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비 가면

후회

인간의 왕자가 바닷속의 자유보다 귀하던가?

이우는 밤 by 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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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떨리고설레다 2019


방 안의 모든 건 아름다웠습니다. 황금과 온갖 보석들이 가구를 휘감고 있었어요. 걸린 산호와 커다란 진주는 물 속에서 봤을 때보다 수천 배는 더 반짝였지요. 인어 공주는 치렁치렁 보석 줄이 달린, 창문을 가린 커튼을 만져 보았어요. 하도 얆아서 밖이 반쯤 비치는, 손가락으로 훑어 내릴 때마다 옅게 주름이 지는 천은 여태껏 본 어떤 것보다 가장 곱고 매끄럽고 서늘했습니다. 그리고 조금은, 어색했어요.

입고 있는 하얀 드레스도 같은 재질로 만들어졌다고 했습니다. 머리채를 부드럽게 땋아올려 묶은 리본 끈도요. 하지만 색깔 탓인지 붉은 커튼만큼 화려하지도, 산호와 진주를 볼 때처럼 개운하지도 않았어요. 그저 갑갑할 뿐이었습니다. 부드럽게 허리선을 타고 떨어지는 치맛자락과, 가슴께에 풍성히 잡힌 주름을 처음 보았을 때의 환희는 이제 흔적조차 찾아 볼 수 없었습니다. 그 변화에 스스로도 의아해질 지경이었어요. 진주가 알알이 꿰인 목걸이를 대어 보았을 때, 세상을 모두 가진 것처럼 마냥 좋던 기분은 다 어디로 갔을까요. 인어 공주는 열 여섯 번째 생일이 지나 이제 어른이 되었다는 사실을 떠올렸습니다. 그러자 궁금해졌어요. 어른들은 원래 이리도 복잡한 감정 속에 내던져지는 걸까요? 

그렇다면 인어 공주는 절대로 어른이 되고 싶지 않았어요. 하지만, 누구나 겪는 일이라면 불평 없이 받아들여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어쨌거나 인어 공주는 이미 어른이 되어 버렸으니까요.

갑자기 바다 냄새가 맡고 싶어져 인어 공주는 커다란 창문을 밀어 열었습니다. 시원한 바람이 기다렸다는 듯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리며 밀려들어왔어요. 육지에 올라왔다는 것을 잠시 잊을 만큼 바람은 그대로였습니다. 깊은 바다를 한껏 누비다 올라와 바위에 기대면, 젖은 머리카락을 간질이며 속닥이던 친구와 하나도 다르지 않았지요. 바람은 그때처럼 인어 공주의 뺨에 입 맞추러 달려왔습니다. 다정하고 열렬하게 목덜미와 드러난 어깨를 감싸안고 쓰다듬었습니다. 하지만 머리카락을 자유롭게 헤집어 줄 수는 없었어요. 인어 공주의 길고 검은 머리카락은 하녀들의 손에 맡겨져 단정하게 틀어올려진 상태였거든요.

여름을 서늘하게 보내기 위해 별궁은 바닷가에 지어졌습니다. 바다마저 얼어붙는 겨울에는 안쪽으로 들어가서 따뜻하게 지낸댔습니다. 육지에서의 삶, 상상만 해도 숨이 턱 막혀 왔습니다. 거기에는 짠물도 없이, 오로지 밍밍하고 텁텁해 아무 맛도 안 나는 민물뿐이래요.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 육지 동물이 얼마나 가없다고 생각했던가요. 어떻게 소금물도 없이 지낼 수 있을지 인어 공주로서는 통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시종들은 인어 공주의 기분을 달래려 온갖 놀라운 이야기들을 해 주었습니다. 풀밭을 뛰노는 양 떼, 밤하늘을 수놓을 불꽃놀이. 그 가운데서 이루어질 결혼식이 얼마나 황홀할지도요. 하지만 인어 공주는 여전히 우울했습니다. 수도의 온갖 멋지고 따뜻한 소식으로도 그 기분을 지울 수는 없었습니다.

육지 생각을 하자 갑자기 바닷바람이 싸늘해졌습니다. 먼저 버리고 떠난 쪽이 인어 공주라는 점을 일깨워 주는 것만 같았어요. 새하얀 드레스의 허리끈이 다시 조여들어 와, 인어 공주는 급하게 바람을 내쫓고 창문을 도로 닫았습니다. 숨이 막혔습니다. 침대의 커튼을 걷고 깊숙이 들어가 앉자, 아무도 보지 못한다는 생각에 비로소 안심이 되었습니다. 인어 공주는 드레스와 한 세트인 장갑을 만지작거리면서 제게 옷을 입히던 시녀들이 재잘대던 말을 떠올렸어요. 하얀색은 가장 순결하고 아름다운 색이랬습니다. 아주 어린 아이들이나 결혼을 앞둔 이들만 걸칠 수 있댔지요. 아마도 그건 가장 사랑스러운 이들에게만 허용된다는 뜻일 겁니다. 인어 공주도 영광스럽게도 그 중 하나에 속했으니,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마땅할 텝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인어 공주는 그럴 수 없었습니다. 결혼을 앞둔 신부들은 하양을 입는댔습니다. 그네들도 새하얀 드레스 속에서 인어 공주와 같은 기분을 느꼈을까요? 가장 고귀한 색이 이리도 답답한 것을 보면, 먼저 이 길을 걸었던 그네들은 결혼을 자유의 상실이라고 여겼던 걸까요.

