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오지 않는
타입 외(연교), 1차 / 5,391자
춥고 어두컴컴한 콘크리트 바닥. 적진 한가운데에 고립되어 악의와 폭력으로 얼룩진 외로운 방에, 혈혈단신으로 맥신을 구하러 온 남자가 있었다.
히르칸이 청혼한 건 아직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을 때의 일이었다. 레비온의 미래는 불투명했고 히르칸과 맥신은 군의 소유였으며 맥신은 아직도 밤마다 악몽을 꾸었다. 그러나 그가 내린 결정이 결코 성급하지는 않았다. 히르칸은 원래 아주 씁쓸한 술처럼 말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가 보석 하나 박혀 있지 않은 금반지를 맥신의 약지에 끼워주었을 때, 맥신은 그 반지보다도 그의 목소리가 더욱 달게 느껴진다고 생각했다.
칼로나 변두리에 외따로 떨어져 있는 고즈넉한 저택이 있었다. 맥신은 히르칸에게 전쟁이 끝나면 그곳에서 같이 살자고 했다. 세상의 소음과 고립된 그 집이 맥신은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설령 또 한 번의 전쟁이 이 땅을 덮친다 해도 그 집만큼은 히르칸과 맥신을 숨겨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애초에 전쟁이 끝나면 두 사람은 온전한 자유의 몸이 될 것이었다. 그 집에서 히르칸과 맥신은 어쩌면 평생 허락되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던 평안한 삶을 꾸려나갈 수도 있었다.
…기나긴 야만의 시대가 막을 내리고 있었다. 트로스가 패배를 선언하고 최전선에서 들려오던 총성이 멎었을 때 맥신은 비로소 제대했다. 무릇 여느 여자들과 다르지 않은 평범한 원피스와 코끝이 뾰족한 구두를 신은 맥신은 해방감을 느꼈다. 마침내 손에 넣은 이 순간을 놓치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히르칸이 돌아오는 날 맥신의 꿈은 마침내 현실이 되고, 끔찍했던 현실은 전부 간밤의 꿈에 지나지 않게 될 것이었다. 그녀가 원하는 건 그저 지루할 만큼 평범한 나날, 해가 저물면 찾아오는 어둠이 더는 두렵지 않은 나날이었다.
히르칸은 맥신과 달리 곧바로 군복을 벗지 못했다. 예상치 못한 일은 아니었다. 모든 군인은 국가의 총과 칼이 되어 저지른 범죄를 재판받아야 했다. 처음에 맥신은 군말 없이 히르칸을 기다리려고 했다. 애가 타기도 했지만 남편을 기다리는 시간을 기쁨으로 여기려 했다. 가구와 수집품들이 빛바래는 일 없도록 모든 커튼과 창문은 먼지를 털고 환기하는 찰나의 시간을 제외하고는 늘 닫아두었고, 혼자 잠들 때도 침대에는 항상 두 개의 베개를 나란히 두었다. 맥신이 민간인의 신분으로 처음 현관문에 들어섰을 때 느낀 가슴 벅찬 기쁨을 히르칸이 돌아왔을 때에도 똑같이 맛보여주고 싶었다.
그러나 히르칸은 좀처럼 돌아오지 않았다.
*
맥신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눈을 떴다. 얼굴이 얼어붙을 것처럼 차가웠다. 발작적으로 손을 떨며 뺨을 더듬어보면 얼굴이 온통 눈물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무슨 꿈을 꿨더라. 잠들기 전엔 무슨 생각을 했더라. 기억을 곱씹으려 하는 것만으로도 첨예한 편두통이 머리 안쪽을 쑤셔왔다. 낯익지만 결코 익숙해질 수는 없는 고통이었다.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숨을 몰아쉬던 맥신은 다시 한번 노크 소리가 들려오자 발작적으로 소리를 질렀다.
내가 일어나기 전까진 문을 두드리지 말라고 했잖아요!
히스테릭한 비명에 문밖의 인기척은 잠시 멈췄다가, 곧 먼지를 잔뜩 먹은 것 같은 탁한 목소리가 돌아왔다. 죄송합니다, 마님. 그 낯선 목소리에 맥신은 불현듯 새로운 하인이 들어왔다는 것을 기억해 냈다. 맥신이 직접 뽑은 하인들은 어느 날 일시에 떠나버렸기 때문에 집에 남은 것이라고는 그와 새로운 하인 몇 명뿐이었다. 그들은 히르칸과 맥신이 집을 사들이기도 한참 전에 이 집에서 하인으로 일했다고 했다.
