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밤빵] 기본 타입

[일반] SAMPLE_014

BL / 기본 타입 (14일) / 9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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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들어온 의뢰‚ 확인한 건가요?”

 

서애‚ 하고 이름을 부른 앨런이 태연한 태도로 문을 열고 걸어들어왔다․ 문 안쪽에는 갖가지 십자가 모형과 더불어 양 떼들 사이에 우뚝 선 성모 마리아의 형상이 유난스러울 정도로 찬란하게 돋보였다․ 성모 마리아는 제품에 어린 예수를 안고 있었으나 포대기에 싸인 채였기에 예수의 얼굴은 제대로 보이질 않았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이마와 양쪽 어깨에 성호를 그은 서애는 그 앞에서 조용히 기도를 올린 뒤 앨런을 바라보았다. 서로를 빤히 응시하던 두 사람은 잠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으니, 이윽고 먼저 입을 연 사람은 서애였다․

 

“네‚ 했어요․”

“문 앞에 의뢰 쪽지가 그대로 남아있던데요․”

“네‚ 확인하고 문 앞에 도로 놔뒀으니까요․ 당연한 이야기네요․”

 

서애는 마냥 태연한 태도로 대답했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던 앨런은 자연스레 문 옆에 놓인 성수에 손가락을 살짝 담갔다가 빼내곤 성호를 그었다․ 그리곤 서애의 가까이에 걸어온 뒤 성모 마리아상에 한 번 고개 숙여 인사하곤 다시 그를 마주했다․

 

“그럼 왜 이걸 문 앞에 다시 놔둔 겁니까?”

“읽어보셨나요?”

“네․”

“그럼 그걸 우리가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하나요?”

 

서애의 물음에 앨런은 잠시 고민했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하냐니․ 의뢰 내용을 한 번 더 상기한 그의 머릿속엔 여러 생각이 스쳤다․ 어린 딸에게 깃든 악귀를 제발 없애달라던 간절한 어머니의 소원이 쪽지 안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아마 여러 번 찾아왔으나 거절당했기에 결국 쪽지로 남겨둔 것 같았다․ 쪽지 내용을 살펴보면 사정이 안쓰러울 만큼 딱해서 도와주지 않고선 못 버틸 것 같았다․ 이제 막 다섯 살이 된‚ 불임에도 불구하고 간신히 얻게 된 세상의 단 하나뿐인 딸이 악귀에 씌어서 매일 밤낮을 울고 웃는다는데․ 감히 그 어떤 어머니가 이를 가만 놔둘 수 있겠는가․ 쪽지에는 어머니의 처절함이 한껏 묻어났기에 앨런은 눈물이 나려던 걸 고개를 들어 올리고 참아야 했다․ 서애는 딱히 저와 같은 감정을 느끼지 않은 것 같았지만 말이다․

 

“할 수…… 있지 않을까요․”

“굳이 말한다면 못한다에 가까워요․ 대상자에게 원한이나 저주도 품지 않은‚ 그저 순수하게 타인을 괴롭히고 죽이려는 악귀에 가까우니까요․”

“하지만 어린아이에게 붙은 걸 보면 힘은 약하지 않을까요?”

“그런 녀석들은 없앤다고 힘만 써봤자 다른 곳으로 쫓아낼 뿐이지 아예 힘도 못 쓰게 막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요․ 괜한 소리 말고 성모상부터 닦으시죠․”

 

서애의 말에 앨런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등을 돌렸다․ 서애의 말이 아예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었다․ 그는 자신보다야 다양한 구마 경험을 가졌으며 아는 것도 현저히 많았으니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모두 같은 말 같은데 왜 굳이 세 개로 나눈 거냐던 제 물음에 어처구니없다는 듯 바라보던 그의 표정이 여전히 생생하게 남아있었다․ 제 질문이 그렇게 이상했던가․ 여전히 그 셋의 차이가 불분명하긴 하나 앨런은 서애가 시킨 대로 마른 천을 가지고 와선 그걸로 성모상을 세심히 닦기 시작했다․ 상대적으로 앨런의 키가 더 컸기에 근래 들어선 이런 것도 앨런이 맡는 경우가 많았다․

 

