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제목 없는 프롤로그를 - 미르

그 뭐냐, 그거다. 그, 고록이란 거다

아, 나는 바보다. 이제 와서 무슨 당연한 소리인가 싶을 정도로, 바보다.

이건 그런 바보인 나의, 짧은 회상글이다.


상현 선배와 나의 결혼이 결정되었을 때, 어머니는 굉장히 기뻐하셨다. 그런 어머니의 모습을 본 아버지 또한 옅은 웃음을 지으셨다. 동생들은 상대가 믿을 만한 사람이기 때문인지 다행이라며 둘 다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소명 선배는…… 미소를 지으면서 축하의 말을 건네셨다.

“……얘기 들었어. 축하해, 미르야.”

어두운 그림자 하나 지지 않은 그 웃음에, 조금 안심했다. 물론 이 결혼은 연애 결혼이 아니지만, 그럼에도 이런 결정이 틀린 게 아니라고 확신을 받은 기분이었다.

나는 상현 선배를 소중히 여기고, 선배도 나를 소중히 여긴다. 약혼이 결정된 이후에 시작된 ‘그래서, 시간이 꽤 지났는데 자세한 계획은 세웠니?’에 대한 해결책도 된다.

(혼인신고 후에는 취소도 안 되지, 정략 결혼이면 웬만한 사유로는 주변 반대 탓에 이혼도 힘들 거야. 괜찮겠어?)

(네!)

(너, 내가 생각하고 대답하랬지?!)

(아……! 음, 어차피 전 좋아하는 사람도 없고, 꼭 해야 한다면 선배님이랑 하고 싶, 으니까 괘, 괜찮지… 않을까요?!)

(그래…….)

어, 어라? 이거, 둘이서 상의한 게 아니라 선배 혼자 고민하고 결정한 건 아닐까……?

…….

에라, 모르겠다!

아무튼, 그렇게 결정된 결혼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상견례라든지, 어, 뭐 이것저것…… 자세히는 기억이 안 나지만. 내가 실수하거나 이상한 소리를 할 때마다 아버지가 혼을 내셨지만 상현 선배가 도와준 덕분에 큰 잘못을 한 적은 없었다.

게다가.

“하얀 정장을 입겠다면 이것도 어울리겠구나.”

어머니가 예쁜 목장식을 주셨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결혼하실 때, 아버지가 선물하신 어머니의 물건이라고 한다. 그 뒤로 딱히 쓸 일은 없었지만 잘 간직해 두었다면서 나에게 주셨다. 레이스초커, 라는 이름의 그 하얀 목장식은 가운데에 작은 보석이 달려 있다. 그 포인트가 마음에 들었다.

어떤 옷을 고르게 되든지, 이것과 어울리는 옷으로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야, 미르. 너 괜찮, 지는 않아 보이네.”

문제는 옷을 맞추러 간 날에 터졌다. 나는 잊고 있었던 내 체질이 발목을 잡은 것이다.

목에 레이스초커를 하자마자 숨이 막히는 기분이 들더니, 상현 선배가 걱정스러운 얼굴을 할 정도로 눈에 띄게 숨이 가빠졌다. 지금도 쌔액쌔액, 하는 내 숨소리가 귀에 들어오고 있다.

“그 초커 때문이면 그냥 빼라. 네 컨디션이 중요하지, 초커가 중요해? 지금 얼굴이 말이 아니야.”

아무래도 표정에서도 드러나는 것 같다. 그렇겠지…….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나는 가쁜 숨소리가 더이상 들리지 않게 숨을 꾹 참고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이것만은 양보할 수 없다.

“…빼라니깐…. 하, 거 참. 빼면 안될 이유라도 있어?”

“어, 어머니…가… 그렇게 웃어주신 건… 처음이에요……. 저, 저에게… 소중한 걸, 주신 것도… 허억, 게다가… 자, 잠깐만, 잠깐만 참으면…….”

“…너, 말 더듬고 있는 거 아냐? 무슨 마음인지는 이해한다만……. 네 평생에 있어 한 번 있을 일이다. 잠깐 참고 할 게 아니야. 장모님께는 같이 말씀드릴게.”

말까지 더듬고 있었던 건가. 눈치채지 못했다. 나중에 어딜 신경써야 할지 메모해두는 게 좋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지금은 참자. 이건 절대로 놓치기 싫으니까……. 어머니가, ‘엄마’가 준 거니까.

