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파의 메두사 (19)

023. 빚을 갚으러 왔어. 카일.

이레시아는 편편한 돌 위에 앉아 쏟아지는 햇살을 맞고 있었다. 한 손으로 턱을 괸 채 그녀는 문뜩 이렇게 한가롭게 햇빛 아래 있어 본 게 오랜만이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원래라면 햇빛은 질색이었을 텐데, 오늘은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

어쩌면 하루 반나절을 꼬박 광산 안을 헤매다가 나와서 그런 걸지도 모르고.

그나저나,

"날 새겠구나."

햇살 아래 나른하니 졸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레시아와 정확히 일곱 발자국 정도 떨어진 거리에서 늑대가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날씨가 따뜻한 대비 그의 눈은 냉랭하기 짝이 없었다.

뚫어지겠네...

"계속 그렇게 서 있을 셈이야?"

느른한 햇살 아래 상의를 탈의한 근육을 눈으로 그리며 따라내려 갔다. 이레시아가 고개를 기울였다.

"아직도 화났어?"

"..........."

"왜?"

그보다 더한 짓도 한 적 있으면서 새삼 꿈 이야기 한번 한 게 뭐라고.

"무슨 꿈을 꾼 건지는 몰라도, 꿈이면 다행인 거 아닌가?"

아님 제 욕망을 마주한 것을 들킨 것에 화가 났을지도 모르겠다. 어느 쪽이든, 이렇게 시간을 끌면 끌수록 저쪽에서 히아센이 더 이상한 생각을 할 텐데.

옷 하나 갈아입혀 달라는 게 이렇게 어려워서야 원.

벗으면 어련히 갈아입혀 주려나 싶어 결국 제 손으로 단추를 풀어냈다.

늑대의 눈매가 꿈틀거렸다. 벗어낸 사제복 안의 셔츠 단추도 모조리 풀어낸 이레시아가 눈을 들었다. 마주치는 시선 속에서 이거 보라는 듯이 셔츠 자락을 끌어내렸다.

"봐. 깨끗하지?"

나신에는 아무런 울혈도 잇자국도 남아있지 않았다. 방금전 상황이 정말 꿈이라는 듯. 그제서야 늑대는 그녀의 앞으로 다가와 천천히 시선을 훑어내렸다. 그녀의 말마따나 팔목과 발목의 상처 말고는 깨끗했다.

"이상하네. 왜 그렇게 화가 났어?"

"... 니가 꿈에 나오는 게 싫어."

"내가 꿈속에서 자기를 괴롭혔나?"

늑대는 대답하지 않았다.

꿈속에서 좋을 대로 그녀를 괴롭힌 건 늘 자신이었다. 그게 싫었다. 어쩌면 그게 진짜 자신의 욕망일지도 모르니까.

"뒤돌아."

명령조에 가까운 말임에도 그녀는 순순히 그가 시키는 대로 움직였다. 늑대를 화나게 하는 일은 꽤나 즐거운 일이지만 그 상태로 오래 두는 게 좋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수족을 화나게 하는 건 여러 뭐로 성가시고 좋지 않은 일이니까.

붉은 드레스는 마치 그녀만을 위해 제작된 것처럼 잘 어울렸다. 이레시아는 머리카락을 앞으로 넘기고 등 뒤의 단추를 채워주는 늑대를 보며 웃었다.

"그거 알아? 당신이 옷을 입혀줄 때마다 꼭 인형이 된 기분이야."

"그게 싫으면 네가 직접 입으면 될 일이야."

"싫다고는 안 했어. 단추 많이 달린 옷은 성가시거든."

그럴거면 애시당초 그런 말을 꺼내지를 말던가.

눈썹이 꿈틀거렸지만 늑대는 더 이상 토를 달지 않았다.

"... 카일이란 남자를 찾으러 갈 건가?"

"위치는?"

"히아센이 알고 있어."

"그래?"

붉은 눈이 보기 좋게 휘었다.

