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2024

할스, 아녜린, 네멜린 힐 그리고 레녹스

광풍과 서리의 소네트 - 애프터 로그 모음

유적 by 량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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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 할스

마법사가 바다 냄새를 잊어버렸다고 생각할 즈음의 일이었다.

친우라 부르는 이들이 몇 있었다. 서로 명줄 걱정하는 사이라면 누구든 그렇게 부를 수 있었겠으나, 사랑이라는 버릇은 간사해서 늘 그보다 더 원하곤 했다. 마법사는 그들에게 곁을 내줘야겠다고 선택했고 그 대가로 30년을 지불했다. 가끔은 필요 이상의 치유 마법을, 그보다 자주 집요하게 잔소리를 퍼부어 그들의 짧은 목숨을 붙여 놓았다. 그러면 그의 친우들은 어김없이 부름에 응했다. 죽음의 문턱에 있는, 황금이 가득한 금광의 밑바닥에서 영원한 무언가를 가지고 돌아왔다.

마법사는 다시 헤아릴 수 없는 피 앞에 서 있었다. 돌이킬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검의 손잡이를 놓칠 뻔 했지만, 할 수 있는 한 냉정해지려고 했다. 흐린 눈 아래서 피거품과 함께 말이 흘러나왔다. 자네라면 알맞은 선택을 하겠지.

케드라스는 음울하게 중얼거렸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 친구.

그리고 그는 그렇게 했다.

06 아녜린

감시대원들이 마물과 대치하고 선 것은 아주 잠깐이었다. 마법사 케드라스가 발톱에 목걸이가 걸린 마물을 향해 뛰쳐나갔다.

아녜린.

동시에 입 밖으로 이름이 튀어나왔다. 말하는 동시에 제 귀에 들려온 이름을 쥐고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뼈와 구슬을 묶은 가죽끈 목걸이. 마물의 발톱에 걸린 인간의 물건. 누가 저걸 가지고 있었지? 마법사는 이미 대답했다. 아녜린.

그가 외친 이름은 15년전 실종된 사령관의 이름이었고, 그 사실을 아는 대원은 그 자리에 거의 없었다. 망할 아녜린이 누구든 저 마물은 아니다. 관절 없는 발로 기고 시커먼 혀를 주둥이 안에 간수하지도 못하는, 본래 무엇이었는지도 모를 존재는 아니란 말이다. 대원들은 마법사의 이성이 드물게 빗나갔음을 빠르게 알았고, 너나 할 것 없이 케드라스의 팔을 양쪽에서 붙들었다.

케드라스는 다시 소리쳤다. 목소리 끝이 갈라졌다. 소린이 자네를 기다려. 저 멀리 공터의 가장자리로 끌려가며 몇 번이고 외쳤다. 소린이 자네를 기다려. 소린이…….

마침표를 찍듯 네멜린 힐의 검이 허공을 갈랐다.

죽음 같은 정적.

07 네멜린 힐

마법사 케드라스는 복수가 온전히 자기 것이라고 외치는 이들을 적잖게 보았다. 그들은 숲에 너무 늦게 들어와 지나치게 일찍 죽었다. 종종 죽지 않아도 될 목숨까지 함께 끌고 갔다. 복수는 그들 것이 아니었고 죽은 자들은 돌아오지 않는다. 하지만 이제 사람으로는 살아갈 수 없는 복수귀들에게 봉인의 숲은 무덤에 불과했다.

그중에서도 네멜린 힐은 으뜸가는 수동 자살 희망자였다.

지난해 그녀는 마물에게 얼굴의 오른쪽 절반을 거의 뜯어먹혔다. 치유에 능하지 못한 마법사들이 분투했고, 결과적으로는 흉터가 크게 남는 정도로 목숨을 건졌다.

모든 흉터는 교훈이다. 그리고 힐에게 교훈 따위는 무시해도 아무렴 상관 없는 것이었다. 그녀는 다시 3년의 세월을 빠짐없이 싸움으로 보냈다. 마치 인생의 마지막 날들을 전투로 얼룩지도록 두지 않고서는 버틸 수 없는 사람처럼. 그것만이 삶의 목적이며 숨의 당위인 양. 승리를 거둘 수 없는 싸움의 도구로써 목숨을 내던졌다. 개중에는 그녀가 선택한 죽음도 몇 차례 있었다.

