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저것 단편들

[슬램덩크] 상

머리 길고 긴 소매자락의 옷을 입는 우성명헌이 나오는 AU (24년 9월 디페 배포)

3RD by 자엉

본 글은 만화 <슬램덩크> 및 애니메이션 영화 <더퍼스트 슬램덩크>의 2차 창작물로 등장하는 인물이나 설정에 대한 저작권은 저에게 없습니다. 언급되는 지명, 인물을 포함한 명칭은 실제와는 관련이 없음을 안내드립니다.

다음 2편은 겨울에 배포 및 공개할 예정입니다.

후기는 생략합니다.

 

 

  

 

 

 

모가 그 마을에 들리게 된 건 순전히 우연이었다. 얼마 뒤 시작되는 무왕무투대회를 위해 상동으로 돌아가야 했는데 갑작스러운 폭우로 나루터가 박살이 났다. 뱃사공이 말한 선택지는 두 가지뿐이었다. 상류 마을을 끼고 돌아가거나 나루터의 재건을 돕거나. 막상 정 모가 돌아가는 길을 물으니, 뱃사공은 골이 깊게 팬 미간을 더욱 찌푸리며 손사래를 쳤다.

“거긴 꿈도 꾸지 마십시오, 산세가 험하고 척박하여 굶주린 사람들만 사는 곳입니다. 하룻밤은커녕 한 시진(2시간)도 환영받지 못할 겁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정 모는 다음 보름달이 뜨기 전까지 상동성으로 가야 했다. 그러려면 이 영강을 건너는 게 가장 빨랐다. 뱃사공에게서 주워들은 정보를 토대로 산을 오른 정 모는 다행히 해가 지기 전에 마을 어귀에 다다랐다. 이렇다 할 표식은 없고 성벽을 쌓아둔 것도 아닌데 다 왔다고 판단한 건 거대한 가문비나무 아래의 불단 덕분이었다. 먼지 한 톨 없이 깔끔하고 향을 피운 냄새가 주변에 가득하여 마을 주민이 주기적으로 관리하는 것이 분명했다. 정 모는 그 누군가가 오늘 밤 자비를 베풀기를 바라며 동전 한 닢을 불단에 바치고 짧게 합장했다.

“거기 누구요?”

연꽃에 앉은 천수관음보살이 그를 가엾게 여겼나 보다. 불단에서 등을 돌리자마자 낯선 노인장이 말을 걸어왔다. 정 모가 되물었다.

“지나가는 선도입니다만 하룻밤 신세 질 곳이 있을까요?”

“우린 외부인을 반기지 않는데.”

노인장은 알 만하다는 듯 쯧쯧 혀를 찼다. 외진 마을에도 한차례 폭우가 지나갔거나 폭우에 대한 소식이 전해졌던 모양이다. 정 모는 집 안이 아니어도 찬 밤바람을 피할 수 있는 곳을 다시 물으려 했다. 그러기 전에 불단에 새 향을 올린 노인장이 등불을 들어 어느 방향을 가리켰다.

“큰길 따라 쭉 가면 살구나무가 보일 거요. 그 집에 물어보든지.”

정 모는 꾸벅 인사하고 노인장이 딴말할세라 부리나케 걸음을 옮겼다.

집은 몇 채 없어도 계단식 밭이 여럿 보이는 평범한 마을이었다. 혈관처럼 곳곳으로 뻗은 길은 폭이 아주 좁았고 큰길이라 해봤자 소가 끄는 수레 한 대가 간신히 지나갈 정도의 넓이였다. 저택 대부분은 담장이 낮아 6척(명나라 표준으로 1척은 31.1cm이다. 6척은 186.6cm가 된다)이 넘는 정 모의 시야에는 살림살이가 훤히 보였다. 살구나무도 열매가 잘 익어 알아보기 쉬웠다. 나무가 제법 컸으니 꽃이 피었을 때는 장관이었으리라. 정 모는 노을빛을 받아 더욱 탐스럽게 보이는 살구 열매를 구경하다 저택의 문을 두드렸다. 안쪽의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으나, 얼마 기다리자 사박사박 흙길을 걷는 발소리가 들렸다.

“누구시죠?”

문밖으로 고개를 내민 사람과 시선이 마주친 정 모가 휘둥그레 눈을 떴다. 너무 놀라 소스라쳐 기절할 뻔했는데, 그건 상대도 마찬가지였다.

