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자갈 1세계관

숲과 회오리바람, 그리고 친구

운명은 참 가혹한 족쇄이다.

오리지널 by 김자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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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 Unsplash


울창한 침엽수 숲 한복판. 녹음의 천장을 뚫고 날카롭게 벼려진 햇빛이 땅에 꽂힌다. 숲의 기운을 받아 옅은 푸른색으로 물든 광원이 어두운 숲 안을 밝혀 세상과 단절된 느낌을 주는 공간. 그 한복판에 서 있는 거대한 바위.

크레이드는 그 바위 꼭대기에서 가부좌를 튼 채 명상에 잠겨있는 듯했다.

바위 주위의 바닥에는 두 자루의 장검과 한 자루의 단검이 일정한 거리를 두고 삼각형을 그리며 꽂혀있었는데, 꼭 외부적 요인을 차단하려는 결계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에게는 그러한 마법적 소양이 전무했다. 다른 방법이야 얼마든지 있었지만 바람이 불 때마다 근처 바닥에 수북이 쌓인 낙엽이 날리고, 간혹 그의 뺨을 스치기도 하는 걸 보면 공간을 단절시키지 않았음은 확실한 듯 했다.

그렇다면 그의 주위는 완벽하게 개방된 공간이라는 의미가 된다. 몸담은 일의 특성상 또, 이 숲의 지리적 특성상, 지금 크레이드는 스스로를 위험에 노출시키고 있다는 뜻이 된다. 숲의 어둠을 틈타 사나운 정령이나, 마력에 과하게 노출되어 변형된 짐승들이 즐비한 이 숲에서 아무런 대비도 없이 명상이라니. 누군가가 그의 모습을 보았다면 죽고 싶어 안달난 놈이라는 평가를 내릴 법 했다.

다행스럽게도 크레이드는 그런 부류에는 속하지 않았다. 그는 되도록 오래 살고 싶은 사람이었으며, 지리적 특성을 간과한 것 또한 아니었다. 그는 이 위험한 공간에서도 내면의 평안을 찾을 수 있는 수행을 하고 있던 것뿐이었다.

본래 수행에는 위험이 따르는 것이다. 크레이드는 스스로에게 그렇게 변명했다.

그러나 숲은 고요했다. 정령들은 크레이드의 태생을 알아보고 적의를 거둔 지 오래였으며, 짐승들은 현명했기에 본능적으로 승산 없는 싸움을 피했다. 결과적으로, 이 숲에는 그의 상대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 역시 사실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무의미한 시간 낭비를 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의 검들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침묵했다. 다른 때였다면 달랐겠지만, 지금만큼은 주인의 평정을 깨서는 안 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숲의 수다 소리만이 잔잔하게 정적을 감싸안고 흘러가기를 몇 시간째, 크레이드의 눈이 천천히 떠졌다. 주변을 둘러보지는 않았으나 그는 침입자가 어디서부터 다가오는지를 확실히 느끼고 있었다. 어지간한 실력자라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의 완벽한 은신이었으나, 그가 단련한 시간과 그것에서부터 비롯된 경험이 아주 흐릿하게나마 꼬리를 잡아챈 것이다.

망부석처럼 굳어져 있던 몸이 움직였다. 평평하지만 좁은 바위 위에서 크레이드는 맨땅에 앉아있는 것처럼 부드럽게 움직였다. 한쪽 다리는 아래로 내리고 다른 다리는 여전히 가부좌를 튼 상태에서 상체만 옆으로 틀어 무성한 나무 사이의 한 점을 향해 활을 쏘는 자세를 취했다. 그러자 크레이드의 팔에 감긴 붕대의 틈을 비집고 기분 나쁜 기운을 띤 자색 촉수들이 뻗어 나왔다. 흡사 광물의 광택을 띤 그것들은 액체처럼 움직여 크레이드의 팔을 타고 올랐다. 팔목부터 손목, 손등, 손가락을 지나 허공을 타고 올라가 서로 휘감겨서 기묘한 형태의 활과 화살의 형태를 이루었다.

몇 초 뒤, 크레이드의 형형한 금안이 흐릿한 연기를 잡아낸 순간, 그가 허상의 시위를 놓았고 두 발의 화살은 공기를 가르고 날아가며 합쳐지더니 한 점에 정확하게 명중했다.

연기가 , 하는 소리와 함께 흩어지고 바닥에 살점들이 후두둑 떨어졌다.

활은 다시 촉수의 형태로 돌아와 붕대 속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그와 동시에 크레이드는 바닥에 꽂혀있던 붉은 색의 검, 귀화(鬼火)를 향해 손을 뻗었다. 검은 바닥에 꽂힌 검집에서 날렵하게 뽑혀 공중으로 떠오르더니 쐐액, 소리를 내며 주인을 찌를 듯이 날아갔다. 그것을 보지도 않고 잡아챈 크레이드가 이번엔 제 옆으로 팔을 뿌리듯 검을 휘둘렀다.

챙!

