샘플

여우비 샘플

옷장 속 by 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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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될 날은 뭘 해도 안 된다는 말이 있다. 갑자기 비가 쏟아지는 이 순간, 희주의 머릿속에 떠오른 말이었다. 쨍쨍한 햇볕이 내리쬐는 보도블럭 위를 소나기가 촉촉이 적시고 있었다. 여우비였다. 희주는 조급한 얼굴로 손목시계를 내려다보았다. 카페로 돌아가기로 한 시간까지 십여 분이 남아 있었다. 문제는 카페까지 걸어가는 데에 십분 정도가 걸린다는 점이고, 한 시간 전에 알바시간이 끝난 알바생을 추가수당으로 붙잡아 두고 왔다는 점이었다. 저 진짜 두시엔 나가야 해요, 사장님. 카페를 나서는 자신의 뒤꽁무니에 대고 재차 말하던 목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어떡하지. 

비는 스콜이라고 봐도 좋을 정도로 쏟아지고 있었다. 당연하게도 희주에게는 우산이 없었다. 어느 누가 비 소식도 없는 쨍쨍한 날 우산을 챙겨들고 다닌단 말인가. 희주는 고민했다. 뛰어갈 것인지, 비가 그치길 기다려 볼 것인지. 뛰어간다면 대략 오 분 안에 카페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지금 내리고 있는 비가 우산 없이 뛰쳐나갈 수준이 아니어서, 짧은 고민 끝에 희주는 몇 분간 기다려 보기로 했다. 갑작스럽게 쏟아지기 시작했으니 갑작스레 그칠 수도 있는 일이다. 그렇게 몇 분의 시간이 지났다. 별반 다를 바 없는 상황에 결국 희주는 결연한 얼굴로 가방을 품에 안았다. 이미 한 시간이나 붙잡아 둔 알바생을 더 잡아 둘 수도 없는 일이다. 비를 맞더라도 카페로 가야했다.

첫발을 내딛음과 동시에 희주는 달렸다. 넓은 보폭으로 성큼, 또 성큼, 고개를 살짝 숙이고선 조금이라도 덜 젖기 위해 빠르게 발을 움직였다. 햇빛을 받은 빗방울이 구슬처럼 반짝이며 바닥에 추락해 산산이 흩어진다. 모두 비를 피하기 위해 어디론가 들어간 건지, 사람 없이 적막한 거리가 마치 다른 세계에 떨어진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했다. 내딛는 발아래에서 물기가 찰팍이며 부서지고 온 사위는 빗소리만이 가득하다. 바쁜 와중에도 묘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그때, 희주는 앞의 무언가에 퍽하고 부딪혀 크게 휘청였다. 가로수가 있는 곳으로 달렸던 것 같지는 않은데. 그래도 꼴사납게 나동그라지지 않아서 다행이다 따위의 생각을 하며 부딪친 것이 무엇인지 확인하려 고개를 들었을 때, 희주는 당황한 얼굴로 눈을 깜빡였다.

가로수도 전봇대도 아닌 다 큰 성인 남자가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은 채 얼굴을 구기고 있었다. 저도 휘청거리는 것으로 끝났는데 왜 바닥에 나동그라져 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희주는 비에 쫄딱 젖고 있다는 것도 잊은 채 자신이 넘어뜨린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미간을 구기던 남자가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맞춰온다. 살짝 붉은 코끝과 빗물과는 다른 물기에 젖은 눈이 처연한 기색을 띄고 있었다. 절대 자신이 울린 것이 아니다. 희주는 반사적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이유 모를 죄책감이 마음을 간질였기 때문이다. 

“죄송합니다. 저…. 계속 그렇게 주저앉아 있으면 옷 다 젖을 텐데 일어나세요.”

남자는 그 자세 그대로 계속 희주를 올려다보았고, 부담스러워진 희주가 사과의 말과 함께 손을 내밀었다. 그러고도 몇 초간을 가만히 쳐다보기만 하던 남자가 이윽고 손을 뻗어 마주잡았다. 짧은 그 몇 초의 간격이 몇 십 분 같이 느껴졌던 희주는 반색하며 남자를 끌어올려 일으켜 세웠다. 일어선 남자가 무언가 말을 걸듯 입술을 달싹이는 순간, 희주는 불현듯 제게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다는 걸 상기해냈다.

“제가 지금 많이 급해서 먼저 가볼게요. 부딪힌 건 진짜 미안해요! 그쪽도 얼른 비 피하러 가세요!”