“대사형?”

십칠 년간 보지 못한 얼굴이지만 틀림없었다. 정 모의 등장에 놀란 눈치라 특유의 무심함은 느껴지지 않았으나 그것도 잠깐뿐. 차분하게 감정을 억누른 검은 눈동자가 흔들림 없이 그를 쳐다보았다.

“정 사제.”

말버릇도 여전했다. 대사형이 저 어투로 부르면 어깨가 절로 움츠러들고 실수한 게 있었는지 머리를 굴리곤 했었다. 그렇지만 대사형은 그를 차갑게 대한 적이 없었다. 오히려 다정한 쪽에 가까웠다. 어린 사제가 고향 생각에 울적하게 있으면 자기 몫의 간식을 양보하며 달래던 이였다.

엄격한 만큼 공명정대하고, 빈틈이 없어도 그를 챙기는 것을 잊지 않아 지극히 따랐던 손윗사람을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 기대하지는 않았었다. 대사형에 대한 소문들은 하나같이 끔찍했다. 세간에 가장 그럴싸하게 알려진 소문은 상서 제일가는 무도관의 대제자가 상동무왕의 척살대에게 쫓기다 영강에 수장되었다는 거였다. 어느 호사가는 척살대에게 사로잡혀 사지가 찢겨 죽었다고 했고, 또 어떤 이는 상동무왕이 친히 참수했다고 떠들었다. 자극적인 소문들을 죄 무시했지만 한 가지는 틀림없었다. 상동무왕이 정 모가 한때 몸담았던 무도관을 짓밟았고, 대제자는 종적을 완전히 감췄다.

살아있으리라 믿었다. 그렇지만 감히 재회를 바란 적은 없었다. 어딘가에서 새 삶을 시작했다면 그걸로 되었다. 몇 번이고 곱씹었던 마음이 무색하게, 눈앞에서 살아 숨 쉬는 모습을 보니 조바심이 났다. 이런 마을에 정착하게 된 이유는 중요하지 않았다. 기연을 얻었다 해도 상관없었다. 정 모는 손을 뻗어 옛 대사형의 팔을 잡았다.

“정 사제.”

맥없이 붙잡힌 옛 대사형이 책망하듯 그를 다시 불렀다.

“여기 온 까닭이 있을 텐데.”

“대사형을…….”

심장이 시킨 사탕발림이 혀끝에서 달게 머물렀다. 오래전처럼, 대사형의 등을 보며 걷던 그 시절처럼 어리광 피우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정 모는 충동을 억눌렀다.

“오늘 잘 곳이 필요했습니다. 마을 초입에서 만난 노인장이 살구나무가 있는 집으로 가라 하더군요.”

“가끔 외부인이 머물다 가긴 하지. 하룻밤만 있을 건가?”

“더 오래 머물러도 될까요?”

“그건 내가 결정할 일이 아니지.”

정 모의 손을 부드럽게 내친 사내가 등을 돌렸다.

“이쪽으로.”

대사형께서는 어쩌다 외딴곳에 홀로 지내시나요? 당신 소식을 들으면 기뻐할 사람들이 많은데. 제 소식은 궁금하지 않으셨나요? 저를, 정 모를 보고 싶다고 한 번이라도 그리워한 적이 있나요? 삼도천 너머에서나 다시 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고작 하룻밤만 머물고 싶지 않습니다. 예전처럼 함께 검과 의를 배우기 위해 눌러앉는다면 허락해주실 건가요?

무수한 생각은 기름칠이 덜 된 문이 내는 소리에 사그라졌다. 정 모가 안내받은 곳은 별관이었다. 말이 별관이지 사실상 창고에 가깝기는 했다. 내부는 휑했고, 가장자리에는 볏짚으로 만든 침대와 낡은 소반이 놓여 있었다.

“잠깐 다녀오지.”

옛 대사형이 작은 호롱불을 들고 돌아왔다. 소반에 호롱불을 놓은 사내가 심지에 불을 붙인 후 정 모에게 물었다.

“식사는?”

“먹었습니다.”

“부엌 뒤편에 우물이 있으니 씻을 때 사용하게.”

“대사형은 어디서 주무십니까?”

“나야 와실(침실)에 머물지.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하고. 집이 넓지 않아 날 찾는 건 어렵지 않을 거야.”