정오에 가까워진 늦은 시각이었다. 하인은 맥신의 요구대로 아침 대신 따뜻한 차와 편두통 약을 내어주었다. 넓은 식탁에 약 한 알과 찻잔 하나, 그리고 맥신이 어울리지 않는 장식품처럼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하인이 등을 돌린 채 조리대에서 분주히 오가는 동안 맥신은 캐모마일 향이 피어오르는 잔을 만지작거렸다. 괴로울 만큼 차게 식어 있던 손끝에 온기가 옮아오자 그제야 신경질적인 기분이 차츰 가라앉았다. 맥신은 어색한 정적 속에 차를 홀짝이다 작은 목소리로 운을 떼었다.
새로 도착한 편지는 없나요?
그러자 하인이 고개를 돌려 맥신을 바라보았다. 오랫동안 사용인으로 일했다는 그 말 그대로 그의 눈빛은 늘 공손했으나, 가끔 맥신의 일상적인 질문이 꼭 의아한 것만 같았다. 그럴 때마다 맥신은 조금 무안했고 기분이 나쁘기도 했다. 그러나 그 시선은 오래 가지 않고, 하인은 곧 접시 하나를 맥신의 앞에 놓아주며 차분한 목소리로 답했다.
오늘도 우체부가 오질 않았어요. 아무래도 안개가 껴서 그런 모양입니다.
그 대답을 듣자 맥신은 조금 우울해졌다. 하인이 내려놓은 접시에는 빈속을 채울 수 있는 가벼운 티푸드가 놓여 있었다. 그러나 맥신이 아무 반응 없이 찻잔을 내려다보고만 있자 하인은 말을 고르다 좀 전보다 한결 부드러운 목소리로 조심스러운 질문을 건넸다.
주인님의 편지를 기다리시나요?
히르칸이 전쟁터로 다시 떠났고 몇 달째 돌아오지 않았다고 이야기할 때 맥신은 감정적이고 공격적이었다. 질문이 그토록 조심스럽게 들리는 건 아마 그 탓일 것이다. 그러나 오늘에 와서 하인의 입으로 히르칸의 부재를 상기할 때 맥신은 예전만큼 감정이 북받쳐 오르지 않았다. 사실 맥신은 그녀 자신이 새로운 소식을 기다리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우체부가 히르칸의 소식을 들고 돌아온다면 그건 꼭 귀환 소식이 아닌 부고일 것만 같았다. 사실 그녀가 기다리는 건 우체부가 아니라 히르칸 그 자신이었다. 이제는 곁에 없는 게 더 익숙한 그녀의 남편이었다.
*
재판이 끝나고 지친 군인들이 하나둘 고향에 발붙일 때 히르칸만은 다시 짐을 꾸렸다. 전쟁이 끝나지 않았다니, 전 세계에 울려 퍼진 트로스의 항복 선언은 대체 무엇이었단 말인가? 레비온의 모든 국민은 이제 더는 폭격과 피습을 두려워하는 일 없이 잠에 드는데 왜 히르칸은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다고 이야기한단 말인가? 그는 마치 전쟁이 끝날까 봐 두려워하는 사람 같았다. 자꾸만 맥신과 집을 두고 실재하지 않는 것을 찾아 떠났다. 간밤의 악몽은 다시 현실이 되어 맥신을 찾아왔고, 바라 마지않던 현실은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고 그저 눈앞에 아른거리며 맥신을 괴롭히기만 했다. 혼자 살기에는 너무나 넓고 공허한 집 안에 홀로 앉아 있다 보면 이 모든 게 마치 끔찍한 악몽 같았다. 히르칸이 집을 비우는 시간은 점점 길어졌다. 한 번의 배웅조차 가슴이 찢어질 것처럼 괴로웠는데, 그 순간이 두 번이 되고 세 번이 되자 맥신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히르칸이 마지막으로 돌아왔을 때 맥신은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가 다시 떠나겠다고 말했기 때문이었다. 맥신은 벌써 남편을 잃은 미망인처럼 울었다. 그러나 아무리 비난하고 원망하고 애원해도 히르칸은 마치 깨지지 않는 벽처럼 한쪽 어깨에 가방을 짊어진 채 서 있었다. 당신은 내가 아니라 레비온을 사랑하는 거야. 당신은 날 사랑하지 않으니까 돌아오지 않는 거야… 그리고 종국에 맥신이 그의 앞에서 주저앉아 지친 목소리로 흐느낄 때, 히르칸은 돌연 지쳤는지 상처 입었는지 모를 표정을 지었고, 맥신은 그 얼굴을 보는 순간 정말로 그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게 되었을까봐 덜컥 두려움을 느꼈다. 그러나 히르칸은 그녀의 상상대로 자리를 뜨는 대신 가방을 내려놓고 다가와 맥신을 끌어안았다. 군복 아래로 그의 단단한 팔이 숨 막히도록 자신을 안아오자 맥신은 불안함에 두방망이질 치던 심장박동이 조금은 가라앉는 걸 느꼈다. 그리고 미온한 안도와 흥분 또한. 히르칸은 그간 더욱 거칠어진 손으로 맥신을 쓰다듬고 감싸 쥐었고, 이윽고 볼품없이 갈라진 입술이 입을 맞출 때, 맥신은 직전까지 곤두세웠던 뾰족한 신경이 속절없이 허물어져 내리는 것을 느끼며, 어쩌면 히르칸이 이번에야말로 자신을 두고 떠나지 않으리라고… 이제 지긋지긋한 군복 따위는 벗어버리고 제 곁에 남으리라고, 자기도 모르게 헛된 희망을 품고 말았다. 그러나 맥신이 다시 눈을 떴을 때 옆자리는 비어 있었고, 이불 위에는 온기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전날과 다르게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맥신은 그저 이미 곁을 떠난 히르칸에게 묻고 싶었다. 난 영원히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 그런데 당신은 왜 돌아오지 않는 거야?
