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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law of gravitation : 인력의 법칙 샘플

전생을 기억하는 남자 X 기억하지 못하는 전생의 연인

옷장 속 by 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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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봐도 낯설기 그지없는 남자다. 임선결은 나란히 서서 저를 따르는 남자에게 흘긋 시선을 던졌다 되돌린다. 저보다 십여 센티미터는 커 보이는 남자는 백구십 센티미터에 가까워 보였다. 봤다면 쉽게 잊히지는 않을 미형의 얼굴이었다. 짙게 쌍꺼풀이 진 큰 눈과 굳게 솟은 콧대하며 그 아래 자리한 붉은 입술이 묘하게 시선을 잡아끌었다. 거리에서 마주쳤어도 한 번쯤 뒤돌아볼 외모의 그 얼굴에 떠올라 있는 것은 그리움이었다. 대체 뭐가 그렇게 그리운 걸까. 처음 마주친 순간부터 이상한 남자였다.

넘어질 뻔 한 것을 잡아준 것까지는 고맙고 좋았는데, 얼굴을 보는 순간 마치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얼어붙어서는 얼굴을 빤히 쳐다봐 사람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연락처를 달라고 매달리는 것도 아니고 되레 연락처를 받아달라고 매달리지를 않나, 마지막 인사를 건네는 그 표정이 마치 비 맞은 개보다도 측은해 괜히 찝찝했더랬다. 그래서 고민 끝에 감사의 인사도 전할 겸 한 번만 더 만나주자 싶어 불러냈더니 사람을 보자마자 덜컥 끌어안기까지 했다. 그 측은한 얼굴만 아니었다면 이상한 놈이라 생각하고 상종도 않았을 그런 부류의 사람이었다.

"프랑스 음식 괜찮아요? 이 근처에 자주 가는 데가 있어요."

"네. 익숙해져서 괜찮아요. 마침 영국 오기 전에 프랑스에서 지내다 왔거든요."

옆얼굴에서 자꾸만 시선이 느껴지는 것 같아 임선결은 내심 묘한 불편함을 느끼며 저보다 한 뼘은 큰 남자에게로 눈을 돌리지 않으려 애썼다.

"여행 오래 다녔나 봐요."

"반년 쯤 된 것 같아요. 유럽 여기저기 내키는 대로 다녔어요."

"일은 안 해요?"

"여행이 끝나면요."

"몇 살인지 물어봐도 돼요?"

"올해 스물이요."

어리다. 임선결은 저보다 한 뼘이나 크고, 연상 또는 동갑내기 같아 보이는 남자가 고작 스무 살이라는 것에 속으로 적잖게 놀랐다. 스물이라고 하기엔 풍기는 분위기 같은 것들이 어른스럽지 않은가. 저와는 일곱 살이나 차이가 나는 나이였다. 그런데 마치 저를 알기라도 한다는 것처럼 대하는 것이 이상했다. 한국을 떠나온 지 사 년이었다. 일곱 살이나 나이가 차이난다면 한국에서 마주쳤을 리가 없을 것 같았고, 설령 마주쳤었다 해도 이미 기억에 남아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말로는 아는 사람과 많이 닮았다고 했지만, 임선결은 묘하게도 남자가 알고 있다는 사람이 자신인 것만 같은 느낌을 받았다. 뭐가 뭔지 정확하게 이해할 수가 없어 불편하고 찝찝했다. 

일 때문에 자주 방문하는 사이먼 리 갤러리와 같은 블록에 있는 어바인 메이페어는 캐주얼한 프렌치 레스토랑이었다. 임선결은 이곳의 음식을 비교적 좋아하는 편이었고, 음식이 맛없기로 소문난 영국이라지만 외국 음식을 주로 하는 어바인 메이페어의 음식은 그럭저럭 괜찮은 수준이라고 생각했다. 무엇을 고르겠냐 물었는데 추천해달라는 답이 돌아와 미간에 잠시 주름을 잡았던 임선결이 짧은 고민 끝에 제 몫의 닭고기 페일라드와 라비올리 드 세인트 진을 주문했다. 술도 함께 주문하겠느냐 묻는 웨이터에게는 가볍게 고개를 저어보였다. 어딘가 불편하고 찝찝한 초면의 남자와 술을 마시는 일은 별로 하고 싶지 않았다.

