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작1

사슴 고기 찹스테이크

A타입, 1차(던전밥 au) / 15,626자

SAL by S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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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심.

 

아버지의 목소리였다. 막심은 고개를 들었다. 본가의 앞뜰에 앉아 토끼풀과 여린 꽃들을 엮고 있던 참이었다. 화관을 만들고 싶었는데 잘 되지 않았다. 뒷짐을 진 채 멀리 서 있던 아버지는 막심과 눈이 마주치자 가까이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막심은 자기도 모르게 만들다 만 화관을 등 뒤로 숨겼다. 그러나 아버지는 막심이 만들고 있던 것에는 별 관심이 없어 보였다.

 

막심, 손을 잡거라.

 

아버지의 손은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보다 나이가 든 것 같았다. 두 손위 형제를 생각해 보면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그의 손은 예전보다 주름지고 거칠었으며 왜인지 땀이 축축하게 배어 나와 있었다. 그의 손을 잡으려면 화관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막심은 별수 없이 화관을 등 뒤에 내버려두었다. 그리고 쭈뼛거리다 아버지의 손을 잡았다. 막심의 손은 흙과 풀물이 들어 지저분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놓기는커녕 행여나 막심이 먼저 놓을까 봐 걱정하는 것처럼 꽉 쥐어왔다.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막심은 아버지의 손을 잡은 채 꽃밭을 가로질렀다. 흐리고 빛바랜 하늘의 끄트머리에서부터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었고, 그곳에서 바람이 낮게 불어올 때면 고개를 쭉 뺀 풀들이 어수선한 소리를 내며 정강이를 간지럽혔다. 그리고 두 사람은 바람이 불어오는 곳을 향해 걷고 있었다. 아버지의 걸음은 빠르고 보폭이 넓어서 어린 다리로는 따라잡는 게 힘들었다. 가슴 속에서 일렁거리는 막연한 불안감을 더는 무시할 수 없게 되었을 때쯤 막심은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어디로 가는 거예요, 아버지?

집으로 간단다.

 

아버지는 막심을 돌아보지 않고 답했다. 막심은 확신 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집은 저쪽에…….

저 집은 모양만 그럴듯한 가짜 집이야. 진짜 집으로 돌아가야지.

어머니랑 형들은요?

거기서 다들 널 기다리고 있어.

 

하지만 조금 전 막심이 앞뜰에 나가도 되냐고 물어봤을 때 고개를 끄덕인 건 다름 아닌 막심의 어머니였다. 지금도 어머니는 형들과 함께 안락하고 따뜻한 거실에서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고 있을 터였다. 집을 떠난 막내아들이 무사히 모험을 마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막심의 모험은 어른들의 기대만큼 순탄하지 못했다. 혼자 무언가 해보려고 해도 잘되지 않았고, 그럴듯한 성과는커녕 마물 하나를 쓰러뜨리는 것도 벅찼다. 집으로 돌아가고픈 생각만 간절해졌다.

막심은 집이 정말 그리웠다. 아침에는 비스듬히 햇빛이 들이치고, 오후 3시 즈음엔 갓 구운 스콘과 다즐링의 향이 코를 간지럽히는……. 막심은 지금이라도 어머니가 창밖을 내다보고 자신을 발견하기를, 그리고 목소리를 높여 돌아오라고 외쳐주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아버지에게 끌려가다시피 걸음을 옮기는 동안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아도 집은 그저 제자리에 고요하게 서 있을 뿐이었다. 평화로운 나의 집—그 집은 사실 막심을 기다리지도, 바라지도 않는 것 같았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 막심은 다급하게 아버지의 손을 잡아끌었다.

 

아버지, 돌아가요. 저 별로 가고 싶지 않아요.

가야만 한다. 그게 우리 집안의 전통이지 않으냐.

하지만… 전 바깥에 원하는 것도 없단 말이에요. 전 어디로 가야 하는지도 모르고, 뭘 찾아야 하는지도 몰라요. 제가 원하는 건 그저…….

자꾸 두 번 말하게 만드는구나. 날 실망하게 할 테냐!

 

무서운 목소리였다. 목소리보다도 그가 실망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더 두려웠다. 하지만… 막심은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잊을 만하면 불어오는 찬 바람이 그가 먼 길을 떠나고 있다는 사실을 자꾸만 상기시켰다. 모르는 곳에 모르는 것을 찾으러 가라니… 가는 길에 길을 잃으면 어떡하지. 아무것도 찾지 못해서, 아니면 너무 초라한 걸 찾아서 집에 돌아갈 수 없게 되면 어떡하지. 집으로 돌아갈 변명을 찾기 위해 막심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그러다 문득 변명 같은 건 필요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 냈다. 그러고 보니 막심은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다. 어떤 결정을 내려도 자신의 편을 들어줄 사람이 있었다. 처음엔 무뚝뚝하고 무서운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는 모험이 끝나고도 자신과 쭉 함께하기로 약속해 주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어디 있지? 아, 그 사람도 분명 저 집에 있을 거야. 고향에 가서 같이 살기로 했으니까. 그를 떠올리자 비로소 손을 뿌리칠 용기가 생겼다. 막심은 아버지의 손에서 억지로 손을 빼냈다. 그리고 눈을 마주치지 못한 채 빠르게 내뱉었다.