네멜린 힐의 몸에는 마력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이 존재하지 않았다. 흔한 경우는 아니었다. 그 몸엔 마력이 단 한 방울도 머무르지 않았다. 케드라스 자신도 신성력을 뱉어내는 몸이라 몸에 담을 수 없는 힘으로 치료받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지 알았다. 치료하는 자들은 그보다 수 배로 곤란하다는 것도. 몸이 아니라 침대로 흘러드는 마력은 아무짝에도 소용없지 않은가.

그리고 세 번째 해의 어느 날 케드라스는 통증 때문에 발작하듯 퍼덕이는 힐의 어깨를 침상 위에 찍어 누르며 확신했다. 네멜린 힐이 자기 목숨을 가지고 내린 선택이 배반당했다. 죽음이 그녀를 거부한 것이다.

“힐! 네멜린 힐.”

밑 빠진 항아리에 끝없이 마력을 붓다가, 실낱같은 무언가를 붙잡았다는 확신이 들었을 때 그가 외쳤다. 치유 마법을 휘감은 손과 핏물이 잔뜩 든 푸른 전투복. 욕설을 짓씹는 다른 마법사들보다도 마력을 많이 쏟아부었을 그가 의식을 회복한 힐의 이름을 불렀다.

케드라스는 눈물이 가득 고인 힐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한순간 그녀의 몸이 축 늘어졌다. 고인 눈물이 관자놀이를 타고 흘러내렸다. 그가 힐의 고개를 억지로 붙들어 길 잃은 시선을 제게로 맞췄다.

“정신 들었으면 숨 쉬어. 내 말 들리나? 옳지. 나를 봐. 이쪽을 봐.”

그리고 케드라스는 그녀의 새벽별 같은 눈을 들여다보았다. 이제껏 본 적 없는 눈이었다. 지금껏 가 닿았던 적이 없는 어딘가에 기어코 닿았다가 도로 끌려온 사람 같았다.

“…….”

한참 동안 눈이 마주쳤다고 생각했다. 케드라스는 그 눈가의 눈물을 닦아 주고 싶다고 문득 생각했다. 그러나 곧 목숨을 살려 놓는 일과 무관하다고 결론지었다. 그보다 중요한 건……

“괜찮아. 돌아왔어.”

그가 속삭이듯 확언을 되뇌자, 공기의 흐름이 안도하듯 변했다. 힐의 얼굴에서 손을 뗐다. 그녀의 시선이 잠깐 마력을 쏟아붓느라 미약하게 떨리고 있는 마법사의 손에 머물렀다.

곧 네멜린 힐이 다 쉰 소리로 속삭였다.

“자고 싶어.”

그러고는 눈을 감아버렸다. 치료를 마무리하던 마법사들이 대경해서 그녀를 깨우려 했지만, 케드라스가 고갯짓으로 그들을 말렸다. 그도 잠깐 할 말을 찾듯이 침묵했다가, 지친 목소리로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잠들게 둬.”

08 레녹스

회의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사령부의 모두가 고개를 돌렸다. 마법사가 문 앞에 서 있었다. 걸어 들어오는 그의 등 뒤로 문이 저절로 닫혔다. 케드라스는 탁자 앞으로 다가섰다. 입술을 거의 움직이지 않고 말했다.

"설명해."

고요한 분노가 그를 휩싸고 있었다. 잔불이 된 지 오래인 그를 정교가 한껏 들쑤시고 간 것이었다. 사는 것이 지치기 전에나 그렇게 화낼 힘이 남아 있었지, 지금에서는 그렇게 할 이유도 힘도 없었다.

하지만 정교가 10년을 감시자로 헌신한 자를 의심해 연행했다. 고지하지 않고 그런 짓을 저지를 리가 없으니, 분명히 과거의 언젠가 사태를 더 나은 쪽으로 돌릴 수 있었다. 그럴 기회를 사령부가 몰랐을 리도 없었고. 케드라스가 어느 부분에서 그들에게 화낼 권리를 쥐고 있는지 정확히 아는 사령부의 감시자들이 침묵을 지키고 앉아 있었다.

"……앉아서 들어, 영감."

소린이 입을 열었다.

케드라스는 그렇게 했고, 전대 사령관의 아들이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교단의 편지를 받을 때부터 케드라스를 이 문제에서 제외하기로 합의했다. 숲의 터줏대감인 마법사가 일이 잘못됐을 때 가만히 있을 리 없고, 정교와 정면으로 부딪치는 일을 불사할 것임에 모두가 동의한 것이다. 감시대는 불가침 영역인 봉인의 숲을 방패로 어느 정도 중립을 지킬 수 있지만, 완전 중립은 아니다. 대륙의 어떤 단체도 그렇게 할 수 없다.

