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곡

1차 BL / 불륜 등 소재 주의 요함

기록 : by 예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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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쪽의 요새라는 별명을 가진 공작성에 달조차 뜨지 않은 밤이 찾아왔다.

검은 융단처럼 뻗은 고요한 복도로 새어나오는 희미한 불빛만 아니었다면 완벽한 어둠이었다. 하지만 이런 밤조차 열락의 꽃망울은 감춰줄 수 없었던 모양이다.

성의 주인, L은 어둠을 방해하는 가장 안쪽 방 앞에 서있었다. 그의 모습은 사냥감의 목덜미를 낚아채기 위해 때를 기다리는 맹수 같았다. L의 남자부인 S, 그리고 쌍둥이 동생 P. 은밀하게 만난 두 사람의 헐떡이는 숨소리와 뒤엉키는 나신, 체온만큼 달아오른 방의 온도. 모든 것이 피부에 불쾌하게 달라붙지만 그는 우두커니 자리를 지켰다. 문 하나를 두고 두 공간의 분위기가 이렇게나 달랐다.

그리고 마침내 그 배덕한 쾌락이 활짝 꽃을 피울 때, L의 인내는 한계에 도달했다. P와 시선이 마주친 그는 경계선이었던 문을 걷어차고 초대받지 않은 그 현장으로 달려들었다.

 

“L! 앗!”

  

놀란 표정을 한 S의 맨 어깨를 잡고 밀어내고, 손톱이 손바닥에 파고들 정도로 꽉 쥔 주먹이 망설임 없이 저와 똑닮은 동생의 얼굴에 내리 꽂혔다. 퍽! 묵직한 타격음과 함께 새된 비명소리가 고막을 때려도 L의 몸은 멈추지 않았다.

P는 묵직한 주먹질에 방어조차 하지 않고 얌전히 폭력을 받아들였다. 남의 부인을 뺏어 분탕질을 친 주제에 무엇이 그리 당당하다고. 무엇이 그리 결백하다고. 무엇이 그리 만족스럽다고 피가 하얀 시트 위에 방울져 튀겨도 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오히려 성인군자의 추악하고 더러운 밑바닥을 까발린 숭고한 밀고자마냥 형을 올려다보며 이죽거렸다. L은 결국 이성을 잃고 입을 꾹 다문 채 일방적인 주먹질을 이어갔다.

 

 “L, 제발! 이러지 말아요!”

 

정작 당사자보다 더 기겁한 사람은 S였다. 남편의 두꺼운 팔뚝에 매달린 가녀린 몸은 폭력을 멈출 수 없었다. 사람이 정말 화나면 눈에 뵈는 게 없다고 하던가. 그런 S의 모습은 오히려 L의 분노에 기름을 뿌렸다.

이러지 말라며 자비를 구하는 부인의 말이 기만으로 느껴졌다. 그야 여태껏 자비를 베풀고 있던 사람은 L, 그였기 때문이다.

 

 

 

일이 이렇게 되리라고 짐작하지 못했다고 한다면 거짓말이다.

  

─ “S, 부탁이야.”

  

결혼식을 올리기 바로 전날. P는 아직 성씨가 바뀌지 않은 S의 앞에 무릎을 꿇고 호소했다. 줄곧 억눌러왔던 연정이라는 마음을 터트린 것이다.

  

─ “사랑해, 그러니 형이랑 결혼하지 마. 형만큼은 안 돼.”

  

L도 동생의 감정을 아예 모르지는 않았다. S를 힐긋거리는 눈동자가 매우 노골적이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더욱 짙어진 자신을 향한 질투. 어릴 적부터 줄곧 비교당해 열등감으로 똘똘 뭉친 동생은 S과 만난 이후 형을 죽일 듯이 노려보곤 했었기에 모른 척을 하기도 힘들었다.

그래서 결혼식에 대한 일로 찾아왔다가 동생의 고백을 목격했던 L은 그다지 놀라워하지 않았다. 올 것이 왔구나, 하고 생각을 했을 뿐이었다.

아니, 더 솔직하게 말해보자면 이제 와서 제가 뭘 어떻게 할 수 있겠느냐는 생각이었다. L은 P를 제치고 정정당당히 S의 마음을 얻었고, 바로 다음날이 대대적인 결혼식이었다. 동성혼에 대해서 장로들과 국왕을 설득한 것도, 혹시라도 싫은 소리 하나라도 귀에 들어가지 못하게 저택에서 일하는 하인들을 대거 교체하고 다른 귀족들의 입을 막은 것도 L였다.

