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파의 메두사 (18)
022. 꿈에서 나온 나랑 뭘 했어?
"누가 보면 목숨이 여러 개 되는 줄 알겠어."
저 지옥 속으로 알아서 기어들어 갈까 고민하는걸 보니까 말이야.
붉은 눈이 가늘게 좁혀졌다. 뭐든 도망칠 수 있을 때 도망치는 것이 좋다. 더 늦으면 돌이킬 수 없을 테니까. 그녀처럼.
"되지도 않는 고집 부릴 생각이면 나갈 길이나 찾아."
"어쩐지 기분이 좋지 않아 보이네."
이레시아는 대꾸도 없이 눈을 감아버렸다.
그의 말마따나 기분이 좋지 않은 건 사실이었으니까.
어찌됐던 의뢰에 대한 전반적인 계획은 이레시아의 머릿속에서 나오는 것이었고, 지금 보기 좋게 실패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다시 계획을 세워야 했다. 다른 아티펙트를 구하거나 그마저도 정 여의찮다면...
"... 그냥 얌전히 족쇄를 풀어주고 나한테 맡기는 게 어때?"
솔직히 말해서 광산 안의 메두사 따위 내가 손을 쓰면 금방인 것을.
독사의 독도, 메두사의 눈도 그녀에게는 아무런 소용이 없으니 그게 가장 효과적이고 빠른 방법이었다. 그러나 일이 결국 이 지경까지 온건 늑대라는 족쇄를 달고 있어서였다.
"당신이 인간이라고 나까지 인간들의 방법을 따르는 건 너무 비효율적이야."
"차라리 비효율적인 게 나아."
얼룩진 눈이 그녀를 내려다봤다. 어디로 날아가 버릴지 알 수 없는 여자를 풀어줄 수는 없었다.
어떤 머저리가 일족을 멸망시킨 단서를 가진 여자를 10년 만에 찾아놓고 쉽게 날려 보내려 할까?
"하아, 그럼 나보고 뭘 더 어쩌라고."
이레시아가 결국 머리를 짚으며 짜증 섞인 목소리를 내뱉었다. 이것도 안 된다, 저것도 안 된다.
발목은 욱신거리고, 마음에 들던 드레스는 걸레짝이 되고, 이딴 광산이나 헤매고 있는데 짜증이 안 나려야 안 날 수가 없었다.
그러자 이마 위로 커다란 손이 내려앉았다. 뭐냐는 표정으로 이레시아가 눈살을 찌푸렸다.
"... 열이 나는군."
이레시아는 다시금 황당하다는 낯빛을 띄었다.
이 남자가 지금 누가 누굴 걱정하는 거야. 혹여나 어두운 바닥에 숨어있는 독사 따위를 걱정해도 모자랄 판에...
어쩐지 할 말이 없어지는 기분이 들어 입술을 달싹이려는 순간, 우뚝. 늑대의 발걸음이 멈췄다. 조용히 입안에 있는 혀를 찼다.
저 앞쪽에서 번져오는 기척을 기민하게 읽은 늑대가 조용히 커다란 바위 뒤로 몸을 숨겼다. 그녀 역시 기척을 느낀 듯 입을 다물었다.
"그어어, 어어어..."
어둠 속에서 침을 질질 흘리며 메두사가 나타났다.
하여간 생각하기가 무섭게 나타나다니...
"혹여나 눈 마주치지 않게 조심해."
그녀가 작게 귀띔했다. 잔뜩 격앙되어 있는지 메두사의 머리에 있는 수십마리 뱀들이 허공을 향해 아가리를 벌리고 있었다.
"그극.... 거어어.."
메두사가 괴기한 소리를 흘리며 그들이 숨은 바위 쪽으로 몸을 틀었다. 턱에서 뚝뚝 흐르는 침과 뱀 같이 찢어진 동공을 가진 눈에서 눈물을 줄줄 흐르고 있었다.
"... 울고 있어?"
몇 시간 전, 이레시아와 똑같은 반응을 하며 늑대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아까도..."
이레시아의 눈이 낮게 가라앉았다. 본래 그녀가 알고 있는 메두사는 동족애가 강하지도, 눈물이 많다는 소리도 들어보지 못했다.
아니 오히려 동족애가 강한 쪽은 라미아 쪽이겠지. 그러면 왜...
"그거걱, 거거...어..."
메두사는 듣기에도 괴로운 소리를 계속 내더니 급기야 제 손으로 머리에서 꿈틀거리는 뱀들을 스스로 쥐어뜯기 시작했다.
으드득. 찌이익.