정 모는 여상히 말하고 떠나려는 옛 대사형을 붙잡고 싶었다. 그가 대사형이 아끼는 사제이며 무도관이 자랑하는 후기지수였을 적에는 가능했을 거다. 뻔뻔하게 안채까지 쫓아가 귀찮게 하고, 침상 구석에 누워 대사형의 온기를 느끼며 쪽잠을 청했을 터였다.

그러나 지금은 불가능했다.

“제가 여기 있어도 괜찮으십니까?”

“안 괜찮다고 하면?”

“떠나야죠.”

“그럼 괜찮아.”

옛 대사형이 그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나도 묻지. 날 왜 대사형이라 부르지?”

옛 대사형은 입에 붙은 호칭을 들먹이는 것인지, 아니면 별다른 이유가 있는지를 확인하고 싶은 듯했다. 뒷머리를 긁적인 정 모가 솔직하게 답했다.

“대사형께서 저를 정 사제로 부르는 이유와 같겠지요.”

“…… 그렇군.”

옛 대사형, 명헌이 고개를 끄덕이곤 자리를 떠났다. 정 모는 명헌에게 거짓말을 하여, 사실 먹은 게 없었으나 배가 고프지 않았다. 대신 기이하게도 가슴이 울렁거렸다.

같은 담장 안에, 저 벽 너머에 대사형이 있다.

침대에 누웠지만, 정 모는 쉽게 잠들지 못하고 겁을 먹었다. 이게 혹시 꿈은 아닐까? 누군가 이 마을에 진을 쳤다거나? 진법에 걸려 무의식이 원하는 것을 꿈으로 보는 중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 얼마나 사실적이고 잔인한 꿈이란 말인가. 정 모는 이른 저녁부터 밤이 깊을 때까지 뒤척이다 묘시(오전 5시 30분에서 6시 30분 사이)가 다되어서야 눈을 붙였다.

 

 


 

 

정 모가 수학한 무도관은 상서무왕의 비급을 소지했다 하여 명성을 떨친 곳이다. 그 비급은 극소수의 사람만이 접할 수 있었으나 보검은 달랐다. 비급을 완벽히 사사한 자는 상서무왕이 소지했다는 보검을 함께 물려받았는데, 이번 대에 검을 받은 자가 명헌이었다. 그리고 그 검을 마른 천으로 반짝거릴 때까지 닦는 것은 정 모가 좋아했던 소일거리 중 하나였다.

상서무왕의 무공은 상서에 뿌리내린 선도들의 역사와 같았다. 하늘에 뜻을 고하는 ‘제’를 보필하기 위해 ‘양’의 맥을 대성했다는 상서무왕은 본래 ‘음’의 맥을 대성한 상동무왕과 한 짝이었다. ‘제’의 후손은 두 무왕의 지지를 기반으로 황실의 기틀을 다졌는데, 동과 서로 흩어진 무왕들은 가장 뛰어난 제자에게 ‘제’를 보필하라는 전언을 남겼다. 하지만 상서무왕의 제자 중에 비급과 보검을 물려받은 이는 황도로 가지 않고 영강에서 가장 가파른 절벽이 보이는 자리에 무도관을 세웠다. 무도관이 번창하자 모두가 그를 상서의 제일가는 무왕으로 추대하였으나 고사하고, 비급을 완벽히 익힌 후학에게 모든 것을 물려준 다음 여생을 산에서 보냈다.

상서무왕의 보검은 주인의 부재를 인지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일대관주가 등선할 때 크게 세 번을 울었고 다음 관주가 독에 당해 사망했을 때도 울었다. 보검은 기이한 만큼이나 아름다웠다. 검신은 갓 내린 첫눈보다 희었고 양의 기를 불어넣으면 햇살 아래 보석처럼 화려하게 빛났다. 검집의 끝에는 반쪽의 태극이 새겨져 있었으며 나머지 태극은 검의 손잡이에서 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비범함이 지나치면 도리어 화를 부르는 법이었다. 당대 상동무왕은 전대 황제의 여동생과 혼인한 뒤 태상황이 되어 정사를 좌지우지하고 있었는데, 불로에 집착하여 기이한 물건들을 수집하다 상서무왕의 보검까지 탐내기 시작했다. 관주는 보검은 병기에 불과하다고 설명했으나 상동무왕은 매우 화를 내며 보복을 예고했다.

