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L]동백꽃 내음
1차 HL 자캐 페어 : ㅊㅇ님 무료 리퀘스트 샘플
한낮의 청명한 하늘에 사이렌 소리가 높이 울려 퍼졌다. 동백의 예민한 귀가 쫑긋거리며 소음을 예민하게 잡아냈다. 이 나라의 대표가 습격당했다는 중대한 경보였다. 드문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물밀듯이 밀려오는 불안감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 어느 누가 나라가 위험에 처한 상황에서 평온하게 있을 수 있을까.
동백은 하던 뜨개질을 멈추고 흔들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녀의 움직임에 따라 털실이 나풀나풀 의자 위에 내려앉았고, 수정하다 만 뜨갯감이 시무룩하게 그 위에 자리를 잡았다. 동백은 곧 창가로 쪼르르 다가가 밖의 상황을 살폈다.
“...어?”
생각보다 아무 일도 없었다. 아니, 정확히는 아무 일도 없는 게 아니었지만. 늘상 있는 일이라는 듯 바깥의 풍경은 평소와 다름없었으나 딱 한 가지 다른 점이 눈에 들어왔다. 누군가 길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상처투성이의 검은 제복 차림을 한 남성.
‘저 제복은...’
분명 국가 소속 특수 경호원들 중 1급의 계급장을 단 사람들만 입을 수 있는 색의 제복과 흰 완장이었다. 그런 사람이 다친 모습으로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었다. 상황이 좋지 않아 보였다. 그런데 왜 길가에 지나가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거지? 누가 좀 도와줘야...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기 전 몸이 먼저 움직였다. 어느새 동백은 가게 문을 열고 밖으로 뛰쳐나가고 있었다.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바깥에 나가 쓰러진 남자에게 다가갔다. ─젊은 남성. 그리고 창문 너머로 보고 예상했던 것보다 상처가 꽤 심각했다.
“일단... 안으로 옮기자.”
다쳐서 정신을 잃은 사람을 밖에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 동백은 그에게 다가가 가느다란 팔 다리로 남자의 팔을 어깨에 두르고 자신에게 몸을 기대게 했다.
그리고 끙끙대며─거의 남자가 질질 끌려가는 수준이었다─뜨개방 안으로 들어갔다. 조금은 낡은 듯한 갈색 나무 문의 쇠경첩이 끼익거리는 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고, 곧 다시 닫혔다. 고요한 정오의 길거리에는 이제 누군가가 남긴 자잘한 핏자국만이 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경보는 다시 울리지 않았다.
동백은 남성을 뜨개방 안쪽 구석에 위치한 침대에 눕히고는 상태를 꼼꼼히 살폈다. 조심스레 제복을 젖히고 보니 자상이 심했다. 한숨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참고 화장실에 가 대야에 물을 받아왔고, 곧 이어 상처를 닦기 시작했다.
어느새 그녀의 옆에는 붕대와 피 묻은 수건, 약재가 든 상자 따위가 널브러져 있었다. 간호하는 동안에도 남자는 깨어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 해가 조금 기울었고, 오후가 되었다.
*
갑작스레 눈이 번쩍 떠졌다. 낯선 공간에 와 있어서 본능적으로 몸이 알아챈 것일까. 반사적으로 감각을 일으켜 주변을 살폈다. 적은 없었다. 여긴 어디지?
“...”
몸에 낯설고 답답한 감각이 느껴졌다. 그러나 그것이 나쁘지는 않았다. 시선을 내려보니 상체에 붕대가 감겨 있었다. 그리고 누군가 치료해준 듯한 흔적까지. 요한은 천천히 몸을 침대에서 일으켰다.
늦은 오후의 햇살이 소박한 자신이 있는 공간을 가득히 채웠다. 따사롭고 평화로운 광경이었다. 그러한 풍경의 한가운데 누군가 있었다. 창문가에 놓인 따듯한 나무색의 흔들의자. 쫑긋 위로 올라간 두 귀와 푹신해 보이는 긴 꼬리. 고양잇과 종족으로 보이는 소녀가 구급상자를 품에 안고 의자에 앉아 있었다.
새근새근 숨소리를 내며 작은 어깨가 오르내린다. 붉은빛이 섞인 흰 털이 무척 부드러워 보였다. 그녀는 구급상자가 소중한 것이라도 되는 것마냥 꼭 안은 채 곤히 잠들어 있었다.
늦은 햇살이 작은 소녀의 머리 위로 내려앉았다. 그건 마음이 무척이나 평온해지는 명화의 한 장면 같은 모습이었다. 요한은 그녀임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자신을 치료하고 이 아늑한 방에 초대한 이가 바로 저 아이였다.
잠에서 깨지 않도록 소리 없이 침대에서 내려왔다. 얇은 이불 자락을 곱게 개어 정리해놓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마침 흔들의자 옆 오래된 책상에 놓인 종이 뭉치와 펜이 보였다. 요한은 그곳으로 조심스럽게 다가가 펜을 집어 들었다.