L은 S와 결혼하고 함께하기 위해 그 모든 것들을 각오하고 실천했다. 그런데 P는 어땠는가? 책임감은 다 회피한 채로 숨어 있다가 이제 와서 사랑을 갈구하는 그가 꽤 우스웠다.

 

─ “... 미안해요, P.”

  

S는 곤란해 한 끝에 그의 고백을 거절했다. 결혼식이 바로 코앞이었으니 어쩌면 당연한 대답이었다. 그러나 L은 이때 안도하며 동생이 저지른 일을 함구해준 것을 두고두고 후회했다.

그것은 때를 놓친 고백은 아무 소용없다고 생각한 자신의 안일함이오. P를 그리워하지 못할 정도로 행복하게 해줄 수 있노라는 오만함이기 때문이다.

 

─ “여전히 아름다우시군요, 부인께서는.”

 

오만은 2년 만에 얼굴을 보인 P가 이제는 마음을 접었으리라 착각을 하도록 만들었다. 그래서 사냥제의 무도회 중 몰래 빠져나가도, 둘을 따라온 자신에게 숨어있던 P를 S가 감싸주어도 두 사람이 소꿉친구여서 그렇다고 합리화를 했었다. L의 그런 착각은 지저분한 추문으로 보답 받았다.

  

─ “아니지요, 부인?”

 

‘왜 S가 P와?’ 라는 의문과 충분히 이런 사태를 막을 수 있었음에도 그러지 않았다는 사실이 L을 괴롭게 했다. 견디지 못한 L이 사냥제가 끝난 날 밤, S를 찾아가 어깨를 붙잡고 추궁했다.

  

─ “여보 .. ..”

─ “오랜만에 만나서, ‘소꿉친구’를 만나 반가워서 그런 거지요?”

─ “... ... .”

─ “회포를 푼 것인데 다들 오해하는 것이지요. 그렇죠?”

 

그렇다고 해줘, 제발

L은 죄책감이 가득 찬 눈동자를 모른 척 했다. S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좋을 대로 결론을 지었다.

 알고 있었다. 이런 건 현실도피일 뿐이라고. 둘은 아무 사이 아니라고. 그렇게 생각하며 황족으로 태어났음에도 생전 처음 권력을 휘둘렀다. 추문을 일으킨 가문을 멸문시키고 사람들의 입을 막는 것. 모두 현실로부터 도망치기 위함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이 잠겨죽을 것 같았으니까.

 그러나 아무리 강력한 힘을 가졌다 하더라도 사람들의 입을 모두 막을 수는 없었다. 뒤에서 사람들의 입을 거쳐 와전되고 확산된 추문은 왕실까지 흘러들어갔다. 국왕은 젊은 황족의 일원이자 당신의 조카들 사이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서 크게 부끄러워하고 분개했다.

 황족의 명예를 실추시키지 말라는 왕성의 편지를 받은 L이 제일 먼저 들었던 감정은 무엇이었는가. 억울함이었다. 황족의 명예를 실추시킨 사람은 P, 단 한사람이지 L은 아니다, 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째서 국왕은 자신과 동생을 함께 엮어 다그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쌍둥이이기 때문인가? 어릴 때부터 L와 P는 같이 묶여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곤 했었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P가 이 세상에 없었으면──.’

 

거기까지 생각한 L은 흠칫 몸을 떨었다.

 

─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P가 없어졌으면 좋겠다고? 이제껏 둘이서 하나라고 생각했던 내 동생을? 스스로가 한 생각이 소름 돋았다. 그동안 P가 아무리 열등감을 보여도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는데...

혼란스럽게 흔들리는 눈을 꾹 감고 식은땀이 배어 나오는 손바닥이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으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이런 어린애 같은 생각까지 다 할 정도로 내가 많이 지치긴 했나보군.’

 

그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천천히 내뱉으면서 생각했다. 동생이 자신 때문에 비교를 당했다고 여긴 L은 벌써 십년 넘게 질투와 분노를 피하지 않고 담담히 받아들였다.

 

‘그럴 만도 하지, 나도 사람인데.’

 

그렇지만 이 지경까지 왔는데 P의 어리광을 계속 받아줄 수만은 없었다. L은 깃펜을 들어 양피지 위에 천천히 정갈하게 써내려갔다.

 

「 부끄러운 길 위에 있는 네가 지금이라도 바른 길로 돌아가길 바란다. 」

 

형으로서, 한 사람의 남편으로서, 같은 황족으로서 경고한 편지는 결국 P의 마음을 돌려놓지 못한 모양이다.

