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작1

다즐링, 마카롱, 에클레어

A타입, 1차(던전밥 au) / 13,655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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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를 좀 따오려고요.”

“…먹고 싶어?”

 

아침이었다. 짐을 챙기던 히르칸은 막심의 제안이 눈에 띄게 탐탁지 않은 표정이었다. 평소라면 ‘굳이?’ 그렇게 말한 다음 막심의 눈총을 받았을 텐데. 히르칸이 말을 여러 번 고르는 게 눈에 보이니 기분이 좋지 않았다. 내심 미안하기도 했다. 이 어색한 상황을 만들어낸 데에 자신의 책임이 일부분 있는 건 부정할 수 없었다.

하지만 먼저 소리를 지른 건 히르칸이었다. 오히려 막심이야말로 억울한 처지였다. 거짓말을 해도 솔직하게 말해도 어느 쪽이든 결국 화낼 거면서. 그러면 또 싸우게 될 텐데… 다시 그런 상황이 생기는 건 죽어도 싫었다. 아마 히르칸도 싸우기 싫으니까 평소보다도 부드럽게 말하고 있는 것일 테다. 그렇지만 먼저 억지로 기분을 풀고 싶은 것도 아니었다. 그냥… 막심은 히르칸을 잠깐 탓하고 미워하고 싶었다. 거짓말을 하면 곧바로 알아차리면서 정작 막심의 진짜 속내는 말해주기 전까지 알아주지 않는다니. 내가 일부러 못되게 굴 리 없다는 거 알면서……. 잠시 어린애 같은 기분에 젖어 발치를 바라보고 있던 막심은 조금 우울한 목소리로 다시 입을 열었다.

“이 주변에는 먹을 게 많이 없다고 히르칸이 그랬잖아요.”

“…그건 그런데.”

“어제는 되게 큰 마물을 잡았다고 했지만… 그런 게 언제 또 나타날지도 모르는 거고요.”

“…….”

“그러니까 조금만 따올게요. 네? 또 무슨 일이 있으면 제가 사역마로 히르칸을 부르면 되잖아요.”

히르칸은 그제야 제 주변을 맴도는 나비의 존재를 기억해 낸 것 같았다. 히르칸이 입을 꾹 다문 채 나비를 노려보는 사이 나비는 날개를 팔랑거리며 어깨 근처를 날아다니다 그 위에 내려앉았다. 자아가 없는 생명체였다. 어떤 일을 시켜도 거역하지 않을 것이다. 예상치 못한 사고가 일어날 일이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것을 한참이나 바라보며 말이 없던 히르칸은 곧 한숨과 함께 손을 저었다.

“알았어. 그럼 나는 물이나 좀 떠다 둘 테니까…….”

그래도 이번에는 엄밀히 따지자면 거짓말은 아니었다. 어제 오랜만에 맛본 사과는 정말로 달고 맛있었다. 지상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맛이었다. 그리고 히르칸이 자신을 위해 사과를 잘라준 것도, 당연하다는 듯이 자신에게 더 많이 나누어 준 것도 기뻤다. 그와 한 번 더 사과를 먹고 싶었다. 막심이 히르칸의 가늠하는 눈앞에서도 떳떳할 수 있었던 이유였다. 그런데도 히르칸의 허락이 어렵사리 떨어지자 막심은 어쩐지 죄지은 어린아이처럼 심장이 무척 빠르게 뛰었다.

 

*

 

지난밤 미궁의 주인은 짧지 않은 대화 끝에 떠나가며 막심에게 ‘또 보자’는 말을 남겼다. 그건 가까운 미래에 대한 불안을 심어주는 약속이기도 했고, 일종의 예고이기도 했다. 또 보자니 당최 언제 보자는 말인지, 하염없이 기다리기만 하라는 말인지…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언제부턴가 자주 보이던, 좀처럼 주위에서 사라지지 않던 나방… 그것에게 실마리가 있는 게 분명하다고 그날 막심은 확신하게 되었다. 그건 분명 평범한 마물이 아니었다. 미궁주는 그 나방과 자신이 아무 관련 없는 것처럼 이야기했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었다. 잊을 만하면 나타나 막심의 시야에 맴도는 그 나방은 히르칸이 없을 때면 막심에게 다가와 재롱을 부렸다.