"…라비올리는 프랑스 음식이 아닌데요."

"나보고 추천해달라면서요?"

그러니 뒤늦은 불평은 듣지 않겠다는 뜻으로 임선결은 단호히 말했고, 남자는 그런 의미로 한 말은 아니었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그리고 어색한 기다림이 이어졌다. 남자는 부담스러울 정도로 임선결의 이곳저곳을 뜯어보고 있었고, 임선결은 그런 남자의 시선에 대해 한마디를 하는 게 좋지 않을까 타이밍을 재어보고 있었다. 분명 처음 보는 낯선 사람인데, 오래도록 찾던 사람이라도 보는 듯한 그리움을 담은 눈이 시선을 잡아당겼다. 아무리 기억을 곰곰이 되짚어도 이런 생김의 사람과 연을 쌓은 적은 없었다. 대체 누구를 자신에게 겹쳐보고 있는 건지는 몰라도 그것이 그렇게 썩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저기. 이름이 뭐예요?"

"선우해겸이에요."

"그래요. 선우해겸 씨. 그쪽이 안다는 사람이 나랑 얼마나 닮은 건지는 모르겠는데, 나는 계속 그런 눈빛 받는 게 편하지는 않거든요. 그러니까……."

그만 좀 쳐다봤으면 좋겠다는 말은 음식을 내어오는 웨이터로 인해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흩어졌다. 따뜻한 김을 솔솔 피워내는 음식을 앞에 두고 안 좋은 소리를 하는 것도 마음이 편한 일은 아니었기에 임선결은 하려던 말을 삼키고 포크를 들었다. 먹어요. 이 가게 라비올리가 맛있어서 주문한 거니까. 일견 불퉁한 그 말에 남자의 얼굴에 옅은 웃음이 번졌다. 곱게 한 말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웃음 짓는 걸 보면 역시 이상한 남자임이 틀림없었다. 임선결은 자신이 남자에게 괜히 연락을 한 것은 아닌지 조금쯤 걱정이 되었다.

"…미안해요. 불편하게 계속 쳐다본 거."

"괜찮아요. 얼마나 닮았기에 그러는 건지 좀 궁금하긴 하지만."

한입 크기로 잘라낸 닭고기를 찍어 입으로 가져가며 임선결은 호기심을 품은 눈빛을 해보였다. 눈빛을 받은 남자가 잠시 곤란하게 웃었다가, 무언가를 고민하고, 입안의 라비올리를 한참 씹다 삼킨 후 물 한 모금을 넘겼다. 무슨 말을 하려고 저렇게 뜸을 들이는 걸까. 임선결의 호기심이 조금 더 깊어져갈 즈음이었다.

"완전히 똑같다고 하면 어떨 거 같아요?"

"네?"

"내가 찾던 그 사람이 당신이라고 말한다면 어떨 거 같냐구요."

"그게 무슨 소린지 모르겠네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은 임선결의 말투가 못내 쌀쌀맞았다. 허튼 소리로 사람을 놀리려 한다는 생각이 든 탓이다. 그러나 남자의 표정은 약간의 긴장이 묻어있을 뿐 장난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고, 임선결은 그 때문에 조금 더 혼란스러워졌다. 쌀쌀맞은 한마디 이후 침묵으로 일관하는 반응을 어떻게 해석한 것인지 남자는 목을 한 번 더 축이고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은 진실이에요. 선결 씨를 속일 이유가 없으니까요.”

"……."