 

실망하신대도 상관없어요. 당장 돌아갈래요.

막심, 가면 안 된다. 저기는 우리 집이 아니야.

거짓말. 제가 집에 돌아가지 못하게 하려고 그러시는 거죠. 저기가 진짜 제 집이에요. 저기서는 다들 절 사랑해주고 아껴준단 말이에요.

사실이 아니야. 넌 그저 그렇게 생각하고 싶으니까 내 말을 믿지 않는 거야. 설령 저기 있는 모두가 널 사랑하고 아낀다 해도 그건 전부 가짜다.

그렇게 말하지 말아요! 저기 있는 사람들은… 아버지랑은 달라요. 제가 모험을 떠나지 않겠다고 해도, 모험에서 아무것도 얻어오지 못했다고 해도… 다들 괜찮다고 말해줄 거라고요.

정녕 네가 원하는 게 그것이냐? 너를 그저 사랑해 주는 것, 네가 무슨 짓을 하든 널 감싸고돌고 칭찬해 주는 것, 고작 그런 게 네가 바라는 것이야?

 

아버지에게 반기를 든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이 될 것이었다. 그런 생각에 긴장해서 심장 박동 소리가 고막을 꽉 채우는데도 막심은 그의 물음을 듣는 순간 의아해졌다. 고작 그런 걸 원하냐니. 막심이 줄곧 바라던 것은 오로지 그 하나뿐이었는데.

 

…네.

 

망설임 한 점 없는 대답. 그리고 막심은 몸을 돌려 뛰기 시작했다. 조금 전까지는 겁을 주기 위해 옷깃 사이를 파고들던 바람이 이제는 그의 등을 떠밀고 있었다. 빨리 달려가라고, 아늑한 집으로 돌아가라고 속삭이고 있었다. 모든 꽃과 풀이 그의 집을 가리키고 있었다. 막심은 혹여나 아버지가 쫓아와 자신을 붙잡을까 봐 조급하게 달렸다. 발을 헛디뎌 휘청거려도 멈추지 않았다.

 

막심! 가면 안 돼!

 

그러나 외마디 비명 같은 외침. 절대 뒤돌아보지 않겠다고, 집만 보고 달리겠다고 결심했는데도… 그 간절한 목소리를 듣는 순간 막심은 저항하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을 아버지의 모습을 생각하며, 두려움과 죄책감으로 답답하게 죄어오는 가슴에 손을 얹은 채 뒤를 돌아보았다. 그런데 거기엔 아버지는 온데간데없이, 모르는 사람 하나가 우두커니 서 있었다.

 

막심…….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막심은 어쩐지 그가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그 남자는, 몰려오는 먹구름을 등지고 서서 허망한 얼굴을 하고 있던 그 사람은…….

 

막심은 헉, 하고 급하게 숨을 들이쉬며 눈을 떴다. 정신을 차려보니 자신은 풀밭에 양손을 짚고 주저앉아 있었다. 무의식 중에 눈물을 흘렸는지 얼굴이 젖어 있었다. 어떻게 된 일이지?

짙은 환각에서부터 막심을 깨운 것은 다름 아닌 미궁의 주인이었다. 그가 가까이에 꿇어앉은 채 부드러운 손수건으로 막심의 얼굴을 닦아주었다. 자기도 모르게 목에 힘을 주고 그 손을 피하려던 막심은 결국 그의 손에 얼굴을 맡겼다. 마치 아이를 다루듯 섬세하고 상냥한 손길이었다. 막심은 얼굴을 조금 찌푸린 채로 훌쩍거리며 미궁주의 얼굴을 흘끗거렸다. 가까이서 바라본 남자는 순혈 엘프였는데, 그럼에도 제법 나이가 든 얼굴이었다. 아마 막심의 아버지보다도 나이가 많을 것 같았다. 막심의 경계심 어린 시선을 아는지 모르는지 손수건을 접어 넣은 미궁주가 몸을 일으켰다.

“저 나방을 처음 봅니까?”

“…이전의 층까지는 나타난 적이 없어서요.”

막심은 그가 내민 손을 잡고 일어나며 조금 퉁명스럽게 중얼거렸다.

“이 미궁의 하층에 사는 나방이에요. 인분에 환각 성분이 있어서 한 번에 많이 들이마시면 위험합니다. 그래서 날려보내지 않는 게 좋아요.”

“꼭 원래 여기 있었던 것처럼 말씀하시네요. 모든 마물들은 미궁의 주인이 의도를 갖고 배치하는 것 아닌가요?”

“원래부터 여기 있었으니까요. 이 나방들은 내가 미궁의 주인이 되기 전부터 여기에 살았어요. 옮겨보려고 해도 잘 움직이지 않더군요.”