보검은 핑계였을 수 있다. 상동무왕은 무예도 빼어났지만 심계가 대단하여 계승순위가 뒷전인 자식을 제좌에 올려놓은 인물이었다. 모두가 입을 모아 이렇게 말했다. 초대 상서무왕의 유지를 받들어 왔던 무도관의 어떤 것이 거슬렸던 거다. 당대 관주 역시 무예로는 상서에서 제일을 다투는 이였으나 한 명으로 수천 명의 군대를 이기기는 어려웠다. 게다가 정 모가 파악한 바로는 상동무왕이 무도관에게 먹인 결정타가 ‘반역죄’였다. 말도 안 되는 죄목이라는 걸 모두가 알고 있었지만, 자칫 연루되어 휩쓸려 나갈까 두려워 돕겠다 나서는 이가 없었다. 끝내 관주와 대제자가 자청하여 상동무왕에게 용서를 구했으나 그 이후의 일은 알려지 않았다. 선도들이 뿔뿔이 흩어지기도 했거니와 소탕에 동원된 이들 태반이 비명횡사했기 때문이다.

이 모든 사달이 나기 전에 정 모는 죄를 짓고 무도관에서 쫓겨났었다. 그의 부모는 어릴 적에 돌림병으로 병사했고 관주를 어버이 대신 알고 자라왔다. 고향이 그립다고 한들 자란 무도관만큼 그리울까. 갈 곳이 없었던 정 모는 근처 야산에서 방황하다 무도관이 있는 산기슭으로 돌아갔는데, 그때는 무도관이 상제의 군대와 상동무왕의 척살대에게 해체당한 뒤였다.

겨우 잠든 정 모를 깨운 건 규칙적인 빗질 소리였다. 스며드는 햇살은 이제 막 아침이 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부지런하게 앞마당을 빗질하는 이가 있는가 보았다.

‘헉.’

벌떡 일어난 정 모가 부리나케 밖으로 뛰쳐나갔다. 맨발에 중의 차림이었고, 머리도 산발이었으나 제 게으름에 대사형이 수고하게 둘 수 없었다.

“우성?”

명헌은 검은 가선을 두른 양 소매를 끈으로 묶은 채 마당을 쓸고 있었다. 이른 아침부터 큰 소리가 날 일이 없는지라 정 모의 야단스러움이 더욱 유난하게 들렸다. 명헌이 의아해하며 정 모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지? 귀신이라도 본 것 같구나.”

“그것이…….”

가까스로 정신을 되찾은 정 모가 떠듬떠듬 대꾸했다.

“늦잠을 잤다고 생각해서, 그래서 그만.”

“밤늦게 깨어 있었으니 늦잠을 잘 수밖에.”

명헌은 양껏 모은 잎사귀를 마당 구석에 쌓아두고서 덧붙였다.

“옷차림부터 단정히 해라.”

“네?”

“혼자 머리 묶을 수 있는 나이는 한참 전에 지났을 텐데.”

“아, 죄송합니다.”

별관으로 되돌아간 정 모가 의관을 제대로 갖추고 나왔을 때 마당은 텅 비어 있었다. 당황하여 영기를 펼쳐 추적하려는 찰나, 어디선가 그리운 냄새가 났다. 고소한 기름 냄새. 갓 지은 밥 냄새가 모락모락 부엌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냄새를 따라서 홀린 듯이 움직인 정 모는 큰 그릇에 밥을 퍼담고 있는 명헌을 발견했다.

“대사형.”

소반에 수저를 놓던 명헌이 움직임을 멈췄다.

“그 호칭 말고.”

“예?”

“나도 이름으로 부르고 있잖아.”

그러고 보니……. 조금 전에도 그를 ‘우성’이라 불렀었다. 빠르게 눈을 깜빡인 정 모가 물었다.

“이 대협이라 부르면 될까요?”

“흠.”

추억이 새록새록 솟아났다. 저건 아주 근소한 수치로 합격점을 줄 수 없다는 뜻이었다.

“그럼, 그러면. 명 형.”

“그래.”