지금도. 두 사람의 거리가 차츰 벌어지자 어디선가 나방이 날아와 막심의 주변을 맴돌았다. 막심이 손을 들자 나방은 손끝에 내려앉아 날개를 접었다. 막심은 손끝에 앉은 나방에게 속삭였다.

"오늘도 날 데려가 줄 거지?"

나비가 아니라 나방, 그것도 마물이라고 하니 막연히 징그럽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가까이서 보니 이 나방은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더듬이는 깃털처럼 가지런했고 새까만 눈은 표면이 매끈해 꼭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짧은 털이 잔뜩 돋아난 날개는 반질거리는 윤기가 흘렀다. 그 모든 잔털이 모여 만들어낸 무늬는 처음엔 원형의 무늬가 겹겹이 중첩되어 눈처럼 보일 뿐이라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이건 또 다른 눈동자였다.

 

어젯밤처럼 앞장서 날아가는 나방을 거리를 두고 쫓아가면 머지않아 그가 바라는 것이 눈앞에 나타났다. 어제는 나무가 한 그루, 그마저도 사과나무밖에 없었는데. 오늘 띄엄띄엄 간격을 벌려 서 있는 과일나무는 그 종류도 모습도 다양했다. 그리고 그사이에 다름 아닌 미궁의 주인이 서서 과일을 따고 있었다. 그가 품에 안은 넓고 얕은 바구니에는 다양한 과일들이 담겨 있어 그 색이 다채로웠다. 막심은 자기도 모르게 조금 긴장하여 침을 꿀꺽 삼키며 바구니를 안고 있는 그에게 다가갔다. 미궁주는 막심이 도착한 걸 알면서도 한동안 시선을 주지 않고 과일을 따다가, 막심이 두어 걸음 거리까지 다가오자 비로소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나방이 고개를 돌린 미궁주의 얼굴과 맞부딪힐 듯 스쳐 지나갔다. 미궁주는 눈썹을 들썩였으나 그 나방이 여기까지 막심을 인도했다는 사실에는 놀라지 않은 듯했다. 역시 연관이 있는 거야. 막심은 속으로만 생각했다.

나방은 제 임무를 다했다는 듯 나무에 달린 열매 중 하나에 앉아 그 위에 맺힌 이슬을 마시고 있었다. 막심이 그 모습을 홀린 듯 바라보고만 있자 미궁주가 헛기침으로 막심의 주의를 끌었다.

“…어제 여기서 과일을 따갔더군요.”

“아… 죄송해요. 주인이 없는 과일이라고 생각했어요.”

“미궁에 있는 모든 건 제가 주인인 셈입니다. 그래도 죄송할 건 없어요. 먹을 게 다 떨어져서 그랬죠?”

막심은 눈치를 보다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온화한 얼굴로 웃으며 한 손을 내저었다.

“괜찮아요. 그때도 그랬고 해칠 마음은 없다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또 여기는… 말하자면 저와 제 아들이 사는 집인데, 누가 굶어 죽기라도 하면 마음이 불편하지요.”

막심은 또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말이 길어지자 마음이 조급해졌다. 실은 그를 만나서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첫 만남에 막심으로 하여금 경계를 풀게 했던 친절한 목소리도 이제는 쓸데없는 겉치레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막심은 눈으로는 나방이 어디에 있는지 찾으며 조금 빠르게 읊조렸다.

“그게, 사실 오늘은… 여쭤볼 게 있어서요.”

“…무엇이죠?”

물어보고 싶은 건, 물어볼 수 있는 건 산더미처럼 많았다. 미궁의 주인과 조우할 수 있다면 어떻게 할 건지. 전 이 미궁에서 무언가 얻어가야 해요. 뭘 얻을 수 있을까요? 이제 지상으로 돌아가고 싶은데 어떻게 돌아가야 할까요? 그러나 막심은 입술을 달싹이다 충동적으로 내뱉었다.

“당신은 미궁의 힘을 어떻게 손에 얻었나요?”

수많은 질문 중에서도 막심이 고른 건 가장 분명하고 노골적인 의도가 담겨 있는 물음이었다. 그가 갖고 있는 것이 너무 탐이 나서, 처음으로 남의 것을 빼앗고 싶을 만큼 탐이 나서 한 말이었다. 별다른 해명도 설명도 하지 않고 그의 시선에 맞서려고 했지만 그와 눈을 마주하고 있으면 차츰 귀가 홧홧해졌다. 부끄러움과 약간의 두려움이 마음을 괴롭게 했다. 그럼에도 막심은 갖고 싶었다. 미궁주는 한참 침묵을 지키다 가느다란 눈으로 막심을 바라보았다.