“인사 한번 살벌하네~”

허공에 나타난 세 개의 손가락이 그의 검날을 붙잡았다. 검고 날카로운 손톱이 인상적인, 다부진 남자의 손가락은 그 끝부분에 일렁이던 연기가 흩어지며 숨겨져 있던 모습을 드러내었다.


머리 반쪽이 원형으로 뚫리고, 검날에 목이 반쯤 베인 남자는 허공을 발판 삼아 서 있었다.

똑바로 눈을 마주치며 남자가 입을 열었다.

“긴장 좀 풀지 그러냐. 설마 겁을 먹은 건 아닐 테고. 누군지 확인할 생각도 없이 일단 죽이려고 드는 건 좀 너무하지 않냐? 평범한 사람이었으면 아까 그 활 한 방에 저승행이었다고.”

공격을 당한 남자가 여유롭게 입꼬리를 끌어올리자 남아있는 반쪽 얼굴에 도드라진 푸른색 핏줄이 씰룩거렸다. 상처 부위에서는 벌써 혈관과 피부조직이 자라나며 뚫려버린 자리를 메꾸고 있었다. 크레이드는 기가 찬다는 표정을 숨기지 않고 귀화를 거두어 제 자리를 지키고 있던 검집을 향해 던졌다. 검은 부드럽게 검집에 들어갔고, ‘탁’,하는 소리를 내며 맞물린 뒤 침묵했다.

다시 가부좌를 틀고 앉은 크레이드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러니까 누가 기척 다 흘리면서 오라더냐? 너를 특정할 수 있는 정보는 다 지워놓고서 살기만 흘려보내면 내가 아닌 누구라도 그렇게 했을걸.”

“어쩔 수 없다는 거 알잖아? 내가 가진 기운의 토대는 살기라고. 그 살기에서 나를 읽어낼 수 있어야지. 우리가 하루 이틀 본 사이도 아니고 10년도 넘었는데 이런 것도 일일이 알려줘야 되냐.”

남자가 손가락을 비비며 핀잔을 주었다. 검날에 닿았던 부분이 검게 그을려 있었기 때문이었는데, 상처는 감쪽같이 사라졌고 남아있던 그을음과 죽은 피부조직이 벗겨져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근데 되게 서운하네? 분명 아까 터졌을 때 눈치챘을 텐데. 목까지 베려고 한 건 순전히 네 화풀이지?”

남자는 장난기 넘치는 말투로 징징대며 바위 가장자리에 엉덩이를 걸쳤다. 크레이드는 대놓고 불쾌감을 표출했다. 그의 등장으로 인하여 오늘 계획한 모든 것들이 수포가 되었기 때문이다.

주인의 기분 변화를 누구보다 빠르게 감지한 단검이 스스로를 감싼 붕대를 풀어 바위 주변을 둥글게 감쌌다. 그곳에 씌어진, 읽을 수 없을 정도로 빼곡하게 휘갈겨진 문자들이 남자를 위협하듯 서슬 퍼런빛을 뿜었다.

“범귀(鬼), 그만.”

빛이 점점 강해지는 것을 본 크레이드가 손을 들었다. 동시에, 붕대의 빛이 사그라들었다. 그러나 범귀가 아직 바위 주변을 파도가 흐르듯 느릿하고 천천히 도는 것을 본 크레이드는 한숨을 내쉬었다.

‘여전히 신용이 없구만, 이 녀석은.’

크레이드는 제 옆의 남자를 흘겨보았다. 남자는 제 손톱을 내려다보기도 하고, 회복된 머리를 긁적이기도 하면서 딴청을 피우고 있었다. 방금 크레이드가 제 목숨을 부지해 준 것을 아는 건지, 모르는 건지.

아니, 알고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조금의 위협도 되지 않았기에 상관 하지 않을 뿐이었다. 남자의 목숨은 이 세계에 존재할 생명의 수만큼이나, 아니, 어쩌면 그 이상으로 무수하게 많을 테니까.

이 이상의 소란을 원치 않았던 크레이드는 남자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짜증을 내었다.

“지아. 용건이 있으면 빨리 말하지 그래. 범귀가 인내심이 좋다고는 해도 이 이상 무례한 짓을 하면 가만있지 않을 텐데.”

“난 상관없는데?”

“나는 상관있어. 그 뒤처리를 내가 다 해야 하잖아. 네 몸 전체의 살덩이가 여기에 흩뿌려지면 이 숲이 다 썩어 문드러져도 모자랄 텐데, 그 책임은 누가 지라고.”

“에잉, 쩨쩨하긴. 주인이나 사역마나 안 좋은 것만 쏙 빼닮아가지고.”

얼굴을 찌푸린 지아가 꿍얼거리며 반쯤 드러누웠던 몸을 일으켰다. 뚱한 표정으로 범귀를 바라본 그가 검지와 중지를 붙여 세우더니 붕대를 향해 무심하게 휘둘렀다. 그러자 붕대가 누군가에게 꽉 잡힌 것처럼 우그러지더니 범귀의 몸체와 함께 바닥에 처박혔다. 벗어나려는 몸부림은 볼품없는 발악에 지나지 않았다. 누르는 것의 정체는 알 수 없었으나, 크레이드는 지아가 주박술의 일종을 사용한 것을 알아차렸다. 갑작스러운 상황 전개와 증폭된 불쾌감에 크레이드는 오만상을 찌뿌리며 지아에게 외쳤다.