하지만 그런 건 불가능했다. 미궁은 말하자면 미궁의 주인이 마음대로 조립한 퍼즐이다. 퍼즐 조각이 실은 자기 마음대로 움직일 힘이 있기라도 하단 말인가. 그는 거짓말을 하고 있다. 막심이 눈을 가늘게 뜨자 미궁주가 예의 부드러운 웃음과 함께 손을 내저었다.

“압니다. 아직 이해하기 어렵겠죠. 거짓말이라고 생각해도 상관 없어요. 다만 무슨 음모가 있어서 이런 말을 하는 건 아닙니다.”

“내가 그걸 어떻게 믿죠?”

막심은 쏘아붙이며 손 아래 있는 지팡이를 꾸욱 감싸쥐었다. 그러자 잠시 턱을 만지작거리던 미궁주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음… 미궁이 원래 위험한 건 어쩔 수 없지만, 이 미궁은 범람의 징조도 없고 안정되어 있죠. 당신이 묵는 곳 주변에는 공격적인 마물도 거의 없고요. 그리고 난 지금 완전히 무장 해제된 상태인데요. 이걸로는 증명이 부족한가요?”

“혹시 모르죠. 주문은 지팡이 없이도 읊을 수 있고, 등 뒤에 단도 같은 거라도 숨겼으면…….”

“당신은 마법학교 학생이죠?”

막심은 흠칫 숨을 들이쉬었다. 실로 오랜만에 들어보는 단어였다. 그리고 미궁 주인의 입에서 듣게 될 거라고는 더욱 생각하지 않은 단어기도 했다.

“…그걸 어떻게… 그리고 무슨 상관입니까?”

“쓰는 술식을 보면 알 수 있지요. 아들이 마법학교 학생이었거든요.”

관심 없다는 듯 입을 다물었지만 경계가 살짝 허물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자식이 마법학교에 다닌다는 건 최소한 번듯한 신분이 증명되어 있다는 뜻이었다. 미궁의 주인은 분명 고대 마법에 손 댄 중범죄자나 혼혈 같은 사람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입을 닫은 채 머뭇거리던 막심은 눈치를 보며 물었다.

“…아드님 이름이 뭔데요?”

“하하… 들어도 모를 겁니다. 연구자 신분으로 미궁 근처에 파견이 됐는데…….”

조금 주저하던 미궁주가 곧 어깨를 으쓱였다. “사고로 죽었거든요.” 그 말투가 얼마나 일상적이고 가벼운지 막심이 좀 전에 들은 말의 의미를 곱씹어보기까지는 다소 시간이 걸렸다. 멍하니 눈을 깜빡이던 막심은 한 손으로 입을 가렸다. 말실수에 대한 죄책감이 직전까지 품고 있던 불신과 경계를 흐리게 만들었다.

“죄송해요, 저는…….”

“아뇨, 괜찮습니다. 신경 쓸 것 없어요.”

“그게, 아는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거든요. 엘프시니까…….”

“그때는 많이 힘들었지만 지금은 아무렇지 않아요. 오래 전의 이야기고, 또 지금은 중요하지 않은 일이 됐으니까.”

그리고 미궁주는 거듭 괜찮다고 이야기했다. 그가 위로하듯이 두 손을 잡아왔다. 무릇 집안이나 학교에서 만나온 여러 어른들을 떠올리게 하는 상냥한 목소리와 몸짓이었다. 막심은 은연중 제 또래일지도 모르는 아들에 대해 아주 잠깐 상상했다. 막심은 누군가의 아들이었고 눈 앞에 있는 미궁의 주인은 누군가의 아버지였다.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닐지도 몰라. 막심은 무심코 긴장을 풀었고… 자연스럽게 그와 눈을 마주쳤다. 그의 동공이 이상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아버지가 되어서, 아들의 죽음이 중요하지 않다고 하면… 이상하지요?”

조금은. 막심이 섣불리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미궁주가 목소리를 낮췄다.

“이유를 알려드릴까요, 막심.”

누군가 입을 틀어막은 것처럼 말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막심은 아니요, 라고 대답할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다. 정적 가운데 그저 밤바람이 풀과 꽃을 쓰다듬는 소리, 그 안에서 말을 고르던 미궁주는 기쁨이 묻어나는 음성으로 속삭였다.

“왜냐하면… 내 아들은 되살아났거든요.”

그 고백이 얼마나 은밀하고 비밀스러운지, 막심은 그 안에 내포된 수많은 의미를 의식하기도 전에 무심코 순수한 호기심을 갖고 되물었다.

“어떻게?”

“미궁의 마법이 있다면 불가능한 건 없습니다.”

 

불가능한 건 없다. 그 말이야말로 마치 마법 같아서, 막심은 그 한 마디에 무척 매료되었다.