“그 질문은… 무슨 뜻입니까?”

“미궁의 힘이 있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그래서 당신도 갖고 싶어졌다고요?”

그 목소리가 마치 자신을 힐난하는 것 같아 막심은 억울해졌다.

“…그 사실을 알려준 건 당신이잖아요.”

“그건 당신이 미궁에 무작정 거부감을 느끼는 것 같아서 한 말이었고요. 어쨌든 그건 알려드릴 수 없습니다. 나가서 다른 미궁이라도 찾아보는 건 어때요?”

좀 전의 다정다감한 기운은 온데간데없이 냉랭해진 목소리로 쏘아붙인 미궁주가 고개를 돌렸다. 기껏 용기 낸 물음의 결과가 매몰찬 거절이라는 사실에 이제는 만면이 화끈거렸다. 간절한 바람에는 편집증적 불안이 동반하는 법이었다. 막심은 마음이 조급해졌다. 그는 협상에 소질이 있는 편이 아니었다. 미궁주의 마음을 돌릴 만한 좋은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거기다 더욱 절망적인 것은 그에게 애원하느라 언제까지고 여기 있을 수만은 없다는 것이었다. 더 오래 있다가는 히르칸이 막심을 찾아 나설 것이다. 그리고 또 속였다며 분명 화를 내겠지. 막심이 무엇보다도 걱정되는 건 미궁의 주인과 함께 있는 모습을 들키는 것이었다. 막심의 생각에 히르칸이 동의할 리 없었다. 어쩌면 미궁주의 그럴듯한 말에 현혹되어 절대 그런 일이 일어나선 안 된다며 막심의 뜻에 반대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모든 문제들도, 만약 미궁의 힘이 있다면…….

 

문득 때아닌 산들바람이 등 뒤에서 불어와 막심을 떠밀었다. 그냥 달라고 해보는 건 어때? 스쳐 지나가는 바람 소리와 함께 귓전에 누군가 속삭인 것 같았고… 처음 그 목소리를 들었을 때 막심은 두려움을 느꼈지만, 이번에는 마냥 두렵지만은 않았다. 열심히 말을 고르며 속으로 중얼거리던 막심은 가슴에 손을 얹은 채 불쑥 입을 열었다.

“그냥 저한테 미궁의 주인 자리를 넘겨주시는 건 어때요?”

“뭐라고?”

“아들이 살아 돌아오는 게 당신 소원이라고 했잖아요? 그리고 지금 아들이랑 같이 살고 있다고 했고… 그럼 당신은 이미 바라는 걸 이룬 것 아닌가요? 제가 미궁의 주인이 되면… 당신이랑 당신 아들을 여기에 함께 살게 해드릴게요. 좋은 집이랑 좋은 말도 드리고 행복하게 살게 해드릴게요.”

미궁주는 이제 노골적으로 적대적인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막심의 눈에는 그가 더 이상 들어오지 않았다. 막심은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 목소리를 높였다.

“저도 미궁의 힘이 필요해요. 가족을 사랑하시니까… 제가 얼마나 간절한지 아실 거 아니에요. 그리고 미궁도 처음부터 당신 건 아니었잖아요? 당신도 남의 미궁을 빼앗아 차지한 거 아닌가요? 그러면 저한테도…….”

굳은 얼굴로 서서 막심이 횡설수설 늘어놓는 이야기를 듣고 있던 미궁주는 어느 순간 바구니를 바닥에 내던지고 다가와 막심의 손목을 덥석 쥐었다. 열쇠 구멍 모양 동공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막심은 숨을 삼켰다. 그는 믿을 수 없을 만큼 힘이 강했다. 늙은 손아귀가 우악스럽게 손목을 비틀어왔다.

“저 나방이 당신에게 무슨 말을 속닥거렸는지 모르겠지만, 미궁의 주인 자리는 내 것이고, 누구에게도 넘겨줄 수 없어요.”

“나방… 그럴 줄 알았어. 미궁의 힘을 얻는 방법과 나방이 연관 있는 거죠?”

“이 이상 묻지 말고 떠나세요, 막심. 당신에게 주는 마지막 기회입니다.”