제 할 말만을 내뱉고 희주는 다시 내달렸다. 가능한 비에 젖고 싶지 않았던 희주였지만, 결국 쫄딱 젖은 채로 아슬아슬하게 카페에 도착할 수 있었다. 사장의 귀환만을 애타게 기다리던 알바생이 반가움 가득한 얼굴로 그를 맞이했다.

“와, 사장님 왜 이렇게 젖었어요? 걸어왔어요?”

“너 시간 맞춰서 보내주려고 엄청 뛰었거든?”

“근데 왜 이렇게 젖었어요?”

화장실에 비치해두려 수건을 미리 가져다 둔 것이 신의 한 수라면 한 수였다. 어쩐지 오늘따라 수건을 몇 장 챙겨오고 싶더라니. 희주는 알바생이 건네는 수건을 받아들어 머리와 옷의 물기를 꾹꾹 닦아내다 한숨을 푹 내쉬었다.

“뛰어오다가 어떤 사람이랑 부딪혔거든.”

“그래서 넘어졌어요?”

“아니. 내가 넘어뜨렸어. 그래서 일으켜주고 사과하는 사이에 다 젖었지 뭐야.”

“앞 좀 잘 보지 그러셨어요.”

“너 갈 때 안 됐니?”

벽에 걸린 시계를 가리키며 축객령을 내린 희주가 젖은 머리를 탈탈 털었다. 점심시간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비가 오는 덕분에 가게에는 손님이 없었다. 이렇게 물에 빠진 쥐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데 손님까지 많았다면……. 생각만 해도 민망한 일이다. 가방을 둘러맨 채 카페를 나서는 알바생을 배웅하며 쳐다본 바깥은 어느새 비가 그치고 말끔하게 개어있었다. 젖어있는 바닥만이 비가 왔음을 알리는 맑은 날씨에 희주는 묘한 억울함을 느끼며 찝찝한 옷을 어떻게 해야 할지 깊은 고민에 빠졌다. 옷이야 가만히 두면 마르긴 하겠지만 그때까지 젖은 옷을 입고 있을 자신이 없었다. 생각만 해도 찝찝함이 온몸을 감싼다. 그리고 쫄딱 젖은 채 손님을 맞이하는 건 손님에게도 못 보일 꼴을 보이는 게 아닐까. 거기까지 생각한 희주는 미련 없이 가게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익숙한 손길로 빠르게 가게를 정리하고 문을 잠그자, 불어오는 선선한 바람에 추위가 슬그머니 옷 속을 파고들었다. 날씨는 이제 겨우 초여름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더위가 찾아오기엔 이른 때였고, 자칫 방심했다간 감기에 걸리기 좋은 때이기도 했다. 일찍 돌아가기로 한 것이 잘한 선택이라는 생각을 하며 희주는 어깨를 살짝 움츠리고 잰 걸음으로 가까운 공영주차장을 향해 걸었다. 차를 가져온 것도 다행이다 싶었다. 잔뜩 젖은 몰골로 남들과 닿을까 걱정하며 버스를 타고 가느니 차라리 제 차를 적시는 게 마음이 편했다. 공영주차장으로 향하기 위해서는 아까 뛰었던 길을 지나치게 되어 있었다. 불과 얼마 전 지나갔던 거리를 다시 걸으며 아까 부딪혔던 남자를 떠올리던 희주의 얼굴이 이상하게 구겨졌다.

그도 그럴 것이, 아까 부딪혔던 남자가 거기 그대로 있었기 때문이었다. 푹 젖은 채 근처 벤치에 오도카니 앉아 있는 모습이 도무지 믿어지질 않아 희주는 눈을 비볐다. 눈을 비볐음에도 남자는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고, 심지어 눈이 마주치기까지 했다. 분명 아까 내리던 비를 그대로 다 맞은 듯한 몰골이었다. 처연하던 얼굴은 이제 온데간데없었지만 그렇다고 밝은 얼굴도 아니어서, 꼭 비 맞은 개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어떤 말도 없이 가만히 보기만 하는 남자의 시선이 부담스러워 희주는 어색한 얼굴로 기계처럼 고개를 돌리고 걸었다. 걸음에 조금씩 속도가 붙고 있다는 것도 의식하지 못한 채 부지런히 걷고 걸어 차 앞에 도달해서야 한숨을 돌렸다. 희주의 머릿속엔 온통 물음표가 떠다니는 중이었다. 

