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일은 아니지만
히라센
오늘은 비가 내리고 있었다.
하나, 둘, 오른쪽, 왼쪽, 번갈아 가며 불이 꺼져가고 있는 시각에 물이 잘게 깔리듯 고인 아스팔트 위를 새카만 발이 꾹꾹 누르듯 밟아 걷고 있었다. 커다란 개인가? 아니다. 이 크기는 분명 사람이다. 하지만 문명을 의미하는 신발로 드러나는 곳 하나 없이 감싸여 있는 두 다리가 묘하게 인간성 없는 걸음걸이를 보이고 있었다. 그 다리의 주인은 한 눈으로 하늘을 보며 다른 한 눈이 있던 곳에 덮여있는 매끈한 무기질로 빗방울을 맞았다. 우산이 없어 후드로 감싼 머리에서 검은색과 회색의 머리칼들이 조금씩 삐져나와 물기를 머금고 있던 그는, 자신을 피하기라도 하는 듯 꺼져가는 불빛들을 지나치며 천천히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꺼지지 않았던 빛 중, 자신이 찾고 있던 것을 발견한 듯 마침내 똑바로 걸어가던 걸음을 옆으로 옮겼다. 그리고 곧 작고 투박한 금속이 유리문에 부딪혀 나는 소리가 났다.
“어서오세요.”
들어온 사람에게는 다행스럽게도, 아직 폐점 준비를 할 생각은 없어 보이던 가게 주인의 인사가 들렸다. 동시에 천천히 코 안으로 스며오는 풀냄새와, 옅지만 얼룩덜룩하게 물냄새와 함께 뒤섞인 꽃냄새가 목적을 그에게 상기시켜줬다.
그래, 오늘은 비가 내리니까.
히라타는 평생에 남과 어떤 관계를 맺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 없이 살아왔다. 그냥 타고나기를 그렇게 타고났다. 라고 하면 너무 단순한 설명이었다. 분명 그의 인생에 타인과의 접촉이 거의 없었으므로(이런 이야기를 하면 어디의 누군가 발끈하더라도,) 성정이 그렇게 굳어진 것은 맞지만, 그에겐 따로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었다.
그러니까 이를테면 영화를 보고 있자니 그 속에 등장하는 남녀가 사랑을 말하는데, 다른 말은 없이 약속이라도 한 듯 입을 맞추거나, 연인이 된다거나, 결혼을 이야기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어린 시절의 히라타는 늘 왜? 하며 극장에서 나오는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그게 사람들이 말하는 ‘사랑’이라는 걸 익히게 되었다. 자신은 별로 하고 싶단 생각이 들지 않는, 어딜가도 가장 농밀하게 표현되는 이것이 좀 어색하고 이해가 잘 되지 않았다. 그리고 조금 외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은 만약 자신이 누군가를 좋아하게 된다면, 그리고 그 사람도 자신을 좋아해서 어떤 관계가 된다고 했을 때 그냥 ‘서로 아끼는 사이’ 로는 상대에게 특별할 수 없을지도… 그런 생각을 했다.
물론 머리를 오래 차지하지 않은 생각이었다. 그야, 자신도 사람을 독차지하면서 특별해지고 싶진 않았으니까. 다만 이런 마음으론 무엇도 지속할 수 없겠구나- 하는 생각을 잠깐 했을 뿐이었다. 결핍이라는 걸 정해주는 건 늘 히라타 자신이 아니었다.
그래도 나는 내 마음이 가는대로 하고 싶어. 라는 생각을 하며 그는 늘어진 옷깃을 오히려 더 단단히 여미었다. 그게 서툴고 너저분한 모양새여도 고쳐 줄 사람은 없었다.
그리고 지독하게 짠 바닷바람을 채찍처럼 맞으며 조금 더 머리가 굵어진 히라타는 산의 나무냄새며 풀냄새에 푹 젖어 온 히가시자토를 만났다.
아무래도 꽃을 사러 온 건 확실해 보이는 사람이 잠시 머뭇거리는 게 보였다.
가게 주인은 손님이 느긋하게 생각할 수 있도록 기다려주는 한편, 손님의 행색을 살피게 되었다. 꽃과는 인연이 전혀 없어보이는 건 알겠다. 그게 그의 평가였다.