 

*

 

어디선가 새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건 느지막한 오전의 햇살에 무심코 지상에서의 기억을 떠올린 것에 불과했다. 히르칸은 느리게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얼마나 깊게 잔 건지 잠이 곧장 깨질 않았다. 오랜만에 침대에서 잠들어서 그런가. 아니면 안전한 곳에 누워있다는 안도감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다 안개가 걷히듯 서서히 정신이 맑아지자 히르칸은 그 모든 감상이 제 착각이라는 걸 깨달았다.

자리에는 막심이 없었다. 옆자리를 더듬거리던 히르칸은 벌떡 일어났다. 그리 넓지 않은 침실에는 막심의 흔적이 없었다. 언제든 챙길 수 있게 가까이 세워놓은 지팡이도 사라진 상태였다. 피가 차게 식었다. 히르칸은 침대에서 맨발로 빠져나와 침실의 문을 벌컥 열었다.

“막심!”

복도를 성큼성큼 걸어 다니며 히르칸은 목소리를 높였다. 발뒤꿈치가 복도를 밟을 때마다 무거운 발소리가 집을 울릴 뿐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왜? 어디로 간 거지? 애초에 여기는 미궁이다. 나갔다고 해도… 대체 무슨 목적이 있어서 어디로 갔단 말인가? 닫혀 있는 문까지 하나하나 열어본 히르칸은 어쨌든 막심이 이 집 안에는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대로 침실로 향해 엉망진창으로 무장을 걸친 히르칸은 검 하나를 잡아챘다. 그리고 부츠를 힘으로 우악스럽게 구겨 신으며 침실에서 뛰쳐나왔다. 그렇게 현관으로 걸음을 막 내디딘 순간 문이 열렸다.

“히르칸?”

히르칸은 눈을 부릅뜬 채 멈췄다. 막심이 의아한 눈으로 그를 마주 바라보고 있었다.

“…너 뭐야.”

“아… 잠깐 나갔다 왔어요.”

대수롭지 않은 목소리였다. 눈을 마주쳐도 막심은 별 반응이 없었다. 오히려 히르칸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어떤 기분을 느꼈는지는 하등 아무런 관심도 없는 것 같았다. 그가 아무렇지 않게 히르칸을 지나쳐, 로브를 벗어 소파에 걸쳐놓고, 그 옆에 앉는 순간까지 히르칸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눈을 끔뻑거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실은 뒤늦게 화가 치솟아 몸이 움직이지 않는 것이었다.

히르칸은 직전까지의 놀란 마음이 가라앉지 않아 자신이 숨을 몰아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온갖 험악한 말이 입 안에서 맴돌고 있었다. 그러나 막심에게 그렇게까지 다듬어지지 않은 말을 내뱉고 싶지는 않았다. 한눈에 보기에도 막심은 상태가 이상해 보였다. 그의 말대로 잠깐 나갔다 오는 사이 무슨 일이 있었던 것만은 분명했다. 그러나 왜인지 막심은 제 입으로 털어놓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히르칸은 한 차례 심호흡하고 가라앉은 목소리로 천천히 입술을 달싹였다.

“…네가 나가는데 내가 못 깼을 리가 없어.”

“…….”

“솔직히 말해.”

그리고 막심은 그제야 히르칸이 화가 났다는 걸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히르칸을 바라보던 그가 곧 시선을 제 무릎으로 떨궜다. 그 위에 가지런히 모은 두 손을 만지작거리던 막심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

“…그렇게 이상한 짓은 안 했어요. 그냥… 수면 마법을…….”

“왜?”

“기분 나빴으면 미안해요.”

“미안한 게 아니라, 왜 그랬냐고.”

목소리가 날카로워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이 와중에도 그게 거슬렸는지 막심이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 그러나 당장 막심이 당당하게 나올 입장이 아니라는 건 두 사람 모두 알고 있었다. 미간을 좁힌 채 제 손만 내려다보는 막심이 머리를 굴리는 소리가 들릴 지경이었다. 다만 그가 거짓말에 소질이 없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입술을 달싹이며 단어를 고르던 막심이 결국 내놓은 건 형편없는 변명이었다.

“요즘 잘 못 잤으니까… 내가 깨울까 봐요…….”

“나 잘 자라고 수면 마법을 걸었다고! 넌 지금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냐?”

그리고 히르칸은 결국 참지 못했다. 거의 고함에 가까운 목소리가 거실을 울리는 순간 막심이 조개처럼 입을 다물어 버렸다. 몇 차례 마른세수하며 서성거리던 히르칸은 제 분을 삭이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차라리 속 시원하게 말이라도 하면, 아니, 제 앞가림이라도 할 줄 아는 놈이었으면 이렇게까지 화가 나진 않았을 텐데. 생각이 없는 데에도 정도가 있지. 히르칸은 막심과 함께 다니면서 단 한 순간도 마음을 놓아본 적이 없었다. 잠들어 있다가도 별 의미 없는 기척에 불현듯 깨고, 그러다 다시 잠드는 게 일상이었다. 그런데 내가 왜 그렇게 신경을 곤두세우는지는 생각도 하지 않고……. 머리가 지끈거렸다. 다른 게 아니라 오로지 막심 때문이었다. 잠들 때는 늘 제가 잠든 사이 막심이 해결할 수 없는 일이 생길까봐 긴장이 됐다. 여기는 다름 아닌 미궁이었고 막심에겐 모든 것이 처음이었으니까. 그리고 오늘, 잠에서 깼을 때 옆에 막심이 없다는 걸 깨닫는 순간… 제 몸의 통제권을 뺏겼단 사실에서 오는 불쾌함도 분명히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히르칸은 막심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까 봐 겁이 났었다.