잠시 침묵이 흘렀다. 손의 굳은살을 만지작거리다가 고개를 들어보니 상현 선배는 내 대답을 기다리는 듯했다.

“……얼굴이, 창백해보인다면 면사포 같은 걸로 가릴게요.”

“그… 얼굴의 문제가 아니라……. 네가 힘들잖아. 게다가 결혼식이 본식만 있는 것도 아니고, 사진도 찍어야 하고, 피로연도 있고.”

……아, 맞다. 의외로 결혼식은 길다. 오랫동안 버텨야 한다. 그런 사실을 완전히 까먹고 있었던 나지만, 알고 있었던 셈 쳤다. 여기서 까먹었다는 걸 알리면 내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을지도 몰라.

숨을 한번 크게 들이쉬고, 내쉬고. 절대 내 상태가 나빠보이지 않게 포장했다. 전부터 연기력은 수준급이라고 들었다. 상태가 괜찮냐고 누군가가 물어보면 거짓말을 하지는 못하겠지만 그 전까지는 숨길 수 있을 것이다.

“……웃는 건, 제 특기예요.”

“하아……. 그래, 내가 졌다.”

앗싸! 이겼다!

그런 준비 기간을 거친 결혼식은 무사히 잘 마쳤다. 아직 꽃샘추위가 한창인 3월. 커다란 예식장에서 소명 선배가 주례를 서고, 주월 멤버들이나(하오는 역시나 뷔페 음식에 엄청난 관심을 보였다) 서로의 친구나 가족 등 많은 사람들 앞에서 상현 선배와 내가 나란히 서 있었다.

내가 정말로 레이스초커를 하고 있었더니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던 상현 선배는 식이 시작되자 예쁜 미소를 보여주었다. 나는 그 얼굴에 안심하고 약간, 진심으로 웃을 수 있었다.

“미르 너 어떻게 아무 얘기도 없이 갑자기 청첩장을 날릴 수가 있어?!”

“우리도 아직인데! 새치기를 하다니!”

“에헤헤…….”

다들 웃고 있었다. 한 사람도 찡그리지 않았다.

나중에 확인한 사진 속의 나는 새하얀 웨딩 정장을 입고 평소와 같은 환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성공적이다. 아, 다행이야.


“허억…… 어윽…….”

결혼식 일정이 모두 끝난 밤. 나는 옷을 갈아입자마자 화장실로 뛰어갔다. 하루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한 것치고는 어째, 그, 나오는 게 많았다.

목에서 시큼한 냄새가 올라와서 견디기가 힘들었다. 그럴 때는 결혼식에 와준 사람들의 얼굴을 떠올렸다. 내 상태를 눈치챈 것인지 걱정스러워하던 슈앙 선배와 두 사람 다 예쁘다며 신나보이던 친구들, 멋있게 축가를 부르던 대우 선배, 계속 나를 걱정해주던 소명 선배.

그리고…….

“선배…….”

식이 시작된 이후로는 웃는 얼굴만 보여주셨기 때문에 안심할 수 있었다. 그건 사실이다. 하지만 내가 아무리 바보여도 그게 꾸민 웃음이라는 건 안다.

정말 이대로 괜찮았던 걸까, 하는 생각이 떠올라서 조금 걱정이 된다.

“……? 멈췄다.”

밖에서 선배가 기다리고 있다. 빨리 나가야 해. 그런 생각을 했더니, 갑자기 나오던 것이 멈췄다. 어떻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양치한 뒤에 화장실에서 나왔다.

거울 앞에서 볼을 꾸욱 꼬집어 표정을 돌렸다.

밖에는 역시나 상현 선배가 있었다. 주변에 다른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그 얼굴을 보자마자, 칭찬을 듣고 싶다고 생각해버렸다. 열심히 했으니까, 결혼식을 망치지 않았으니까, 나를 포함해서 다들 웃었으니까.

소명 선배가 상대였다면 가까이 가서 쓰다듬어 달라고까지 했겠지. 내가 생각해도 나는 정말…… 어리광쟁이다.

“무사히 끝났죠?”

활짝 웃으면서 그렇게 말했다.

“……그래. 수고했다.”

선배는 내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그런 대답을 했다.