“어이! 저거 안 풀어?!”

“싫은데. 난 순전히 친구 안부가 걱정되어서 와본 것뿐이란 말이야. 근데 저놈은 들어먹을 생각도 안 하고 내쫓으려고 별짓 다 할 거란 말이지?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나도 알고, 너도 알고, 저기 꽂혀있는 둘도 아는 사실인데, 내가 그렇게 바보로 보이냐, 넌?”

지아의 비아냥에 두통이 몰려와 크레이드는 머리를 틀어쥐었다. 사상 최고의 마법사이자 사상 최악의 괴물인 이 도마뱀 녀석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할 때까지 이 자리에서 벗어나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그 목적이란 걱정이라는 핑계로 포장된 참견 내지 설교일 것이 분명했다.

가장 혼자이고 싶은 순간에, 가장 도움이 안 되는 간섭은 극도의 혐오감을 불러오기 마련이다. 크레이드 역시 사람이었기에, 별반 다르지 않았다. 성가시고, 짜증이 나고, 죽여버리고 싶을 정도로(지아에게는 한 대 맞은 것보다 별것 아닌 일이기에 하는 생각이다.) 화가 났다.

그것을 모를 리 없는 지아가 범귀를 땅에 내리찍은 채 그냥 두고서 크레이드 쪽으로 상체를 돌렸다. 여전히 머리를 틀어쥔 채 고개를 숙이고 있는 친구를 보며, 식인귀라 칭해지는 남자는 연민의 한숨을 내쉬었다.

“진정해라, 좀. 나도 이러고 싶진 않았거든? 근데 뻘짓도 적당히 해야 넘어가지.”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지아에게는 별 상관이 없었지만.

크레이드의 마음의 소리는 지아에게 당장 이 자리에서 꺼져달라며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 귀가 따가워질 정도로 말이다. 마음에도 귀가 있을 수 있다면 이것보다 정확한 표현이 없었을 것이다.

“너 대체 여기서 뭐 하냐?”

이젠 한심함을 두른 목소리가 크레이드의 골을 때렸다. 안 그래도 욱씬거리던 것이 이젠 징을 치듯 쾅쾅거려 뇌와 두개골 사이의 빈 공간이 진동하는 것 같았다. 이미 다 알고 있는 주제에 굳이 당사자의 입에서 사실을 내뱉으라고 강요하는 저 도마뱀의 간사한 혀를 뽑아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그것 역시 지아의 목을 날리는 것만큼이나 무의미한 일이라는 것을 크레이드는 누구보다 잘 알았기에 실행에 옮기지는 않았다. 뽑아내봤자 제 손과 옷만 더러워질 뿐, 저놈의 혀는 무슨 식물이라도 되는 양 순식간에 자라나서 개소리를 나불댈 게 뻔했다.

“말해주면 순순히 꺼져 줄 거냐?”

“말 좀 곱게 써라. 친구한테 ‘꺼져 줄 거냐?’,가 뭐냐? 그리고 내가 촛불이냐? 꺼지게.”

“헛소리 그만해라. 비천(悲釧)한테 한 발 더 쏴재끼라고 하고 싶은 거 겨우 참고 있으니까.”

“아이고, 흉흉하기도 해라. 무섭다, 무서워.”

이게 진짜. 크레이드가 입술을 짓씹고 겨우 참아낸 한마디였다. 그마저도 지아는 이미 읽어냈다. 그럼에도 변함은 없었다. 크레이드만 성가심과, 짜증과, 부글거리는 속과 더불어 입술이 찢어진 상처를 얻게 되었다.

사실, 이 상황을 빠르게 해결하는 방법은 간단했다. 지아가 원하는 답을 들려주면 되는 것이다. 그럼 그는 만족한 채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그렇기에, 크레이드는 더욱 입을 다물었다. 지금까지 필사적으로 부정하고, 변명으로 덧씌우고 있던 것을 드러내자니 자존심이 삐그덕거리며 비명을 질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다른 방법이 없음 또한, 그는 잘 알고 있었다. 다른 생명들보다 기회와 시간이 압도적으로 풍족한 이 끔찍한 괴물은, 분명 시간이 얼마나 지나든 제 목적이 이뤄질 때까지 기다릴 테니까.

제 머리카락을 한참 괴롭히던 손을 떼어내고, 크레이드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다시 처음의 자세로 돌아와서, 아직 옅은 분노가 남았으나 꽤 진정된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수행 중이다. 보면 모르냐.”

결국 그의 입은 알량한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쓸데없는 거짓을 뱉었고, 지아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내가 아니라 네가 바보네. 머리만 하얗게 센 게 아니라 뇌도 같이 표백됐냐?”

