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2024

마유슌 / デアイ

2021 🖤🤍 시점교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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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이었다. 초여름, 이십여년 전 지어진 적당히 투박한 중교 2학년 B반의 전경이 나무 그늘에 어둑해져 있다. 활짝 연 창문 너머 햇빛 내리쬐는 운동장과 코모레비 내린 교실 안 지루한 낭송 소리의 구분선 확연하다. 더운 기운 감도는가 하니 선선한 바람 창문틀을 넘어오고, 그림자진 탁상이 서늘타가도 반팔 아래 살갗이 엉겨붙는다. 어깨부터 접어 넣어지는 허리께에 시원함 남은 빳빳한 옷감 주름져 떨어지는 열넷의 남자애들. 교실 뒷자리, 창문가서 두어 칸 떨어진 곳에 앉은 슌 눈길은 거스러미가 있는 나무 바닥이나 하얀 가루 붙어있는 칠판에 가 닿아있다. 슌 연필 끄트머리를 통 튕긴다. 탁상에 부딪혀 가늘고 맑은 나무 소리를 낸다.

여태 요란인 매미 소리에 겨우 묻힐까 싶은 떠드는 소음과 걸상 끄는 소리. 곧 잦아드니까 선생이 전학생을 언급한다. 슌이 거진 들릴까 말까 하게 플라스틱 펜 끝으로 책상 톡톡 건드린다. 공원을 돌아서 카키고오리 노점상이 있던가. 로손에 들러 가리가리군으로 괜찮을까. 삼 교시 이과 수업이 끝나갈 무렵에 교실 앞문이 드륵 열린다. 남자아이 하나가 발걸음 내딛는다. 슌의 눈이 이끌렸다. 토독, 펜 끝 책상에 닿았다. 열넷 치고는 제법 어른스러워 보이는데. 곧게 내려와 턱께나 목선 따위에 가볍게 흩어지는 흑발, 다문 입이나 선이 주욱 그어진 눈매 위로 머리칼 몇 올 흐트러져 있다. 올라간 눈꼬리 아래 새까만 눈동자나 올곧은 콧대는 흔들림 없고. 떨어지는 목선과 어깨에 얇은 셔츠 깃이 감싼다. 푸르고 어둑하게 응달진 교실에, 매미 소리 나뭇잎 부딪히는 소리가 가득 밀려온다. 남자애는 역시 빳빳하게 떨어지는 반소매 아래 희고 단단히 뻗은 팔을 손으로, 뼈대가 드러난 손가락들로 한 번 쓸었다 놓더니 발성했다. 하시바 마유입니다. 일본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슌 여태껏 남자애에게 시선 떼지 못한 것 알아챈다. 동시에 입술이 바짝 말라온다. 갇힌 숨 내보내고, 하아 하고 내쉬는 때에 슌은 안다. 속절없이 이 남자애를 사랑해버릴 거라는 것. 첫사랑의 그것처럼 애닳게 박동이 뛴다. 그러나 첫사랑의 그것처럼 그런 것은 상관이 없어진다. 슌은 알았다. 정오가 다가와 무덥지근한 기운이 올라오고 있다. 물기 찬 손끝 책상에서 떼자 바람이 식혔다. 자리를 일러주는 따위의 웅웅대는 음성, 그 남자애가 곧은 걸음걸이로 슌을 향해 걸어올 때도, 슌 자신이 첫눈에 반한 교탁 옆 그 자리에 무엇이라도 있는 양 바라보며 입술 살짝 물어 축였다. 남자애의 시선이 슌이 앉은 줄에 닿았다 떨어진 것 같기도 했다. 빈 자리는 슌의 뒤의 뒷자리에 있었다. 방수나 캔버스천같은 재질의 가방이 바닥에 내려앉는 소리, 짧게 의자가 밀리는 소리. 슌의 손가락 제 뒷목 닿는 양이 조심스럽다. 선생이 가르치거나 숙제 이르는 소리가 느리게 기어가는 것은 어차피 아무래도 좋았다.

종소리와 동시에 활기가 찬 걸상 마찰음들 메아리치는데, 대번에가 없는 슌 스스럼 없이 일어섰다. 전학생보다는 앞둔 기말고사의 불평이 소소히 터져나오는 소란 속 돌아보자 남자애는 서있던 모습 그대로 앉아있다. 근처의 한두 명 스치듯 남자애에 다가갔다 몇 마디 섞고는 제 무리로 돌아가는 게 고작이다. 슌은 어떻게 하는지도 모르고 남자애에게 다가간다. 저기. 올려다보는 남자애의 입가에 엷은 미소 깔린다. 나리타 슌이야. 나리타군이면 돼. 남자애가 잠시 눈을 깜박이곤 한 손으로 턱을 괸다. 슌은 안 돼?




