짐짓 안도의 한숨을 흘렸다.
"문. 닫아줄래?"
"아, 앗?! 네!"
프리실라가 허둥지둥 문을 닫았다.
잠시 미친 걸까? 프리실라는 화끈거리는 얼굴을 푹 숙였다. 혹시나 불편한 것은 없는지 묻기 위해 찾아와 놓고 넋이 나가버리다니. 이래서 너울 모자를 쓰고 계셨던 걸까?
같은 여자지만, 맨얼굴을 마주한 순간 저도 모르게 숨이 멈춰버렸다. 당황함과 더불어 목뒤로 열이 올랐다. 맨얼굴도 얼굴이지만, 눈앞의 여자는 지금...
"저... 저기."
프리실라가 얼굴을 붉힌 채 앞을 훤히 드러낸 채인 그녀의 샤워 가운을 붙잡아 여미었다.
"감기... 드실 거예요. 이렇게 입고 계시면..."
"... 어차피 벗을 건데."
이레시아는 제 샤워 가운을 단단히 붙들어 맨 여자를 떨떠름하게 쳐다봤다. 늑대나 이 여자나 왜 다들 제 나체를 보면 가리지 못해 안달인지 모르겠다.
나름 이 얼굴과 몸매 하나는 자신 있는 무기인데 말이지.
"당신. 이름이?"
"프, 프리실라 오르테즈 입니다."
얼굴은 물론 이제는 귓불까지 새빨개진 프리실라가 기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프리실라 오르테즈라. 그러고 보니 아까 그 사내들도 이 여자를 그런 이름으로 불렀었지. 아무래도 어디선가 본 기시감이 가시질 않았다. 내가 그 사내들 중 한명을 어디서 봤더라?
이 여자와 한 곳에 지낸다면... 다시 만나게 되려나?
"이레시아 디벨론, 록산나."
"네?"
"당신 이름, 프리실라 오르테즈 라며. 이름을 물었으니 내 이름도 말해주는 게 예의 아닌가?"
"이레시아 디벨론... 록산나..."
프리실라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그러더니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안색이 창백해졌다. 이름과 성, 그리고 그 뒤에 붙는 이름은 분명 '라스트 네임'이었다.
왕의 측근이나 친인척, 또는 그만한 공을 세운 이들이 왕에게 직접 내려 받는 이름. 프리실라의 어깨가 달달 떨리기 시작했다. 그냥 귀족도 아닌, 고위 귀족을 이런 누추하기 짝이 없는 여관으로 안내하다니.
그녀의 당황한 얼굴을 읽어낸 이레시아는 모른 척 인사를 건넸다.
"일이 끝날 때까지 여기서 신세를 좀 질까 하는데, 괜찮나?"
"여, 여기는 너무 누추하지 않으신가요? 말씀만 하시면 다른 더 좋은 여관을 알아봐 드릴게요!"
확실히 조금 낡고 오래된 물건들이 많긴 하다만. 여기보다 더 좋은 곳은 이런 아티펙트가 더 많이 나뒹군다는 소리 아닌가?
"아니. 여기가 좋아. 이 이상 거추장스러운 건 질색이거든."
"아... 아 그러시면! 필요한 것이라면 뭐든 말씀해 주세요. 최대한 구해서 가져다드릴게요!"
필요한 것? 필요한 것보단야.
"그래? 그럼..."
눈 앞에서 치워줬으면 싶은 건 있는데 말이지.
듣던 중 반가운 소리라는 듯 미소가 떠올랐다.
"저 커튼 장식들 좀 치워줄래?"
"네? 아... 저건 장식이 아니라 아티펙트..."
프리실라가 당황한 얼굴로 바닥에 나뒹구는 커튼 장식을 쳐다봤다.
"내가 성물 알레르기가 있어서."
이레시아가 태연한 얼굴로 덧붙였다.
히아센이 있었다면, 그딴 알레르기가 어딨어! 라고 머리를 쥐어 뜯었겠지만. 다른 건 몰라도 저것만큼은 싫었다.
원하는 이가 나타나는 꿈을 꾸게 하는 아티펙트 만큼은...
+++++
티파의 도시 수입의 대부분은 광산에서 얻는 보석과 그것들을 가공해 만든 아티펙트, 그리고 그 모든 걸 뛰어넘는 수입원. 가뭄에 단비 내리듯 희박한 확률로 발견된다는 록하트였다.