뭔지는 모르지만 그 남자가 숨기고 있는 것에서 구린 냄새가 나고 있었다. 그게 무엇인지 아직 알지 못하지만 벌써부터 찢어 죽이고 싶은 건 기분 탓인가.

"적어도 손목과 발목 정도는 받아내고 싶은데..."

이쪽도 광산에서 구른 값 정도는 정산 받아야 덜 억울하지 않을까. 두 눈알을 받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었다.

"손목은 이미 히아센이 하나 거덜 냈으니까 발목으로 만족해."

"이럴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내가 그자의 옷을 벗길걸 그랬네."

이레시아가 입맛을 다셨다. 무엇을 하던 히아센이 했던 짓보다 더 고통스럽게 해줄 자신이 있었다.

"나였다면 손목이 아니라, 손가락 마디마디를 하나씩 잘라 그자의 입에 쑤셔 넣어줬을 텐데..."

"뭐든. 제발 적당히 해."

상상만으로도 구역질 나는 고문법에 인상이 찌푸려졌다. 이레시아는 마지막 단추까지 채워진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악인에게 무슨 인권을 찾는단 말인가? 그런데...

그녀의 눈길이 무언가 찾는 듯 아래를 향했다.

"내 구두는?"

바닥을 내려다보던 이레시아가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점심의 햇살과 함께 잠시 둘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히아센 이 멍청이가...

늑대가 결국 머리를 짚고 한숨을 내뱉었다. 결국 히아센은 또 한 번 징징거리는 얼굴로 도시로 내려가야 했다.

+++++

불이 꺼진 방 안에는 남자의 끙끙 거리는 목소리가 가득했다. 피에 절은 오른손을 붕대로 감고 식은땀을 흘리고 있던 카일은 여느 때처럼 이어지는 악몽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의 꿈은 언제나 나뒹구는 마차 사고에서 부터 시작되었다.

한적한 숲속을 달리던 마차는 돌연히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땅이 흔들리면서 전복돼버리고 말았다. 젊은 영주 부인을 호위하던 카일 역시 그곳에 있었다.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건 그 혼자뿐이었다.

히이잉...

겨우 정신을 차린 눈에 보이는 건, 죽어가는 말의 소리와 전복된 마차에서 삐져나온 피에 물든 하얀 손. 괴기한 모양새로 꺾인 팔과 반파된 마차 안에서는 아무 소리 없이 피만 흥건히 흘러나오고 있었다.

한 도시의 번듯한 도시 경비원 단장이었다.

잘 나가는 인생이었는데. 속된 말로 탄탄대로 같은 인생이었는데. 돈도, 인망도, 명예까지 가진 인생이 한순간에 무너졌다.

'내가, 도대체 뭘 잘못 했길래?'

영주 부인의 호의를 제대로 하지 못한 죄로 그는 경비원 단장 자리를 내놓아야 했다. 그 많던 인맥들도 그가 단장의 자리에서 해임되자마자 거짓말처럼 떠나갔다.

모아 뒀던 돈은 술값과 노름판에 빠져 한순간에 흩어졌다. 친한 친구들조차 하나둘씩 떠나갔다.

'내가 뭘 잘못했어?'

구렁텅이에 빠진 그에게 한 사제가 찾아왔다.

'당신 이야기는 익히 들었어, 전 경비원 단장님.'

더 이상 술을 마실 돈조차 없던 그에게 사제는 술값을 대신 계산해주며 다가왔다.

'단장님에게 무슨 잘못이 있겠어. 당신은 그저 할 수 있는 일을 최선을 다해서 했을 뿐이지. 그저 단장님은 운이 없었을 뿐이야. 그 어떤 누구라도 그 상황에서 영주 마님을 구할 수 없었을 텐데 말이지.'

'그래. 나도 피해자야! 다들 그저 나한테 죄를 뒤집어씌우지 못해서 안달이 난 거라고!'