왕자님이 나쁜 사람인 건 아니었어요. 이웃 나라 공주님은 길고 멋진 금발에 눈물이 핑 돌 정도로 예뻤는데도, 인간들에게는 보잘것없는 벙어리에 불과했던 인어 공주에게 손을 내밀었고 결국 선택까지 해 주었으니까요. 육지의 사람이라는 종족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인어 공주의 눈에도 왕자님은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떠오르는 해의 빛줄기와 아무도 닿은 적 없는 깊은 바닷물을 반죽해다 빚은 것만 같았습니다. 왕자님은 매일 밤마다 찾아와 이마를 쓰다듬으며 노래를 불러 주었어요. 또 예쁘다는 말과 함께 머리카락도 빗어 주었지요. 하지만 그뿐이었습니다. 모든 몸짓에서 인어 공주는 더 이상 배 위의 왕자님을 느낄 수 없었어요. 왕자님은 더 이상 인어 공주에게 특별한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인어 공주가 사랑한 그 날의 왕자님은 영영 어디론가 사라지고 말았어요. 가장 고귀한 존재, 무엇보다 빛나는 태양. 어디에서나 눈에 띄고 감출 수 없이 사랑스러우며 타는 듯한 축제의 열기 속에서 홀로 빛나는 것 같던 그 사람 말이에요. 인어 공주는 왕자님을 잃어버렸습니다. 

선상 파티라는 단어는 다리를 얻고 나서야 알았습니다. 그 때는 아무것도 모르는 채, 다만 아름답다고 생각했습니다. 갑갑한 바닷 속 왕궁에서 평생을 지내다 처음 맛 본 인간의 세상이 얼마나 놀랍고 황홀했는지요. 거대한 유람선에 켜진 불빛과 하늘을 수놓은 색색 불꽃에 인어 공주는 눈이 부셨어요. 늘 자유로이 헤엄치던 바닷속의 빛과는 감히 비교할 수조차 없어, 이러다 눈이 멀어 버리는 줄로만 알았답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 인어 공주는 장갑에서 손을 떼고 고개를 들었습니다. 그리고는 여전히 답답한 드레스 안에서 깨달았습니다. 불편한 건 옷이 아니었어요. 처음 신어 보는 보석 구두도 아니었지요. 목구멍을 턱 틀어막고 죽일 듯 조여 들어오는 느낌은 갈비뼈와 심장의 것이었습니다. 이유를 찾는 일은 어렵지 않았어요. 인어 공주는 부드러운 치맛자락을 덥석 움켜잡았습니다. 매끄러운 천자락에 주름이 갔지만 신경 쓰지 않았어요. 모든 것은 처음부터 맞지 않은 자리를 감히 탐했던 까닭이었습니다. 인어 공주에게는 원래부터 인간의 옷이 필요 없었습니다. 신발도, 장신구도. 바다 느낌을 내려고 벽에 걸어 둔 죽은 진주와 산호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인어 공주는 장갑을 잘 갈무리해 상자에 도로 집어넣었습니다. 구두도 벗어서 침대 밑에 같이 밀어넣었습니다. 그대로 창가로 돌아가, 창문을 활짝 열고 매달리는 바람을 간절하게 받아들였습니다. 그제서야 숨통이 조금이나마 트였습니다.

이제 인어 공주는 소리 내어 말할 수 있었습니다. 더는 왕자님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왕자님은 인어 공주의 삶을 망가뜨린 장애물에 불과할 뿐이었습니다. 그 날의 왕자님은, 가장 고귀한 존재요 무엇보다 빛나는 태양, 어디에서나 눈에 띄고 감출 수 없이 사랑스러우며 타는 듯한 축제의 열기 속에서 홀로 빛나는 것 같던 그 사람은 죽었습니다. 술에 취해 형편없이 바닷속에 가라앉았던 그 순간 이미 숨을 멎었습니다.

공기가 부족한 듯 이리도 답답했던 것은, 늘 있던 자유가 사라진 탓이었습니다. 어쩌면 인어 공주가 왕자님을 사랑했던 까닭은 제가 무엇을 가졌는지 알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인어 공주는 울고 싶어졌습니다. 사실 조금은 눈물 흘렸습니다. 고작 이것을 위해 그 많은 축복을, 그리도 헌신짝 버리듯 던져 버렸던가요. 역시 왕자님은 이웃 나라 공주님을 위해 남겨 두었어야만 했었나요. 

어쩌면 인어 공주는 그 날, 요란하기 그지없던 배의 불빛에 정말 눈이 멀어 버렸던 걸지도 몰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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