낙제를 면한 정 모가 명헌을 대신하여 소반을 들었다. 명헌을 따라 도착한 곳은 부엌 옆의 작은 정원이었다. 잡초 없이 잘 관리된 정원에는 달콤한 냄새가 가득했는데, 그 중심에 장정 넷이 편하게 식사할 수 있는 탁자가 있었다. 달짝지근한 냄새의 출처는 탁자 중앙에 놓인 살구 바구니였다. 정 모는 지시에 따라 접시를 내려놓고 명헌과 마주 앉았다.

“식사 후 바로 움직여야겠다.”

막 첫술을 뜨려던 정 모가 명헌을 쳐다봤다.

“알겠지만 산은 해가 짧아. 해가 중천에 떴을 때 움직이면 늦다.”

“…… 제 목적지를 알고 계셨습니까?”

“영강을 건너려는 거지?”

“그렇습니다.”

“거처가 상동인가 보구나.”

“자주 움직여 다닙니다.”

“가장 빠른 길로 알려줄 테니 해가 지기 전에 가거라.”

정 모가 머뭇거렸다.

“왜?”

“가끔 만나는 외부인에게도 이렇게 친절하신지요?”

명헌이 헛웃음을 흘렸다.

“산 아래 나루터가 정말로 폭우 때문에 없어졌을까?”

“영강은 폭이 넓지 않습니까? 강물이 갑자기 불어난다면야.”

“몇백 년을 버텼던 나루터다. 오가는 배가 삭아 교체되었을지언정 나루터는 한 번도 손상된 적이 없었어. 누군가 고의로 없앴을 가능성이 충분하지.”

정 모의 말마따나 상동과 상서를 가로지르는 영강은 폭이 넓었다. 영기를 능숙히 다룰 수 있는 선도조차 헤엄쳐 건너기 어려웠고, 딱 한 군데에 있는 나루터에서 배를 타거나 하류까지 한참을 내려가 보법으로 뛰어넘어야 했다.

머리를 굴려 봤지만, 나루터를 부순 이유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정 모가 상동으로 가는 걸 막기 위해서라면 굳이 영강 일대에서 손을 쓰지 않아도 되었을 터다. 게다가, 폭우를 핑계 삼아 훼방 놓는 이가 누구인지도 감이 잡히는 바가 없었다.

“원한을 산 곳은 없습니다.”

정 모가 인상을 구겼다.

“아마도요.”

“…… 원한을 아주 많이 산 모양인데.”

“진짜입니다. 원한이라 해도 명 형이.”

무도관에서 쫓겨난 직후를 말하려던 정 모가 입을 다물었다. 향기로운 냄새가 가득한 화창한 아침이었으나, 언제고 간에 그때를 떠올리면 소낙비가 쏟아지는 한겨울로 되돌아가는 것 같았다. 그는 질척한 흙바닥에 무릎을 꿇고 명헌이 있을 방향을 향하여 엎드려 있었다. 용서해달라고, 그저 당신과 이 무도관이 소중하여 그랬다고, 대사형이 한 번 더 묻는다면 무엇 하나 감추는 것 없이 고하리라 다짐했으나 그럴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었다. 명헌은 차기 관주의 자격으로 그를 추방했고 추위로 새파랗게 질려 있던 정 모는 끝내 혼자가 되었다.

제 손으로 저지른 죄의 업보였다. 원망하려 해도 할 곳이 없었다. 정 모가 해한 이는 대사형의 부인이 될 사람이었다.

그는 그이가 대사형의 반려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판단했고, 말로는 물러나게 할 수 없음을 깨닫자마자 바로 움직였다. 피를 보지 않는 방법이 있었을까? 그랬을지도 모른다. 정말로 무도관을 위해 저지른 짓이었나? 정 모는 자신 있게 답할 수 없었다. 붉은 혼례복을 입은 대사형이 누군가와 다정하게 장래를 약속한다는 생각만으로도 속이 뒤집혔다.

“내가 왜?”

정 모의 안색이 심상치 않다고 느꼈는지, 명헌이 빠르게 말을 이었다.

“기왕 검을 들었으면 원한이 붙지 않게 확실히 처리하라고 했었지. 조언을 그새 잊었구나.”

“해로운 싹은 일찌감치 정리하라 하셨죠. 잊지 않았습니다.”

정 모가 불쑥 진실을 털어놓았다.

“그간 무도관 사람들을 만나고 다녔습니다.”

“뭐?”

“알아보니 십칠 년 전에 죽은 사람은 전대 단주님 한 분뿐이더군요. 그래서 살아있는 이들을 찾아다녔지요.”