크레이드의 감긴 눈이 꿈틀했으나, 그뿐이었다. 그는 더 이상 입을 열지도 않았고, 움직이지도 않았다. 그래서 지아는 다른 수를 쓰기로 했다. 바위에서 내려와 뒷짐을 지고 그 주위를 휘적거리며 돌면서, 제 오랜 친구 대신 그의 속내를 풀어주기로 한 것이다.

“여기 네 상대가 될 만한 짐승은 없어. 귀중한 정령사의 혈통을 공격하는 멍청한 정령도 세상에 존재하지 않아. 넌 그냥 오기를 부리고 있을 뿐이잖아. 박차고 나올 때는 언제고, 막상 정말 떠나자니 걱정돼서 발은 안 떨어지는데, 그렇다고 다시 돌아가기는 쪽팔리고, 몇몇 놈들 얼굴 다시 보기도 싫으니, 무슨 일이 있으면 당장 뛰어가서 도와줄 수는 있게 지켜보고 있기로 한 거잖아?”

지아가 발을 옮길 때마다 낙엽이 사락거리며 흩어졌다. 제 발치를 내려다보며 사실을 추측인 양 늘어놓은 지아가 말을 이으며 걸음을 멈췄다.

“사람도 안 오고, 적당한 거리에, 네가 네 자신한테 한 변명에도 딱 들어맞는 장소가 이 숲이니까.”

크레이드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 미동도 없었다. 그러나 그의 심장은 엄청난 기세로 뛰고 있었다. 그 소리에서 지아는 많은 것을 읽어낼 수 있었다. 불쾌함, 수치심, 짜증, 혐오, 분노.

‘긍정적인 감정이라고는 하나도 없군.’

그를 올려다보고서 지아가 눈을 가늘게 떴다. 저 모든 감정을 제공한 원인에 자신이 끼어있다는 것을 알기에 이 이상 무어라 설교를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답답함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던지라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제 친구에게 바늘을 한 번 박아볼 참이었다. 그럼 흠칫거리기라도 하겠지, 싶어서.

“너, 내가 밉냐?”


상황은 정확히 지아의 예상대로 흘러갔다.

크레이드가 고개를 돌려 희번덕거리는 눈으로 지아를 무섭게 노려보았다. 항상 지아가 무의식적으로 두르고 다니는 것과는 다른, 확실한 목적을 가지고 대상을 인식한 살기가 담긴 눈. 과거 큰 까마귀라는 별명으로 불렸던 세월이 무색하지 않은, 날카롭고 오싹해지는 시선이었다. 아무래도 지아의 말은 바늘이 아니라 비수가 되어 그에게 타격을 준 모양이었다.

하지만 지아는 두려움에 떨지도, 코웃음을 치지도 않았다. 이젠 연민이 짙게 깔린 얼굴로 제 오랜 친구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가 다시 한번 물었다.

“내가 밉냐고.”

크레이드가 질문으로 답했다.

“…그걸 꼭 말로 할 필요가 있냐?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너한테?”

지아가 대답했다.

“읽는 거랑 듣는 건 다르단다, 꼬맹아.”

“닥쳐. 한 번만 더 지껄이면 찢어버린다.”

지아의 태연한 대답에 크레이드가 으르렁거렸다.

“그러시던지. 표출은 스트레스 해소에 좋은 방법이니까.”

결국 지아는 태연자약한 대답으로 크레이드의 이성의 끈을 끊어냈고, 최악의 상황을 불러일으키고야 말았다. 분노는 억누르기만 해선 해결되지 않는다. 누르면 누를수록 쌓이고 부풀어서, 터져버렸을 때 그냥 두었을 때보다 더 큰 피해를 낳게 되니까.

크레이드가 바위에서 뛰어내려서 나머지 한 자루, 가룡(加龍)을 뽑아 들었다. 세 자루 검 중에서 가장 긴 길이를 자랑하는 청록빛 도신(刀身)이 검은 검집에서 뽑혀 나오는 순간 망나니의 그것처럼 검날의 끄트머리가 언월도의 형태로 갈라져 거대하게 변모했다.

“그 입 닥치라고, 했지!”

대상을 정확하게 겨냥한 크레이드가 사선으로 지아의 몸을 올려베었다. 오렌지색 후드 자락이 깨끗하게 잘린 동시에 지아의 발치 주변을 둥글게 감싸고 칼바람이 몰아쳤다. 그것도 잠시, 그대로 솟아오른 검기가 거센 회오리바람이 되어 지아를 감쌌다.

대기가 비명을 질렀고, 바람의 사정거리에 있는 것들은 종류를 가리지 않고 가루가 되어 바람을 타고 위로, 위로 올라갔다. 지아의 옷자락도 예외 없이 회오리바람의 반도 올라가지 못해서 티끌이 되어 흩어져버렸다.

자신이 불러낸 국소적 재앙 앞에서, 그 자세 그대로 멈춰선 채, 크레이드는 어깨로 숨을 몰아쉬었다. 회오리바람 안에서 무참히 찢기고 있을 친구를 저주하는 말을 속으로 퍼부으며, 아직 그의 형체가 보이기라도 하는 것처럼 한 점을 노려보았다.