그도 그럴게 눈 앞의 사람은 인상도 험상궂고, 한 쪽 눈은 특이하게 고글 처럼 렌즈가 달린 안대로 가려져 있는 데다가, 양 손에 꼼꼼하게 낀 검은 장갑에 서 있는 모양새도 그렇게 친절할 것 같진 않았다. 다만 그런 요소들을 조금이나마 상쇄시켜주는 옷차림이 그를 강도가 아니라 손님으로 생각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래도 옷이 분명 본인 취향은 아닌 것 같아 보였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칠 즈음, 손님이 입을 열었다.
“저거 주세요.”
손님의 인상에 비해 맹한 말투에 가게 주인은 무심코 맥이 풀린 소리로 아하… 하고 말았다. 그리고 바로 제 발 저린 듯 어흠, 헛기침을 하곤 상대방이 저거 라고 가리킨 꽃에 손을 가져가며 물었다.
“몇 송이 드릴까요? 다른 꽃과 매치해도 좋을텐데요.”
“…한 송이…만 주면 될 것 같은데.”
“…아하.”
이상할 정도로 대화가 맥빠지게 끝나버리는 느낌에 가게 주인은 그냥 손이나 빨리 움직이기로 했다. 그래, 우산도 없어보이는데 많이 사봤자 다 더러워지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그나마 이 한 송이가 최대한 젖지 않도록 꼼꼼하게 비닐로 겉을 한 겹 더 감싸주었다. 그러고보니 이런 늦은 시간에 우산도 없이 와서 이걸 한 송이만 사가는 저 사람의 사연은 뭘까? 하는 생각도 들었으나, 묘하게 말을 걸기 어려워서 질문 대신 조용히 꽃을 건네고 손님의 결제를 도왔다.
손님 또한 아무 말 없이 목례 하곤 꽃과 함께 가게를 나가버렸다.
그리고 잠시 뒤 이 가게를 마지막으로 거리의 모든 불이 꺼졌다.
비는 아직 그치지 않았다.
“넌…좋아하는 사람과 헤어지지 않는 법을 혹시 알고 있어?”
언젠가 토모나리가 이 말을 하게 되었을 때였다. 히가와 싸움 아닌 싸움을 하고, 그를 조금 울리기도 하고, 그러나 끝내 마주보고 이야기하는 일이 좀 있었지만, 이 때의 토모나리는 내심 스스로에게도 질문하고 있었다. 히가를 잃지 않기 위해 자신이 하는 모든 게 혹시나 거꾸로 서로를 멀어지게 하는 건 아닌지, 잃고 싶지 않다는 감정은 또 ‘사랑’과 다르거나 거기에 미치지 못하는 것인지, 그저 위하는 마음은 어떻게 표현해야 상대방과 ‘같을 수 있는’ 건지도.
하지만 자신은 모르는 것들을 잔뜩 안겨주고, 하나하나를 어렵고 어렵게 알려주는 히가가 너무 좋았기 때문에 토모나리는 히가가 친구라 불러주었을 때 부터 가르쳐준 대로 자신이 연인이 되길 선택한 사람을 안았다.
분명 히가는 히라타의 옷깃을 고쳐주는 사람이 아니었지만 히라타가 토모나리가 될 때 마다 스스로 여민 것을 풀게 만드는 사람이었다. 그러면 제법 바라지 않았던 감정들이나 일들이 함께 얼룩덜룩하게 스며들어왔으나 토모나리는 그게 싫지 않았다.
토모나리는 이게 자신의 방식으로 느끼는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아마도 그렇겠지. 라는 생각을 늘 덧붙이곤 했지만.
이 이후로도 두 사람이 딛고 선 땅에는 종종 비가 내렸다.
창백해진 얼굴로 어린애처럼 왜 알아주지 않느냐는 식의 말들 따위를 내뱉고 나니 그 말들조차 전부 고백이 되었다는 사실을 토모나리는 몰랐다.
당신은 몰랐겠지만, 친구라고 부르게 되었을 때 부터 토모나리는 항상 히가에게 고백하고 있었다. 누구에게도 알려줄 필요 없을거라 생각하던 것들을 애써 알려주려고 내민 모든 말과 행동이 서투르게 히가와 자신을 상처 입히면서까지도 인정받았으면 했다는 걸, 토모는 뒤늦게 술냄새가 풍기는 센이치의 품 안에서 깨달았다.