그사이 서애는 서류 뭉치를 살폈으며 앨런은 가만히 저 혼자서 생각에 잠겼다․ 정말 할 수 없는 걸까․ 해서는 안 되는 걸까․ 그렇게 한참 생각하며 성모상을 닦던 중‚ 손에 들린 천이 바닥에 툭 떨어졌다․ 아……․ 허리 숙여 천을 주운 앨런은 그대로 서애를 바라보았다․ 서애는 여전히 시선을 서류 쪽에 둔 채였다․

 

“서애․”

“싫어요․”

“……아직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는데요․”

“아‚ 실수․ 뭔가 얘기하신 줄 알았네요․”

“……․”

 

둘 사이로 다시금 정적이 흘렀다․ 앨런은 아무런 말 없이 서애를 바라보았으며 서애는 팔락거리는 종이 소리를 내고선 천천히 글을 읽어내려갔다․ 미묘한 적막이 흐르고 십 초 정도가 지났을까․ 그리 긴 시간이 아닌 것처럼 느껴질 시간이었으나 누군가를 바라보고 또 누군가가 바라본다는 걸 의식한 상황 속에선 그 십 초도 꽤 길게 여겨질 수밖에 없었다․

 

하아……․ 결국 서애가 먼저 한숨을 크게 내쉬곤 앨런을 바라보았다․ 사실 앨런이라면 저런 식으로 반응하리라 으레 생각했다․ 그럴까 봐 일부러 쪽지도 바깥에 놔둔 거였는데 그걸 또 어떻게 확인한 건지․ 평소에 걸을 때마다 주위를 사방으로 연신 둘러보며 걷는 건지․ 서애는 어디 한 번 이야기해보라는 듯 앨런과 시선을 마주했다․

 

“혹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신가요?”

“서애가 안 하겠다면 저라도 하겠습니다․ 구마 의식․”

“저 없이 혼자서 그걸 해내겠다고요?”

“어깨 너머로 봐왔으니까요․”

 

허․ 서애는 기가 찰 노릇이었다․ 뭘 알고 저런 식으로 말하는 걸까․ 구마라는 건 구마 사제의 영력이 특히 더 중요하게 여겨지는 법이었다․ 단순히 하고자 하는 의지만으로 되는 게 아닐뿐더러 방법을 안다고 해서 그걸 따라 하는 것만으로도 구마에 성공하진 않았다․ 만약 그렇게 됐다면 개나 소나 모두 구마 사제가 되겠다며 신부복을 입고 십자가를 흔들고 있었겠지․ 하지만 그게 아니기에 구마 사제가 따로 존재하는 것이며 역경과 고난 같은 수행을 거듭한 뒤 진정한 하나의 구마 사제로 거듭나는 것이었다․ 그 기준으로 미루어 보아‚ 앨런은 아직 멀어도 너무 먼 상황이었다․ 영력은 나쁘지 않긴 했어도 구마 할 기술과 능력을 갖추지 못했기에 그 영력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한다는 게 문제인 셈이기도 했으니․ 애초에 이게 단순 구마라고 해도 앨런이 직접 나설 가능성은 희박했다․

 

“구마 사제의 조건․ 교회법전 제1172조 2항의 내용을 기억하시나요?”

“깊은 신앙심과 높은 학식‚ 그리고…… 자신감……․”

“…… 지혜 등을 갖춘 모범적인 신부 중에서 까다롭게 선발한다는 내용이에요․ 구마예식서에 나온 의식 방법은 어떻게 되죠?”

“먼저 거룩한 성인을 부른 뒤에 도움을 청하고 복음서를 읽은 뒤 기도…… 아니‚ 먼저 부마자에게 안수 기도를……․”

“하아……․”

 