*
이 집의 현관을 처음 밟을 때 난 꿈을 꿨어요.
하인은 더도 덜도 말고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만 들이는 거예요. 조용하면서도 또 너무 고요하지만은 않으면 좋겠으니까. 그리고 우리는 종전과 해방을 자축하면서, 마침내 찾아온 일상에 감사하면서… 하루하루를 보내는 거죠.
아이는 없어도 좋지만 있어도 좋아요—그건 하늘에 맡길게요. 아이를 갖게 된다면 더도 덜도 말고 딱 한 명만 낳아서, 온 마음을 다 주면서 키울 거예요. 그리고 그 아이가 학교에 가고 사회에 나가고, 그래서 자신만의 가족을 일구게 되면 이 집에는 다시 우리 둘만 남게 되겠죠.
그게 내 꿈이에요. 당신과 서로 사랑하면서 행복하게 늙어가는 것. 그리고 한날한시에 눈을 감는 것. 그리고 우리는 이 집의 마당에 나란히 묻혀…….
칼로나는 가을과 겨울 사이 경계선에 갇혀버린 것처럼 안개가 걷히는 날이 없었다. 히르칸의 연락이 끊긴 이후로는 단조롭고 다를 것 없는 나날이 반복되었다. 가슴 속이 얼어붙을 것 같은 냉랭한 공기를 들이마시며 맥신은 다시 한번 잠에서 깨었다. 기억나지 않는 악몽에 비명을 지르며 깨었던 어제와 다르게 오늘은 어떤 꿈도 꾸지 않았다. 그저 늘 방 안에 잔존하는 고독과 공허가 어깨를 뻐근하게 짓눌러올 뿐이었다. 그것에서부터 벗어나려 애쓰며 맥신은 어깨 위로 숄을 단단히 둘렀다. 가장 먼저 한 일은 창가로 다가가 반쯤 걷힌 커튼 너머로 창밖을 내다보는 것이었다. 앞뜰에서 정원사가 희뿌연 안개 속에 서서 낙엽을 쓸어모으고 있었다. 꽃이 피지 않는 계절이라 그가 하는 일이라고는 그저 갈퀴로 낙엽을 모으는 일뿐이었다. 정원의 한 귀퉁이에 수북이 쌓인 낙엽 더미는 말 그대로 죽은 잎들의 무덤처럼 보였다. 언젠가 저 잎들이 바스러져 사라지고 새잎이 나는 날이 오기나 할지, 맥신은 불현듯 궁금해졌다.
히르칸을 아주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전쟁이 마치 주일 교회의 종이 울리듯 일시에 끝나는 것은 아니다. 지난한 전투가 끝난 뒤에도 그들은 모두 그들만의 전쟁을 치러야 한다. 그리고 완전한 종전을 알리는 방송이 라디오에서 흘러나왔을 때 맥신은 그녀의 전쟁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히르칸이 마침내 전쟁터를 찾아 헤매기를 그만둘 테니까. 그리고 맥신은 비로소 온 집안의 커튼을 걷고 햇살이 들이치는 환한 집에서 그를 마중할 것이다. 그러나 그 날을 기다리며 집을 돌보던 하인들은 어느 날 일제히 떠나버렸다. 집은 모든 게 그대로였지만 동시에 모든 게 하루아침에 송두리째 뒤바뀐 것만 같았다. 이 사랑스럽고 아늑한, 익숙하지만 낯선 집에 홀로 있는 맥신을 히르칸은 구하러 오지 않고, 맥신은 춥고 외로운 집에 꿋꿋이 남아 또 한 번의 아침을 맞이한다. 모든 건 끝난 게 아니라 아직 시작하지 않은 거라고 애써 믿으면서. 언젠가 히르칸이 그의 전쟁을 끝내고 돌아와 맥신을 다시 한번 힘껏 안아주기를 기대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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