슌은 4교시부터 아사기리 군과 자리를 바꿔 앉았다. 한 칸 앞? 코니시랑도 가깝고, 괜찮네. 슌은 아사기리 군 자리 앞에서 벌써 가방을 꽉 들고 서 있었다. 슌은 낙서가 조금 남은 책상에 반듯히 앉아, 수학 담당의 유이치 선생이 들어오는 동안 어깨 너머를 흘끗 쳐다봤다. 하시바가 슌과 눈을 맞췄다. 하시바에겐 보이지 않는 손가락 말려들어가 슌은 고개 제자리로 했다. 얼굴 발개지면 안 돼. 빼기 기호를 썼다가, 획 하나를 더 그었다가 숫자 네 개를 세 번째 고쳐썼다. 네. 네에. 슌.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와 어쩔 수 없이 뒤를 돈다. 이거 이렇게 해? 하시바가 방향 돌려 보여준 공책에는 정갈하게 뻗치는 글씨체로 숫자가 오밀조밀 들어있다. 슌 몸을 아예 돌리고는 응, 대답했다가 하시바의 글씨 위 하나를 덧댄다. 떨리는 손이 삐뚜른 선 그어낸 것이 한심스럽다. 그런 생각에 빠져있는데 하시바 그 옆에 장난스레 우는 표정 그렸다. 왜? 묻자 아깝다. 한마디 툭. 잘했어. 답하니까 입꼬리 쭉 올린다. 이제 수업 들어. 그 말에 도로 앞 향해도 수업 들을 수 있을 리가 없고.

하시바가 점심으로 꺼낸 건 편의점 도시락이었다. 아, 그거 맛 없는데. 슌 도시락 뚜껑 열며 뒤 힐끔이다 말해버린다. 에, 정말. 하시바가 젓가락 비닐을 벗기더니 감자샐러드 조금 집어 입에 넣는다. 최악은 아니네. 웃어보이는 걸 보고 슌은 책상을 조금 옮겨 하시바와 붙였다. 너는 뭔데? 유부초밥... 하나 줄까? 아, 고맙지만 별로 취향 아니라. 돌아온 답에 슌이 젓가락으로 밥알 깨작였다. 그새 스파게티 한 입 맛본 하시바가 으, 소리냈다. 내일엔 다른 걸로. 다음 가닥을 넘기면서도 능청스레 그런다. 내일도 편의점? 아직 아침에 요리하긴 힘들어서. 하시바 다른 반찬 집으며 말 잇는다. 혼자 살아. 혼자? 거의. 아... 슌을 가만 바라보더니 하시바가 슌의 도시락 한 켠의 방울토마토 가리킨다. 토마토 하나 줄래. 그러곤 받아먹을 제스쳐를 취하길래 슌은 손으로 하나 집어 입에다 넣어주었다. ...더 맛있는 거 알려줄게. 학교 끝나고. 그 말에 하시바가 방긋 웃었다. 슌도 그제야 웃어보였다.




                   


나 일본 학교 안 다녀봐서 몰라. 그리 말하는 하시바를 슌은 신발장까지 데리고 나오고는 일일이 챙겨선 교문 밖을 나왔다. 집이 어디냐는 물음에 로손 쪽, 하고는 말아버리는 모습에 슌 웃음 터뜨렸다. 학교 밖에 작열하는 태양 새로 뜨문뜨문히 나무 그늘이 길게 드리우는 오후였다.

거리 아래 쨍한 햇빛이나 그림자에 생생히 얼룩지는 맑은 얼굴. 하시바는 이런 저런 얘기를 하거나, 듣거나, 혹은 아무 말 하지 않으면서 길을 걸었다. 슌은 눈이 부시다고 생각하면서 옆을 바라봤다. 귀에서 떨어지는 턱선이나 유리같이 반투명한 눈동자의 측면이 쏟아져 내렸다. 그러다 그 주체가 슌을 바라보거든 슌은 여름 열기에 숨막힘을 느꼈다. 꼭 미소지으며 바라보는 저 얼굴. 슌은 꾹 참고 발을 옮겼다. 발걸음이 자꾸 맞춰졌다. 다 왔다. 슌이 앞의 편의점을 고갯짓했다. 에어컨 바람이 반가웠다.