서애는 이전보다도 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럴 줄 알았다․ 단순하고도 당연한 구마 의식에 관해서도 이렇게나 헷갈리면서 어떻게 혼자라도 해내겠다는 건지․ 뒤늦게 앨런은 자신이 착각했다고 말했으나 서애는 당연히 그를 혼자서 보낼 수 없었다․ 무슨 일이 생길 게 눈에 뻔한데 어떻게 그만 홀로 보내버릴 수 있겠는가․ 그렇게 된다면 다음에 이곳에 발을 디딜 사람은 앨런이 아니라 앨런의 탈을 쓴 악귀일 테였다․ 그것만큼은 절대 안 되었기에 서애는 다소 냉담한 태도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앨런이 원체 배려심 있고 다정하다는 건 알았으나 때와 장소를 구분할 줄 알아야 하고 대상과 상황을 파악할 줄 알아야 했다․ 당연한 것이었다․ 정말 당연한 건데‚ 왜 앨런만 이걸 모르는 건지․ 타인을 돕고 싶다는 지극한 이타심이 그의 눈을 가려버린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과 함께‚ 서애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숨을 크게 내쉬었다․ 앨런이 저렇게 나오는 걸 말릴 수는 없을 것 같았고 혼자 보내는 건 더더욱 무리였다․ 결국 서애는 백기를 흔들어야만 했다․ 승패가 뻔히 보이는 게임 앞에서 앨런만 덜렁 내던질 순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알겠어요․ 저도 함께 가죠․”

“무리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건 제가 해야 할 말인 것 같은데요․”

 

숨을 깊게 고른 서애는 지끈거리는 머리의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뭐‚ 그래도 구마가 어려울 뿐이지 아예 불가능한 건 아니었다․ 적어도 그 어린 몸에서 나올 수만 있다면 일단 그것만으로도 괜찮을 테니까․ 설마 그새 다른 인간의 몸을 찾아 들어가진 않겠지 싶던 서애는 제 나름대로 구마 의식에 관한 계획을 만들기 시작했다․

 

가장 중요한 건 여자아이의 몸에서 벗어나는 것이었다. 아이의 몸은 원체 유약했던지라 악귀에 괜히 잘못 걸리면 꽤 오랜 시간을 고생하고 앓다가 죽을 수도 있었다․ 게다가 그 악귀는 누가 보기에도 죽일 목적으로 달려든 것이었으니‚ 그게 아니었다면 굳이 그 작은 몸에 들어가진 않았을 거였다․ 그저 생이란 걸 살아보고 싶고 몸을 가지고 싶었을 뿐이라면 더 젊고 건장한 청년의 몸에 들어섰겠지․ 그리 생각한 서애는 가장 먼저 아이의 생명을 중요시해야겠다 다짐했고‚ 서애가 연신 생각을 곱씹던 중에 앨런은 주운 천을 들고선 성모상을 열심히 닦았다․ 같은 부위를 너무 벅벅 닦았던 탓인지 금칠 된 부위가 살짝 뜯어진 것처럼 보였으나 앨런은 미처 이를 눈치채지 못했다․ 지금은 그저‚ 자신이 해야 하는 일들에 관해 생각할 뿐이었다․

그리고 구마 의식 당일․ 두 사람은 함께 어느 저택을 찾아갔다․ 이쪽이에요‚ 라고 말하며 두 사람을 안내하던 어머니의 얼굴은 이전에 마주했을 때보다도 훨씬 더 초췌하고 창백해 보였다․

 

“두 분이 와주셔서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부마자의 상태는 어떤가요․”

“부마자요? ……아‚ 애나를 말씀하시는 거군요․ 음…… 솔직히 말하자면 상태에는 달라질 게 없었어요․ 이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더 악화되지 않았으니 좋다고 말해야 할 것 같은데 아이가 계속 제 의식을 차리지 못하니……․”

 

어머니는 끝내 참았던 울음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서애는 고개를 돌렸으며 앨런은 제 안주머니에 놓인 손수건을 꺼내 어머니에게 건넸다․ 부인‚ 너무 염려하지 마세요․ 따님은 반드시 원래대로 돌려놓겠습니다․ 앨런이 조금은 무미건조한 듯한 어조로‚ 한없이 다정하기만 한 말을 내뱉었다․ 본인이 주도하는 것도 아니면서 저렇게 말할 이유가 있나 싶긴 했다만 확실히 그녀의 눈물은 어머니의 존재를 인식한 이들이라면 누구든 으레 슬퍼질 수밖에 없을 거였다․ 서애는 그런 감정을 느끼고 싶지 않아 고개를 돌렸던 것뿐이었으며 이윽고 두 사람은 어머니의 인도와 함께 아이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아이는 죽은 것처럼 가만히 누운 채였다․ 언제부터 이런 상태였냐고 묻자 처음 서애를 찾으러 간 날에 ‘재밌는 일을 꾸미는구나’라고 말한 이후부턴 줄곧 저 상태라고 이야기했다․ 밥도 먹지 않았기에 아이의 팔과 다리는 애처로울 만큼 앙상했으나 어머니가 항상 몸을 닦아주기라도 했던지 머리칼은 가지런했고 몸은 깨끗했다․ 좋은 향까지 나는 걸로 봐선 그녀가 제 아이를 얼마나 아끼는지를 바로 알 수 있었다․ 빙의까지 된 상태라면 사태는 더더욱 최악이었다. 서애는 앨런에게 아이의 몸을 결박하라 일렀다․ 혹여라도 자신이나 다른 이들에게 위해를 가할지 몰랐기에 필요한 작업이었으며‚ 그 사이 서애는 성수를 준비하고 성경을 손에 든 채 십자가를 목에 걸었다. 악귀의 악취를 조금이라도 덜 느끼기 위해 인중에 박하 향이 강하게 나던 향을 바른 뒤 성수를 제 몸에 뿌리곤 기도문을 읊었다․