딱딱한 한마디와 함께 그가 막심이 걸어왔던 쪽으로 막심을 끌고 걷기 시작했다. 적어도 미궁주가 그를 히르칸에게 데려다주지는 않을 것이었다. 그러면 그는 자신을 어디로 데려가는 것인가? 어쩌면 이대로 지상으로 쫓겨나게 될지도 몰랐다. 그리고 만약 미궁의 주인이 그러기로 마음먹는다면 자신은 저항할 수 없을 것이다. 당장 지금도 손을 뿌리치기 위해 팔에 힘을 주고 뒤꿈치로 땅을 밟아보기도 했지만 미궁주의 몸뚱이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막심은 앓는 소리를 내면서도 고집스럽게 띄엄띄엄 말을 이었다.

“싫어요… 내가 여기까지 오려고 얼마나 고생했는데. 내가 이만큼 욕심내는 게 죽을죄는 아니잖아요. 막무가내로 내놓으라고 한 것도 아닌데, 난 당신들도 살려주겠다고 했는데…….”

말이 길어질수록 목소리가 떨렸다. 두려움이나 분노 때문이 아니었다. 무슨 말을 해도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다는 좌절 때문이었다. 생각해 보면 미궁주와 막심이 대등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막심이 알려주지도 않은 이름을 알고 있었고, 막심과 히르칸이 어디서 묵고 있는지도 알고 있었다. 그가 미궁의 주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한 그는 막강했다. 지금 이대로 그에게 쫓겨나면 미궁의 마법은커녕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떠나게 될 것이다. 그러면 무슨 낯으로 집에 돌아가? 히르칸을 다시 볼 수는 있을까? 그 의문에 확답을 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막심은 이제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 데에는 진절머리가 났다. 이대로라면 설령 혼자가 아니라 둘이 떠나게 된대도 히르칸에게 고향 땅을 보여주겠다는 소망, 욕심 같은 건 절대 이루지 못할 거야. 막심은 장난감을 빼앗긴 아이처럼 억울했다. 내게 이 문제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아주지 않는 이들에게 화가 났다. 막심의 소원을 이루는 데에도 분명 여러 방법이 있을 테지만 여기까지 온 이상 이게 아니면 영원히 만족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막심은 눈을 질끈 감고 소리를 질렀다.

“나도 가지고 싶어요. 내 거란 말이에요!!”

 

그리고 별안간 누군가 막심의 외침에 응답했다.

“그래, 네 거야.”

 

중성적인 목소리였고, 부드러운 여자의 목소리 같기도 했고, 거친 남성의 목소리 같기도 했다. 혀를 차는 소리가 머리를 울렸다. 단순히 그 소리만이 아니었다. 지나치게 큰 감각에 막심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사이 유예되었던 온갖 감각이 머릿속으로 밀려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 순간 미궁주가 눈을 부릅뜨고 주변을 급하게 두리번거렸다. 막심은 미궁주가 손을 놓자마자 자기도 모르게 웅크려 앉아서 양쪽 귀를 틀어막았다. 온화한 얼굴은 온데간데없이 그가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 소리를 질렀다. 허공을 향해서였다.

“거짓말! 이 악마! 내게 모든 힘을 안겨주겠다고 약속했잖아!”

“약속한 건 모두 줬어. 죽은 아들을 살려내 줬고 망가진 네 집안과 성도 돌려주었지. 너는 이제 더 바라는 것도 없잖아. 그러니까 이제 더 간절한 사람한테 양보하는 게 어때?”

막심은 문득 여태껏 들려왔던 목소리가 제 머릿속의 환청이나 망상 같은 게 아니라 실존하는 목소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던 강렬한 감각, 그리고 그에 수반하는 멀미와 현기증을 느끼며 막심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손목이 욱신거리고 세상이 빙글빙글 돌았다. 무의식적으로 가장 먼저 찾은 건 여태껏 막심을 이끌어오던 나방이었다. 미궁의 주인이 되는 법은 나방과 관련이 있다고 했으니까. 막심이 주변을 둘러보며 눈으로 나방을 찾는 순간 귓가에 누군가 다시금 속삭였다.

넌 네 말대로 정말 간절히 바라는구나!

“정말로… 내가 바라는 걸 전부 이루어줄 수 있어?”

“뭐든 이루어줄 수 있지. 불가능한 건 없다고 저 남자도 이야기했잖아.”