제길, 제기랄! 다 네가 자초한 일이야. 다 네가 자초한 일이라고. 난 참으려고 했어. 기어코 끄집어낸 건 너야. 넌 나한테 이럴 자격도, 찾아올 면목도 없어. 없다고. 네가 그렇게 좋아하던 촌구석에 평생 처박혀있지, 왜 걸어 나와서. 인간 가죽을 뒤집어써도 괴물은 괴물인 거야. 죽어도 죽어도 너는 다시 살아나니까, 그 애들도 그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기라도 한 거냐? 너무 죽다 보니 그러지 못한다는 간단한 사실도 잊어버린 거냐고. 결국 돌아버린 거냐, 이 개자식아!’

입을 꾹 다문 채, 목에 핏대를 세우며 크레이드가 속으로 악을 질렀다.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스스로 가늠하지 못할 정도로 흥분한 상태였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소란은 오래 가지 못했다. 그의 뇌리에 벼락처럼 내리꽂힌 잠잠한 목소리 때문이었다.


“기대에 부응하지 못해 유감이지만, 난 놀라울 정도로 정상이야.”

조금 전까지 맹렬하게 휘몰아치던 바람이 손가락 튕기는 소리와 함께 사라졌다. 우수수 떨어지는 나뭇가지와 무수한 먼지들 사이에서 생채기 하나 없는 지아가 베이기 전 모습 그대로 나타났다. 그 거짓말 같은 등장에 크레이드는 하마터면 주저앉을 뻔한 몸을 겨우 붙들었다. 지아를 잘 알았기 때문에 그나마 이 정도로 끝난 것이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분명 심장마비가 와서 쓰러졌을 거다. 그렇잖은가. 크게 자란 침엽수가 울창한 숲과 단단한 바위를 가볍게 깎아내는 수준의 위력을 가진 회오리바람에 휩쓸렸는데, 사지 멀쩡하게, 그것도 상처 하나 없이 사람이 걸어 나왔으니.

이 모든 것이 가능했던 것은 지아가 그 악명 높은 식인귀 종족이기 때문이었다. 초인적인 재생 능력, 타고난 마력량과 오랜 시간 동안 갈고닦은 실력. 평소의 크레이드였다면, 그와 견줄 수 있는 생물이 이 세상에 남아있는 지조차 미지수인 괴물 중의 괴물에게 고작 이런 참격이 통할 리 없다는 것을 기억해 냈을 것이다.

그런 실력을 갖췄음에도 지아가 자신의 옷자락이 잘리게 허용한 것은, 나름의 배려였다. 타격감이 없었다면 분이 조금이라도 사그라들기는커녕, 더 폭발해서 숲이 다 날아갈 때까지 날뛰었을 테니까.

“에이, 아끼는 옷인데 아깝게 됐네.”

실밥 튀어나온 곳 하나 없이 깔끔하게 잘려 나간 옷의 단면을 들었다가 놓으며 푸념을 뱉은 지아는, 멍한 눈을 하고서 팔을 아래로 늘어뜨린 크레이드의 손에서 검을 받아 들었다. 빼앗은 것이었으나 주인이 손에 힘을 줄 생각도 하지 않았기에 받아 들었다고 하는 것이 더 어울리는 표현이었다.

지아는 날이 땅을 향하게 검을 들고서 코등이를 잠시 응시했다. 그러자 ‘팡!’,하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가룡의 거대한 검신이 산산조각 나며 평범한 장검의 형태로 돌아왔다.

‘던지면 알아서 들어가려나. 내가 주인이 아니라서 그냥 바닥에 떨어질 것 같은데.’

직전에 칼에 베이고, 소규모 자연재해에 휩싸였다가 빠져나온 직후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태연한 사고로 지아가 어처구니없는 고민을 하고 있을 때였다.

“…왜?”

힘아리 없는 신음에 지아가 눈동자를 굴렸다. 흐리게 질린 금안이 금방이라도 깨질 것처럼 요동치고, 날카롭게 올라간 눈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지아는 그 모습을 외면했다. 그의 군청색 수정체에 괴로운 인간의 상이 맺혔다. 조금의 일렁임도 없이 선명하게. 하지만 비친 남자의 몸은 조금만 건드려도 무너질 것처럼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지아가 대답하지 않자, 크레이드는 다시 물었다. 조금 커졌을 뿐, 쇠판을 긁는 듯한 너덜거리는 목소리는 그대로였다. 아니, 오히려 더 심해졌다.

“…왜, 그 때 와 주지 않았던 건데…?”

동요의 원인은 분명, 설익은 채 쌓아둔 괴로움이리라고, 지아는 어렵지 않게 짐작했다. 제대로 영글지 못하고 결국 수확되지 못한 그런 부류의 감정들은, 마음의 심층이라는 바닥에 하나하나 떨어져 터져버린다. 그 얼룩은 평생 남아서, 아리고 쓰린 상처를 만들어내지. 주변에 튀어서 더 크게 번지기도 하고.

‘저 소리, 참 많이도 들었지.’

지아가 생각했다. 오랜 세월 살아오면서 그가 만났던 무수한 인연 중 대부분은 저 한 문장으로 귀결되는 경우가 많았다.