"…나는 내 전생을 기억하고 있어요. 태어났을 때부터 그랬죠. 이번 생은 선결 씨가 나보다 연상인 것 같네요. 원래는 반대였거든요. 전생의 나는 선결 씨와 아주 가까운…특별한 사이였는데, 선결 씨가 사고로 먼저 죽었어요.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나도 죽었고요. 죽을 때 차라리 잘됐다고 생각했던 것도 기억나요. 선결 씨가 없는 세상에서 제대로 살아갈 수가 없었거든요. 그랬는데…그랬는데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은 정말 몰랐어요. 운명같이 우연히 마주칠 거라고는 정말……."

임선결은 말을 잇지 못하고 입술을 꾹 깨무는 남자를 보며 생각했다. 지금 말하는 것은 허무맹랑한 거짓일 뿐이라고. 분명 거짓일 게 틀림없는데 마치 꼭 진실인 것처럼 들렸다. 왜 남자의 말이 진실처럼 들리는 건지 임선결은 혼란스러웠다. 그러고 보면 남자는 처음부터 마치 자신을 꼭 아는 사람처럼 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남자의 말에 넘어가 줄만큼 임선결은 순진한 사람이 되지 못했으므로. 짐짓 시큰둥한 얼굴을 하고 혼란을 감추며 포크 끝으로 얇게 저민 닭고기를 쿡 찔렀다.

"설마 진짜 믿으라고 한 이야기는 아니죠? 전생을 기억하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어요. 상상력이 제법 풍부하시네요, 선우해겸 씨."

"역시 안 믿을 줄… 알았어요. 선결 씨는 허무맹랑한 이야기 덥석 덥석 믿는 편은 아니었으니까."

"날 안다는 듯이 이야기 하지 말아요. 우리는 고작 며칠 전에 처음으로 잠깐 마주쳤던 것뿐이니까."

(이어지는 내용이 아닙니다)

임선결은 저도 모르게 가방을 꽉 움켜잡았다. 그러니까, 횡단보도 건너편에 선 남자를 발견한 순간에 말이다. 길 건너의 남자가 자신을 보지 않으려는 듯 눈을 덮어 가리는 것을 보며 며칠 내 애써 덮어놓고 있던 불편함이 보람도 없이 와르르 일어났다. 무슨 일이 있느냐 물어오는 애인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그저 가벼운 해프닝으로, 이상한 남자와 잠시 얽힌 것으로 치부하려 했기 때문이다. 비록 사람의 마음을 찝찝하게 만들긴 했으나 남자가 스스로 알아서 멀어져주니 그것으로 인연이 끝났으리라 생각했다. 이런 식으로 마주치게 될 줄 상상이나 했겠는가. 런던에 그렇게나 많은 길 중에서 왜 하필 같은 거리에 있는 건지. 대상 없는 원망이 솟았다. 이제 다시 볼일이 없다 생각했고, 차 찌꺼기처럼 남은 불편함도 서서히 희석되어 갈 줄 알았다.

다신 나타나지 않을 것처럼 잘 지내라고 인사까지 했으면 하루 빨리 런던을 떠났어야 하는 게 아닌가? 갈 곳 없던 원망이 애꿎은 남자에게로 향했다. 영영 바뀌지 않기를 바랐던 신호가 무심하게 바뀌고, 임선결은 어쩔 수 없이 걸음을 옮겼다. 부러 남자 쪽으로는 시선도 두지 않았다. 혹여나 그가 자신을 잡기라도 하면 어떻게 해야 하나 걱정한 것이 허무하리만치 남자는 쉽게 자신을 스쳐지나갔다. 반대쪽 인도를 밟은 다음에야 임선결은 자신이 여태껏 손이 하얗게 되도록 가방을 움켜쥐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뒤늦게 저려오는 손을 가볍게 쥐락펴락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조금 전까지 자신이 서 있던 방향에 남자가 등을 보인 채 서 있었다. 마치 그 자리에서 굳어버리기라도 한 듯 꼼짝을 않고 서 있었다. 차들이 파도처럼 쏟아져 두 사람 사이를 가를 때까지, 임선결은 멈춰선 남자의 너른 등을 바라보다 몸을 돌렸다.