목소리의 말이 맞았다. 분명 그렇게 이야기했다. 미궁의 주인은 아들을 잃었다고 했다. 그러나 이곳에서 죽은 아들이 살아 돌아오는 기적을 맛보았다고 했다. 그것만이 아니라 미궁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게 없다고 말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막심은 그의 행복과 평화를 자신도 누리고 싶다고 생각했었다. 집에서 아버지와 어머니가, 히르칸이… 자신을 기다려주는, 그런 삶을 영원히 만끽하고 싶었다.

 

막심은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나… 미궁의 주인이 되고 싶어.”

“그럼 어떻게 할래?”

“미궁의 주인이 되겠어.”

 

좋은 선택이다.

 

그리고 다시 한번 수천 마리의 나방이 날아들었다. 소리 없는 날갯짓 소리에 미궁주의 노성이 묻혔다. 그 뒤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막심은 두 팔로 얼굴을 가리고 눈을 질끈 감았다가, 날갯짓 소리가 사라질 때쯤 실눈을 뜨고 눈앞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을 덮쳤던 나방은 일제히 하늘로 날아가 마치 검은 구름처럼 하늘을 유영하고 있었다. 미궁주는 눈을 뜬 채로 맥없이 쓰러져 있었다. 그의 얼굴에선 어떤 생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심지어 좀 전의 노기조차 흔적도 없이 사라져, 그는 그저 약간의 놀람만 남은 얼굴로 허공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형언할 수 없는 이상스러운 기분을 느끼며 그 모습을 내려다보고 있으면 나방 한 마리가 막심의 어깨에 내려앉았다. 그 나방은 다른 나방들보다 커서, 날개가 거의 손바닥을 전부 가릴 것 같았다.

막심은 여태껏 자신에게 속삭여오던 모든 목소리가 이 단 한 마리의 나방의 것임을 알았다. 나방이 막심에게 물었다.

“이제 어떻게 하고 싶어?”

“모르겠어. 나는…….”

“잘 모르겠구나. 그럴 수 있지. 그러면 가벼운 것부터 시작해 볼까?”

그 한마디와 함께 많이 낡아 해지고 흙먼지가 묻은 옷이 순식간에 탈바꿈했다. 우아하고 세련된 마법에 감탄하다가도 막심은 그 옷의 모양새를 한눈에 알아보았다. 고향의 복식이었다. 격식을 차려야 할 때 막심이 자주 입던 옷이었다. 검고 촘촘하게 짜인 옷감은 부드러웠고, 전투복과는 거리가 멀었으며, 꼭 막심 한 사람을 위해 재단된 것처럼 길고 짧은 부분 하나 없이 몸에 감겨들었다.

 

옷이 마음에 들어?

악마가 다정하게 물어왔다. 그 물음에 막심은 비로소 웃을 수 있었다.

 

*

 

그리고 히르칸은 두 번째 수통을 채운 뒤 분수대의 수반에 걸터앉아 머리를 짚고 있었다. 막심이 언제 돌아올지 알 수가 없었다. 만약 이르게 돌아갔는데 막심이 그 자리에 있지 않으면 화를 낼 것 같았다. …아니, 사실은 화가 나는 게 문제가 아니었다. 히르칸은 전에 없이 불안했다. 꼴에 막심의 기분을 생각해 준답시고 말도 안 되는 실수를 한 것 같았다. 막심은 누가 봐도 마음이 딴 데 가 있는 얼굴이었다. 역시 혼자 보내는 건 나쁜 선택이었다. 그러나 이제 와서 마음을 바꿔 먹고 그를 찾으러 나간다고 치자. 돌아온 막심과 엇갈리기라도 하면?

그렇다고 언제까지고 앉아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가긴 가야지… 히르칸은 오늘따라 유난히 무거운 몸을 느리게 일으켰다. 수통을 먼저 챙기던 차에 분수대 동상 위에 얌전히 앉아있던 나비가 불현듯 팔랑거리며 날아올랐다. 얼굴 가까이서 인분 없는 날개가 히르칸의 코 위에 앉기라도 할 것처럼 퍼덕거렸다. 히르칸은 고개를 뒤로 빼고 눈을 게슴츠레 뜬 채 나비를 바라보다 날아다니는 몸뚱이를 손끝으로 툭 쳤다. 잠시 히르칸의 손끝에 앉았던 나비는 다시 날개를 퍼덕거리며 날아올랐다.

“왜 그래? 따라오라는 거냐?”

