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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새북 샘플

옷장 속 by 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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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물패의 경쾌한 가락이 바람을 타고 춤을 춘다. 오방색 깃발이 허공에 나부끼며 몸을 흔들었다. 사람들은 너도 나도 밝은 얼굴로 가락을 즐기며 경사를 함께 나누었고, 군데군데 펼쳐진 잔칫상은 상다리가 휘어지지 않을까 걱정스러울 만치 풍성했다. 오늘은 영산靈山을 터 삼아 살아가는 호랑이족과 여우족의 가장 큰 잔칫날, 산군님과 여우의 혼인날이었다.모두가 웃는 낯으로 잔치를 즐기는데 반해 가라앉은 낯의 두 사람이 있었으니, 잔치의 주인공인 신부와 신랑이었다.

“좀 웃지 그러나.”

제게만 들릴 정도로 나직이 건네지는 한마디에 원의 표정이 한층 더 딱딱하게 굳었다.

“웃음이 나겠습니까? 그러는 산군이나 웃으시죠.”

“웃음이 나겠나? 신랑 된 자가 죽상인데.”

화려한 홍원삼을 차려입은 산군의 옆모습을 잠시 쳐다보던 원이 조그맣게 콧방귀를 끼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렇게 도망 다닌 결혼이었는데, 결국 일이 이렇게 되고 말았다. 당장이라도 증발해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산이 점지해준 인연이라 할지라도 멀리 도망쳐버리면 무시할 수 있을 줄 알았던 과거의 스스로를 멍청하다 욕해본들 혼인식 자리에서 사라질 수는 없었다. 무표정하게 나란히 앉은 원과 산군 앞으로 흐드러지게 핀 작약 한 송이가 허공을 날아 두 사람의 발치에 잔뜩 쌓인 작약 더미 위로 떨어져 내렸다. 혼인하는 신랑과 신부를 축하하는 의미로 혼인식에 참여한 모두가 하얀 작약에 축복을 담아 던지는 것이 전통이었다.

착잡한 눈으로 쌓여가는 작약을 바라보던 원이 입고 있는 청단령의 소매 끝을 만지작거렸다. 호랑이에게 잡혀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는 말이 있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긴장을 놓지 않으면 뭐든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원은 인간세상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곳에 두고 온 제 정인이 보고 싶었다. 마지막으로 본 모습이라곤 창백하게 질린 채 곧 죽을 사람처럼 잠들어있는 모습이 다였다. 산이 뜻이란 게 참 무서웠다. 그 뜻을 조금 거슬렀다고 소중한 사람을 망가뜨렸다. 애타는 마음을 가지고 놀 듯 정인의 심장을 몇 번이고 멈추었다 뛰게 만들었다. 자신이 산의 뜻대로 이렇게 혼인을 치르고 있으니 지금쯤이면 괜찮아졌겠지. 그렇게 믿는 수밖에 없었다. 무릎 위로 물방울 하나가 툭 떨어져 내렸다. 남색의 청단령을 더욱 짙게 물들이며 스며든 눈물이 섧다. 원은 반사적으로 입술을 꼭 깨물었다. 울지 않을 것이다.

혼인식은 해가 뉘엿뉘엿 기울어 갈쯤에야 끝이 났다. 평상복으로 갈아입은 원은 저녁식사도 마다한 채 침실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핸드폰을 꺼냈다. 통화권외 지역 표시가 뜬 핸드폰은 배터리가 있으니 켜지는 것일 뿐, 인간 세상이 아닌 이곳에서는 아무런 쓸모가 없었다. 그럼에도 원은 핸드폰을 소중히 꼭 쥐고 내려다보았다. 인간 세상에서 유일하게 가져올 수 있었던 물건이다. 그녀가 제게 사 준 것이다. 지금이라도 당장 통화버튼을 누르면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만 같은데. 보고 싶어도 볼 수 없고, 듣고 싶어도 들을 수 없다는 사실이 원의 마음을 너무나 힘들게 했다. 바깥에서 들려오는 왁자한 소리를 흘려들으며 원은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정말 문자 그대로 앞날이 캄캄한 암흑이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불현 듯 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어 올린 원의 시선과 이제 막 방으로 들어서던 산군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부딪혔다.

“불도 안 밝히고 궁상이군.”