또 일을 만족스럽게 처리하지 못했다. 가방을 키 작은 티 테이블에 올려둔 임선결이 가족과의 저녁식사 탓에 오늘은 보지 못할 것 같다는 연인의 문자를 무심히 읽어 내리고는 소파에 몸을 파묻었다. 지독한 피로가 몸 구석구석을 파고든다. 이대로 소파와 한 몸이 되어 편히 늘어져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영양가 없이 머릿속을 떠다녔다. 일이며, 연인, 저녁식사, 장을 봐야할 것 따위를 곱씹던 뇌리에 남자의 존재가 다음 주제로 떠올랐다. 임선결은 남자에 대한 생각을 별로 하고 싶지 않았으나, 울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드는 얼굴을 하고도 저를 모른 척 스쳐 지난 것이 몹시 신경에 거슬렸다. 옷에 튄 빗물처럼 쉽게 털어낼 수 있는 무게는 아니었다.

남자는 왜 아직 런던에 머무르고 있을까. 오늘과 같이 우연한 마주침을 가장해 저를 보기위해? 그것은 자기애가 과한 답이다. 어쩌면 이제야 본격적으로 런던 관광을 하려는 걸지도 몰랐다. 물론 반쯤 죽어가는 어두운 얼굴로 관광을 하는 사람은 없을 테니 그것은 가장 신빙성 있을지언정 가장 가능성이 없는 이야기였다. 부족하지 않은 집안이라고 하니 돈이 떨어져 발이 묶인 것도 아닐 것이다. 그러고 보면 낮에 마주친 남자의 얼굴이 어딘가 까슬하고 마른 것 같다 느꼈었다. 전생의 연인이었다는 사람에게 현생에서 거절당하는 것이 그렇게도 충격적인 일일까. 전생을 기억하지 못하는 임선결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도, 짐작해볼 수도 없는 감정이었다.

그리고 그 다음날부터, 마주친 것이 정말 우연이었다는 듯 남자는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다. 임선결은 마음이 편해졌으나, 오히려 남자의 존재를 떨쳐낼 수 없었다. 그가 어느 거리를 배회하고 있을지에 대해 생각했고 과연 오늘은 런던을 떠났는지에 대해 생각했다. 스스로 의식하지 못한 사이 횡단보도 앞에만 서면 서양인과 견주어도 작지 않은 키를 가진 아시안을 찾거나, 메이페어나 트라팔가 광장을 지나는 일이 있을 때면 괜히 보고 있던 휴대전화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밀어내려 할수록 끌어당겨지고 있다는 사실을 임선결은 알지 못했다. 자신의 행동을 '불편한 그와 다시 마주칠까봐 조심하는 것'으로 규정할 뿐이었다.