‘왜.’

‘어째서.’

‘너는 왜 거기 없었느냐.’

‘너는 왜 와 주지 않았느냐.’

그런 부류의 말들.

지겨움이 그득그득 묻어있는 한숨을 내쉰 지아가 크레이드에게 향한 시선은 이젠 연민마저 사라져있었다. 흡사 마네킹에게 말을 거는 기분이라고, 크레이드는 생각했다. 그러나 앞에 있는 것은 분명 살아있는 생명이었다. 사람이었다. 종족은 다를지라도, 그 종족이 심지어 냉혹하고 잔혹하기 그지 없다고 소문이 난 식인귀라고 할지라도, 크레이드가 아는 지아는, 감정이 넘쳐흐르는, 언제나 유쾌하게 웃음 지으면서도, 타인의 슬픔에 공감하고, 화가 날 땐 화를 내기도 하는, 참으로 ‘인간적인’ 사람이었다.

과거의 기억에 매달리며, 크레이드는 한 발, 한 발 다리를 움직였다. 비척거리며 다가와 천천히 앞으로 손을 뻗는 친구를, 지아는 막지 않았다. 그 손이 자신의 멱살을 잡고, 옷깃을 잡아올리고, 그 머리가 제 쇄골에 닿았을 때도 가만히 있었다. 정말 가만히.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않았고,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지 않았다. 그런 지아를 흔들며 크레이드가 중얼거리듯, 흐느끼듯 다시 입을 열었다.

“왜…, 어째서…, 왜, 그렇게 강하면서, 대체 왜…!!”

한 마디씩 뱉을 때마다 목소리가 커지며 더 형편없이 갈라졌고, 동시에 흔드는 힘도 강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지아의 몸이 휘청거리기까지 했다. 하지만 크레이드는 멈추지 않았고, 지아도 막지 않았다. 크레이드는 이젠 비명에 가까울 정도로 처절하게 소리 지르며 연신 ‘왜’,라는 말을 반복하고 있었다. 그러길 얼마나 지났을까, 이제 한계에 다다랐는지 크레이드가 고개를 들고 지아를 노려보았다. 원망과 배신감으로 가득 찬 눈동자와 무심한 눈동자가 서로 맞부딪혔다. 그러나 결코 섞이지는 못했다.

지아는 크레이드의 마음을 전부 읽어낼 수 있었다. 예전 같았으면 당장에라도 끌어안고, 도닥여주고, 얼마든지 위로해 주었겠지만, 또한 원한다면 사과의 말이라도 들려주었겠지만, 이번엔 그러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비슷한 소리를 너무 많이 들었기에 이런 절규에는 무감각해진 것도 있었거니와, 친구라는 이름을 들먹이며 제 원망은 서슴없이 쏟아부으면서도, 정작 원망의 대상이 된 친구가 어떨지에 대한 것은 하나도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슬슬 질려버렸기 때문이었다.

지아에게 있어, 이 순간만큼은 그들 중 한 명일 뿐인 크레이드는 여느 사람과 같이 제 욕구에만 갈급하여 여전히 대답을 갈구하고 있었다. 대답 한번, 동요 한번 없는 그의 모습에서 크레이드는 세상이 무너지는 괴리감을 다시 한 번 느껴야 했다.

그 날 이미 한 번 느꼈던 감각. 머리가 하얗게 새어버릴 정도로 끔찍했던 순간이 다시금 그에게 도래했다.

“왜! 그 때 와 주지 않았냐고, 왜!!

그래서 목이 찢어져도 상관 없다는 듯이 호소했다. 절규했다. 그 날, 모습을 보이지 않은 지아에게 그 이유를 듣고 싶었다.

“네가 왔었다면, 네가 막아줬었더라면, 그랬다면 전부 괜찮을 수 있었어. 아무 문제 없었을 거라고! 다들 예전처럼 다 같이 모여서, 함께…, 그렇게…!!!”

“아닐 거라고 생각하는데, 나는.”

말꼬리를 잘라먹고, 지아가 성가시다는 듯한 말투로 끼어들었다.

“…뭐라고?”

바람 앞에 놓인 촛불처럼 위태롭게 일렁이는 목소리. 절망에 짓눌려 금방이라도 박살 날 것처럼 불안한 모습을 한 남자. 기관이 자랑하는 사천왕도 결국 인간인 것이다.

‘뭐, 그것도 이젠 다 옛날 일이 됐지만.’

머리를 긁적이던 지아가 크레이드의 손을 떼어냈다.

“넌 내가 무슨 전지전능한 신이라도 되는 줄 아냐? 미안한데, 오히려 그 반대거든. 그리고 내가 그 전장에 있었다고 한들 상황이 드라마틱하게 달라지진 않았을 거야. 피해는 조금 줄었을 수야 있었겠지. 하지만 그뿐. 결과는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았을 거라고.”

크레이드가 주먹을 그러쥐었다. 힘이 잔뜩 들어갔는지 아까와는 다른 느낌으로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그걸 네가 어떻게 확신해!”