설마 자신을 기다린 걸까? 말도 안되는 생각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런 종류의 생각에 사로잡혀있던 희주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사과도 했는데 자신을 기다릴 이유가 없었다. 기다리고 있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되는 일이었다. 분명 닮은 사람을 잘못 봤거나, 정말 만에 하나 본인이라 해도… 어쨌거나 잘못 봤을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너무 호러틱하지 않은가. 요즘 세상이 너무 흉흉하니 괜한 생각이 드는 게 틀림없다. 희주는 스스로의 생각을 차곡차곡 접어 의식의 한 구석으로 밀어두고 차에 올랐다. 머릿속은 금세 빨리 집으로 돌아가 따뜻하게 샤워를 하고 보송한 옷을 입은 채 여유를 즐기고 싶다는 생각으로 가득했다.

다음날 희주는 평소처럼 출근하려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어제의 그 남자가 여전히 그 자리에 앉아있었기 때문이었다. 어제부터 지금까지 줄곧 같은 자리에 있었던 게 틀림없었다. 똑같은 옷을 입고 나온 게 아니라면 말이다. 희주의 보얀 얼굴에 옅은 공포가 어렸다. 소름이 끼쳤다. 머리가 아프도록 부딪혔으니 분명 귀신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귀신이 아니라면 저 남자가 어째서 아직도 같은 자리에 있는 건지 설명이 되지 않았다. 미친 사람일까? 희주는 가능한 그쪽을 쳐다보지 않으려 애쓰며 반쯤은 뛰다시피 카페로 향했다. 

카페 오픈 준비를 위해 기계적으로 손을 움직이면서도 남자에 대한 생각은 쉽게 떨쳐지지 않았다. 같은 자리에 계속 앉아있는 것처럼, 희주의 머릿속에도 남자가 들어앉아버린 것이다. 뛰다시피 걸어온 방향을 봤을 테니 카페로 찾아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때문에 희주는 일하는 내내 긴장을 놓지 않은 채 틈틈이 창밖을 쳐다보며 경계하는 하루를 보내야 했다. 그러나 걱정과 달리 남자는 밤이 되어 가게 문을 닫을 때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가게 문을 잠그며 희주는 한숨을 쉬었다. 하루 종일 긴장하고 있었던 탓인지 어깨가 다 아팠다. 어깨를 주무르며 뗀 걸음이 얼마 가지 못하고 멎었다. 둘러가더라도 다른 길로 가는 것이 좋을지, 그냥 늘 다니던 길로 가는 것이 좋을지 고민에 빠진 탓이다.

둘러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이긴 했지만 한편으론 남자가 아직도 그 자리에 있을지 궁금증이 일기도 했다. 짧은 갈등 끝에 희주는 늘 다니던 길로 가보자 마음먹었다. 그리고 지금 이 시간까지도 그대로 있다면 경찰에 신고를 하면 되지 않을까. 희주는 긴장된 마음으로 신중하게 한 걸음씩 걸었다. 혹시나 남자가 그대로 그 자리에 있다거나, 자신을 보고 일어서서 움직인다면 당장에라도 경찰에 신고할 수 있도록 한 손에는 핸드폰을 꼭 쥔 채였다.

“와… 아직도 있네.”

멀리서도 똑같은 자리에 오도카니 앉아있는 모습이 또렷했다. 생긴 건 멀쩡하고 번듯한 사람이 왜 저러고 있을까. 해답을 찾을 수 없는 의문이 싹을 틔웠다. 멀찍이서 남자를 잠시 주시하던 희주는 통화버튼만 누르면 되게끔 112를 미리 눌러두고, 남자에게 조금씩 가까이 다가갔다. 물론 스무 걸음 안으로 가까이 다가갈 생각은 결코 없었다.

“어제 저랑 부딪힌 그 분 맞죠? 혹시 귀신은 아니…죠?”

경계하는 고양이처럼 다가오던 희주를 가만히 쳐다보던 남자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티를 내지 않으려 하는 듯 했지만 말을 걸어준 것이 못내 기쁜 눈치였다.

“노파심에 묻는 건데…… 어제부터 지금까지 계속 여기 앉아있던 건 아니라고 해줄래요?”

“어제부터 지금까지 계속 있었어요.”

단정하고 깨끗한 목소리였다. 희주는 남자의 목소리를 들었다는 것에 한 번, 말의 내용에 또 한 번 놀랐다. 남자는 진짜 이틀간 이 곳에 앉아있었다고 말하고 있었다.

“혹시 노숙자에요…?”

“아니에요.”

“그럼 왜…?”

“갈 곳이 없어서요.”

“방금 노숙자 아니라면서요.”

“집이 있긴 한데 갈 곳이 없어요.”

희주의 얼굴 위로 어이없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가출했어요?”

“그런 셈이죠.”

“다 큰 남자가?”

“억지로 결혼당하는 것보다 가출이 나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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