묘하게 신경이 곤두선 나날들이 이어졌다. 임선결은 쉽게 지쳤고 진이 빠졌다. 옷에 튄 빗물처럼 남자를 쉽게 탈탈 털어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마음처럼 그럴 수 없어서 걱정을 내려놓지 못하는 연인에게 하루하루 담을 쌓았다. 임선결은 제 연인에게 남자에 대해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어느 남자가 계속 생각나는데, 그 남자는 전생에 자신이 연인이었다고 주장하며 옆을 맴돌았다 말하면 믿기는 할까. 지금은 코빼기도 안 비치는데 그게 더 찝찝하다고 말하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최근 겪은 것, 느낀 것 가운데 진실 되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해소되지 않는 답답함에 임선결은 잘 가지도 않던 바를 찾았다. 메이페어도 트라팔가 광장도 아닌 다른 곳으로, 혹시 마주칠지 모를 남자를 만나지 않을 수 있을 만한 곳으로. 그렇게 찾아간 곳이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의 뒷모습이 보이는 골목에 자리한 작은 바였다. 테이블 좌석은 몇 있지도 않고, 바텐 의자만이 예닐곱 놓인 조그만 가게엔 없을 거라 생각했던 손님들이 제법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었다. 임선결은 코트를 벗어 등받이에 걸쳐두고 바텐 의자에 엉덩이를 붙였다. 평소에 술을 즐기는 편은 아니었으므로 가장 무난한 맥주를 한 잔 시켜놓고 그와 함께 주문한 피스타치오는 먹지도 않은 채 껍질만 까 일렬로 늘어놓는데 집중했다. 그런 것에라도 정신을 쏟아야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대충 느낌으로도 제법 오랜 시간이 흘렀다는 것을 알 수 있을 즈음이었다. 비어있던 옆자리에 걸터앉는 인기척에, 임선결은 저가 들어올 때만 해도 몇 자리 비어있는 것을 봤는데 그세 자리가 다 찬 건가 생각하며 별 생각 없이 옆을 쳐다보았다. 밤색의 눈을 마주한 순간 움찔, 경직되었던 얼굴은 결국 짧은 헛웃음과 함께 피스타치오 껍질 위로 떨어져 내렸다. 며칠 내내 지긋지긋하게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던 주인공이 거기 있었다. 이런 구석진 곳이면 마주하는 일 따위 결코 일어나지 않을 줄 알았다. 런던을 떠나지 않았을지 모를 그와 마주치지 않기 위해 고르고 고른 곳에서 이렇게 마주쳐버리다니, 임선결은 자신이 지지리도 운이 없다 생각했다.

"자리가 없어서… 내가 나갈게요. 마시던 거 마셔요."

"…됐어요. 앉아요."

이런 상황을 예상하지 못한 것은 남자 역시 매한가지인 듯 당황한 밤색 눈이 어둑한 조명 아래에서 흔들렸다. 임선결은 고개를 돌렸다. 남자를 탈탈 털어버리지 못해 골머리를 앓고 있으면서 선뜻 앉으라고 대꾸한 자신의 행동을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그가 불쌍해서? 새삼 그의 이야기가 더 궁금해져서? 어쩌면 이것이 남자를 완전히 털어낼 수 있는 기회일지도 몰랐다. 임선결은 바텐더를 불러 제 것과 같은 한 잔을 남자에게 샀다. 한국 나이로 스물이니 영국법대로 따져도 음주에는 문제가 없으리라. 임선결은 자신이 이런 생각까지 하고 있다는 것이 못내 우스웠다.

"그거 알아요? 당신이랑 나랑 일곱 살이나 차이나요."

"…그래서요?"

"나는 만나는 사람이 있고, 내 눈에 선우해겸 씨는 갓 졸업한 스무 살 애인데 우리가 마주쳤던 걸 애인에게 말할 수 없었어요. 그 허무맹랑한 전생 이야기도, 당신에 대한 것도요. 횡단보도에서 마주쳤던 그날 이후 난 꼭 내가 바람이라도 피우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그때부터 지금까지 계속이요. 우린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내가 왜 그런 기분을 느껴야 해요. 나한테 왜 이래요? 뭐가 문제에요, 도대체. 날 그만 편하게 해줄 수는 없어요?"

꾹꾹 담아두었던 말을 쏟아낸 임선결이 긴 원망조 끝에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며칠 내내 곤두선 신경이나 답답함과 피로 그 모든 것들이 한 문장으로 귀결되었다. 임선결은, 선우해겸이라는 남자와 아무런 사이가 아니다. 그럼에도 바람을 피우고 있는 듯한 기묘한 죄책감이 신발 속의 가시처럼 자꾸만 사람을 불편하게 만들고 있었다. 임선결은 이제 혼란스럽기까지 했다. 저와 바람을 피우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하는 상대가 지금의 제 연인인지, 전생의 연을 주장하는 이 남자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왜 내 앞에 나타나서 사람을 복잡하게 만들어요."

"미안해요. 복잡하게 만들어서요. 나도 이렇게 마주치게 될 거라곤 정말 상상도 못했지만……."

"대체 나한테 전생 이야기는 왜 한 거예요?"