그래, 내가 뭘 잘못했어? 난 잘못한 게 없어.

카일은 억울하다는 듯이 소리쳤다.

'저 봐. 단장님은 잘못한 거 하나 없는데, 왜 당신 주변에 사람들은 자꾸만 떠나가지? 이상하지 않아? 누군가가 이 모든 일을 꾸민 게 아닐까? 당신을 시기한 누군가가 단장님을 괴롭히기 위해서 말이야.'

사제가 마치 악마 같이 속삭였다. 술에 취한 카일의 눈동자가 정신없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술집 안의 사람들 전부가 마치 저를 보며 키득키득거리며 비웃는 것 처럼 보였다.

'왜 이렇게 돼버렸지?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야 도대체...'

카일이 괴로운 듯 머리를 쥐어뜯었다. 그러자 사제가 그를 향해 몸을 기울였다.

'뭘 또 고민하고 있어.'

그리고 카일만이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네 인생은 처음부터 네가 다 말아먹은 거야. 이 등신 같은 인간아.'

사제의 얼굴을 가리고 있던 후드 안에서 입술이 찢어지게 웃었다. 카일이 순간 화가 치밀어올라 머리를 쥐어뜯던 손을 들어 주먹을 날리려 들었다. 그러나 고개를 들었을 때 사제는 없었다.

대신 회색의 피부를 가진 뱀의 눈을 가진 여자가 보였다.

'...... 카, 이이일...'

"아아아악...!!!"

침과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과 마주하는 순간 카일은 소리를 지르며 잠에서 깨어났다.

"헉... 헉. 빌어먹을..."

카일은 식은땀을 흘리며 침대 옆에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는 술병을 집어 들어 들이켰다. 집 안에서는 술 냄새와 상처에서 나는 고약한 고름 냄새가 진동을 했다.

술을 마시는 돈도 모자라는 판국에 이딴 상처, 소독한다고 독한 술을 들이붓기만 한 것이 화근이 된 모양이었다.

사제에게 받았던 돈도 진즉에 바닥이 나고, 일자리를 구하자니 손이 이래서 할 수 있는 일도 없었다. 손을 벌릴 친구들조차 이제는 카일에게 학을 떼버렸으니 이제는 정말 돈이 나올 곳이 없었다.

하여간 이 새끼들이나 저 새끼들이나.

도움 되는 것들이 하나 없었다. 아니, 오히려 다들 제가 경비 단장이었을 때 콩고물이나 주워 먹으려고 빌붙었던 거머리 같은 것들.

카일의 이빨이 바득바득 갈렸다.

내가 뭘 잘못했어. 도대체 내가 뭘 어쨌는데. 난 그저 운이 더럽게 없었을 뿐인데. 왜 다들 자신을 보면 그저 고개만 절레절레 저어대는지.

"시발!!"

카일은 욕지거리와 함께 빈 술병을 던져버렸다. 벽에 아무렇게나 부딪힌 술병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깨져 나뒹굴었다. 돈이 필요했다. 술을 마시고 여자를 끼고 놀려면 돈이 필요했다. 그는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일어나 서랍장을 뒤졌다.

먼지 말고는 아무것도 나오는 게 없었다. 정말 이제는 하나도 남은 것이 없는 모양이었다.

"아아악!!!"

카일이 화를 참지 못하고 서랍장을 뒤집어엎더니 발로 밟아댔다.

"도대체 내가 뭘!! 뭘!!! 뭘 잘못했어...!!!"

비명과 같이 소리를 지르며 서랍장을 산산조각낸 카일이 씩씩거리며 숨을 골랐다. 이미 맛이 가버린 것 같은 머릿속에서는 오로지 돈과 술, 그리고 여자 생각 뿐이었다. 뭐든 마시고, 뭐든 제 멋대로 거칠게 굴고만 싶었다.

"빌어먹을 사제 새끼... 일이 이딴 식으로 굴러갈 줄 알았다면 돈이나 더 뜯어 냈어야 했는데..."