그러나 이 모든 생각을 말로 옮기기에 히르칸은 너무 흥분해 있었고, 말솜씨가 그렇게 좋은 편도 아니었다.

“다시는.”

“…….”

“나한테 그 마법 걸지 마. 알겠어?”

이를 악물고 씹어뱉자 막심이 아랫입술을 말아 물었다. 이윽고 그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귀 끝이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지금 이 순간에는 정말로 보고 싶지 않았지만… 막심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눈길이 가는 건 별수 없었다. 아래로 비스듬히 시선을 고정한 막심의 눈은 금방이라도 눈물을 떨굴 것 같았다. 마음이 약해질 것 같아서 히르칸은 그 모습을 오래 바라보는 대신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리고 무거운 침묵이 이어졌다. 미궁이 이렇게 조용한 곳이었나, 새삼스러운 감상이 들 정도였다. 야생동물도 다른 모험가도 없는 곳이라 인공적으로 불어오는 바람을 제외하면 들려오는 소리라고는 두 사람만의 발소리가 전부였다. 평소에도 이런 정적은 종종 찾아왔다. 하지만 오늘따라 이 침묵이 버겁게 느껴졌다. 사실 굳이 전투를 벌일 필요는 없었는데… 가뜩이나 예민해진 신경에 길목과 마물의 둥지가 지나치게 가까운 게 거슬렸다. 결국 히르칸은 혹시 모를 공격에 대비하며 지나가느니 차라리 속 시원하게 전부 소탕하는 게 낫겠다는, 답지않게 비효율적인 선택을 했다. 그러나 마물의 생김새를 보건대 전부 죽이는 게 그렇게 어렵진 않을 것 같았다. 히르칸은 막심을 뒤로 물리고 마물용 검을 뽑아 들었다.

예상대로 달려드는 마물들을 베어내는 건 어렵지 않았다. 길이는 기껏해야 허리춤까지 오는데다가 몸통은 크고 다리는 짧은, 땅딸막한 생김새의 마물이었다. 갈고리 같은 발톱은 꽤 위협적이었지만 마물의 팔은 히르칸의 검에 비해 너무 짧아서 그에게 상처를 입히는 게 불가능했다. 무리 없이 마물 무리와 전투를 마친 히르칸은 마지막으로 궁지에 몰려 땅에 네 발을 딛고 짖는 한 마리를 베기 위해 가까이 다가갔다. 거품까지 물고 맹렬한 울음소리를 내던 마물은 승산이 없다고 판단했는지 등을 둥글게 말고 이상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히르칸이 방심하거나 섣부르게 군 것은 아니었다. 그것이 어떤 반응을 보이든 히르칸은 이대로 다가가 목을 베어내면 끝날 일이었다. 분명 그래야 했는데.

히르칸이 검을 치켜드는 순간 팽팽하게 당겨오던 그것의 등가죽이 찢어지며 갑자기 축축하게 젖은 날개가 솟아올랐다. 눈을 부릅뜨고 빠르게 검을 내리꽂았지만 이미 늦었다. 마물이 아슬아슬하게 히르칸의 얼굴을 스쳐 날아오르며 히르칸의 목덜미부터 관자놀이까지를 길게 찢어발겼다. 그러나 솟구치는 피를 한 손으로 틀어막으며 검을 고쳐 잡던 히르칸은 그럴 필요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갑작스러운 반격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사실 최후의 발악이었고, 마물은 히르칸이 휘두른 검에 치명상을 입고 쓰러져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긴장이 풀렸다. 변태하는 종인줄은 몰랐는데. 그냥 지나가는 게 맞는 선택이었나. 얕은 한숨과 함께 비틀거리는 히르칸에게로 막심이 뛰어왔다.

“히르칸!”

뒷걸음질치는 히르칸을 막심이 품에 덥석 안았다. 옷깃을 젖히고 상처 부위를 손으로 감싸려던 막심은 축축한 옷깃이 살에 달라붙어 여의치 않자 스틸레토를 꺼내 옷깃을 찢어버렸다. 별로 위기감이 들지 않았기 때문에 시야가 빠르게 가물거리기 시작하는 와중에도 히르칸은 그의 손에 들린 단검을 보며 멍하니 생각했다. 잘 쓰네… 그에게 스틸레토를 넘겨준 건 잘한 일이었다. 검을 든 막심은 잘 상상이 되지 않았지만 단검을 쥔 폼은 제법 그럴듯해보였다.