히르칸은 얼굴을 찌푸렸다. 이렇게 말하면 막심이 너머에서 내 목소리를 들을까? 할 줄 아는 거라곤 앉기, 날기, 파닥거리기밖에 없으니 여간 답답한 게 아니었다. 입이라도 만들어달라고 할 걸 그랬나. 제자리에서 위아래로만 날갯짓하는 나비를 가만히 응시하고 있던 히르칸은 문득 발을 디딘 땅에서부터 진동이 전해져오는 것을 느꼈다. 처음에는 조약돌이 굴러가듯 미미한 진동이었다. 그러나 히르칸이 그 근원지를 가늠하기도 전에 진동은 가공할 속도로 몸집을 불리며 히르칸을 덮쳐왔다.

 

자리를 피할 새도 없이 땅이 쿵, 하는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히르칸은 크게 휘청이며 수통을 놓쳤다. 그러나 놓친 걸 주울 여유는 없었다. 연이어 불규칙한 충격파와 함께 분수대의 수반이 깨어지며 맑고 차가운 물이 바닥으로 쏟아져나왔다. 히르칸은 급한 대로 검을 낚아채며 고개를 들어 막심의 사역마를 눈으로 좇았다.

“막심!”

히르칸은 한 박자 늦게 팔랑거리는 나비의 날갯짓을 발견하고 소리를 질렀다. 이걸 경고한 거였나? 그러나 막심의 사역마는 부름에도 돌아오기는커녕 한 번 멈추는 일조차 없었다. 나비는 히르칸을 내버려두고 곧장 어디론가 향하고 있었다.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히르칸은 다급하게 목소리를 높이며 중심을 잡았다.

“막심, 가면 안 돼!”

금이 가기 시작한 바닥을 뛰어넘으며 히르칸은 나비를 쫓아 뛰었다. 그러나 발 디딜 곳을 찾느라 빠르게 바닥을 살피던 도중 히르칸은 달갑지 않은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이건 지진이 아니었고, 땅이 금이 가거나 깨어지는 것도 아니었다. 미궁의 바닥이 구역을 나누어 자리를 바꾸고 있는 것이었다. 미궁의 구조가 바뀌고 있었다. 숱하게 미궁 공략에 참여해 온 히르칸도 미궁의 구조가 변하는 건 몇 번 보지 못한 광경이었다. 그러나 결코 좋은 징조가 아니라는 것만은 확실했다. 나비의 뒤를 따라 달리던 히르칸은 갈림길을 지나칠 때쯤 모닥불을 피워두었던 방향을 흘끔 쳐다보았다. 막심과 히르칸의 짐이 고스란히 남아 있을 그곳은 그새 길이 막혀 더는 접근할 수 없었다. 막심이 저 안에 있다면 분명 위험한 상황일 것이다. 그러나 어쩐지 막심은 그곳에 있지 않을 거라는 강한 확신이 들었다.

그리고 어느덧 주변의 광경은 변하여… 히르칸은 어느덧 익숙한 장소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차츰 숨이 가빠왔다. 힘들어서가 아니었다. 더는 무시할 수 없는 강한 예감이 히르칸을 강하게 짓누르고 있었다. 이곳은 히르칸과 막심이 이 층에 다다라 처음으로 묵었던 고성이었다. 막심이 히르칸을 재우고 자리를 비웠던 바로 그 장소였다. 그러나 히르칸으로 하여금 끝내 달리는 것조차 어렵도록 만든 광경은 다름 아닌 하늘의 광경이었다. 하늘 위로 마치 새가 편대비행을 하듯 검은 구름이 일렁이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자세히 보면 나방 군집이었다. 막심의 어깨에 앉아 있었던, 막심과 히르칸을 이끌어주던 나방 수천 마리가 한 몸처럼 날고 있었다.

잡힐 듯 잡히지 않던 막심의 사역마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그 안으로 날아들어갔다. 나방과 썩 닮지도 않았던 사역마는 그 무리에 섞여 드는 순간 그들과 하나가 되어 눈으로 분간할 수 없게 되었다. 그건 막심의 선물이었다. 그가 마음을 주고받듯 히르칸에게 준 것이었는데. 그러나 히르칸의 좌절감과는 아무 상관 없이 비로소 온전해진 그들은 바닥에 그림자처럼 내려앉았고, 이내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 뒤에는 막심이 서 있었다.

등을 보이고 서 있던 막심이 뒤를 돌아보았다.

그는 놀란 얼굴이었다.

“막심…….”