늘어진 알바생이 짙은 사투리로 인삿말을 내뱉는 동안, 둘은 냉장식품 코너로 향했다. 이거 괜찮나? 응, 그건 나도 가끔 사는 편이고. 하시바가 도시락 몇 개를 뒤적였다. 그러는 사이 슌이 하드 두 개를 골라 보인다. 가리가리군 먹을래? 내가 살게, 무슨 맛이 좋아. 네가 먹는 거. 바보 같네. 하시바는 젤리 한 봉지 유심히 보는 듯하더니 집어들었다. 그거, 나 좋다는 의미? 슌이 말 돌린다. 성분표 읽었어? 당연히 못 읽었지, 한자밖에 없잖아. 어차피 젤리란 건 다 엇비슷하니까. 가리가리군 소다맛 두 개와 젤리를 든 둘이 계산대 앞에 가 선다. 이 성분은 뭔데? 나도 몰라, 무슨 산. 직원이 여전히 심한 오이타벤으로 계산을 했고 슌이 돈을 내밀었다. 거기다 하시바가 동전 몇 개를 밀어넣으며 답했다. 바보 같네.


하시바가 사는 아파트와 슌의 집은 그리 멀지 않았다. 메일 주소를 교환하고 홀로 귀가하는 길에 슌 베싯 웃었다. 손에 달랑달랑 들린 나무 스틱에는 하나 더, 라고 음각으로 새겨져 있었다. 열기가 올라오는 아스팔트 바닥을 꾹 밟아가는 옆에 풀벌레가 요란히 울었다. 하시바 군. 하시바. 하시바 마유... 마유는 좀 그렇지. 적힌 이름 지웠다가 타이핑해놓고는 그러고도 폰을 놓질 못했다. 나중에 첫 메일 보내기엔 뭣하니까 사소한 일이라도 보낼까. 슌 스틱 잡아 올리곤 더위가 한 풀 가신 푸른 하늘에 대고 사진 찍었다. 아까 먹은 가리가리군 하나 더에 당첨됐어. 내일 보자. ...너무 뜬금없나. 전송 버튼 누르고 들어서는 익숙한 골목에 슌 괜히 옷 매무새 정돈하고 집 대문을 열었다.

/// 중략

오히려 항상 그러니 익숙해진 것도 있었다. 심장은 언제든 첫만남처럼 뛰었지만 하시바는 벌써 슌에게 연인같았다. 오늘 잘생겼네. 턱선 봐봐. 옆모습 좋아. 난 슌땅 눈밑점이 좋은데. 그것만? 그 옆 점도 예쁘고~. 꼭 사랑하는 게 당연한 것처럼 대화가 흐르다보니 슌은 어느 날 하시바에게 입 맞추게 될 거라고도 생각하게 됐다. 오늘은 아니야. 내일도. 그렇지만 한 달이면 입을 맞추게 되려나.

슌은 잊어버릴세라 하시바와 있었던 날들을 빼곡히 일기장에 적어넣었다. 여름 내내 시답잖은 이야길 하며 방학에 만날 약속을 얘기하던 일. 여름밤 방에서 공포영화를 보며 수박을 먹은 일. 바다에 가자고 약속을 하고 그날 아침 설레는 마음으로 옷을 챙긴 일. 벗은 하시바의 몸을 바닷가에서 계속 흘끔거렸던 일. 시원한 물 속에서도 맨몸끼리 닿으면 열이 올랐던 일. 돌아오는 전철 둘이 나란히 앉아 밖의 푸르른 하늘을 바라봤던 일. 옆에 누워 낮잠 자는 하시바의 얼굴을 한참 바라봤던 일. 반대로 밤에 자다 깨보니 하시바가 몸 위에 팔을 두르고 머리칼을 만지작거리고 있던 일. 우르릉 장마가 오던 일주일 내리 방 안에서 엎드려 다리를 얽고 만화를 읽거나 컵라멘을 먹고 게임을 하며 창밖을 내다봤던 일. 종잇장을 넘길 때마다 바다 냄새가 났다.

2학년의 겨울이 왔다. 어두침침한 하늘은 꼭 저녁같았다. 지루한 수업시간, 한 녀석이 어, 한 것을 시발점으로 모두의 이목이 창밖에 끌렸다. 눈 온다! 슌이 고개를 돌렸다. 보송한 첫 눈이었다. 슌은 크리스마스 생각이 났다. 크리스마스도 하시바와 보내겠지. 새해도. 삼학년에는 반이 떨어지려나... 슌은 이젠 익숙하게 뒤를 돌았다. 떨어지는 눈을 보는 하시바의 옆모습이 영원히 간직하고 싶도록 예뻤다.

