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2024

헛간

힐마르 오스퇴가르드의 죽음

유적 by 량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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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히스는 마침내 어느 갈림길 앞에서 멈춰섰다.

소란스러운 밤손님처럼 한참을 달린 뒤의 일이었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눈 앞에 보이는 길을 따라 무작정 달렸다. 어디에서 떠나왔고,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 알 길이 없었다. 풀무처럼 숨을 거칠게 몰아쉬는 말의 목을 도닥이다가, 덜컥 생각이 미끄러졌다.

죽지 마요.

목이 덜컥 무거워졌다. 아나히스는 길을 달려오는 동안 제가 눌러 삼키고 있던 말을 찾아냈다. 그래서 다시 말했다. 죽지 마요. 우리가 우리 말고 뭘 더 가졌냐고요…….

웃기지도 않다는 듯, 두 손으로 얼굴을 문지르려 했다. 눈시울이 이미 뜨거웠다. 숨을 터뜨리려 했는데 그대로 울음이 되었다. 말안장에 앉은 채 아나히스는 울었다. 젖은 얼굴을 맨손으로 문질러 가면서 한참 동안 어린애처럼 흐느꼈다. 아나히스가 말했다. 어디로 가야 하는데요?

어디로 갈 수 있는데요. 대체 어디로 가란 말이에요, 제기랄!

헛간 안에는 세꼬리늑대들의 대장이 있다.

길 위에서 밤이 거의 지나갔고 아나히스는 오래지 않아 울음을 그쳤다. 딸꾹질을 하며 말안장을 내리고 호르헤스를 눕혔다. 갈기가 흰 말의 옆구리에 몸을 붙이고 앉아 웅크렸다. 이제 얼굴에서 소년 같은 태가 나지 않는 레인저는 초가을 날씨에도 추위를 심하게 타는 듯 자꾸만 망토를 끌어다 몸을 가렸다. 턱이 떨리며 이빨이 부딪쳤다.

아나히스. 넌 똑똑한 녀석이잖아. 힐마르 오스퇴가르드의 마지막 말이다.

사실은 그렇지 않다. 아나히스는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싶었다. 한 번도 그런 적 없었다고. 앞으로도 영영 그렇지 않을 거라고. 난 당신만큼이나 얼간이여서 당신이 그렇게 말한 이유를 절대로 이해하지 못할 거라고. 이 세상에 다시 없을 얼간이 같은 인간.

등 뒤로 호르헤스의 체온이 느껴졌다. 물을 양껏 마시고 곡식을 한 줌 씹은 말은 아나히스를 믿고 땅바닥에 몸을 눕혔다. 말의 옆구리가 부풀었다가 가라앉기를 반복했다. 그가 숨쉬는 박자와는 완전히 달랐다. 몸 바깥에 매달린 말의 심장이 된 것 같았다.

몸을 바짝 기대고 앉아, 아나히스는 점박이 무늬가 은하수처럼 흩뿌려진 늙은 말을 생각했다. 폭풍 숲에서 닷새를 습보로 달릴면 나오는 목장도 생각했다. 평화롭게 풀을 뜯으며 말년을 보내고 있을 그 녀석을, 한때 어느 레인저가 희망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그럴 수만 있다면 고바이스를 되려 자기 등에 태울 것처럼 굴던 그는?

그는 헛간 안에 있다. 헛간 안에 있지 않아도, 헛간 안에 있는 거다.

아나히스는 한참 동안 어둠을 응시했다. 시간이 흐르는지도 모르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새카만 밤의 장막이 그의 머리를 어루만지고 떠났다.

어스름이 보이기 전에 그는 잠에 들었다. 꿈에서 힐마르 오스퇴가르드가 그의 옆에 기대앉아 있었다. 호르헤스의 흰 몸에 기대어 우라질 불은 왜 안 피워뒀냐며 투덜댔다. 아나히스는 몸을 일으켰다. 울음을 누르려면 입술을 꾹 다물어야 했다. 어떤 질문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한참 뒤에야 간신히 입을 여는데, 목소리가 형편없이 떨렸다.

지금 어디 있어요?

힐마르는 인상을 찌푸렸다가, 소리 없이 낄낄대며 아나히스의 머리를 한껏 헝클어 놓았다. 그가 뭐라고 했지만 아나히스는 듣지 못했다. 사실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은 것이다. 그는 죽어서도 선생 노릇은 하지 않는다. 아나히스는 다시 거기 있는 게 좋으냐고 물었다. 어떻게 하면 거기 갈 수 있냐고도.

하지만 다시 없을 얼간이들은 알고 있었다. 그는 헛간 안에 있다. 헛간 안에 있지 않아도 헛간 안에 있는 거다. 그러니 이제 어떻게 할 거냐고 물을 필요는 없다. 아나히스는 언젠가 그랬듯 분명 제가 그에게 돌아갈 것을 알았다. 어디로 가든 결국은 돌아오게 될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아니야. 아직은 안 돼. 어느새 간 데 없이 사라진 힐마르가 마지막으로 그렇게 말하기라도 한 것처럼, 아나히스도 끝내 입을 다물었다.

푸른 새벽빛이 그 젖은 얼굴을 더듬어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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