“그럼 너는 어떻게 확신하는데?”

제대로 정곡을 찔린 크레이드가 희미하게 입을 뻐끔거렸다. 무어라 반박할 말을 찾았지만, 혀는 움직이지 않았다. 지아는 비어있는 손으로 뒷목을 움켜쥐고 고개를 까딱거리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너, 다른 사람들한테도 그 말 하고 다녔다더라? 대답은 하나같이 나랑 비슷했다고도 들었는데. 질리지도 않냐?”

순간 크레이드의 뇌리를 무수한 목소리들이 스쳐 지나갔다. 지아의 말대로, 그 날 이후, 크레이드는 그 전장에 없었던, 정확히는 와 주지 않았던, 도움이 되었을 것이 분명했던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지금처럼 원망과 배신감이 가득 담긴 울분을 토해냈었다. 사죄를 하는 사람도 있었고, 침묵을 지키는 사람도 있었고, 되려 경멸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그중 누구도 크레이드가 원하는 대답을 들려주지는 않았다.

그러나 지아는 그 대답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오늘 그를 찾아온 것이었다. 친구 된 도리로서, 눈앞의 남자가 더 이상 헛짓거리를 하고 다니지 않도록, 친절하게 들려주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이었다.

“넌 그냥 남에게 탓을 돌리고 싶었던 것뿐이잖아. 현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어서. 그 녀석들의 빈자리가 너무나도 커서.”

크레이드가 주먹을 들어 우악스럽게 두 귀를 틀어막았다. 하지만 지아의 목소리는 너무나도 선명하게, 또 아프게 고막을 찔렀다.

“그래서 다 미워하고 싶었겠지. 그 전장에서 무력했었던 자신도 싫었고, 지금까지의 노력이 부정당하는 것만 같았고, 결정적인 순간에 도움을 주지 못했던 스스로가 한심해서, 죄책감에 미쳐버릴 것 같아서, 차라리 바깥으로 화살을 돌리는 게 낫다 싶었을 거야. 이해해. 나도 그런 적 있었거든. 너도 잘 알고 있겠지만 말이야.”

그만하라고 외치고 싶었다. 목소리는 여전히 나오지 않았다.

“근데, 그런다고 엎어진 물이 다시 컵에 담기진 않아.”

지긋지긋했다.

누가 몰라서 이러는가. 필사적으로 부정하고 있었는데, 굳이 그걸 자각시키려고 찾아온 친구의 친절함에 넌덜머리가 났다.

붙잡았던 사람들 중에서, 원망을 쏟아냈던 사람들 중에서 잘못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다들 피해자였다.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지아의 말대로였다. 크레이드는, 자신의 평온이 더욱 중요한 사람이었고, 죽기 전에 이런 아픔을 다시 겪었다는 사실이, 다시 견뎌내야 한다는 미래가 증오스러울 정도로 싫어서 도망치려고 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이젠 끝나버렸다. 그 대신 전부 술술 늘어놓아 준 잔인한 친구 덕분에.

몸에 힘이 탁 풀렸다. 저항하고 싶은 생각도 더는 들지 않았다.

그렇다고 순순히 넘어가고 싶지도 않았다. 채 아물지도 않은 가슴을 난도질해 놓고 후련한 얼굴을 하고 있는 눈앞의 괴물에게 무언가 흠집이라도 남기고 싶었다. 자신만큼은 아니더라도 괴로워했으면 했다.

“…그럼 나도 하나만 묻자.”

“뭔데.”

쭉 내려가 있던 시선을 들어 올린 크레이드가 지아를 노려보았다.

“그래서, 왜 안 온 건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네가. 한 번 설득해 볼 생각도 없이, 얼굴 한 번 보지도 않고 초윤을 그렇게 보낸 건데.”

지아는 말이 없었다. 노린 대로 일이 흘러가는 느낌에 크레이드는 굳어있던 혀가 빠르게 풀리는 것을 느꼈다.

“초윤이라면, 분명 그 애라면, 네가 나타나서 말 한마디 했어도 망설였을 거야. 그런 식으로 우리를 떠나지 않았을 거라고. 세상을 다 뒤져도 찾을 수 없을 친구라면서? 영혼도 줄 수 있는 절친이라면서. 그건 단지 허울뿐인 말이었던 거냐?”

그가 아예 당당히 고개를 치켜올렸다. 한 방 제대로 먹였다 싶어 의기양양한 기분마저 들었다. 분명, 밋밋한 낯이 속 시원하게 일그러졌을 거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크레이드의 시선을 가득 메운 것은 위협적으로 뻗어오는 커다란 손바닥이었다.


최상위 포식자가 뿜어내는 살기란 굉장한 것이다. 평범한 위협과는 하등 비교가 되지 않는다. 사지의 말단부터 피가 차갑게 식어가면서 급속도로 몸이 굳어버리는 감각. 꼭 가위에 들린 것처럼 말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지금 크레이드를 엄습한 위압감과 공포는 실시간으로 일어나고 있으며 직접적으로 생명에 위협을 가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당장이라도 숨이 멎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아무리 죽음에 익숙하고, 수많은 전장을 헤치고 살아남은 전사라고 하더라도 이 정도의 살기를 이겨내는 것은 쉽지 않았다. 두려움은, 생물에게 내재되어 있는 원초적인 위기 감지 능력이기도 하니까.