머리가 뜯겨 너덜거리는 몸통에서는 끊임없이 뱀의 머리가 다시 자라났다. 머리카락을 대신한 뱀들이 미친 듯이 비명을 지르며 메두사의 손을 물어뜯었다.
- 키에에엑...!!
그러자 메두사는 더욱 사납게 제 머리 위에서 꿈틀거리는 뱀의 머리를 잡아 뜯었다. 손가락이 떨어져 나가 바닥에 이리저리 나뒹굴었다. 비어버린 자리에서는 녹색의 체액과 함께 다시 손가락이 자라났다. 짙은 녹색을 띄는 산성 피가 바닥으로 뚝뚝 떨어져 바위를 녹였다.
메두사는 입에서 침을 질질 흘리며 그 짓을 몇번이고 반복했다. 징그럽고 역겨운 장면에 늑대의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도대체 언제쯤 저 미친 짓을 그만두려나 싶은 찰나.
"... 어, 딧어어어..."
한참을 그러던 메두사가 드디어 역겨운 울음소리 대신에 어눌한 인간의 말을 내뱉었다.
"어딧, 어... 어딨어... 어딨어! 어딨어! 어딨어! 어딨어! 어딨어!"
남성과 여성 그 중간의 목소리로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메두사는 웃음과 울음 그 중간의 사이에서 떠나가라 비명을 질렀다.
"어딨어!!!!!!!"
광산 안의 광물들이 쩌적 소리를 내며 갈라졌다. 늑대의 귀에서 멎었던 피가 다시 흘렀다.
"듣지 마."
입안의 생살을 씹어대며 고통을 참아내고 있던 그의 귓가에 두 손이 내려와 앉았다. 이레시아의 두 손이 그의 귀를 대신 틀어막아 주었다.
"거거걱... 그어, 어, 어..."
그러더니 이윽고 방전이 된 듯 움직임을 멈추었다. 뱀처럼 가늘게 찢어진 눈이 도로록 도로록 굴러가는 소리만 들렸다. 그러다...
"... 죽, 여줘."
"?!"
생각지도 못한 말에 이레시아의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
"... 죽여줘... 차라리 죽여! 죽여! 죽여! 죽여! 죽여! 죽여! 죽여! 죽여! 죽여! 죽여! 죽여! 죽여! 죽여! 죽여! 죽여! 죽여! 죽여! 죽여! 죽여! 죽여! 죽여! 죽여! 죽여!"
광산 안에 메두사의 단말마가 계속해서 이어졌다.
"... 죽여... 죽여..."
메두사의 눈에서는 눈물이 계속 떨어졌다.
"....... 카아일."
방금... 누구라고?
익숙한 이름에 늑대가 번뜩 고개를 들었다.
"카아일... 카일... 카이일!!!!!!!"
메두사는 이빨을 바득바득 갈며 그들이 숨어있는 바위를 지나쳐 더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늑대는 터질 것 같은 심장을 부여잡고 숨을 죽였다. 저벅거리는 발소리는 금세 어둠 속으로 다시 사라졌다. 기척이 온전히 사라진 것을 확인한 늑대가 입을 열었다.
"... 방금, 카일이라고 한 건가?"
“카일...”
그 남자 이름이 왜 또 여기서 나오는 거지? 그냥 시시껄렁한 불량배가 다가 아니었나?
하지만 분명 히아센에게 딱히 이상한 점은 전해 들은 게 없었다. 이레시아가 늑대의 가슴팍에 머리를 기대었다.
"지금 당장 이 징그러운 광산을 나가야 할 이유가 생겼네."
카일. 그 남자를 다시 만나봐야 했다.
+++++
그들이 광산을 빠져나왔을 때는 이미 점심 무렵이었다. 이대로는 사람들의 눈에 너무 띌 것이 분명하니 늑대가 아티펙트로 히아센을 소환했다. 그런데...
"뭐냐?"
늑대가 한심하다는 눈으로 히아센을 쳐다봤다.
이레시아가 입을 옷가지와 크라켄 구이 3개를 손에 든 히아센이 헐레벌떡 뛰어오느라 흘린 땀을 훔쳐냈다.
"하아, 하아! 뭐... 뭐가?"
안 그래도 광산이 있는 산까지 거리가 꽤 되는데, 쥰까지 안고 뛰느라 죽을 맛이었다.
"이레님~"
쥰이 활짝 웃으며 늑대의 다리에 달라붙었다. 고양이 머리띠를 하고 있는 모습이 귀여웠다. 여전히 그의 품에 들린 채 이레시아는 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잘 잤어, 아가?"
"아침 인사치고는 많이 늦은 것 같은데."
늑대가 지적했다.
"히아도 수고했어."
간단히 그것을 무시하며 이레시아가 드레스를 건네받았다.