원은 대꾸하지 않고 다시 고개를 묻었다. 산군 역시 대꾸를 바라고 한 말은 아니었던 듯 방 문을 닫고 들어와, 방에 불을 밝히고 원을 무시한 채 제 할 일을 했다. 잘 준비라도 하는 건지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화장실을 들락거리는 소리, 물소리 따위가 원의 귀를 두드렸지만 원은 고집스레 고개를 들지 않았다. 방 밖으로 나가고 싶다는 생각이 불쑥 치솟았다가도 귓가를 맴도는 장 아저씨의 목소리가 자꾸만 발목을 잡았다.

‘도련님, 초야는 꼭 한 방에서 보내야 합니다. 이제 제발 속은 그만 썩이세요.’

집안의 잡일을 도맡으며 어릴 적부터 자신을 보아왔고, 인간 세상으로 도망친 자신을 설득하기 위해 몇 번이고 찾아왔던 사내는 어떤 의미론 제게 작은 아버지 같은 존재였다. 그런 이가 제발 그만 속 썩이라며 양 손을 붙잡고 절절하게 말을 하는데, 그에게 받은 큰 도움 때문에라도 원은 더 이상 그의 말을 거절할 수 없었다. 생각에 잠겨있는 사이 방 안에 어둠이 내렸다. 산군이 밝혔던 불을 끈 것이다. 잠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고, 사위가 고요해졌다. 원은 꼼짝도 않은 채 가만히 숨만 내쉬었다.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계속 그렇게 구석에 처박혀 있을 건가?”

“…….”

“당신이 한 건 약탈혼이 아니야. 언제까지 납치당한 사람인 양 그러고 있을 거지?”

“…….”

아무 대꾸도 않자 답답해하는 듯한 한숨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더니 이내 저벅저벅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원은 저도 모르게 바짝 긴장해 몸을 굳혔고, 잠시 후 머리 위로 푹신한 것이 덮였다. 이불이었다. 이게 뭐지.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황한 원이 눈을 깜빡이는 사이 문이 열렸다 닫혔다. 산군이 방을 나간 것이다. 초야는 꼭 한 방에서 보내야 한다던 목소리가 다시 한 번 귓가에 울렸다. 그래서 저도 억지로 참고 얌전히 있었는데, 저렇게 쉽게 나가버리다니. 고민하던 게 우습게 느껴질 정도로 어처구니가 없었다. 산군이 저래도 되는 건가. 원은 머리를 덮은 이불을 끌어내려 닫힌 문을 황망하게 쳐다보았다. 그렇게 방을 나선 산군은 날이 밝고도 방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아무래도 다른 방에서 밤을 보내고 그대로 영산을 한 바퀴 돌아보러 나선 모양이었다. 복잡한 머리에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운 원이 뻐근한 몸을 일으켜 방 밖으로 나서려던 때였다.

“도망쳤다고 해서 영영 안 올 줄 알았는데 그래도 돌아와서 혼인식은 했네.”

“산의 뜻이 지엄한데 그걸 무슨 수로 끝까지 거부하겠어. 철없이 고집 부렸던 거겠지.”

문 밖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원의 손이 문고리를 잡은 채 멈칫했다.

“할아버지께 들었는데 지금까지 도망친 경우는 한 번도 없었대.”

“이번 여우는 별종이기라도 한 모양이지.”

원은 수군거리는 목소리가 멀어져 들리지 않게 된 후에도 한참을 가만히 서 있다 문을 열고 방 밖으로 나섰다. 아무도 없는 마당이 고요했다. 조금 전 들었던 말이 맴돌았다. 여우 운운한 것을 보면 떠들던 것은 호랑이임이 틀림없었다. 괜한 화가 호랑이들의 대표 격인 산군에게로 향한다. 원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산군을 속으로만 욕하며 부엌으로 향했다. 목이 말라 물이라도 한 잔 마실 요량이었다.

“너 몰라? 걔 인간 세상으로 도망가더니 인간한테 홀려서 왔잖아.”

“난 그냥 헛소문인 줄 알았지.”

“왜 그런 놈이 산군님의 배필로 정해졌는지 몰라. 산의 뜻은 도무지 알 수가 없어.”

“근데 얼마나 요사스러운 인간에게 걸렸기에 몇 달 사이에 단단히 홀려서 돌아왔대.”

오늘은 남의 입을 통해서 제 이야기를 듣는 날이라도 되는 모양이다. 하지만 제 이야기를 하는 것은 참아도 제 정인을 두고 요사스럽다는 둥의 말을 하는 것은 참을 수 없었다. 