 

 

 

 

 

어젯밤 격정의 불꽃은 잘도 어둠을 침범했거늘, 아침의 평화로운 햇살은 그러지 못했다. 창문에 걸린 두꺼운 커튼 때문일까, 착 가라앉은 방의 공기 때문일까. 햇볕이 분명 스며들고 있음에도 침실은 어두컴컴했다.

L은 그런 방에서 촛불 하나 켜지 않고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있었다. 항상 당당하던 등은 힘을 다한 노인처럼 둥글게 말려있었다. 그래서인지 S는 어렵사리 정신을 차린 후에도 쉽사리 말을 꺼내지 못했다.

“부인.”

 

어느새 L은 늙은 사자와 같은 눈동자로 S를 바라봤다. 다정한 포옹과 상냥하게 쓰다듬는 손길, 걱정 어린 말은 없었다. 힘을 다했으나 여전히 맹수처럼 날카로운 갈색 눈동자만 부인을 응시했다. 그것이 이제 애정은 다 타고 재만 남았다 말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S는 벌써부터 눈가가 시큰거렸다.

 

“여보─,”

“부인께서는 많은 기회가 있으셨지요.”

 

S가 더 무어라 말을 꺼내기 전에 L이 먼저 입을 열었다. 봄볕 같은 따스함 대신 겨울 하늘처럼 묵직한 목소리가 공기를 내리눌렀다. 부인은 분위기에 압도된 채 그가 무슨 뜻으로 그런 말을 하는지 몰라 입을 닫았다. 무언가 말을 꺼내야 하는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L은 살갗이 까진 자신의 주먹을 만지작거렸다.

 

“어제일과 제가 귀족 회의 때문에 수도에 잠깐 떠나있었을 때, 사냥제와 결혼식 전날까지.”

 

부정한 그날이 하나씩 떠오를수록 S의 얼굴이 점점 창백하게 질렸다. 남편은 처음부터 부인의 외도를 알았다. 그럼에도 조용히 부인이 돌아오길 기다렸다. 그렇게 받아들인 S의 어깨를 죄책감이 강하게 짓눌렀다. 숨이 턱 막혔다. 자신이 저지른 죄악의 무게에 깔려 죽을 것 같았다. 이불에 감싸인 연약한 몸뚱이가 어느새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평소 같았으면 S가 다시 까무러칠까 안절부절 못했을 남편이었다. 그러나 그가 고개를 돌려버리자 몸이 더욱 크게 떨리기 시작했다. L은 애써 외면한 채 응어리진 감정을 꾹 삼키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는지 두 사람 모두에게 잔인한 질문으로 튀어나왔다.

 

“...나만을 사랑해주는 게 그렇게 어렵던가요?”

“아냐! 아니에요. L, 나는...”

 

놀란 부인이 마치 총알처럼 침대에서 뛰쳐 내려와 L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S는 L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당최 알 수 없었다. 자신을 바라봐주지 않고 어루만져주지 않는 그가 낯설었다. 그것이 불안의 몸집을 불렸다. S는 절박하게 L의 거친 양손을 자그마한 제 손으로 꽉 붙잡았다.

L은 S의 손을 맞잡아주지 않았다. 천천히 허공을 바라보던 눈동자가 부인을 내려다봤다. 뽀얀 맨살에 남은 울긋불긋한 자국을 가리려는 듯 이불이 휘감겨있었다. 그 끝이 길게 늘어져 언젠가 결혼식에 부인이 입었던 웨딩드레스를 떠오르게 했다. 그때에는 우리의 관계가 이렇게 되리라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L은 자신이 자비라는 핑계로 현실을 외면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드디어 인정했다. 피부에 닿는 상처의 질감과 아릿한 통증이 두 사람에게 이것이 현실이라고 잔인하게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리의 결혼 서약은 당신에게 아무것도 아니었단 것처럼 느껴져요.”

“아니에요, L. 정말 미안해요. ...다시는 그러지 않을게요. 믿어줘요.”

 

벌겋게 달아올랐던 S의 눈가는 기어코 차오르는 물기를 막지 못했다. 볼을 타고 떨어지는 저 굵은 눈물이 참회인지 수치인지 아님 다른 무언가인 건지 L은 알 수 없었다. 목소리로 끄집어낸 저 말조차 사실일까 의심스러웠다. S를 믿지 못하게 만드는 이 상황이 끔찍하게도 싫었다.