토모는 센이치와 다르게 감정이 격해진다고 해서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아니었으나 자신이 지금까지 중 가장 상상도 못할 정도로 멍청한 모습을 하고 있어서, 그리고 결국 그걸 알아준 센이치가 자신을 안아주었기 때문에 그는 조금… 울고 싶어졌다. 그건 센이치가 토모를 여전히 좋아한다는 표현이었으니까.
그리고, 토모도 역시 센이치를…
한 손에 꽃을 든 사람은 가게가 있던 거리를 벗어나 몇 걸음 걷다가 곧 겉에 입고 있던 후드 안에 들고 있던 꽃을 넣고 지퍼를 잠갔다. 그 움직임에는 아무 군더더기도 없었지만, 분명 소중히 하는 마음이 느껴졌다. 그 마음 처럼 붉은 꽃송이가 심장처럼 가슴께에 자리하는 것을 느끼며 그는 발걸음을 더 빠르게 재촉했다. 그 걸음은 지침을 모르는 것 같이 꾸준하게 물이 깔린 길에 순간순간 자욱을 남기며 목적지를 향해 갔다.
기다리고 있을 사람에게는 출발하기 전에 연락을 했다. 보고 싶다는 말도 충분히 했다. 자신은 원래도 피로할 몸이 없었던 사람이었지만 오늘은 비가 내리는 날이었기 때문에 더욱 피로를 느끼지 않았다. 많은 일을 혼자 겪었고, 상대방과 함께 하지 못했던 건 맞았다. 그래도 지금 그를 향해 가는 길이 힘들지 않았다. 곧 이 밤 내내 함께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아직 비가 내리고 있었으니까.
뛸 수도 있었을텐데 기어코 성실하게 걷고 걸어서 그 사람이 도착한 곳은 집이었다. 초인종을 누를 필요는 없었다. 도어락을 열고 들어가면 되었다. 물기가 묻어서 한 두번 미끄러지는 손을 견디고 문을 연 그에게 도어락 열리는 소리를 듣고 다가온 사람이 와서 반겨주었다. 문이 닫히고, 비를 흠뻑 맞은 사람은 드디어 후드를 천천히 벗고 품에 안고 있던 꽃을 먼저 느리게 건넸다.
“갑자기 웬 장미?”
그것을 일단 받아든 상대방이 물었다.
“비가 와서.”
그렇게 대꾸하며 현관에서 묘하게 미적거리던 그는 무언가 변명하듯 말했다.
“…수요일은 아니지만. 늦어서 미안해.”
마침 집에서 기다리고 있던 사람이 틀어둔 TV에서 자정이 된 것을 알리는 멘트가 나오고 있었다. 수요일도, 목요일도, 금요일도 아니고 이젠 토요일이다. 장미를 건넨 사람은 아무래도 목요일에 돌아오려고 했지만 그게 생각보다 잘 되지 않았던 점이 걸렸던 것 같았다. 목요일도 수요일은 아니었지만, 아무튼.
그가 더 무어라 말을 하기 전에, 야속하게도 TV 속 심야토크쇼 패널들이 떠드는 소리가 선수를 치고 말았다.
『요즘 비가 자주 오네요~』
『네, 덕분에 저도 지난 주엔 아내에게 장미를 선물했습니다.』
『어머, 저도 한국에서 배웠어요- 비오는 수요일엔 사랑하는 사람에게 빨간 장미를~』
“ …… 그렇대.”
유난히 드물게 머뭇거리며 말하던 사람은 갑자기 엄청 침착해져서는, 젖은 후드를 들고 신발을 벗어 먼저 방에 성큼성큼 들어가버렸다.
왜 갑자기 이렇게 민망할까. 그런 생각을 했으나 지금의 그는 그래도 알고 있었다.
여전히 자신이 알고 느끼는 사랑을 상대방이 아는 방법으로 주고 싶었고, 그게 여전히 똑같은 모양은 아니지만, 토모도 역시 센이치를 사랑한다는 것을.
수요일도, 목요일도, 금요일도 아니고 이젠 토요일이지만, 그래도 기다리는 사람에게 비오는 날 빨간 장미를 주고 싶어하는 것과 같다는 것을.
그리고 센이치가 그걸 받아줄 수 있는 사람이란 것도.
그래서 민망하지만서도 토모는 그 기분이 좋아서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서서히 비가 그치며 습기로 방이 미지근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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