공기가 진동하며 어깨를 짓누르고 금방이라도 땅에 처박힐 것 같으면서도, 현실감이 사라질 것처럼 몽롱해져서 붕 떠오르는 기분이 든다. 눈앞의 손바닥은 느긋하게 다가오며 그의 숨통을 서서히 조여왔다.

곧 크레이드는 호흡이 거칠어지고, 정신이 뚝 끊길 지경까지 몰렸다. 아슬하게 버티고는 있었으나, 결국 시야가 완전히 지아의 손바닥에 잠식당하자 저절로 눈이 질끈 감겼다.

‘함부로 놀린 입에 명줄이 달아나게 생겼구나.’

괜한 욕심과 심술에 방종하게 행동하여 결국 최악의 결과에 이르게 되었음을 직감한 크레이드는 뒤늦은 후회와 반성을 되뇌었다. 목이 베어질까, 머리가 잡혀 터질까, 그것도 아니라면 가볍게 잡아들려서 어딘가에 내리찍혀 죽게 될까.

주마등처럼 과거의 추억들이 스쳐 지나갔다. 그는 떠오르는 장면 하나하나에서 지아와 자신, 그리고 다른 동료들과 나누었던 대화들에 집중했다. 순간순간 스쳐 가는 추억에서 그들의 말과 행동은, 무엇 하나 애정이 묻어 있지 않은 것이 없었고, 우정이 서려 있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 친구이지 않았던 순간도 없었다.

그제야 크레이드는 생각했다. 어쩌면, 허울뿐인 말을 늘어놓았던 것은 지아가 아닌 자신이 아니었을까 하고.

알고 있었으면서 오기를 부렸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의 무력함을, 동료의 빈 자리를. 그 날의 일은 어차피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결국 우리들은 그 빌어먹을 운명이라는 주박의 포로였음을.


부드러운 손길이 머리를 감쌌다. 반사적으로 눈이 번쩍 뜨였다. 신체 부위가 터지면서 나는 물컹한 소리, 형용할 수 없는 고통, 죽음의 싸늘한 기운. 그 무엇과도 다른 따스한 감각이 느껴져 어안이 벙벙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지아는 눈꼬리에 힘을 풀고서 오랜 친구이자, (지아의 기준으로) 가여운 어린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뭘 그렇게 겁을 먹어. 내가 뭐, 너 한 대 치기라도 할까 봐?”

“….”

침묵은 곧 긍정이. 푹, 한숨을 내쉰 지아는 거둔 손을 주머니에 욱여넣었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까마득할 정도로 어린놈한테 그런 짓, 이제는 안 해. 접었어. 어른스럽지 못하다고 어머니한테 혼났거든.”

누가 들으면 헛웃음이라도 가볍게 터뜨릴 이유였지만 아직 몸의 마비가 풀리지 않은 크레이드는 그럴 수 없었다. 그런 그를 가만둔 채로, 지아는 몸을 돌렸다.

“그럼, 난 간다. 청승도 적당히 떨어.”

돌아보지 않은 채 손을 휘적이며 지아가 인사를 건넸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크레이드가 화들짝 놀라며 소리쳤다. 아직 그는 답을 듣지 못했다.

“잠, 깐 기다려! 나 아직 답 못 들었어! 대체 왜 그랬던 건데!”

방금 죽음의 공포를 양껏 맛보았음에도 포기를 모르는 자였다. 그러나, 지금이 아니면 들을 수 없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기에 망설일 틈도 없었다.

사박거리는 발소리가 멈췄다. 여전히 돌아볼 생각은 없었보였지만, 또한 친절하기도 했던 남자는 친구의 호기심을 충족시켜 주기로 한 모양이었다.

“아직 화났으니까.”

둘 사이를 산들바람이 가로지르고 나서도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결국 지아가 고개를 돌렸다. 건조한 적안에는 어렴풋이, 그러나 강렬한 분노가 새겨져 있었다.

“전부터 궁금했던 건데, 대체 너네는 날 뭐라고 생각하는 거냐? 그런 엄청난 일을 한순간에 잊어버리고 다시 친구, 친구하고 허울 좋게 웃을 줄 알았어? 그것뿐만이 아니지. 결국 그 녀석은 약속을 지키지 않았어. 다시 한번 날 배신했다고.”

더 물을 것이 있느냐는 눈빛. 그 눈빛을 마주하고서도 질문을 꺼낼 수 있는 자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크레이드 역시 그러했다. 그렇기 때문에, 지아가 다시 뒤를 돌아 왔던 방향으로 걸어갈 때에도 더는 잡을 수 없었다.


숲 그림자 속으로 사라지기 직전, 귀신이 입을 열었다.

“말려 봤지만 소용없었어.”

크레이드가 서둘러 시선을 향했을 땐, 그곳에는 이미 아무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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