 

“주님‚ 이 성수로 저의 죄를 씻어주시고 마귀를 몰아내시며 악의 유혹을 물리쳐 주소서․ 아멘․”

 

서애는 그 상태로 성수를 들고 와선 앨런에게 다가갔다․ 돼지를 묶고 있던 앨런은 하던 것을 멈춘 뒤 서애를 응시했다․

 

“주님‚ 이 성수로 세례의 은총을 새롭게 하시고 모든 악에서 보호하시어 깨끗한 마음으로 주님께 나아가게 하소서․ 아멘․”

“깨끗한 마음으로 주께 나아간다는 건 죽는 의미인가요?”

“……시작하시죠․”

“네․”

 

두 사람은 각자 자리에 서서 준비를 마쳤다․ 잠시 목을 가다듬은 앨런이 그레고리 성가를 부르기 시작하자 그 앞에서 서애가 시편을 읽기 시작했다․ 아이의 몸 안에 잠든 악귀가 제 모습을 드러내게 하려는 심산이었다․ 그레고리 성가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그의 승리를 기뻐하는 노래로‚ 악귀들이 가장 두려워하고 공포에 떠는 노래였다․ 앨런이 진지한 얼굴로 그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자 잠시 손가락 끝을 까딱거리며 몸을 흔들던 아이가 별안간 눈을 번쩍 뜨고선 고개를 꺾은 채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 좆같은 노래 좀 멈춰․ 잠이 안 오잖아․”

“사악한 자는 그렇지 아니하니 바람에 나부끼는 겨와도 같아, 야훼께서 심판하실 때 머리조차 들지 못하고 죄인이라 의인들 모임에 끼지도 못하리라․”

“그 개같은 성경도 그만 읽어․ 지겹지도 않은가 봐? 허구한 날 남이 싸지른 똥이나 되새기고……․”

“악한 자의 길은 멸망에 이르나 의인의 길은 야훼께서 보살피신다․”

“لا يمكنك أن تطردني بالتأكيد سوف أقودك إلى طريق الموت.”

 

어느 순간부터 아이가 악귀에 씐 채로 저만의 언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 말이 어떤 말이든 그다지 중요한 건 아니었다․ 오히려 자신이 이해하지 못 할 말로 이야기한다면 삿된 것에 마음이 휘둘릴 필요도 없을 테니까․ 그러나 그 말에 어떤 의미가 있기라도 한 건지․ 창을 다 닫아뒀음에도 불구하고 촛불이 바람에 휘청거리기 바빴으며 테이블 위에 놓인 성수와 십자가‚ 거울 등도 함께 흔들리기 시작했다․ 한없이 고요한 세상 속에서 자신들만 유난스러운 소음을 자아내는 것만 같았다․ 아니‚ 정확히는 눈앞의 악귀가 만들어낸 소음이겠지․ 서애는 신경 쓰지 않으려 하며 부마자에게 성호를 긋고 페이지를 넘겨 시편을 읽기 시작했다․

 

“야훼는 나의 빛‚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오․”

“إن النور الخاص بك أغمق من الظلام. الشيء الذي تخافه هو أمام عينيك.”

“야훼는 나의 굳은 성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오․”

أنت تعرف ذلك. لا يمكنه إنقاذك إنه مجرد خائن جبان.”