"후아...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마님 옷은?"
"버렸어."
"왜?"
"독사들을 상대했더니 엉망이 돼버려서."
"도, 독사?!"
가쁜 숨을 몰아쉬던 히아센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메두사가 아니라 독사가 있었어?!"
"메두사는 항상 독사를 풀어서 주변을 경계하니까 있을 만도 하지. 숫자가 좀 많았다는 것만 빼면 좋았을 텐데."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옷이나 빨리 갈아입어."
늑대가 말머리를 끊고 나섰다. 그의 셔츠가 허벅지쯤에서 흔들려서 신경 쓰이기 짝이 없었다.
"갈아입혀 줘."
이레시아가 익숙하게 그에게 드레스를 들이밀었다. 늑대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이레시아가 고개를 슬며시 기울였다.
"뭐야. 이미 광산 안에서 훤히 다 봐놓고서 이제 와서 내외하는 거야?"
히아센의 어깨가 움찔거리는 게 보였다. 붉은 입술이 빙긋 호를 그렸다.
"당신을 안아주느라 나체가 됐는데, 이 정도도 해주지 않을 작정은 아니지?"
안아줘? 나체? 아까는 독사 때문이라며?
히아센의 동공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초점 없는 눈을 한 히아센은 반사적으로 쥰의 귀를 틀어막았다.
"내가 언제 해달라고 말했나?"
"없어도 이미 해버린걸?"
"그냥 그대로 둬도 난 상관없었어."
마치 성가신 걸 상대하는 어투로 그가 냉랭하게 말했다.
"흐응..."
이레시아가 입 안의 혀를 한번 굴리며 잠시 고민했다.
그냥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면 될 것을... 어쩜 내 늑대는 꼭 한번 말로는 말을 듣지 않을까.
"... 이렇게 취할 것만 취하고 모른 척 하는 거야?"
"취한 적 없어."
그러자 그녀가 다 알고 있다는 듯 늑대의 귓가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거짓말."
다음 순간, 이레시아의 목소리가 귀에 박히듯 선명하게 들이찼다.
"... 꿈에, 내가 나오지 않았어?"
늑대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몸이 좋지 않아 채 담아두지 못한 기운들이 그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지 그녀가 모를 리 없었다. 그저 아까는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묻지 않은 것이지.
이레시아의 얼굴에 달콤하고도 짙은 미소가 피어올랐다.
"꿈에서 나온 나랑 뭘 했어?"
귓속을 파고드는 농밀한 속삭임에 늑대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일부로 그러는 거야? 싫어 죽겠다는 그 얼굴. 왜? 나 같은 괴물이랑 몸을 섞는 게 그렇게나 싫어?'
'아니면, 나랑 해서 좋은 게... 싫은가?'
그녀가 진득하게 미소 지으며 속삭이던 말도 떠올랐다.
"... 잤나?"
얼룩진 눈의 온도가 영하로 훅 떨어졌다. 살기 어린 눈빛이 순식간에 목을 졸라 죽일 것만 같았다.
화났다...
그에게서 흘러나오는 기색에 목덜미가 오싹거릴 정도였다.
온전한 서큐버스였다면 그의 꿈속에서 정기를 받아먹었을 텐데, 안타깝게도 이레시아는 혼혈이었다.
배는 일절 부르지 않았고, 여전히 배고픔에 허덕이고 있었다.
그러나 이레시아는 어딘가 차오르는 만족감에 배부른 고양이 같은 얼굴로 그의 귓가에서 떨어졌다.
지금 이 반응 자체로도 그녀에겐 충분히 대답이 되었으니까.
"어디였어?"
"너..."
"침대? 아니면 설마 저 안에서?"
당장이라도 씹어 삼킬 것 같이 사나운 말투를 늑대가 억눌렀다. 두 눈이 혐오감과 살기로 뒤덮여 그 색이 혼탁했다.
그 눈이 오로지 그녀만 집요하게 쫓자, 우습게도 심장이 간질간질한 것이 기분이 좋아졌다. 어딘가 우월한 승리감까지 들었다.
아아. 이뻐라.
그녀가 숨이 막히도록 아름다운 얼굴로 진심으로 즐겁다는 듯 미소 지었다.
"변태."
그녀를 안아 든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러나 늑대는 단 한마디도 변명할 거리가 없다는 사실에 턱이 아프도록 이빨만 악물었다.
이레시아는 그런 그에게 다시 한번 드레스를 내밀었다.
"갈아입히면서 직접 확인해봐."
정말 꿈인지 아닌지. 사실 내심 궁금하고 불안하잖아?
악마가 그를 농락하며 웃어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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