"나는 선결 씨가 내 운명이라는 걸 믿으니까요."

한 치의 의심도 없다는 듯 단정히 내뱉는 문장이 무겁게 내려앉는다. 며칠의 간격을 띄우고 다시 만난 남자는 덜 측은해 보였고, 어느 방향으로든 스스로의 생각을 정리한 듯 보였으며, 여유를 찾은 것 같았다. 여태껏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는 것은 저뿐이었다. 임선결은 남자의 말을 부정하듯 고개를 저었다. 움직임을 따라 흔들리는 머리카락이 눈썹 끝을 간질인다. 차분하게 가라앉은 눈을 보면 더 혼란스러울 것만 같아서, 임선결은 시선을 피했다.

"난 운명 같은, 그런 허황된 거 안 믿어요. 믿을 나이도 지났고요."

"믿을 수밖에 없을 거예요. 흔들리고 있잖아요, 지금."

"이건 흔들리는 게 아니―“

드르륵, 앉은 채로 가뿐히 끌려가는 의자에 임선결이 놀란 듯 말을 멈췄다. 반사적으로 움켜쥔 남자의 팔이 단단했다. 둘 사이의 거리는 지나치게 가까웠고 음영 아래 검게 보이는 눈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선결 씨는 지금 흔들리고 있는 거예요. 시선을 옭아매듯 상체를 가까이 기울인 남자가 속삭였다. 뜨거운 숨이 닿는다. 마치 삼켜질 것만 같았다. 그의 나직한 한마디가 더 이상 부정할 수 없을 만큼 임선결을 흔들었다.

"전생의 인연이라면서요. 난 지금의 삶에서 만나는 사람이 있다니까요."

"결정은 당신이 하는 거예요. 밀어낼수록 끌어당겨지는 운명을 잡을지, 밀어내면 멀어지는 인연을 잡을지."

어떻게 할래요? 선결 씨. 이미 답을 알고 있다는 듯 휘어지는 눈매를 가만히 마주하던 임선결은 결국 시선을 피했다. 그의 말대로, 제게는 이미 답이 있었다. 임선결의 대답을 기다려야 할 남자는 거기서 끝내지 않았다.

“지금 선결 씨에게 키스할 거예요. 피하느냐, 피하지 않느냐에 따라 선결 씨의 대답도 달라지는 거라고 생각할게요.”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그저 가까운 거리에서 혈색이 도는 남자의 입술로 눈을 내리깔았을 뿐이다. 스스로에게 답이 있다는 것을 인정한 순간, 임선결의 손은 남자를 밀어낼 힘을 잃었다. 남자가 지금도 충분히 가까운 거리를 더 좁혀온다. 가게 안 어둑한 조명이 만들어내는 그림자 아래에서, 남자는 다정하게 입을 맞추었다. 그 생경한 다정에 임선결은 질끈 눈을 감았다. 조심스레 아랫입술을 머금는 남자의 입술이 뜨겁게 느껴졌다. 한 번, 두 번 머금던 입술을 느릿하게 핥아올리는 감각이 선명했다. 

어쩐지 가슴께가 무겁게 조여 오는 것만 같다. 입술 사이를 가르듯이 구는 혀의 움직임이 농밀했다. 입술을 열지 않을 수 없었다. 여즉 남자의 팔을 쥐고 있던 임선결의 손에 꾸욱, 힘이 들어갔다. 들릴 듯 말듯 남자가 한숨처럼 웃는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밀고 들어온 혀가 여린 입천장을 핥고 혀뿌리를 문질렀다. 그에 움찔거리는 혀를 휘감듯이 해 은근하게 부벼온다. 모든 감각이 지나치게 선연했다. 한참 입안을 부드럽게 휘젓던 혀가 물러가고, 맞닿아있던 입술이 떨어지는 소리가 물기에 젖어있었다. 타액에 젖은 제 입술을 핥아올린 남자가 엄지로 임선결의 입술을 훔쳐냈다.

“…대답. 잘 들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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