 

“... 미안하지만 나는 더 이상 당신을 못 믿겠어요.”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처럼 S는 몸에 힘이 쭉 빠져 바닥에 풀썩 주저앉았다. S의 사랑하지 않는 L은 생각하지 못했었다. 충격에 말이 되지 못한 감정들이 S의 입 안에 맴돌았다.

L은 무미건조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S의 생각을 부정하는 것일까. 그는 한 손으로 야윈 뺨을 감쌌다. 눈물을 매단 채 파르르 떠는 속눈썹을 엄지로 훑었다.

“그렇다고 당신이 내 곁에 없는 건 싫어.”

“L...”

“그 개새끼 옆에 있을까봐.”

 

잠시 안심했던 S는 뒤이어 들려오는 무덤덤한 L의 말에 흠칫 몸을 떨었다. 거친 욕설을 내뱉던 당사자는 아무렇지 않게 놀란 부인의 얼굴을 계속 어루만졌다.

 곧 계속 앉아있던 몸이 천천히 일어났다. L은 한쪽 벽에 걸려있던 날카로운 레이피어 앞으로 향했다. S는 걸음을 옮기는 그를 눈으로 쫓았다. 그가 검을 집어들자 S는 순간 오싹한 생각이 뇌리에 스쳐 저도 모르게 헉, 하고 숨을 삼켰다.

 

 "안심해요, 내 검 끝이 당신을 향할 일은 절대 없을 테니.”

 

 L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안다는 말투로 S를 달랬다. 그런데 S는 안심할 수 없었다. 저 검의 끝이 향하는 사람이 자신이 아니라면 남은 사람은 ‘그’밖에 없다.

 

 "안 돼요! 안 돼요, L. 여보, 그러지 말아요.”

 

 S는 언제 겁을 집어먹었냐는 양 무릎걸음으로 빠르게 다가와 종아리를 붙잡았다. 자신의 선택이 불러온 결과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형제가 파멸로 향하는 것은 원치 않았다. 자신 때문에 형제의 우애가 처참히 무너지는 것은 견딜 수 없었다. 그래서 모래가 가라앉아 그나마 맑아진 진흙탕 같던 L의 눈동자가 다시 차갑게 탁해지는 것도 깨닫지 못했다.

 L은 잠시 아무 말 없이 제게 매달리는 부인을 가만 바라보다가 허리에 검을 차고 이불 채 S를 안아들었다.

  

“당분간은 이 방에 머무르도록 해요.”

 

 L은 침대에 그를 가지런히 눕히며 이불을 꼼꼼하게 덮어주었다. 이마를 쓸어주는 그는 다시 예전의 다정하고 상냥한 남편으로 돌아온 듯 보였다. 하지만 S는 그렇지 않음을 눈치 챌 수 있었다. 멀어지는 그의 손목을 가녀린 손이 낚아챘다.

  

“잠시만, 가지 말아요.”

“사람들에게는 몸이 안 좋아졌다고 하죠.”

“무얼... 무얼 하려는 거예요, L.”

“... ... 사랑해요, 부인. 다녀올게요.”

  

L은 대답하지 않고 울 것 같은 표정을 한 S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너무나도 손 쉽게 S의 손을 뿌리친 남자는 부인의 외침을 외면하며 문 밖으로 걸어 나갔다. 다급한 목소리는 침실 문 앞을 지키던 기사 둘이 문을 닫아주자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날이 선 적막이 복도에 가득 찼다.

  

“부인께서 울음을 멈추지 않으실 것 같으니 하녀들은 침실에서 공작부인을 돌보라. 미열이 있었으니 의원을 미리 부르는 게 좋겠다.”

“예, 공작님.”

 

공작은 바깥에 대기하던 하녀장에게 명령한 두 집사장을 불렀다.

  

“집사장, 쥐를 잡아야겠다. 지금부터 움직여라.”

“알겠습니다.”

 

 노련한 집사장은 주인이 무슨 말을 하는지 금방 알아챘다. P와 S가 주고받는 편지를 중간에 가로채 L에게 바쳤던 사람이 바로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이제 그는 P와 내통하는 자들을 속아내는 것을 명받았다.

 L이 고개를 까딱이자 집사장과 하녀장은 바쁘게 몸을 움직였다.

  

“... ... .”

  

L은 충실한 하인들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곧장 걸음을 옮겼다. 그의 발끝이 향한 곳은 지하감옥이었다. L은 홀로 계단 아래로 내려갔다.

P는 가장 안쪽 감옥에 수감되었다. 양팔과 발목이 쇠고랑에 묶인 채 무릎을 꿇고 앉아있었다.