소명 선배처럼 안아주고, 쓰다듬어주는 그런 칭찬은 아니었지만 가슴이 뛰었다. 어쩐지 커다란 검파란을 해치우고 선배들에게 잘했다고 칭찬받는 기분이었다.

어쩐지, 그 한마디에 긴장이 풀려버린 나는…… 그대로 엎어져버렸다! 다행히 얼굴 박치기를 하기 전에 선배가 내 몸을 잡아주셨지만, 무릎은 박은 것 같다. 아야야.

몸에 힘을 주었지만 사지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손발이 덜덜 떨려서 내가 진동하는 휴대폰이 된 것 같았다.

“무슨 일이야? 어디 아프냐?!”

“배…….”

“배가 뭐?”

“배, 배고파요…….”

“…….”

고개를 살짝 들어서 겨우 대답했더니 꼬르르르르륵, 하는 소리가 둘밖에 없는 복도에 울려퍼졌다. 선배는 깊은 한숨을 쉬고는 “여태 아무것도 못 먹었으니 당연하지, 장미르……”라고 하셨다.

그 말에 나는 그저 웃을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화장실에서 나온 후에는 그런 걸 완전히 잊었기 때문에…….

“일어날 수는 있겠어? 일단 슈앙 녀석한테 가야겠네.”

“으, 네…….”

선배의 부축을 받으면서 문을 닫기 직전인 중잘집까지 차로 이동했다.

슈앙 선배는 내 모습을 보고는 기겁하며 우리 둘을 가게로 들여보냈다. 컨디션이 좀 안 좋은 줄은 알았는데 어떻게 하루종일 아무것도 안 먹을 수가 있냐면서도 주방으로 가는 속도는 평소보다 빨랐다. 메이리는 가장 가까운 자리에 나를 앉히고, 나는 상현 선배가 떠와준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양치한 직후에 마시는 물은 많이 시원해서 기분이 좋았다.

음식이 나오길 기다리는 동안 선배들은 결혼식에 대해서 이것저것 이야기를 나누셨다. 나는 신경쓰지 못했던 부분까지 이야기하셔서 나도 모르게 “그랬구나……”하고 중얼거려버렸다.

“마히따…….”

그리고 나온 음식을 먹었더니 곧바로 몸 상태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내 몸이지만, 신기하네.

“이제 괜찮냐?”

“갱항아요!”

“먹고 말해.”

상현 선배는 안심한 것인지, 아니면 어이가 없으신 것인지 살짝 웃으셨다.

그렇게, 우리의 결혼식은 무사히 끝마쳤다.

다음날 아침, 비행기를 타고 떠난 신혼여행…………은 괌, 이라는 곳으로 갔다. 거기가 정확히 어딘지는 돌아온 이후에도 잘 모르겠지만, 즐거웠다고 생각한다. 내 첫 해외여행이었고, 외국인이 많았던 것이 기억난다.


그렇게 법적으로, 사회적으로 상현 선배와 내가 부, 부부가 된 이후에 나는 조금씩 가주의 일을 했다. 우선은 매일 본가 검도장에 가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하낟. 조금씩 일을 늘려가면서 이모할머니가 은퇴하시기 전에 완전히 가주가 될 준비를 해야 한다.

상현 선배와 같이 사는 집에는 주말마다 돌아간다. 형식상의 구실만 맞춘 듯한 부부의 생활은 어쩐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장미르, 너 자꾸 칠칠맞지 못하게 입에 묻히고 먹을래?”

“앗, 에헤헤…….”

하지만 선배는 상냥하다. 소명 선배랑은 다른 의미로, 상냥한 사람이다. 어, 정확히 어디가 어떻게 다르냐고 물으면, 말은 못하지만, 드래도 확실한 건…….

“아, 아뇨! 제가 알아서 뗄게요!”

“? 그래. 떼고 나서는 묻히지 않게 조심해라.”

“네에…….”

내 기분이 다르다는 것.

…….

뭔 소리람!

으음,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선배와 닿는 것이 부담스러워졌다. 닿으면 몸이 굳고, 심장이 아파서 빨리 떨어지고 싶다. 선배가 싫은 건 아니지만, 그렇다. 어째서인지도 모르겠고, 어떻게 하면 좋은지도 모르겠다.

서, 설마 나, 선배랑 결혼하면 안 됐던 건가?