수십 번을 들어도 여전히 알아들을 수 없는 영창. 이어 상처가 아무는 게 느껴졌다. 동시에 얼굴과 목 안쪽이 미친 듯이 간지러워졌다. 회복 직전에 찾아오는 예의 현기증을 느끼며 눈을 끔뻑거리던 히르칸은 무의식중 손을 끌어올려 상처가 났던 부위를 긁었다. 그걸 본 막심이 무심코 얕은 미소를 지었다.

“이제 좀 괜찮아요?”

“어… 괜찮네.”

히르칸은 중얼거렸다. 줄곧 시계방향으로 빙빙 돌던 시야가 눈을 몇 번 깜빡이자 제자리로 돌아왔다. 히르칸은 그제야 게슴츠레 뜨고 있던 눈꺼풀을 들 수 있었다. 눈을 제대로 뜨고 바라본 막심의 얼굴에서는 좀 전의 미소는 찾아볼 수 없었고, 좀 전의 간지럽고 몽롱한 감각이 꿈이었던 것처럼 차츰 머리가 차가워졌다.

 

“히르칸.”

막심이 내민 건 웬 새빨간 열매였다. 검을 손보던 히르칸이 그것을 건네받아 살펴보는 동안 막심은 물을 가득 채운 수통을 각자의 머리맡에 내려놓고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히르칸은 반들반들한 껍질의 냄새를 맡고 옷깃으로 문질러 닦아보았다. 놀랍게도 그건 사과였다. 의심할 여지 없이. 지상의 과일이 상층도 아닌 하층에서 나타나다니.

사과를 유심히 바라보던 히르칸은 막심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는 히르칸을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이런 건 어디서 났어?”

“물 떠오는 길에 있었어요. 사과나무가…….”

“그런 거 없던데.”

“…….”

“…뭐라 하는 거 아니야. 그냥…….”

너 나한테 숨기는 거 있냐? 히르칸은 한 번 더 치미는 말을 삼켰다. 머리를 벅벅 털고 깨끗한 단검을 꺼내 사과를 쪼개주자 막심은 그것을 가만히 바라보다 조용히 하나 집어 먹었다. 절반 조금 넘는 부분을 막심의 몫으로 잘라놓은 히르칸은 남은 부분을 한 입 깨물어 먹었다. 다소곳하게 앉아서 사과 조각을 야금거리던 막심이 작게 목소리를 냈다.

“나비가 있었는데…….”

아마 그 나방을 이야기하는 모양이었다. 히르칸은 막심이 말을 마치기를 기다렸다.

“…그 나비가 어디까지 가나 궁금해서 쫓아가니까 사과나무가 나왔어요. 멀리 갈 생각은 아니었어요. 그리고 나비가 멀리 간 것도 아니었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고개를 슬쩍 돌려 보면 막심의 사역마는 모닥불의 열기가 닿지 않는 곳에 얌전히 날개를 모으고 앉아 있었다. 하기야 저 나비일 리가 없었다. 저 나비는 막심의 손에서 탄생한 마물이니까. 그렇다면 그 꽃밭에서 막심의 어깨에 앉아있던 그 나방이 막심을 인도해 줬단 말인가? 그렇다고는 해도 히르칸이 실제로 그 나방을 본 건 두어 번이 고작이었기 때문에 그 모습을 떠올려보려고 해도 잘 떠오르지 않았다. 설마 따라 온 건… 아닐 테고. 히르칸이 막심의 말을 곱씹는 동안 막심은 제 무릎에 두고 있던 스틸레토를 문득 검집에서 뽑아 들었다.

“스틸레토 좀… 닦을게요. 좀 전에 피가 묻어서.”

“내가 해줄게.”

“제가 할게요.”

히르칸은 내심 맥이 빠져 막심에게 헝겊을 건네주었다. 헝겊을 건네받은 막심은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히르칸이 늘 하던 대로 어설프게나마 단검의 날을 닦았다. 가르쳐준 적 없는데도 곧잘 따라하고 있는 걸 보니 기분이 이상해졌다. 원래는 그에게 스틸레토를 주고, 그걸 어떻게 관리하는지, 어떻게 쓰는지도 직접 가르쳐주고 싶었다. 그런데… 거기다 신경 쓰지 않으려고 했지만 막심은 오늘 아침부터 온종일 저것만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저러다 돌려주겠다고 할지도 모르지. 히르칸은 가만히 그 모습을 바라보다 불쑥 내뱉었다.

“마음 바뀌었어?”

계속 스틸레토만 만지작거리던 막심의 손이 멈췄다. 일렁이는 모닥불의 열기에 그의 눈에도 열기가 옮아 붙은 것 같았다. 그러나 그 눈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고… 한참 입을 다물고 있던 막심이 들릴 듯 말듯 웅얼거렸다.

“내 마음은 절대 안 변해요…….”