명헌이 미간을 찌푸렸다.

“어째서?”

상동무왕의 세력은 건재하다. 상서 사람들은 무도관 사건으로 상서무왕의 유산이 훼손되어 불쾌해했지만 아직은 황실의 입김이 더 거셌다. 문제의 무도관을 언급하기만 해도 태상황에게 끌려간다고 눈치를 보는 세상인데, 정 모는 생존자들을 찾는 연유를 알려주지 않았다. 추궁하려던 명헌도 마음을 바꿔 식어버린 음식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래. 일단 먹자. 말했다시피 갈 길이 바쁘니까.”

둘은 더 이상의 대화 없이 조용히 식사를 재개했다.

 

 


 

 

‘양’과 ‘음’의 맥을 수련한 선도들은 병에 걸리지 않았고 노화가 더뎠다. 평범한 사람들은 선도들이 빠른 속도로 뛰어도 숨이 차지 않고 한 번의 도움닫기에 산을 훌쩍 넘는다고 믿기도 했다. 정 모는 축지법을 사용할 줄 몰랐지만, 사흘 밤낮을 쉬지 않고 걸어보기는 했다. 좀 꾀죄죄해졌을 뿐 발바닥이 부르트거나 지쳐 쓰러지지는 않았으므로 반나절 산을 타는 것 정도야 큰 문제는 없을 터였다.

정 모가 염려한 건 명헌의 상태였다. 그간 이런 촌구석에 틀어박힌 이유가 손상된 내력이라면……. 발소리도 가뿐하지 않았고, 호흡 역시 예전처럼 깊지 않았다. 그가 아는 명헌은 좋지 않은 소식이 있을수록 감추는 편이었다. 맥을 잃어 영기가 바닥났는데 그에게 맞추려다 무리할까 걱정이었다. 그래서 살구나무 저택을 떠난 정 모는 아주 여유로웠다. 느긋한 걸음걸이만 보면 상동성까지 먼 길을 가야 하는 게 아니라 집 앞을 거니는 것 같았다. 앞서가는 명헌이 왜 꿈지럭대느냐 야단쳐도 정 모는 씩 웃기만 했다.

“이러다 한세월 걸리겠어.”

“그렇게 멀리 있습니까?”

“꽃구경 가는듯한 걸음으로 갈 만한 곳은 아니다.”

명헌이 안내해주기로 한 곳은 유속이 빠르지 않고 강의 폭이 갑작스레 줄어들어 강 너머로 바로 도움닫기 할 수 있는 어느 지점이었다. 선도가 아니면 날아오르듯 보법을 펼칠 수 없으니 영강을 건너는 건 무리였지만, 얄궂게도 정 모가 선도이기에 조심할 필요가 있었다. 속설에 영강은 ‘양’과 ‘음’의 맥을 수련한 자들을 미워하여 방심하는 순간 강바닥으로 끌어당긴다고 했다. 명헌은 그 속설이 완전히 거짓말은 아니더라 씁쓸하게 웃었다. 설마, 정 모가 탄식했다.

“황도를 빠져나오고 맨몸으로 영강을 건너셨습니까?”

명헌이 고개를 끄덕였다.

“척살대에게 쫓기다 강으로 뛰어내렸었지. 물살에 몸을 맡겨 그대로 하류로 흘러가려 했는데 삼도천으로 갈 뻔했었다.”

무도관의 대제자에 대한 여러 헛소문이 완전히 빈말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떨떠름해진 정 모가 다음 이야기를 재촉했다.

“그래서요? 그때 맥을 다쳐서 무공이 예전만큼은 못하게 되었다는 말씀은 아니겠지요? 아니면 기연을 만나 구사일생했다거나?”

“예전부터 느꼈는데 넌 호사가 기질이 있어.”

손사래를 친 명헌이 이어 말했다.

“가까스로 정신 차렸을 때는 하류가 아니라 이 근처의 냇가에 있었지.”

“기이하군요. 여기는 상류 지대잖습니까?”

“글쎄다. 선도가 영강에 빠지면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는 걸지도. 아무튼, 그 냇가에서 반 시진 걸으면 절벽이 나온다. 배를 타지 않고 안전하게 건너갈 수 있는 장소는 그곳밖에 없어.”