(결혼 전에 잘 지내던 사이여도 그 후에는 보장할 수 없어. 잘 됐으면 좋겠지만…… 그래도 뭐, 결혼 후에 변심이 있어도 너무 방황하진, 말고.)

누군가가, 아마도 결혼식장에서 그런 말을 해준 기분이 든다. 누구였지?

그때 일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런데 그 말이 맴돌아서…… 살짝 초조해졌다.

“선배한테 주말에 놀러 가자고 해도 괜찮을까…….”

“대체 왜 그걸 동생 수련 봐주는 와중에 생각하는 건데?”

“몸을 움직여야 머리가 돌아간단 말이야!”

어른들이 모두 화룡류의 힘을 잃은 지금, 화룡류 무술을 사용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내 쌍둥이 동생들은 대학 입학 후에 내가 무술 수련을 봐주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내 주된 고민 상담은 이곳, 검도장의 지하 대련실에서 이뤄진다.

소명 선배 덕분에 완급 조절이라는 것을 익힐 수 있게 된 나는 설령 진검 대련을 하더라도 이 애들을 다치지 않게 조절할 수 있게 되어서…….

“스케줄만 맞으면 편하게 불러도 되는 거 아냐?”

“부부인데 뭐 어때.”

“부……?!”

다른 생각을 하던 중 들어온 아직 귀에 익지 않은 단어에 놀라, 옆에서 경멸하는 표정을 짓고 있는(물론 장난일 것이다. 장난…… 장난 맞지?!) 동생들을 보지 못했다.

다만 그 후에 내가 어떤 일을 했는지는 기억이 나는데…….

“선배, 저희 집 도장에 놀러 오시지 않을래요?”

“같이 영화보러 가요! ……무슨 영환지는 모르겠지만요.”

“새로 생긴 카페의 디저트가 맛있대요! 어, 뭐, 뭐였더라?”

“이번 파견 임무에 같이 가주시면 안 돼요……?”

“놀이공원에 가고 싶어졌는데 같이 갈 사람이…….”

“뭐, 뭔가를 만들어 버렸으니까 먹어주세요!”

그런 식으로 다짜고짜 끌고 다닌 기억이, 난다. 그런데도 정작 같이 있을 때 닿으면 깜짝 놀라서 멀찍이 떨어지고, 시선을 피하고…… 하지만 너무 멀리 떨어져 있으면 불안하다. 역시 나는 이상하다. 이상해졌다.

결혼식 때까지만 해도 이러지 않았는데, 약혼 이후로 챙겨주실 때가 많아서 조금 멋있다고 생각한 적읃 있어도 다가가기 싫다고 생각한 적은 없다고!

선배가 이런 걸 눈치채버리면 어쩌지……. 눈치, 채셨겠지만…….

미움받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고민은 해결되지 않은 상태로 시간이 흘렀다. 어쩔 수 없지. 생각하는 건 나랑 안 맞으니까.

하루는 소명 선배와 함께였던 날이었다.

“응? 네가 먼저 나를 안다니 드문 일이네. 무슨 일이라도 있었니?”

“어, 그게…….”

생각없이 있었더니 소명 선배를 끌어안아버린 거 같다. 상현 선배에 대한 생각으로 머리가 가득 차버려서, 안정하고 싶, 었던, 것 같……을지도?

속으로 당황스러워 하면서도 꼬옥 끌어안고 있었다. 슬슬 더워질 시기지만 딱 알맞게 따스했고 소명 선배의 심장고동에 안심이 되어서 떨어지기 싫었다. 아아, 편안해…….

“그게, 최근 들어 갑자기 몸에 닿는 게 꺼려지는 사람이 있어서요. 그 사람이 싫은 건 아닌데 가까이 가거나 닿으면 조금 긴장되고… 당황스러운데 기분이 나쁘지 않은… 그런 게 있어서……. 근데 선배님이랑은 그냥 편안하니까! 뭐가 다른지 보려고! 어어, 그게……!”

횡설수설하면서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선배를 끌어안고 있는 팔에도 힘이 들어간 것 같다. 조금 진정한 후에 떨어져서 앉았다.

선배는 잠시 생각한 후에 진지한 어투로 말씀하셨다.

“그러면 네가 마음이 설레는 사람이 생긴 건 아니니?”

“딸꾹.”

설레는 사람?

설레?