적당히 굳은 눈을 바삭거리며 나아가던 얼마 후의 하굣길. 하시바는 딴 말을 하다 별것 아닌듯 말을 끼워넣었다. 내년엔 일본 떠날걸. 슌은 뽀드득 눈을 밟다 멈춰섰다. 두어 걸음 앞서나간 하시바가 뒤늦게 멈춰서 뒤를 봤다. 미안, 내 의지로 여기 온 것도 아니었어서. 가는 것도 그래. 이초 후 슌이 두어 걸음을 따라잡았다. 언제부터 그렇게 됐는데. 몰라, 그젠가. 슌은 그럼 나한테 왜 그랬는데, 하는 물음을 삼켰다. 눈이 녹은 진창 옆으로 비켜 서며 하시바가 슌의 손을 잡아줬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사실 내년에 가는 거 아니야. 그럼? 준비되는 대로. 내일일 수도 있고. 슌이 입술을 질근 깨물었다. 연락할 거지, 라든가 그런 말은 나오지도 않았다. 하시바만 헤어지기 전 손을 꼭 쥐었다가 놓고 갔다.

며칠 후, 삼 교시가 끝나고 하시바가 갑자기 짐을 챙겼다. 뒤에서 나는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슌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슌은 눈을 꾸욱 감았다가, 불현 후회하는 감각에, 눈을 떴다. 하시바가 슌의 어깨를 감싸 안아왔다. 가? 즐거웠어. ... 하시바의 손이 슌의 얼굴을 감쌌다. 겉옷까지 차려입은 하시바와 슌의 눈이 맞닿았다. ...응. 고작의 대답을 한 슌을 뒤로하고 하시바가 숙인 몸 일으켰다. 하시바의 팔이 슌을 잠깐 끌어안았다가 풀렸다. 하시바는 교실을 나가며 두어 번 정도 뒤를 돌아봤다. 그게 끝이었다. 12월 21일, 끝이었다.

방학이 시작되고 슌은 크리스마스날 성탄곡 따위가 울리거나 케이크를 파는 가게를 지나쳐올 때쯤에야 쏟아내듯 울었다. 길거리 광장의 트리는 화려했다. 슌은 거리를 한참 걸어와, 제 방에 들어서며 뚝뚝 떨어지는 눈물을 닦았다. 제야의 종을 칠 때도, 절에 가 운세를 뽑을 때도 하시바는 없을 거였다. 하시바 없이도 내년의 여름같은 건 올 거였다. 슌은 하시바와 만난 후 처음으로 이불 아래 들어가 펑펑 울고 후회할만큼 후회했다.


                  

하시바가 떠난 후 수 개의 계절이 지나갔다. 슌은 그 시간 내내 하시바를 생각하진 않았다. 그래도 가끔씩은 꼭 폰을 붙들고 안녕, 이라든가, 보고 싶어, 라든가, 잘 지내? 등의 글자를 한참 고민하며 적어넣고 똑같은 메시지가 뜨는 메일을 보냈다. 이 계정에 더 이상 메일을 보낼 수 없습니다. 그 빨간 느낌표가 뜰 걸 알면서 자꾸 마음을 담아 한 마디를 썼다. 슌은 중학교를 졸업했고 가까운 고등학교가 없어 이사를 갔다. 이사를 가는 김에 시골 큐슈를 벗어나 아예 츄부까지 갔다. 중학 2년의 교과서는 후배에게 물려주었고 작아진 교복은 버렸다. 슌은 가끔씩 책상 서랍을 열어 단추 하나를 꼬옥 쥐었다. 가쿠란에서 잘라낸 동그랗고 단단한 단추만이 닳지 않고 남아있었다. 하시바가 지금쯤 이 세계의 어디 있을지는 감도 잡히지 않았다.

입학한 고등학교에서는 귀가부가 불가했다. 슌은 내키진 않았지만 밴드부에 들어갔다. 음악이나 드럼은 좋아했다. 다행히 교내공연같은 것도 그럭저럭 할 만했다. 제법 친해졌달까, 가깝게 지내주는 선배같은 것도 생겼다. 그 선배는 보컬로, 슌에게 입부를 권했고 내내 잘해주는 선배였다. 슌은 어렴풋이 그 선배가 자신을 좋아하는 걸까 생각했다. 그래도 선배가 자꾸만 자신에게 상냥할 때마다 하시바 생각을 지우기 어려웠다. 그다지 많이 말하지 않았는데도 선배는 하시바 얘기를 좋아하지 않는 듯했다. 그래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슌은 문득 하시바를 마유라고 부를걸, 그런 목적 없는 후회만 짤막히 했다.