- 당신께 고맙습니다. 은혜는 꼭 보답할게. 다음에 다시 만나자.
고운 글씨체가 종이 위에 검은 흔적을 남겼다. 남자는 잠든 소녀를 흘긋 바라보고는 펜대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조용한 발걸음으로 뜨개방을 나섰다. 피 묻은 붕대와 밖에 나와 있는 약병들만이 다친 누군가가 이곳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리고 있었다. 색색거리는 조용한 숨소리가 한낮을 채웠다.
*
시간이 쏜살같이 흘렀다. 벌써 한 달이 지났다. 동백은 해와 달이 수십 번이 지도록 누군가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 몸 상태는 괜찮을까. 또 다치지는 않았을까. 걱정이 되는 건 당연지사였다. 그렇게 편지 한 장만을 달랑 남기고 사라졌는데 그 누가 걱정하지 않을 수 있을까. 국군 경호원인 것 같던데, 그 말은 즉 그가 특수 경찰이라는 뜻이었다. 어디서 어떻게 또 다칠지 몰랐다.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을 이렇게 걱정하는 게 말이 안 된다는 것을 알았지만, 이상하게 동백은 이름도 모르는 그에게 자꾸만 마음이 갔다.
딸랑─
가게 문에 매달아 둔 종이 울렸다. 손님인가. 동백은 조금 높은 책상에 걸터 앉아 발을 동당거리던 것을 멈추고 바닥에 사뿐히 착지했다.
“앗, 어서 오세요...!”
“안녕.”
바람 냄새가 났다. 산뜻한 풀 내음과 기분 좋은 계절의 향이 덧대어진 상냥한 냄새. 한 달 전의 그 남자였다. 동백의 눈이 크게 뜨이며 뜨개방 안으로 들어오는 요한을 향했다. 저도 모르는 사이 귀가 쫑긋거리고 꼬리가 살랑였다.
“당신은...!”
“다시 만나자고 했잖아? 아가씨. 그때 날 치료해준 게 당신 맞지?”
대답을 듣지 않아도 요한은 그녀가 바로 그 존재임을 알았지만, 부러 물어보았다.
“이건 답례. 선물이야.”
“이게 뭐예요? 와아.”
그가 내민 손에는 귀여운 동물 인형과 꽃다발이 한 아름 안겨있었다. 붉은 털이 섞인 흰 털의 고양이 인형과 겨울의 동백꽃을 연상시키는 붉고 노란 술을 가진 꽃들이 가득했다. 동백은 기쁜 기색으로 그것들을 받았다.
“꼬마 아가씨를 닮은 것들로 준비해봤는데.”
“감사합니... 엑, 꼬마요...?”
“꼬마 맞지. 몇 살인데?”
“몇 살인지도 모르면서 꼬마라고 부르신 거예요?”
동백은 툴툴대며 말하다가 조그맣게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직 성년이 되지 않았어요.”
“그것 봐.”
“그러는 당신은요?! 저랑 나이대도 크게 차이 안 나 보이는데...!”
요한이 그 말에 씨익 웃으며 동백의 머리를 짓궂게 헝클였다. 동백의 꼬리가 그에 맞춰 양옆으로 크게 살랑였다.
“글쎄. 너보단 많아.”
“이익...”
“그보다, 계속 이렇게 문 앞에 서 있을 거야?”
“아, 아... 미안해요. 안으로 들어오세요.”
동백이 흐트러진 머리를 정리하며 끄응, 앓는 소리를 냈다. 그래도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의 손길이 기분 좋기도 했다. ...이런 생각, 남이나 마찬가지인 사람한테 들어도 되는 걸까. 동백은 인형과 꽃다발을 창가에 얹어 놓고는 뒤를 돌아 요한을 바라봤다.
요한은 제 집 마냥 뜨개방을 돌아다니다가 제 옆에 놓인 흔들의자를 보고는 그에 다가와 풀썩 앉아버렸다. 끼익, 의자가 삐걱이며 앞뒤로 잔잔하게 흔들거렸다. 그러고보니 비슷한 어두운 계열 색의 옷이라 몰랐는데, 오늘의 그는 제복이 아닌 사복 차림이었다. 그가 한들한들한 태도로 물었다.
“이름이 뭐야?”
“네?”
“이름. 우리 통성명도 안 했잖아.”
요한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앉은 채 동백 쪽을 쳐다봤다. 동백은 그 모습에 괜히 심장이 두근거림을 느끼면서 대답했다.
“아... 동백이에요.”
“예쁜 이름이네. 나는 요한이야.”
“요한... 요한이라고 불러도 돼요?”
그러자 요한이 픽 웃고는 가까이 오라는 듯 손을 까닥였다. 동백은 홀린 듯이 그에게로 다가갔고, 곧이어 애써 정리한 머리가 다시 흩어지고 말았다. 그의 앉은키가 동백의 키와 엇비슷해서 그녀가 고개를 숙일 필요도 없이 일어난 일이었다. 부드럽게 머리를 헝클이는 손길에 괜히 기분이 나른해졌다. 동백은 눈을 가늘게 뜨며 요한을 뾰루퉁한 표정으로 응시했다.