그, 그게 뭐더라?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지만 몸이 먼저 반응해버렸다. 딸꾹질이 멈추지 않았고, 나도 모르게 그 장소에서 도망쳐버렸다.

문을 닫기 전에 소명 선배의 “응?”하는 목소리가 들린 것도 같았다.

“우아아아아아아아, 딸꾸그아아아아아악!!!”

이상한 비명소리를 내며 공원 산책로를 내달렸다. 평범하게 걷고 있던 사람들이 나를 보고 놀란 얼굴을 하고 있다. 죄, 죄송합니다.

그렇게 한참을 뛰다가 이대로 지구를 한바퀴 돌 수도 없으니까… 애초에 국경을 넘어서면 혼날 테니까, 본가로 들어갔다. 쌍둥이들에게 상담을 하기 위해서이다.

“……이런 일이 있었어.”

“응……. 그걸 이제야 자각한 거야?”

“시, 싫어…….”

“뭐야?”

“무섭다고!!”

“뭐가?!”

“몰라, 당연히!”

“아, 아파! 때리지 마! 그리고 당연한 건 또 뭐야?!”

싫어.

무서워.

선배는 그대로인데 내가 달라졌다는 게 무섭다.

만화에서는 이런 걸 조금 간지러울 뿐, 달콤하고 기분 좋은 것으로 표현하지만 지금 내 심정은 소명 선배가 입원했을 때랑 비슷하다. 아니, 그땐 감정의 종류가 조금 달랐지만……. 분명 선배는 괜찮을 텐데, 내가 이런 감정을 가지지만 않았어도 아무 일 없이 일상을 보낼 수 있었을 텐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내 감정 때문에 주변 사람들에게 피해가 가는 것도 싫다.

모르는 감정은 싫다. 무섭다.

“어, 어떻게 하지……?”

“제형 본인한테 말하고 조언을 받아봐.”

“응, 그런 건 당사자끼리 말하는 게 최고지.”

“응……. 응? 아니, 그건 고백하라는 거잖아?!”

“아~ 이게 안 통하네.”

날 얼마나 바보로 아는 거야, 대체?!

평소의 배는 귀엽지 않아진 동생들은 내버려두고, 나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려 노력했다.

정말 노력했다.

“선배님, 선배님은 위에 씨랑 어떻게 사귀게 됐었나요…….”

“뭐? 듣고 싶냐? 하, 참 어쩔 수 없구만~.”

……노, 노력했다.

슈앙 선배부터, 얀이나 하오, 대우 선배…… 친구들이나 선후배 가리지 않고 상담을 했다.

하지만 누구든지 간에 최종적인 결정은 내가 해야 한다.고 했다. 뭐, 그렇겠지만.

“다치는 거야 우리 직업상 어쩔 수 없다치고, 치료는 제때 해야 할 거 아냐. 어?”

“선배.”

그래서 차라리 꾹 참고 아무 일도 없었던 셈 치려던 어느 날.

“저 선배 좋아해요.”

“어, 그래. ……뭐?”

“딸꾹.”

아, 어……? 입이랑 머리가 싸웠나 보다.

나는 멍하니 나를 바라보고 있는 상현 선배를 두고 집을 뛰쳐나갔다. 딸꾹질은 멈추지 않았고 내 발도 멈추지 않았다. 해가 저물어가는 강가의 벤치까지 전속력으로 달렸다. 앉은 후에는 딸꾹질과 심장이 두근대는 것을 멈추기 위해 가슴께를 부여잡고 안간힘을 썼다.

아, 저녁노을이 상현 선배의 머리카락색 같네……. 그대로 도망쳤는데, 어떡하지?

“……미르야?”

나를 부르는 소리에 깜짝 놀라 돌아봤더니, 운동복을 입고 있는 외삼촌이 있었다. 결혼식 이후로 처음 만나는 것이다.

잠시 우물쭈물 하더니 조심이 내 옆에 앉았다. 파스가 붙여진 내 팔을 보고, 내 표정을 본 후에 고개를 돌리고 작게 말했다.

“무슨 일 있냐? 그, 벽인 셈 치고 말해봐. 싫으면 말고.”

“……좋아하는 사람한테 고백하고 도망쳤어요.”

“아~…… 누군데?”

“상현 선배…….”