/// 중략

노래가 끝날 무렵 메일이 도착했다. 슌은 얼른 종료하고 메일창을 열었다.

역시 슌이었구나
내가 나카노로 갈게
집에서 만날 수 있어?

물음에 확답은 없었지만 슌은 그것 없이도 심장이 자꾸만 뛰었다.

                    


슌은 공원 벤치에 앉아 폰을 꼭 쥐고 있었다. 맥도날드 건너편의 인도가 내다보이는 공원 가장자리의 벤치, 오후 세 시였다. 기다린지는 십여분 즈음 되었을텐데, 십 분이 삼십 분으로 느껴져버려서, 음악도 듣지 못하고 지나가는 사람을 힐끔대고만 있었다.

하시바는 전과 똑같은 채로 나타났다. 파랗게 물들인 머리색이나 뚫은 피어싱은 달랐지만, 오히려 그렇지 않은 쪽이 하시바가 아니라고 생각되었다. 걸어오는 하시바를 알아챈 순간 슌은 자리서 일어났다. 심장이 지나치게 뛰고 있어서 제어가 어려웠다. 하시바 역시 걸음을 빨리 해서, 슌에게 다가갔다.

"슌, 여전하네."

하시바는 웃음을 짓고 있었지만, 살짝은 고민하는 눈치였다. 슌은 튀어나올 것만 같은 심장 붙들고 응, 대답하곤 너도. 덧붙였다. 잠시간의 침묵이 있고, 슌은 하시바를 와락 껴안았다. 하시바의 머리카락이 슌의 볼을 간지럽혔다. 하시바에게서는 은은하게 좋은 향이 났다. 이내 하시바의 팔이 슌의 허리를 감아왔다. 둘은 제법 오래도록 안고 있었다.


하시바는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살고 있었다. 전철로 삼사십 분이면 갈 수 있는 동네였다. 슌은 방학동안 전철을 자주 탔다. 꼭 옛날로 돌아간 것 같았다. 돌아올 것 같지 않았던 청량한 여름날, 하시바가 사는 아담한 멘션 단칸방에서 옛날처럼 웃고 장난을 쳤다.
슌은 그러다 불안증이 들었다. 여름이 가면 하시바 역시 사라질 것만 같았다. 몇 번 영영 돌아온 거냐고 물었지만, 하시바는 아마, 라든가 모호하게 답을 하고는 했다.

어느 날, 매미소리가 나던 청량한 오후, 하시바가 문득 말을 꺼냈다.

"저기, 슌쨩."
"응."
"내가 싫지 않아?"
"싫다니··· 별로."
"싫어졌을 거라고 생각해서."
"싫지 않아."
"사귈까."
"···에,"

책장을 넘기던 슌의 손이 멈췄다.

"고백인데."

하시바가 몸 일으켜 슌 쪽을 바라봤다.

"··· ···"
"이런 건 수비범위 밖?"
"아니···"
"츳코미해줘-."
"장난하고 있는 거야?"
"일본에 돌아온 건 장난 아닌데."

슌과 하시바의 시선이 순간 맞닿았다. 그날, 슌은 처음으로 하시바의 눈에서 머뭇거림을 읽었다. 그 머뭇거림은 불안의 형상으로, 초조나 괜찮은 척의 표리부동의 뒤섞임으로 보였다. 슌의 심장이 주체하지 못하게 요동했다.

"···좋아."
"키스해도?"
"응···"

슌은 떨려서 토할 것만 같았다. 하시바가 슌에게 다가갔다. 한 손이 슌의 볼을 감싸고, 슌의 눈에 하시바의 눈매가 가득 찰만큼 가까이 왔다. 그리고 부드럽고 따스한 감촉이 슌의 입술을 덮었다. 이내 촉촉하고 물컹한 혀가 슌의 입 안으로 밀려들어왔고 츕, 츄웃하는 소리가 짧게 울렸다. 슌의 눈이 감겼고 하시바의 숨소리나 맞물려오는 입술이 달아서 으응, 신음이 배어나왔다.

하시바가 입술을 떼어내고도 슌은 저도 모르게 살짝 혀 내어 입술 핥으며 눈을 떴다. 하시바는 올곧게, 사실은 치기와 뒤엉긴 욕정으로, 슌을 보고 있었다. 슌은 저를 바라보는 하시바의 얼굴에 등선이 순간 저릿했다. 몇 초 후 하시바는 격하게 슌에게 달려들어 뉘이고는 허리와 목을 붙들고 정신 없이 입을 맞췄다. 반바지 아래 맨다리들이 엮였고 슌의 팔이 하시바를 끌어안았다. 더 가까이, 더 가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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