히르칸은 숨을 헐떡이며 그 자리에 천천히 멈춰 섰다. 변하기 시작하는 미궁의 구조. 탈바꿈한 막심의 옷차림. 넘쳐흐르는 마력을 감당하지 못하고 되살아나 싹을 틔우는 지팡이. 막심의 어깨에 앉아 있던 나방이 기지개를 켜듯 날개를 펼치면 날개에 그려진 두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이 모든 게 가리키는 사실은 단 하나였다.

등 뒤에서부터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풀들이 고개를 숙이며 소란스러운 소리를 냈다. 손안에 땀이 배어났다.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모르겠어. 지금이라도 없던 일로 할 수는 없을까? 한 박자 늦은 좌절과 당혹, 절망감이 히르칸을 파도처럼 덮쳐왔다. 황망한 얼굴을 하고 있던 히르칸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곧장 칼을 뽑아 들었다. 한 번 벌어진 일을 무를 수 없다 해도 아직 방법이 남아 있었다. 지금 베면 된다. 막심 레오노프를 죽이고 미궁을 빠져나가면 된다.

“아직도 나한테 화났어요?”

그런데 막심의 목소리는 늘 듣던 그대로였고, 또 물기가 어려 있었다. 부들부들 떨리던 두 팔에서 점점 힘이 빠졌다. 막심의 옷은 색을 다 집어삼킨 것처럼 어두운 색이었고, 좀처럼 보지 못한 복식이었다. 그런데 그 옷은 막심과 너무나도 잘 어울렸다. 또 그가 고향에 있을 시절 입었던 옷이라는 걸 너무도 잘 알겠기에…….

진동이 가라앉고 있었다. 히르칸은 일격의 순간을 놓쳤다는 것을 깨달았다. 막심을 베기엔 너무 늦었다. 그러나 그 순간이 백 번은 더 찾아온대도 히르칸은 막심을 벨 수 없을 것이었다. 그 사실을 깨닫고 히르칸은 천천히 검을 놓았다. 그의 손안에서 칼자루가 미끄러져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부드럽고 두꺼운 풀밭은 그 위로 철로 된 검날이 떨어져도 아무 소리를 내지 않았다.

 

막심이 성큼성큼 다가와 히르칸을 덥석 끌어안았다. 그의 얼굴이 젖어 있었다. 훌쩍거리고 있는 막심이 울고 있는지 웃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히르칸은 넋이 빠진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은 지상에서도 본 적 없는 맑고 예쁜 색이었다. 그것을 배경 삼아 새하얀 벽돌과 청람색 지붕으로 겹겹이 쌓인 첨탑이 끝을 모르고 구름 위로 치솟고 있었다. 불쑥 유치한 기억이 떠올랐다. 어릴 때 동화를 읽으며 자랐던가. 기억은 나지 않지만 히르칸에게 있어 언제부턴가 어릴 때의 경험은 별로 중요하지 않게 여겨졌다. 그런데 막심은 썩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줄곧 이런 생각을 하면서 살았나…….

 

*

 

히르칸과 막심은 더 이상 요리를 하지 않았다. 배가 고플 일도 없었고 식량을 직접 구해야 할 필요도 없었다. 그날의 식사 메뉴는 온전히 막심이 결정하게 되었다. 그가 오늘 저녁은 크림소스를 끼얹은 홍합 스튜가 먹고 싶다 하면 그날 저녁 테이블에는 완벽한 크림 홍합 스튜가 올라왔다. 히르칸은 해산물을 많이 먹어본 적 없었기 때문에 특유의 바다 향에 익숙해지는 데에 오랜 시간이 걸렸다. 사실은 지금도 제대로 적응하지 못했다. 그래도 막심은 히르칸이 시도를 해본다는 것 자체가 기쁜 모양이었다.

 

오후 3시가 다 되어가는 시각이었다. 입을 맞추려던 막심과 히르칸은 노크 소리에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얼굴이 발그레하게 달아오른 막심이 멋쩍은 헛기침을 두어 번 하고선 의자에 도로 앉았다.

“들어와요.”

문이 열리면 그 뒤에는 하인이 쟁반 가득 티포트와 디저트를 들고 서 있었다. 흔들림 없이 쟁반을 들고 테이블에 다가온 하인이 눈을 내리깔고 테이블을 넉넉하게 채워주었다. 그리고 찻주전자를 들고 차를 따르려는 하인을 막심이 제지했다. 직접 따르고 싶다고 했다.