여러 차례 교단에 방문할 것을 권했는데도 제때 찾아가지 않은 레녹스에게도 귀책이 없지 않았다. 막지 않은 쪽은 그 수도사 본인이라는 것을 간과할 수는 없다는 말까지 맺고, 소린은 설명을 듣는 내내 가만히 앉아 있던 케드라스에게 말했다.

"영감이 어떻게 생각하든 사령부 입장에선 명분이 중요해. 그리고 그 명분이란 놈 만들어 볼 기회까지 내다 버린 건 레녹스 대원이야."

말끝에서 음울한 맛이 났다. 팔짱을 낀 채 시선을 비껴 내리고 있던 케드라스가 한숨처럼 입을 열었다.

"'내가' 어떻게 생각하든?"

공식적으로 사령부 소속은 아니지만, 케드라스의 조언 없이 지금의 감시대가 유지되지는 않았을 터였다. 하지만 아녜린의 아들은 매몰차리만치 싸늘하게 대답했다.

"영감 생각도 사령부에게 중요하다고 말하고 싶으면 10년 전에 직접 사령관을 달았어야지."

케드라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소린이 상황을 마무리하려는 듯 다른 사령부 대원들을 둘러보고선 목소리를 조금 가볍게 덜어냈다.

"내 말은, 정교 놈들도 그렇게 막무가내로 나오진 않을 거라고. 얼마 안 걸려서 돌아올 거야. 알아들어? 포탈 열어서 가는 놈들 쫓아갈 생각일랑 제발 하지 마. 부탁이니까 머리 식을 때까지 어디 처박혀 있든가 해."

케드라스는 대답하는 대신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법사는 아무 말도 더 남기지 않고 회의실을 나갔고, 문은 조금도 거칠지 않게 닫혔다. 그의 평소같은 발소리가 멀어지고, 살벌한 침묵만이 남아 회의실의 공기에 내려앉았다.

마법사는 건물의 짧은 복도를 빠져나가 무작정 걸었다. 그에게 무슨 일이냐고 묻는 사람이 없을 때까지. 또는 불빛이 멀어질 때까지. 사람의 흔적이 없는 곳까지. 완전한 어둠 속에 멈춰선 채, 케드라스는 일어난 일을 되짚기 시작했다. 그는 알아야 했다. 언제나 그랬다.

내가 뭘 했어야 했지?

케드라스는 항상 옳은 선택을 내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건 다른 누구보다 그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사실 옳은 선택에는 그렇게 관심이 있지도 않았다. 그는 후회하지 않을 선택에 천착했고 이것이 그 결과였다. 눈에 띄는 흑마법 추종자들을 없애기로 선택했고, 정교의 입장에도 충실히 따르지 않기로 했다. 오랜 친구의 숨을 제 손으로 끊기로 했고 그를 대신할 후임에게 살아남는 방법을 가르쳤다. 그가 가르친 것은 누군가의 도움 없이 먹고 자고 살아남는 방법에 불과했다. 무언가 더 필요하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어둠 속에서 손 안을 내려다보았다. 시선이 손을 향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잡히는 상이 없었다. 그는 이미 멀리까지 갔을 후임을 생각했다. 삶이라는 것에 서툴던 제자. 그는 수많은 감시자들을 가르쳤지만, 사는 법은 한번도 가르쳐본 적이 없었다. 서로 사랑하고, 자신을 믿고, 스스로 걸어나가는 방법을 가르칠 수는 없었다. 그것을 가르쳐줄 수 있는 선생은 단 하나, 삶 자체뿐이었다. 그러니 살지 않으면 배울 수도 없다. 손을 들어 얼굴을 문지른다. 그제야 손이 거기 있다는 사실이 느껴진다.

유구한 침잠에서 내가 너를 어떻게 꺼내 주어야 했을까.

네가 변하지 않으려 드는 것을 내가 어떻게 해야 했냐고 변명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책임을 미루는 말 뒤에 숨어 제가 노력할 수도 있었던 무언가를 정당화하고 싶지 않았다. 어린 아이라고 생각하고 제대로 키워냈어야 하는데. 살아남는 법이 아니라 사는 법을, 걷는 법을, 숨쉬는 법을 조금이라도 가르쳐 줄 수 있었더라면. 케드라스는 숨을 길게 내뱉었다. 내가 차라리 네게 뭐라도 됐더라면, 그랬더라면…….

케드라스는 한참 동안 어둠 속에 서 있었다. 어쩌면 자신이 할 수도 있었던 일, 그러나 하지 않은 일에 대해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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