그럼 왜 이러는데……. 그런 말이 금방이라도 입술을 비집고 튀어나올 것 같아서 히르칸은 입을 꾹 다문 채 한숨을 삼켰다. 오늘 아침부터 하고 싶었던 말을 전부 했더라면 지금쯤 정말로 막심의 마음이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알았다.”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할지도 모르지. 하지만 대체 뭣 때문에? 내가 소리를 질러서? 아니면 혼자 마음이 상한 부분이라도 있는 건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히르칸답지 않은 일이었다. 마음을 추스를 시간이 필요한 건 히르칸도 마찬가지였다. 머리를 거칠게 턴 히르칸이 벌떡 일어났다.

“먹을 것 좀 구해올게.”

막심은 대답하지 않았다. 히르칸은 신경 쓰지 않으려 애쓰며 방에서 저벅저벅 걸어 나왔다.

장작이 타닥거리는 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로 무턱대고 걷다 보면 어쩐지 숨이 트이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해방감은 아니었다. 여전히 가슴 한편이 무거웠다. 자리를 피함으로써 찝찝한 기분을 해결하고 싶은 게 아니었다.

하지만 당장 기분이 안 풀리신다는데 어쩔 수 없지……. 우두커니 멈춰서서 마른 손으로 얼굴을 한 번 쓸어내린 히르칸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거의 최하층에 다다른 것 같았다. 이 층계는 꼭 사람이 모두 떠난 마을 같은 모양을 하고 있었고, 그만큼 척박하기도 했다. 먹을 걸 찾는 건 쉽지 않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 사과나무를 찾아서 끼니를 대신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런 고민을 이어가던 히르칸은 문득 멀지 않은 곳에서 낯익은 생김새의 나방이 날아다니는 것을 발견했다. 그러고 보니까 저렇게 생겼었지. 막심이 만들어준 사역마보다 좀 더 크고 색이 진했다. 정말로 막심을 따라온 건가? 아니면 이 층에서는 이 나방이 흔한 건가? 눈을 가늘게 뜨고 나방이 날갯짓하는 걸 지켜보면 그것은 마치 히르칸의 시선을 느끼기라도 한 것처럼 지그재그로 비행하며 히르칸과 차츰 가까워졌다.

“막심이 이놈을 따라가니까 사과가 나왔다던데.”

눈앞에 떠 있는 나방을 보며 히르칸은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혼잣말하는 버릇도 없는데. 막심의 사역마와 닮은 모습, 그리고 내내 말을 삼키며 참아왔던 탓에 머릿속으로만 하려던 생각이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히르칸의 목소리에 반응이라도 하는 건지, 아니면 그저 행선지를 바꾼 건지 히르칸이 말을 맺자마자 나방은 위아래로 파닥거리며 어딘가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나방을 따라가든 따라가지 않든 여기서 음식을 찾는 건 순전히 운이다. 히르칸은 나방의 뒤를 쫓아갔다. 나방은 히르칸이 걷는 속도보다 빠르게 날았지만 놀랍게도 그를 기다리는 것처럼 중간중간 멈춰 섰고, 히르칸이 어느 정도 나방을 따라잡으면 다시 날아가기 시작했다. 기분이 묘해졌다. 마치 나방이 정말로 쫓아오라고 자신에게 말을 걸어오는 것 같았다.

그리고.

“정말로… 있네.”

나방이 앉은 나무를 지나친 히르칸은 얼떨떨한 기분이 되어 중얼거렸다. 마치 누군가 그려놓은 듯한 밝은색 잔디밭 위에 몸집이 작은 사슴 한 마리가 풀을 뜯고 있었다. 보통의 사슴보다 몸집이 작은 것뿐이지 이 사슴을 잡으면 아마 서넛은 거뜬히 먹이고도 남을 것이다. 사슴은 인기척에 목을 들고 그를 바라보았으나 도망가지 않았다. 오히려 히르칸을 반기듯 가까이 다가와서 작은 뿔이 달린 머리를 들이밀었다. 그러나 막심과 히르칸이 배를 채우고 살아 나가기 위해선 죽여야 할 것이다. 히르칸은 조금 착잡한 기분이 되어 사슴을 내려다보았다.