“아버지는 주무시나요?”

“네, 낮잠 시간이라서요.”

“알겠어요. 조금 있다가 일어나시면 저녁은 먼저 드시라고 말씀해 주세요. 디저트를 먹고 나면 저녁까지 별로 배가 고프지 않을 것 같아서.”

“네, 알겠습니다. 편히 쉬세요.”

공손한 미소를 띤 하인이 그렇게 말하고선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는 히르칸에게도 고개를 숙였지만 히르칸은 어떻게 답해야 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어떤 말도 없이 그저 빤히 바라보기만 하는 히르칸을 보며 하인은 살짝 당황한 표정을 지었지만 곧 얼굴에서 그 기색을 지우고 물러갔다. 히르칸을 떨떠름하게 만드는 건 바로 그런 부분이었다. 여기 있는 사람들은 전부 만들어진 사람인데, 저렇게 당황하기도 한단 말인가.

 

따뜻한 물에 우린 다즐링 차와 사이에 잼을 바른 바삭거리는 설탕 과자, 버터와 슈크림, 초콜릿 향기가 나는 구움 과자. 차를 따를 때는 이렇게 주전자의 뚜껑을 손으로 살짝 받쳐달라고, 막심은 익숙하고 섬세한 자세로 차를 따르며 히르칸에게 이야기했다. 달고 기름진 디저트와 곁들여 먹을 수 있도록 진한 색으로 익은 여러 과일이 얇게 썰려 나왔다. 히르칸은 이런 음식을 지상에서도 먹어본 적이 없었지만 막심은 이것이 고향에서 먹던 것과 완전히 똑같은 맛이라고 기뻐했다.

“이렇게 먹어봐요. 크림이랑 과일을 얹어서.”

히르칸은 별 감흥 없는 얼굴로 그가 내민 에클레어를 바라보았다. 히르칸이 바로 입을 벌리지 않자 막심은 짐짓 서운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너무 멍하니 앉아 있었나. 히르칸은 괜히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너무 달아서 그래. 넌 이런 걸 잘도 먹냐.”

“그러니까 차랑 같이 먹는 거죠. 씁쓸한 차랑 달콤한 디저트는 궁합이 좋아요.”

그렇게 말하며 막심이 재촉하듯 한 차례 더 디저트를 내밀어 왔다. 히르칸은 더는 거절하지 못하고 결국 에클레어를 한 입 베어 물었다. 크림은 입에 넣는 순간 부드럽게 녹아 사라지고 페이스트리는 한 차례 씹을 때마다 잘 구운 파이의 겉껍질처럼 입안에서 부서졌다. 삼키고 나면 남는 달짝지근하고 끈적끈적한 뒷맛은 기분 나빴다. 그 향을 되새김질하는 동안 막심은 히르칸이 어떤 말이라도 내뱉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게 히르칸의 목소리를 기다리는 막심은 귀엽고 온순해 보였지만, 가끔 그 눈동자 아래로 간절함이 엿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히르칸은 눈을 내리깔고 제 앞에 놓인 찻잔을 바라보았다. 부스러진 찻잎이 찻물 안에서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히르칸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옛날에… 내가 버터버 잎을 따다가 끓여줬을 때.”

“…….”

“그때 네가 비싼 차 향이 난다고 좋아했잖아. 나는 이런 차를 먹어본 적도 없어서 몰랐는데.”

그런데 네 말대로 엄청 비슷하네. 히르칸이 중얼거리자 막심은 입술을 달싹이다 어떤 말도 내뱉지 못하고 표정을 흐렸다. 그가 슬픈 얼굴을 하기를 바라는 건 아니었다. 그저…….

“그때가 더 좋았던 것 같다…….”

그런 이야기였다. 히르칸의 목소리가 잦아들다 완전히 들리지 않게 되었을 때 막심은 입술을 달싹이다 가라앉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나도…….”

들릴 듯 말듯 떨리는 목소리. 그리고 그가 잠시 고개를 숙였다. 히르칸은 어쩌면 글썽거리는 그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질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막심은 그렇게 길지 않은 침묵 끝에 무언가 결심한 듯 눈을 지그시 감았다 떴다. 눈물이 뺨으로 떨어지는 일은 없었다. 그가 손끝이 하얗게 질릴 만큼 찻잔을 꽉 쥐었다.

 

“아뇨, 지금이 가장 행복해요.”

그리고 히르칸은 받아들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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