“내가 당신보다 나이가 많을 텐데, 그렇게 이름으로 막 불러도 되는 거야~?”
“겉으로 보기엔 저랑 얼마 차이 안 나 보인다구요. 진짜로 몇 살이신데요?”
동백이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리자 평소 인상 때문인지 완벽하게 새침한 태도가 완성되었다. 그러나 요한은 그녀가 화나지 않았다는 걸 알았다. 왠지 모르게 알 수 있었다. 그는 가벼운 태도로 입을 열었다.
“그건 나도 잘 몰라─. 내가 나이를 천천히 먹는 종족이어서 말이야.”
그 말은 들은 동백이 갑자기 장난기가 발동했는지, 빙긋 웃고는 고개를 내려 요한과 시선을 맞추었다. 시선이 마주쳤다. 얼굴이 가까웠다. 그러나 그녀는 가까운 거리를 의식하지 못했는지 여전히 싱글벙글한 표정이었고, 가슴이 뛰고 목덜미가 붉어진 쪽은 오히려 요한이었다.
“흐응. 그럼 아저씨라고 불러줘요?”
“...꼬마 아가씨 원하는 대로.”
“헤헤.”
동백이 활짝 웃었다. 이제 막 피어난 꽃 같이 화려하고 수줍은 그 웃음은 너무나 밝은 세계의 것이어서, 요한은 저도 모르게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게 되었다. 순수한 미소였다. ...요한은 헛기침하며 자리에서 일어났고 동백이 그런 그를 반사적으로 쳐다보았다.
“근데 아저씨는 경호원이에요? 나랏님 경호원. 지난번에 보니까 제복 입고 있던데.”
“그래.”
“아저씨 얘기 좀 해주세요. 궁금해요.”
“내 얘기? 별로 재미 없을 텐데...”
요한이 털어놓은 이야기는 이러했다. 방대한 마력 보유자인 그는 꽤 높은 1계급의 경호원이었고, 그렇기에 한 나라의 대표를 지키는 유일무이한 존재였다. 한 달 전, 권력다툼의 일환으로 각 대표들이 모여 열린 일명 ‘싸움 회의’ 일정에 참석 중이던 와중 벌어진 습격으로 인해 요한은 큰 부상을 입었다.
다행히 그가 온몸으로 지켜내 피신시킨 대표는 무사했으나 정작 본인은 습격 장소에서 빠져나오다 정신을 잃고 그 길가에 쓰러져있었던 거라고.
“아저씨, 대단한 사람이었구나...”
“그으럼. 1급 경호원은 현재 이 나라에 내가 유일해.”
“높은 계급... 그렇구나. 좋겠다...”
갑자기 시무룩해져 풀이 죽은 동백의 모습을 보고 이상함을 느낀 요한이 그녀의 손을 잡아다 침대 위에 앉혔다. 자신도 바로 옆에 앉고는 동백의 표정을 살피며 허둥지둥 말을 건다.
“왜, 왜 그래?”
“아뇨, 그냥... 저와는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인 것 같아서요. 아저씨가.”
“...”
자신과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 그건 요한도 동백을 처음 봤을 때 느꼈던 감상이었다. 그러나 자신의 것은 그녀가 말한 것과는 아주 많이 달랐다. 요한은 동백의 웃음을 처음 봤던 순간 느꼈다. 밝고 순수한 세계에 사는 것 같은 이 아이와 자신은 사는 세계가 다르다고. 순백을 물들이면 안 된다고. 세상이 경고하고 있었다. 태양이 사랑한 아이였다.
“너는...”
“...”
“...네 이야기도 내게 들려주지 않을래?”
“네? 저요?”
동백이 깜짝 놀라 제 곁에 앉은 요한을 바라봤다. 요한은 진중한 눈빛으로 동백의 붉은 눈동자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네가 궁금해.”
“...아.”
처음이었다. 누군가가 자신을 궁금하다고 해준 것은. ‘동백’이라는 사람에 대해 알고 싶어 한 것은. 낮은 계급에다 고아로 자란 그녀에게 관심을 가지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아무도 그녀를 궁금해하지 않았다. 오히려 낮게 업신여겼다. 유일한 빛이었던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는 세상에 홀로 남겨졌더랬다. 그런데 이 남자는 왜, 나에게 이렇게...
아랫입술을 꾸욱 깨물었다. 가슴이 턱, 막힌 듯 무언가 답답했다. 동백은 심호흡을 한 번 하고는 요한과 얼굴을 마주했다. 그러자 요한이 자연스럽게 그녀의 두 손을 잡아주었다. 따스한 체온이 서로 맞닿았다. 이제, 네 이야기를 들을 준비가 되었다. 우연히 시작된 두 인연이 싹을 맺고 꽃을 틔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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