 L의 그림자가 P 위에 드리웠다. 그가 고개를 들었다. 얼굴에는 멍과 굳은 피딱지가 덕지덕지 붙어 꼴이 말이 아니었다. P는 자신을 찾아온 사람이 형이라는 것을 깨닫자 갇혀있는 주제에 히죽 미소를 지었다.

  

“결투라도 신청하려 오셨습니까?”

  

공작의 허리춤에 매인 검을 발견하고 그가 비아냥거리며 말했다. L도 피차 서로를 죽이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S가 P에게 어느 정도 마음을 주기 전이라고 해도 둘은 소꿉친구였다. 오래 알고 지낸 이상 형제가 서로의 손에 죽는다면 S는 큰 충격을 받을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S가 과연 그걸 버텨낼 수 있을까?

  

“내가 널 어떻게 하지 못할 거라 생각해서 그리 방자하게 구는 것이겠지.”

“그렇지 않습니까?”

 

 P는 비웃으며 계속 여유를 부렸다.

  

“형님이라면 조금 더 효율적으로 움직이셨으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런 방법이 네게는 있는 마냥 얘기하는 구나.”

“왜 없겠습니까.”

  

L이 어디 한 번 얘기해보라는 듯 한쪽 눈썹을 까딱이자 P의 웃음이 더욱 짙어졌다.

  

“중요한건 S의 마음이죠.”

“그래서.”

“누가 S의 마음을 독차지할 수 있는지 겨뤄보자는 겁니다.”

“무슨 말을 하려나 했더니 계속 이런 추태를 부리겠다는 말이구나.”

“어차피 우리 둘이 실랑이를 해봤자 결론은 나지 않습니다.”

 

 저울이 계속 평행할 수는 없는 법 아닙니까. L은 P의 말에 가만히 팔짱을 꼈다.

  

“제가 마음을 독차지한다면 S의 재혼을 위해 그와 이혼해주십시오.”

  

L이 얼굴을 와락 구기자 P는 재빨리 뒷말을 이었다.

  

“대신 그 전까지 S는 계속 공작령에서 지낼 겁니다.”

“... 만약 네가 진다면?”

“영구추방이든 어떤 명령이든 불복하지 않겠습니다.”

“하! 무슨 말을 하나 했더니.”

  

L은 그의 말에 픽 한쪽 입꼬리를 올릴 수밖에 없었다. P가 정말로 S를 사랑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랫동안 비교당한 동생의 복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네 열등감도 이제는 지긋지긋하구나.”

  

중요한 건 S의 마음이라고? 여기에 S의 의사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그는 그저 L이 괴로워하길 바랄 뿐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사실을 교묘히 섞으며 유리하게 대화를 이끄는 P가 꼭 악마같이 추악하게 느껴졌다.

 

 “네가 무능해서 빛을 발하지 못하는 게 어디 내 유능 때문이냐?”

“그렇게 무능한 동생에게 부인을 뺏긴 기분은 어떠십니까?”

  

자존심이 상한 P는 미간을 찌푸린 채 씩 웃으며 비아냥거렸다. P의 도발에 아랑곳 않고 그를 내려다보던 L은 이윽고 감옥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뺏겼다, 정녕 그렇게 생각하느냐?”

  

형의 말에 P의 얼굴 위로 의아한 빛이 감돌았다. L은 동생의 얼굴을 내려다봤다. 일란성 쌍둥이라 외모가 똑같이 생긴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그러나 지금 L은 그 사실이 거슬리기 그지없었다.

  

“정정당당하게 S의 마음을 가져왔다고 생각하느냐?”

 

 L이 P의 멱살을 잡고 들어올렸다. P는 불길함을 느꼈는지 몸부림을 쳐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그러나 핏줄이 울룩 솟아오른 손은 그를 놓치지 않았다. 동시에 스릉, 예리한 검날이 검집에서 빠져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나와 닮은 얼굴로 부인을 꾀어내다니 너무 비겁하지 않나, P.”

  

아마 S는 P를 보고 자신을 떠올렸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부인은 자신의 얼굴을 보고 P를 떠올렸다. 외모를 이용한 것도 모자라 주객전도라니. 당치도 않았다. 검의 끝이 P의 왼쪽 이마에 닿았다.

  

“L!!”

“P, 내 동생이여..”

  

L은 자신을 올려다보는 동생에게 가늘게 웃어보였다.

  

“어디 나와 다른 얼굴로도 S의 마음을 얻을 수 있는지 한 번 보자꾸나.”

  

그 말을 끝으로 지하 감옥에는 후작의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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