“야훼는 나의 보호자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오․”

“إذا خرجت من هذا الجسد، سأقتلك أولا.”

 

이윽고 부마자가 킥킥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그러나 서애와 앨런은 미동도 보이질 않았으며 서애는 부마자의 머리에 손을 얹고 그와 눈을 마주한 채 기도하기 시작했다․ 구마 의식은 단순히 기도로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부마자의 안에 서린 악귀‚ 악마와 싸우는 것이었으며 그들은 두려워하는 인간을 가장 좋아했다․ 초조해하고 불안해하는 모습을 보면서 쾌감을 얻는 이들․ 그렇기에 서애는 부마자와 똑바로 눈을 마주한 상태에서 기도하듯 그를 협박하기 시작했다․

 

“أيها الأوغاد، أبناء الشيطان وأنتم لستم مختلفين عني.”

 

시간이 지나자 처음엔 비웃기만 하던 악귀도 서애의 말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지 점점 표정을 굳히기 시작했다․ 주변의 모든 것들이 흔들렸고 벽에 걸어 놓은 액자가 떨어지는가 하면 갑작스레 전등에 불이 들어왔다가 나가기를 반복하더니 커튼도 열리고 닫히기 시작했다․ 커튼이 닫히고 불이 나가면 공간은 촛불에만 의지한 채 한없이 어두웠다․ 심지어 그 촛불마저도 악귀에 의해 흔들렸던지라 위태로운 형태만 유지될 따름이었으니‚ 굳이 말하자면 구마 의식은 악귀와 이어 가는 기 싸움이었다․ 절대 여기에서 머뭇거려선 안 됐기에 서애는 제 혼신을 다했다․

 

그는 당장 그 여린 몸에서 나올 것을‚ 다시는 이곳에 발을 디디지 않을 것을‚ 그리고 원래 네가 있어야 할 곳으로 되돌아갈 것을 명령했다․ 요구 따위는 하등 소용없었기에 강력한 어조로 내뱉어야만 했다․ 서애가 목소리를 높이고 힘을 주자 사방으로 눈동자를 굴리던 악귀가 이윽고 한곳에 눈동자를 고정했다․ 그곳에선 앨런이 노래를 부르던 차였으니‚ 그를 보고 씨익 웃던 악귀의 모습은 그 자체로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그건 누가 봐도 여린 여자아이가 내보일 수 있는 웃음이 아니었다․ 입꼬리가 귀에 닿을 것처럼 올라간 모양새는 심각할 정도로 기괴하기 그지없었으며‚ 이윽고 그의 몸이 연신 흔들리던 차에 서애는 부마자의 머리를 더 세게 눌렀다․ 당장 그곳에서 나오라던 서애의 외침이 닿자 악귀가 눈동자를 홱 굴려 서애를 보았다․

 

“좋다․ 네 말대로 하지․”

 

긍정적으로 생각할 법한 말이었으나 서애는 되레 그 말이 소름 끼치게 들렸다․ 악귀가 저런 식으로 순순히 나온다고 말할 경우는 보기 드물다 못해 존재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지레 겁먹더라도 도망가기 일쑤였을 뿐 절대로 순하게 구는 법은 없을 터였는데․ 설마 싶던 서애가 고개를 돌려서 앨런을 바라보던 차‚ 아니나 다를까 여자아이의 몸에서 혼이 빠져나감과 동시에 앨런의 몸이 거센 바람에라도 맞은 듯 뒤로 풀썩 넘어가며 이내 코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제길‚ 앨런!”

 