저항은 심하지 않았다. 칼을 척추가 있는 곳에 단숨에 꽂아 넣자 버둥거리던 사슴은 머지않아 숨이 멎었다. 습관처럼 한숨을 내쉬며 히르칸은 허리를 숙였다. 사슴 손질은 본격적으로 모험가 생활을 하기 전에 몇 번 해본 적이 있었다. 먼저 사슴의 목 주변으로 둥글게 칼집을 넣어 머리와 몸의 가죽을 분리한 다음, 가슴께부터 배까지 일직선으로 칼집을 낸다. 내장을 빼내고 가죽을 벗겨내는 것이다. 그런데 칼날이 사슴의 갈비뼈를 지나 배에 다다를 때쯤 히르칸은 덜컥 손을 멈췄다. 무언가 이상했다. 마치 배가 아니라 등이나 목에 칼을 집어넣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히르칸은 손끝의 감각을 부정하며 아직 칼집이 나지 않은 사슴의 배 부분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나 바라본다고 해서 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다. 결국 히르칸은 사슴의 배를 단숨에 갈랐다. 그리고 잡아당긴 가죽이 벗겨지는 순간 눈을 질끈 감았다. 이 사슴은… 내장이 없었다. 내장이 있어야 할 부분이 살로 가득 차 있었다. 마치 걸어 다니는 고깃덩어리 같았다. 가죽을 벗겨보아도 사슴의 모든 부분이 전부 부드럽고 육질이 연한 살코기로 이루어져 있었다. 히르칸은 신경질적으로 단검을 집어 던지고 그 앞에 잠시 주저앉았다. 손질할 필요도 없겠지. 어딜 베어내도 분명 맛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건 이상하다. 비단 이 사슴만이 아니라 오늘은 은근한 요행이 계속되었다. 목이 마르면 물을 떠 올 만한 곳이 보이고, 입이 마르면 과일나무가 생겨나고, 배가 주리니 이제는 고기까지. 마치 누군가 히르칸과 막심을 배불리 먹이기 위해 식사를 차려놓고 기다리는 것 같았다. 달콤한 사탕 따위가 줄지어 떨어져 있는 것을 아무 의심 없는 아이처럼 쫓아가고만 있는 것 같았다. 히르칸은 나방이 앉아있던 쪽을 휙 노려보았다. 미동 없이 앉아 있던 나방은 어느샌가 날아가 버리고 없었다. 잘 차려진 함정에 발을 집어넣고 있는 건 아닌지 의심이 들었다. 하지만…….

히르칸의 귀에 누군가 속삭이는 것 같았다. 분명 좋아할 거야. 여태 계속 마물만 먹었으니까. 그 말이 맞았다. 막심은 아침부터 줄곧 상태가 좋지 않았다. 차라리 아침의 다툼 때문에 기분이 언짢다고 하면 이해라도 할 텐데, 꼭 그 이유만은 아닌 것 같아서 더욱 막막했다. 그래도 먹고 나면 기운이 좀 날지도 모른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나만 말 안 하면 되는 문제 아닌가. 피가 덕지덕지 묻은 손등으로 이마를 받치고 한참 고개를 숙이고 있던 히르칸은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어쨌든 굶기고 싶지는 않았다. 나도 제정신이 아니군. 자조적인 욕설을 입 안으로 중얼거리며 히르칸은 칼을 다시 집어들고 날을 깨끗하게 닦았다. 이윽고 사슴의 살코기 부분을 도려내기 시작했다.

 

깨끗한 천으로 감싸 핏물을 제거한 고기를 한입 크기로 썬다. 그리고 뜨겁게 달군 반합에 넣고 뒤적거리며 볶는다. 야채나 곁들일 만한 양념도 없이 그게 전부였다. 고기의 겉 부분이 황금빛으로 지글거리고 핏기가 가실 때쯤 불에서 내린다. 그리고 반합 뚜껑을 닫은 채로 잠깐 두었다가 열어 열기를 내보낸다. 오랜만에 맡는 고기 냄새였다. 그러나 군침도 돌지 않을 만큼 히르칸은 입맛이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정체불명의 고기를 막심에게 먼저 먹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생김새로 보나 향으로 보나 분명한 사슴 고기지만 미궁, 그것도 깊은 곳에 있는 동물이 진짜 사슴일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칼끝으로 고기 한 점을 찍어 올린 히르칸은 그것을 덥석 물었다. 처음으로 느껴지는 향은 버터가 섞인 것 같은 진한 고기 향이었다. 이어 씹을 때마다 따뜻한 육즙이 흘러나와 입안을 덥혔다. 먹을 만했다. 아니, 분명히 맛있다. 살결은 부드럽고 비린내는 덜하고 육즙은 짭짤했다. 그게 어쩐지 썩 달갑지 않다가도… 히르칸은 고개를 저었다. 내가 너무 예민하게 굴고 있나. 요즘 마물이니 벌레니 하는 것들만 주워 먹다 육고기 맛을 봐서 그런 기분이 드는 걸지도 모른다. 그렇게 허튼 생각을 의식 밖으로 밀어낸 히르칸은 다시 고기 한 점을 찍었다. 막심의 입가에 조심스럽게 가져다 대자 막심이 입을 살짝 벌렸다. 고기를 받아먹은 그가 입을 가리고 한참 우물거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맛있냐.”

“네…….”

그리고 막심이 살짝 웃었다. 히르칸은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다 손을 뻗어 입을 가린 막심의 손을 치웠다. 막심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지만 히르칸은 그의 당황한 눈을 모른 체했다. 그리고 별 게 묻지도 않은 막심의 입가를 괜히 살살 닦아주었다. 히르칸의 손짓에 담긴 마음을 아는 건지, 아니면 그저 온기가 좋았던 건지 막심은 이번에는 괜히 토라진 티를 내지 않았다. 그 대신 어린아이처럼 얌전히 그의 손길을 받으며 음식을 씹어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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