그 타이밍에 외삼촌은 잠시 의아한 얼굴을 하고는 곧 웃음을 참는 표정을 지었다. 뭐지…….

“넌 역시 그 집 애가 맞구나. 설마 고백 공격을 하고 도망치는 걸 물려받을 줄은 누나도 생각 못했을 거야.”

“네?!”

갑자기 엄청난 소리를 들어버렸다!

어렸을 때부터 집안 사람 누구도 닮지 않은 특이한 애라고 불리던 내가, 어머니와 닮은 구석이 있다니. 처음 알았다. 심지어 이런 바보같은 면을 닮았다니. ……그 어머니가, 이런 상황에 처했다고?

“아, 그래. 뭔가 조언하려면 그 전에 이게 먼저겠군. 결혼식 때는 아무리 그래도 눈치 보여서 말 못했지만…… 다음에 만나면 하려고 했던 말이 있었거든. 듣기 거북하면 말해. 아니, 그냥 무시하고 가버려도 돼. 내가 그랬던 것처럼.”

“네……? 뭔데요?”

외삼촌이 허벅지 위로 꾸욱, 주먹을 쥐는 게 보였다. 무슨 말을 하시려는 걸까.

“……미안해. 지금까지 너에게 화풀이만 했었어. 차기 가주라는 자리의 권한만 바라고 의무는 지기 싫어하면서, 잘 되지 않는 일을 아무 잘못 없는 너한테…….”

잠시, 지금 상황을 판단하는 시간이 필요했다. 어, 어어…… 오늘은, 고백의 날인가?

“미안해.”

“저, 그게…….”

무슨 말을 하는지 겨우 이해가 되었지만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다. 잠시 눈을 굴리면서 생각했다. 아, 아니, 눈 말고 머리를…….

“그, 최근에, 최선의 방법보다 자신의 마음을 우선하는 게 좋을 때도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말하면서 외삼촌을 슬쩍 봤더니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예전 같으면 내 말에 끼어들었을 텐데. 어찌되었든 계속 들어주신다면 말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가끔은 또 내 마음이랑 다르게 움직일 때 좋은 결과를 가져올 때도 있어요. 그러니까……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오늘따라 내 진심을 말해야 하는 순간이 많은 것 같다. 나중에 돌아가서도, 선배한테 내 진심을 말해야 하는 걸까.

“저는 딱히 별 상관 안 하지만 소명 선배님이나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것 같아요. 제대로 된 처벌조차 받지 않은 당신을 용서하면 안 될 것 같아요. 이런 식으로 마주칠 때는 있겠지만, 앞으로는…… 연락하지 않을게요.”

“그래. 어느 쪽이건 네 대답을 듣고 싶었어. 이대로 아무 처벌도 없이 집에서만 나가게 될 줄은 몰랐으니까….. 찾아와서 들을 수밖에 없었거든.”

“여태 내 말은 안 들었으면서.”

“……그건 누구한테 옮았냐?”

살짝 장난을 좀 쳤더니 분위기가 조금 풀어진 것 같다. 음음.

“그럼 이제 본론인데, 어차피 다시 고백한 상대가 있는 집으로 돌아가야 하지?”

“우엥?”

“가서 일단 대답부터 듣고 생각해라! 이상! 너답지 않게 고민하지 말고! 그럼 난 입이 미끄러진 죄로 누나한테 처맞으러 간다!”

……그건, 결국 선배랑 만나서 얘기하라는 거잖아요!

당황해버린 탓에 반응이 늦어져서, 떠나는 외삼촌을 붙잡으려던 손이 허공에 떠 있었다. 멍하니 하늘을 보니 노을색은 보라색으로 넘어가지 않고 더더욱 붉어져, 마치 세상이 불타는 듯이 보였다.

도망은 쳤지만 다른 곳으로 가버릴 수도 없다. 나는 다시 상현 선배가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어떤 대답을 듣게 되든지 간에 일단 만나고 봐야지. 그 뒤에는, 어, 몰라!

각오를 다지고 돌아온 나를 본 선배는 내 양팔을 붙잡고 새빨개진 얼굴로 말하셨다.

“야, 장, 장미르. 너, 진짜야? 나 좋아한다는 말, 진, 진짜야?”

양팔을 붙잡힌 바람에 심장소리가 갑자기 커졌다. 터질 것 같다. 이쯤되면 아픈 수준이다. 그런데 가슴을 부여잡을 손은 상현 선배 때문에, 움직일 수가 없다.

