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못된, 혹은 잘못되지 않은 만남

벨라-크로우 유니버스 조각글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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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미쳤구나, 내가.

눈 앞에 떠다니는 18세기 복장의 백인 남자를 보며 벨라는 생각했다. 하긴, 이리도 오래 살았으니 미치지 않은 게 이상하지.

"그쪽이 벨라지?" 남자는 여전히 허공에 떠 있는 상태로 벨라에게 물었다.

뭐야, 내 이름을 어떻게 알지?

"나도 너와 비슷한 사람이니까."

진짜로 독심술을 하나? 아니면 FBI 프로파일러처럼 표정을 읽는 건가? 고민하던 찰나에 남자가 말을 이었다.

"너만큼은 아니지만 나도 오래 살았어. 난 미국의 탄생과 함께 이런 삶을 얻었거든."

그래 보이긴 했다. 복장이 딱 독립전쟁 시기의 미국 복장이었으니까.

"용건은?"

하지만 귀찮은 건 딱 질색이었기 때문에, 벨라는 부디 지금 제 앞에 떠 있는 저 남자가 제게 부탁이나 제안을 하지는 않기를 바랐다. 부질없는 바람이었지만. 남자는 해맑게 씩 웃으며 말했다.

"나랑 같이 돌아다니자."

아, 역시 그런 건가. 어째서 부유한 백인 남자들이란 나이를 먹어도 이리 한결같은 건지. 벨라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남자를 초점 없이 쳐다보았다.

"그런 거 아냐." 남자가 얼굴을 살짝 찡그리며 어색하게 웃었다. "난 그저 네게 더 넓은 세상을 보여주고 싶어. 너도 이 세상을 사랑했으면 좋겠어."

"...내가 여기서 어떻게 '더 넓은 세상'을 볼 수 있다는 거지?" 벨라가 무슨 소리인 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남자를 바라보자, 남자는 떠다니는 것을 그만두고 바닥에 착륙해 목을 가다듬었다.

"내가 너와 '비슷하다'고 했었지? 나는 너처럼 불멸의 몸이지만 내겐 또 다른 능력이 있어."

남자는 말을 마친 후 별안간 허리의 칼집에서 칼을 꺼내 허공에 그었다. 그러자 놀랍게도, 허공이 찢어졌다.

"나는 우주와 우주 사이를 이동할 수 있어. 더해서 '마법'도 조금 쓸 수 있고."

벨라는 잠시 어디서부터 놀라야 하는지를 생각했다. 평행우주가 있다는 것과 남자가 그 사이를 이동할 수 있다는 것, 뭐가 더 놀라운가. 아무래도 평행우주가 존재한다는 게 더 놀라운 것 같다.

"평행우주가 진짜로 있다고?"

"그래. 이 세계에서는 양자적으로 존재하고 있어."

무슨 소리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존재한다는 이야기겠지.

"내가 다른 우주로 가면 무슨 이득이 네게 있지?" 하지만 벨라는 여전히 회의적이었다. 이득에 대한 욕구 없이 행동하는 인간은 세상에 없으니까.

"글쎄... 즐거움?" 남자는 능글맞게 받아치고는 어깨를 으쓱했다. 제 수를 쉬이 보여주지는 않겠다는 건가.

"그렇다면 내게는?"

"더 넓은 세상을 구경하고 세계에 대한 관점이 달라질 수 있지. 아니면 더 나은 우주를 찾아 정착하든가."

일리가 없는 말은 아니었다. 남자에겐 여태까지는 별다른 악의의나 수상한 낌새가 느껴지지 않았고, 이 세계에 완전히 질린 벨라에게는 좋은 기회일 수 있었다. 아직 저 남자의 꿍꿍이는 모르겠지만, 제게 해를 가할 사람은 아니어 보였다.

"넌 이름이 뭐야?" 일단은 판단을 보류하고 남자에 대해 할 수 있는 한 더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하며 벨라는 물었다.

"이제야 물어보네." 남자는 다시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크로우(Crow)라고 불러줘."

"그게 네 첫 이름(First name)인가?"

"그건 아니지만, 마지막 이름(Last name)은 더더욱 아니지. 지금은 그 이름을 쓰고 있어."

까마귀라... 비유적인 이름인가. 남자, 크로우는 벨라의 생각을 읽었는지 옅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걱정 마, 널 해치지 않겠다고 맹세할게, 내 부모님의 이름과, 내 첫 이름을 걸고."

크로우는 한쪽 팔을 뒤로 한 채 허리를 조금 굽히며 벨라에게 손을 건넸다. 수천 년을 살아온 벨라가 느끼기엔 그 맹세가 거짓말 같지 않았다. 아니, 사실 그는 크로우에게 처음부터 은근한 동지애를 느끼고 있었다. 처음 만나자마자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사람은 자신과 같은 시간을 살아온 사람이라는 것을. 다만 모른척했던 것뿐.

"저와 함께하시겠습니까, 무슈(Monsieur) 벨라?"

벨라는 잠깐 망설였지만, 이내 마음을 굳히고는 손을 내밀며 답했다.

"물론이죠, 무슈 크로우 (Bien sûr, Monsieur Crow.)"

두 사람의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 12.14 12:37 폰트 수정 (프리텐다드 → 리디바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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