난 분명 시키는 대로 했어.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야. 아무도 모르게 광산으로 여자들을 꼬셔내서 재미 좀 보고, 검붉은 광석이 있는 장소에 시체를 유기해라. 시키는 대로만 한다면 수고비는 섭섭지 않게 주겠다던 얼굴이 떠올랐다.

"시발. 나머지는 알아서 다 하겠다고 큰 소리 치더니..."

욕지꺼리가 끊기지 않았다. 속이 부글부글 끓어 화병으로 미쳐버릴 지경이었다. 머릿속이 혼란으로 빙빙 돌았다.

왜. 도대체 왜...

"어떻게 그 여자가 버젓이 살아서 돌아다니고 있느냔 말이야!!!"

그때,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히익?!"

놀란 카일이 겁을 집어먹고 숨을 삼켰다. 설마, 설마. 그때 그 샌님 같은 놈이 또 찾아온 것은 아니겠지?

카일은 눈알을 굴려 한쪽 벽에 놓인 쇠꼬챙이 따위를 들고 천천히 문으로 다가갔다. 거칠어진 숨소리를 애써 정리하며 그때의 그 새끼거든 바로 머리를 후려칠 생각으로 문을 벌컥 열었다.

"누구...!!"

그러나 문밖의 이는 전혀 생각지 못한 이가 서 있었다. 문밖의 손님은 여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다갈색 눈이 그를 향해 빙그레 웃었다.

"빚을 갚으러 왔어. 카일."

카일은 마치 악마를 본 것 같은 얼굴로 쇠꼬챙이를 떨어트렸다.

차마 그 샌님 때문인지, 아님 이제 술에 절을 대로 절어서 멍청하게 앞일 생각을 못했던 머리 때문인지는 몰라도, 경련을 일으키면서 꿈틀거리던 입꼬리가 바들바들 거리며 올라갔다.

"빌어먹을... 괴물 새끼..."

+++++

"어? 어디 갔어?!"

히아센이 당황한 얼굴로 텅 빈 집안을 뒤지기 시작했다.

벌써 내뺀 건가? 엉망이 된 집안을 둘러보던 이레시아의 표정이 차갑게 굳어졌다. 반대로 머릿 속은 바쁘게 굴러가기 시작했다.

"히아."

"부... 분명 어젯밤까지만 해도 있었어! 끙끙거리면서 침대에 누워있는 꼬락서니를 내가 확인했다니까?!"

혹여나 제게 불똥이 떨어질까 봐 히아센이 더듬거리며 변명했다. 그러나 이렇게 사라져버릴 거 라는 건 그녀 역시 예상 못한 일이었기에 그에게 화낼 생각은 없었다.

"워프로 가서 카일이 출입한 흔적이 있는지 알아봐."

시간이 없었다. 어젯밤까지 있었다면 분명 멀리 가지는 못했을 것이었다.

"아, 알았어!"

히아센이 고개를 끄덕이며 후다닥 빈 집을 뛰쳐나갔다.

"당신은 카일이 자주 가는 주점이나 유흥가를 뒤져봐. 나는 빈민가 쪽을 다시 확인해볼 테니까."

그는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가슴 위에 손을 얹어 그녀와 연결된 족쇄의 고리를 조금 느슨하게 풀었다. 보이지 않는 사슬의 길이가 늘어났다.

이것으로 두 사람의 거리가 조금 떨어져도 족쇄의 주술이 발동하지 않을 것이었다. 일정 거리 이상은 벗어날 수 없을 테지만.

"Ludus(창조). Monstrum(괴이한 것)."

늑대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흙으로 빗어낸 시녀 인형 하나를 소환했다. 표정 없는 인형이 바닥에서 불쑥 튀어나오더니 정교한 사람 모양을 갖췄다.

"쥰을 여관으로 안내해."

시녀 인형은 고개를 끄덕이며 쥰을 안아 들었다. 세 사람은 각자 흩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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