서애는 바로 앨런에게 다가가서 그의 상태를 확인했다․ 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앨런은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은 채 기절한 것처럼 잠이 들어 있었다․ 망할‚ 망할! 다급해진 서애는 제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걸 느꼈다․ 도대체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진 거란 말인가․ 어째서 앨런이‚ 어째서……․ 빠르게 침착함을 되찾고자 온 힘을 다하던 서애는 일단 앨런을 구속해야 한다는 걸 인지했다․ 아직 악귀가 앨런의 몸 안에 완전히 자리 잡진 않았기에 서둘러서 데려간 뒤 구마 의식을 거행한다면 성공 가능성이 있었다․ 생각을 마친 서애는 이게 최선이리라 생각하곤 급한 대로 물건도 다 내팽개쳐준 채 앨런을 데리고 곧장 그곳을 떠났다․ 아직 눈을 뜨지 않던 앨런을 방에 넣어둔 뒤 그를 침대 위에 눕히곤 묶어두었다․ 머릿속에선 한시라도 빨리 앨런의 몸에서 저 망할 자식을 떼어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뒤늦게 다시 그 집으로 돌아가‚ 무슨 일이 있는 거냐던 어머니에겐 아이의 구마가 성공적으로 거행되었다고 전했다․ 어머니는 연신 눈물을 흘리며 감사하다는 말을 읊고 주저앉았으나 서애의 머릿속엔 오로지 앨런뿐이었다․ 이런 건 됐고 그저 빨리 돌아가서 그를 원래대로 돌려놓아야만 한다는 생각만 가득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같이 오셨던 다른 분은 어디에 계신가요? 그분께도 감사 인사를 전해드리고 싶은데……․”

“……일이 있어서 먼저 떠났습니다․ 인사는 제가 대신 전해드리죠․”

“네‚ 감사해요․ 정말 감사합니다……․”

 

어머니의 감사 인사를 몇 번이나 더 들은 뒤‚ 앨런은 급한 일이 있다는 말과 함께 물건들을 챙기곤 그곳을 떠났다․ 돌아가면서도 몇 번이나 성서를 읊고 기도를 올렸다․ 부디 앨런에게 별다른 문제가 일어나지 않기를․ 비록 그 악귀가 강력하긴 했으나 지금이라도 빨리 돌아가서 구마 의식을 거행한다면 잘 해결될지도 몰랐다․ 확률이 적긴 했어도 아예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기에 서애는 속도를 더했다․ 이곳에 올 때와 달리‚ 언젠가부터 갑자기 장대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이례적일 정도로 많은 양의 비였다․

 

따로 파트너를 원하지 않았기에 결국 서애는 혼자서 구마 의식을 준비했다․ 악귀가 웬만큼 강한 녀석이 아니란 것도 잘 알았기에 단단히 준비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하나둘‚ 본래라면 곁에서 앨런이 해야 할 일들을 혼자서 해나가며․ 저도 모르게 자꾸만 시선이 침대 위로 향하게 됐다․ 혹여라도 앨런이 제힘으로 악귀를 끊어냈을까 하여․ 그리고 어쩌면 앨런이 아예 악귀 자체에 들리지도 않았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품은 채였다․ 그러나 앨런은 여전히 미동도 보이지 않았으며 죽은 듯 가만히 누운 그를 보자 서애의 머리가 조금씩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문제없으리라고 홀로 되뇌는 것 외에는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움직이던 손은 자꾸만 멈칫거리게 됐고 구속된 앨런을 볼 때마다 그의 정신력이 실시간으로 깎이는 듯했다․

 

“……하아……․”

 

멍청한 생각이 아닐 수 없었다․ 곁에 있던 그가 악귀에 들리게끔 하다니․ 이런 일이 생길 가능성이 얼마든 존재한다고‚ 그만큼 이번 악귀가 꽤 위협적이란 것도 알았으면서․ 왜 진작 앨런에게 말해주지 않았을까․ 엄밀히 따진다면 이는 자신이 감당해야 할‚ 제 숙명이자 사명인 몫이었다․ 앨런이 저렇게 된 게 제 탓이라는 괴로운 자책감으로부터 좀처럼 벗어나기 힘들었다․ 과연 내가 이런 상태로 혼자서 의식에 성공할 수 있을까․ 괜히 잘못되었다가 악귀를 더 부추긴 탓에 앨런의 몸에 위해가 가해지진 않을까․ 다시는 앨런을 되돌릴 수 없는 건 아닐까․ 서애는 하던 것을 멈추곤 멍하니 허공을 응시했다․ ……멍청하긴․ 사실은 두려울 뿐이면서․ 애써 그 감정을 억누른 채 그저 자신 없다는 이유로 도망치려는 본인의 모습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서애는 다시 시선을 돌려 앨런을 바라보았다․ 앨런은 여전히 움직임 하나 없이 눈을 감고 있었다․ 그의 눈 위에 천을 덮어준 뒤‚ 서애는 조용히 그 방을 나왔다․ 적어도 제 정신이 온전할 때 의식을 거행하자고․ 그때 진행해도 늦지 않으리라고․ 그리 생각하며 걸음을 돌린 서애였다․