그때 내 안에서 뭔가가 끊기는 소리가 들렸다.

“……네! 힉, 딸꾹.”

“진짜야……?”

어쩐지 뭔가, 요상하게 돌아가는 것 같다. 분명 고백은 내가 했는데 대답은 듣지 못한 채로 질문만 받고 있다. 우리 결혼은 그저 어른들 사정에 의한 것이라며 선을 그어도, 나는 상관없다. 평소대로 돌아갈 뿐. 정말, 그뿐.

그런데 상현 선배는 울먹이는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갸우뚱하며 “? 네……”하는 힘 빠지는 대답을 했다.

그러자 내 팔을 잡고 있던 손에서 힘이 쭉 빠지며 결혼식 때와는 반대로 선배가 주저앉아버렸다. 어, 어떡하지? 몸이 아프신 건가? 아니면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건가? 어떡하지, 사랑 고백 같은 거 할 타이밍이 아니었나 봐!

선배는 당황한 나를 두고, 손목만 약하게 잡은 상태로 힘없이 중얼거렸다.

“……나도 좋아해.”

상상도 못한 대답을 들어버렸다. 상현 선배가…… 누구를? 뭐한다고?

나같은 어린애는, 나같은 바보는, 나같은 녀석은… 누가 이런 식으로 좋아할 만한 사람이 아니다.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늘 그렇게 생각해왔다. 그런데, 그게 틀렸던 것 같다. 선배가 틀렸을 리는 없으니까.

“다행이다…….”

힘이 쭉 빠져서 나까지 주저앉아버리고 웃음이 새어나왔다. 손목을 잡히지 않은 반대쪽 손으로 선배의 손을 만졌다. 역시 아직 이러면 두근거리고, 긴장된다. 하지만 역시, 기분이 나쁘지 않다.

생각해보면 나는 누군가에게 좋아한다거나 사랑한다는 말을 해본 적이 없다.

소명 선배를 존경하는 선배라고만 했지 좋아하는 선배라고 말해본 적은 없다.

동생들을 귀여운 동생이라고만 했지 사랑하는 동생이라고 말해본 적은 없다.

부모님에게, 감사하다고만 했지 사랑한다고 해본 적이 없다.

그리고, 나를, 나를…….

내가 내 감정을 몰라서 무서웠던 게 아니다. 상대가 받아들여줄지, 이 감정이 옳은지, 내 한마디로 대체 어떤 결과가 생길지, 그 후에는 대체 어쩌면 좋은지. 그것들이 전부 내 눈에 보이지 않아서, 그게 무서웠다. 그걸 모르는 게 무서웠다. 그래서 계속 도망쳤다.

단 한번, 더이상 도망치기 싫다고 생각했을 때, 나는 나아가버렸다.

“……에헤헤.”

벼랑에 떨어진 듯한 기분이었지만, 그건 생각보다 후련한 기분이었다.

……아, 이제 어떻게 하면 되지? 생각을 안 했네…….


“그렇게 됐어.”

“그러니까 왜! 그걸! 대련실에서! 말하냐고!”

“어머니 앞에서 말할 수는…….”

“엄마도 이런 형을 봤으면 좋겠어…….”


제 첫 고?록입니다.

사실 고록을 의도하고 썼다기보다는 예전에 푼 결혼식 썰에 더해서 미르가 고백한 경유라든지 상현씨의 답변이라든지 그런 썰을 푼 뒤에, 자연스럽게 이어지도록 범이리를 출연시키고, 덤으로 외삼촌과 완전히 작별시키기 위해서 전부 모아서 쓴 건데 형태만 보면 완전히 고록입니다. 어어, 이상하다…….

결혼식에 부를 사람 정할 때 상현씨가 미르에게 외삼촌도 불러도 되겠냐고 물었는데 미르는 별 생각이 없어서 ? 네 가족인데요 뭐…라고 했습니다. 상처는 남았는데 대체 왜……. 저도 잘 모르겠네요.

참고로 저 뒤에 외삼촌은 진짜로 처맞았습니다.

“이야~ 누나, 다행이다! 누나랑 똑 닮았던데, 미르.”

“그걸 얘기했다고?”

“당연하지!”

“…….”

“자, 잠깐만, 크헉!”

이런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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