일반 아티펙트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광물. 마력을 끝도 없이 들이부어도 부서지지 않는다는 광물이었다.
전설 속에서나 나오는 마왕을 물리쳤다는 용사의 검도 록하트를 가공해서 만들어졌다고 하니...
"원하는 이들이 억만금을 들고 줄을 서서 기다려도 손에 넣은 자들은 몇 없죠."
프리실라가 식탁 위에 조각 케이크를 올려두며 설명을 이었다. 그들은 어느새 1층의 식탁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앉아 있는 이는 이레시아 한 사람만이었지만. 그녀는 익숙하게 프리실라에게 시중을 들게 하고 있었다.
"내가 알기로 지금까지 발견된 록하트 원석은 고작 4개 뿐인 거로 아는데."
이레시아는 여유롭게 찻잔을 기울이며 그녀의 설명에 살을 덧붙였다. 분명 킹 하이스턴 왕가가 1개, 마탑의 주인이 1개, 오르셸로의 숲의 엘프가 1개.
그리고 마지막 록하트는 이곳, 영주 부인이 소유하고 있다고.
"네. 하지만 정확히 말씀 드리자면... 이제는 4개의 록하트 중 1개는 행방이 묘연하다고 할 수 있겠네요."
"그 신문 기사를 말하는 건가?"
이레시아의 질문에 프리실라는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티파의 도시. 영주 부인 테사, 의문의 사고사.]
[영주 부인의 록하트 행방은 어디에?!]
[파헤쳐졌다! 영주 부인의 묘지가! 여전히 록하트의 행방은 오리무중!]
[홀연히 사라진 영주 부인의 시체! 그 뒤를 잇는 이따른 실종 사건!!]
그녀는 플라티나로 날아드는 신문에 몇 달 전 대문짝만하게 실린 기사를 떠올렸다. 사치가 조금 과하다는 것 빼고는 여러 뭐로 사람은 괜찮은 여자였다. 어느 날, 마차 사고로 홀연히 비명횡사 했다는 것만 빼면...
"아."
그 순간 아까 전 스쳐 지나가듯 만났던 골목 왈패들의 얼굴이 다시 떠올랐다. 어디서 봤나 했더니, 그 중 한명이 사건의 목격자인 남자가 아닌가. 이것 참 반가운 우연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일이 지나고 몇 달 뒤였어요. 한 사제가 이곳 록하트 산맥에 '현자의 돌'이 있다고 한 게..."
신문 기사를 떠올리던 이레시아가 상념에서 고개를 들었다.
"현자의 돌?"
현자의 돌이라면 하찮은 돌멩이를 금으로 바꾸고 죽은 사람을 살릴 수도 있다는, 록하트보다도 더 희귀하고 진귀한 것이었다.
"네. 산맥에 잠들어 있는 현자의 돌을 찾는다면 그걸로 다른 광물을 록하트로 만들 수 있다고..."
"그자는 그런 정보를 어떻게 알고?"
이레시아의 질문에 프리실라는 그저 고개를 저었다.
"저가 광물을 진귀한 록하트로 바꿀 수 있다고 하자 다들 현자의 돌을 찾는 일에 몰두하기 시작했어요. 제 약혼자도..."
"... 현자의 돌을 찾다가 죽은 건가."
프리실라는 입술을 깨물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러하니 평소라면 위험해서 파고 들어가지 않을 곳까지 쑤셔댄 거겠지. 그러다가 광산 안의 메두사를 깨워서 이 사단이 일어난 걸까?
이레시아는 습관처럼 파이프 담배를 입에 물고 끝자락을 잘근잘근 씹어댔다.
"그 사제는 지금 어딨지?"
"이미 이 도시를 떠난 지 꽤 됐어요."
쯧. 이레시아가 짧게 혀를 찼다.
"불을 지펴놓고는 내뺀 건가..."
무슨 속셈인지는 모르겠지만 일개 사제가 현자의 돌에 대한 정보를 어디서 얻은 거지? 본의 아니게 어딘가 찝찝한 것의 꼬리를 잡은 것 같아 입안이 썼다. 이런 의뢰는 늘상 뒤끝이 좋지 않단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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