 

그러나 좀처럼 마음이 진정되질 않던 그는 차일피일 의식을 미루기만 할 뿐‚ 무엇 하나 제대로 진행하질 않았다․ 혹여라도 앨런이 굶어서 죽기라도 할까 봐․ 잠든 그에게 찾아가서 억지로 잘게 다진 음식과 물을 먹인 뒤 천을 한 번씩 거둬내서 얼굴을 확인하는 게 고작이었다․ 악귀에 씐 사람은 보통 신체에 그 특징이랄 게 보이기 마련이었다․ 달리 다칠 것도 없는데 갑자기 피가 나거나 멍이 드는‚ 무엇 하나라도 이상 징후가 보여야 마땅했다․ 하지만 앨런은 그 어떤 것도 보이질 않았고 서애는 그의 모습을 찬찬히 살핀 뒤 그곳에서 나오기를 반복했다․ 내일‚ 내일은 정말로 구마 의식을 거행하자․ 더 늦으면 아예 악귀에게 잠식당하고 말 거야․ 그 생각을 며칠째 반복하던 서애였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났을까․ 그날도 어김없이 앨런을 찾아간 서애의 손엔 그릇과 물잔이 들려 있었다․ 활동 에너지가 없다 보니 최소한만 챙겨주면 되었기에 양은 그리 많지 않았는데‚ 문고리를 잡을 때부터 조금 싸한 기분이 들더라니 이내 문고리를 잡아당겨서 문을 열자마자 바람이 부는 게 느껴졌다․

 

……잠깐‚ 바람이라니? 서애는 그럴 리가 없다는 눈빛으로 제 앞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자신은 분명히 창을 다 닫아두고 커튼까지 쳐뒀을 테였다․ 그 모습은 단 하루도 바뀐 적이 없었으니까․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창은 훤히 열려 있었으며 솔솔 불어오던 바람이 햇살과 함께 방안으로 흘러들고 있었다․ 요 며칠 동안 도시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장대비가 오늘에서야 막을 내린 터였다․ 햇볕이 들던 곳에 홀연히 앉은 실루엣이 서애의 눈에 들어왔으니‚ 이는 다름 아닌 앨런이었다․ 앨런은 태연하게 침대에 앉아서 햇볕을 마주하고 있었다․ 자신이 분명히 미동도 하지 못하게 묶어뒀을 텐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앨런․”

 

서애의 목소리가 그에게 닿은 순간‚ 앨런이 고개를 돌렸다․ 얼굴의 절반에 피가 묻은 듯‚ 어쩌면 눈에서 피가 흘렀던 것으로 추정되는 그 얼굴이었다․ 서애는 움직이지 않았고 고개 돌린 앨런은 태연한 어조로 대답했다․ 네․ 그 목소리가 너무 평소 같았기에 순간적으로 앨런이 돌아온 건 아닐까 싶었으나 그의 손가락이 저주의 문자를 적어 내려가는 게 보였다․ 서애는 그 모습을 가만히 눈으로 지켜보았다․

 

“아‚ 드디어 오셨네요․ 마침 잘 됐어요․”

“……․”

“그날 이후로 통 기억이 안 나는데‚ 일어나보니 제 몸이 묶여있지 뭐예요․ 조금 놀라긴 했지만 충분히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사례를 몇 번 보긴 했으니까요․”

“……․”

“하지만 잘 알잖아요․ 서애․ 전 멀쩡해요․ 아무런 문제가 없고요․ 뭔가 오해가 있으신 것 같아서요․ 그러니까……․”

“……․”

“이 빌어먹을 것 좀 내 손목에서 떼어줄래요?”

 

앨런은 묶인 제 두 손을 흔들었다․ 거기엔 성수에 씻어내린 십자가 위로 예수를 찬미하는 말들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차마 다른 건 풀어냈어도 그것 하나만큼은 풀어내지 못한 눈치였다․ 서애는 그런 앨런을 가만히 지켜보며 손에 힘을 주었다․ 여전히 그의 눈에는 앨런의 손이 마구 움직이는 모습만이 가득했다․

 

저를 향해 저주의 문자를 적어 내려가던‚ 그 절망적인 움직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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