명헌은 반 시진이라 했지만 정 모가 굼떠 실제로는 그보다 조금 넘게 걸렸다. 연신 재촉하던 명헌도 냇가를 지나고 나서는 녹음이 한창인 정경을 무시한 채 서두르고 싶지 않았는지 편히 걸었다. 정 모는 명헌 몰래 미소 지었다. 명헌과 거니는 건 대사형에게 정혼자가 생긴 후로 처음이었다. 인적이 뜸한 산길은 비탈이 심하고 잔풀이 많았지만, 그런 것은 방해로 느껴지지도 않을 정도로 기꺼웠다.

같은 성별의, 그것도 가족이나 다름없는 대사형에게 이런 마음을 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옆자리에는 내가 있어야 한다고 오만하게 굴지도 않았다. 그저 이 순간이 정 모가 가장 원했던 미래였다. 같은 길을 둘이서 함께 걸어가는 것. 연심과 함께 품었던 소원을 이제야 얻어걸리듯 성취해냈다는 게 우스우면서도 조금 안타까웠다.

“물소리가 들리는군.”

길이 끊긴 절벽에 위태롭게 구부정하게 자라난 소나무가 있었고, 한참 아래로는 강물이 세차게 흘렀다. 소나무의 가지를 밟고 뛰어오르면 고생할 일 없이 건널 수 있을 듯했다. 너무나 간편하고 깔끔한 지름길이라 여태까지 몰랐다는 게 의아할 정도였다. 미리 알았더라면 나루터로 향하는 일 없이 이곳을 넘어 상동으로 갔을 텐데.

‘하지만 그랬다면 명 형과 재회하지 못했겠지.’

“조심히 가거라.”

양손을 소매에 감춘 명헌이 작별 인사를 건넸다. 정 모는 맞은편에 보이는 반질반질한 암석을 한참 응시하다 명헌을 돌아보았다.

“저 너머에 저를 적대하는 자들이 있으리라 보십니까?”

“그럴 수도, 아닐 수도 있지.”

“적어도 나루터가 폭우로 없어진 게 아니라 확신하시는군요.”

“최악을 가정하는 게 최선을 믿는 것보다 안전하니까.”

정 모와 시선을 마주한 명헌이 말을 돌렸다.

“하고싶은 말이 있다면 숨기지 말고 해라.”

“할 말이야 늘 있었죠.”

정 모가 쓴웃음을 지었다.

“명 형, 저와 같이 가지 않겠습니까?”

“어디로?”

“상동성 말입니다.”

“상동무왕의 본거지에 날 데리고 가겠다고?”

“곧 무왕무투대회가 열립니다. 전 대회에 참가해서 상동무왕을 직접 만날 계획입니다.”

“네가 목숨 귀한 줄 모르는구나.”

“명 형에게 쫓겨나며 한 번 죽었는데 또 죽는 게 대수겠습니까?”

명헌이 분개하려는 찰나, 정 모가 말을 이었다.

“이제 제가 무도관 출신이라는 걸 아는 사람들은 거의 없습니다. 무명으로 참가하여 좋은 성적을 거둔다면 상동무왕을, 태상황을 볼 기회가 틀림없이 생길 겁니다. 명 형은 궁금하지 않습니까? 한 번도 억울하지 않았어요? 아무 죄 없는 관주님은요? 이대로 죄인인 채 두어야 합니까? 제자 된 도리로 누명을 벗길 시도라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늘 고요하고 표정 없던 얼굴이 일그러졌다. 정 모의 가슴이 세차게 뛰었다. 명헌은 그를 추방한다고 선언할 적에도 비슷한 얼굴을 했었다.

“네가 감히, 뭘 안다고.”

“모릅니다! 모르니까 알려주면 되잖아요?”

“몸만 커다랗고 여전히 어려.”

정 모를 꾸짖은 명헌이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마음대로 해라. 가서 죽든 말든 알 바 아니지. 길을 알려줬으니 다시 찾아오지 말거라.”

정 모가 입술을 사려물었다.

“진심이 아니신 거 압니다.”

명헌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는 명헌을 원망스레 쏘아 보다 등을 돌려 소나무의 가지를 딛고 날아올랐다. 찰나의 순간을 허공에서 보내고, 정 모는 상동에 착지하여 건너온 쪽을 되돌아보았다. 그러나 자리를 지키고 있는 건 푸른 잎이 싱그러운 소나무 한 그루 외에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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