“요사스러운 인간 아니고, 홀린 것도 아니야. 그리고 나도 내가 왜 배필이 됐는지 정말 알고 싶다.”

열린 부엌문의 문지방을 타넘으며 원이 쌀쌀맞게 반박했다. 뒤늦게 꿀 먹은 벙어리가 된 여우 둘이 원의 눈치를 살핀다. 저와 함께 배필 교육을 받았던 성과 홍이었다. 호랑이는 이백 년에 한 번 날 때부터 산군으로 점지되어 백호로 태어난다. 반면 여우들은 성인이 되어야 털이 희게 변하므로 그 전까지는 누가 그 대代 산군의 배필이 될지 알 수 없었다. 때문에 백호가 태어난 해에 같이 태어난 여우들은 어릴 적부터 남녀에 상관없이 각종 집안일을 배우도록 되어있었다. 백호가 영산을 관장하는 바깥일을 한다면 여우는 집안일을 도맡는 것이다. 원이 성과 홍을 지나쳐, 물병을 꺼내고 컵에 물을 따라 한 컵을 다 비울 때까지 그들은 꼼짝 않고 서 있었다. 원은 제 눈치만 살피는 두 사람을 빤히 쳐다보았다.

“넘길 수 있는 자리였으면 진즉에 넘겼을 거야.”

“아, 알지.”

“당연히 알고말고.”

정말 할 수만 있다면 당장에라도 배필 자리를 떠맡기고 싶은 마음이 굴뚝이었다. 원은 햇수로 50이 되어 성인식을 치르던 날 하얗게 변해버린 제 털을 떠올렸다. 그러자 자연스레 그 날 느꼈던 절망이 되살아났다. 배필 교육을 받으면서도 저처럼 배필이 되기 싫어하는 아이들이 있는가 하면, 산군의 배필로 점지되길 소원하는 아이들도 있었다. 그런 여우들을 점지하면 될 것을. 원은 할 수만 있다면 오래된 이야기 속 산신의 수염이라도 잡고 마구 흔들고 싶었다. 왜 하필 배필 따위 하고 싶지도 않던 자신을 점지한 거냐고.

“앞으로 그 인간에 대한 이야기 하지 마. 집안일 도와주는 걸로 뽑혔으면 적어도 나랑 척은 지지 말아야지.”

“어, 응. 당연하지.”

“앞으로 이야기 안 해. 아침 차려줄까? 뭐 먹어야지.”

“됐어, 아무것도 안 먹고 싶어.”

원은 어색하게 웃어 보이는 성과 홍을 일별하고 우울하게 부엌을 나섰다. 산군은 오후 늦게나 되어야 돌아올 테니 그 동안은 산군의 얼굴을 볼 일도 없는데 기분이 풀어지지 않았다. 방으로 돌아온 원은 구석자리에 이불을 두르고 앉아 주머니에 넣어놓았던 핸드폰을 꺼내 또 하염없이 그것만 만지작대며 쳐다보았다. 충전을 할 수도 없는데 배터리가 벌써 절반은 닳았다. 배터리가 닳은 만큼 원의 속도 새카맣게 탔다. 혼인을 해버린 이상 인간 세상으로 다시 나갈 수도 없었다. 혼인으로 맺어진 백호와 백여우가 영산을 떠나면 산을 두르고 있는 결계가 흔들린다나 뭐라나. 애초에 산군은 영산을 벗어날 수 없기도 했다.

단아하게 생긴 듯 하면서도 달리 보면 매섭게 보이는 산군이 떠오르자 다시 또 산군이 원망스러웠다. 자신을 고른 게 산군이 아님에도 그랬다. 그래서 원은 아예 대놓고 산군을 씹었다.산군은 체격도 큰데 뚜렷한 이목구비에서 묘하게 위압감을 풍기는 게 가까이 하기 어려웠다. 거기다 키는 또 얼마나 큰지, 그리 작지 않은 키인 저와도 눈높이가 비슷한 사람이었다. 묘하게 주홍빛이 도는 눈동자는 또 얼마나 사나운지 어두운 데선 분명 샛노란 안광을 뿌릴 게 뻔했다. 그럼 그냥 짐승 아닌가. 별의 별 것을 다 꼬투리 잡아 씹어대고 나니 속이 조금 풀리는 것도 같았다. 이정도 하면 지금쯤 한창 귀가 간지럽겠지. 원은 이불을 두른 채 일어섰다. 깨끗이 씻고 이불을 정리하면 기분이 좀 더 나아질 수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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