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한주인] 꽃점
아쿠네코 유한x주인♀️
고즈넉한 오후, 설렁설렁 먹은 점심이 소화될 때 즈음 아몬은 한 손에는 물뿌리개를 들고, 또 한 손에는 정원 손질용 가죽 장갑을 든 채로 정원에 물을 주러 나왔다. 천천히 정원을 거닐던 그는 웬일로 유한이 정원에 놓여진 벤치에 앉아 쉬는 모습을 목격했다. 도통 쉬는 법을 모르는 사람인지라 이 시간 이면 항상 전술 공부를 하거나 훈련을 하고 있을터인데. 오늘의 유한은 손에 꽃 한송이를 쥔채 멍하니 꽃잎을 하나씩 뚝뚝 떼어내고 있었다.
"유한 씨, 뭐하세요?"
"아... 죄송합니다. 이렇게나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다니..."
그건 괜찮은데. 고작 잠깐 쉬었다고 다른 집사들에게 사과해야 한다면 매일같이 농땡이를 부리는 보스키 씨는 진작에 머리를 바닥에 대고 싹싹 빌어야하리라. 아몬은 오늘도 뻔뻔하게 하우레스의 머핀을 몰래 훔쳐먹고 있던 그를 떠올리곤 피식 웃음을 흘렸다.
"아하하, 괜찮아요. 그나저나 꽃을 왜 그렇게 뜯고 있어요? 스트레스 해소용?"
하나마루씨가 많이 괴롭혀요? 아몬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유한에게 물었다. 자신도 항상 보스키를 매번 챙기고 있는 입장이라, 훈련이나 업무에 비협조적인 하나마루를 챙기는 유한의 입장이 어느 정도 이해가 되었으니까. 아몬의 말에 유한은 쓴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차라리 하나마루 씨에 대한 문제라면 쉬울텐데.
"아뇨, 이건 꽃점이라는겁니다. 꽃잎을 하나씩 떼어내면서 점을 치는거죠. 동쪽 대륙에 전해져오는 미신이랍니다."
"에~ 재밌어보이네요. 그래서 꽃이 뭐라 하던가요?"
아몬이 그리 묻자 유한은 말없이 꽃잎이 딱 한 장 남은 꽃을 바라보았다. 그 마지막 꽃잎 만큼은 차마 스스로 떼어낼 용기가 없다는 듯, 그는 앙상한 꽃을 놓아주었다. 언젠가 그의 기억에서 잊혀져 정원의 양분이 되고, 썩어서 보이지 않는 곳까지 깊숙히 가라앉도록.
"... 잘 모르겠습니다."
최근 유한에겐 머리가 지끈거릴 정도로 큰 고민이 있었다. 그것도 자신이 섬기는 주인에 관한 아주 중요한 문제가. 처음 주인이 자신을 담당 집사로 지정했을 땐 차마 말로 다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기쁠 뿐, 설마 이러한 문제를 떠안으리라곤 생각도 못했다.
충신에게 있어 가장 필요한 양분은 주인으로부터의 인정이었으니까. 주인에게 선택 받았다는 사실만으로도 활력이 넘쳐서, 유한은 충성스러운 사냥개처럼 단 하루도 쉬지 않고 주인의 곁을 지켰다.
그래서 머리가 조금 이상해진걸까. 처음으로 이질감을 느낀 건, 얼마 전 주인이 테디와 담소를 나누는 장면을 목격했을 때였다. 테디의 밝은 화법에 사람들을 활짝 웃게 만드는 힘이 있다는 건 진작에 알고 있었다. 자신 또한 같은 건물에 살며 그 덕분에 활력을 찾은 순간이 여럿 있엇으니까. 하지만 드물게 활짝 웃은 채 그와 이야기하는 주인을 보고 있자니, 기분이 참으로 오묘했다. 자신과 있을 땐 왜 저렇게 웃지 않을까, 라는 아주 원초적이고 불쾌한 욕망.
거기까지 생각이 들었을 때엔, 요즘 주인님께 인정을 받았다고 너무 들떴구나 싶어 스스로를 성찰하는데에 그쳤다.
그렇지만 낮잠을 주무시는 주인님께 이불을 덮어드리며 무심코 그녀에게 입을 맞추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유한이는 자신의 충의에 불순한 마음이 섞여있음을 깨달았다. 후부키를 주군으로 섬길 때는 잠든 그를 보며 사랑스럽다 여긴 적 없지 않는가. 오히려 후부키와 사랑스러움, 두 단어를 같이 떠올린 것 만으로도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제 곁에서 순수한 호의로 병간호를 해준 다정한 주인에게 몸도 마음도 바쳐 반드시 지켜드리라고 맹세했건만, 지금보니 그녀의 곁에서 가장 위험한 사람은 그 누구도 아닌 바로 본인이었다. 주군을 사랑하는 신하라니, 거리의 광대들이 추문거리로 삼을 이야기가 아닌가. 돌아가는 상황이 우스워 유한은 스스로를 향해 냉소를 지었다. 그 동안은 계속해서 주인에 대한 미련 때문에 스스로의 마음을 외면했건만, 해야할 일 조차 잊은채 정원 한구석에 앉아 꽃점같은 미신에 기대고 있는 자신의 꼴을 더이상 보고 있을 순 없었다.
욕망을 다스릴 수 없다면 아예 끊어내는게 맞겠지. 그게 유한이 살아온 방식이었다. 오늘에야말로 주인에게 담당 집사 자리를 내려두겠다고 청을 올리리라. 그는 굳게 다짐하며 주인이 저택으로 돌아오길 기다렸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주인의 방에서 전술서를 읽고 있던 유한은 방 안이 환한 황금빛으로 차는 광경을 목격했다. 그 빛속에서 모습을 드러내며 집사들의 세계에 강림한 주인은 어지러움에 잠깐 휘청이다가, 이내 유한을 발견하곤 자기 걱정일랑 말라는 듯 해사하게 웃어보이며 인사했다. 그렇게나 마음을 정리하겠다고 마음 먹었건만, 그녀의 미소를 보니 또다시 주체할 수 없이 가슴이 콩닥인다.
'나는 참으로 구제불능인 놈이구나.'
이대로 사랑스러운 주인과 계속 눈을 마주치고 있다간 자신이 한 결심이 또 미련에 금새 녹슬어버릴까, 유한은 서론을 제쳐두고 바로 본론을 꺼내들었다.
"주인님. 돌아오시자 마자 이런 청을 드려 죄송하지만, 제 담당 집사 자리를 다른 분께 넘겨주실 수 있을까요."
유한의 말에 주인이 깜짝 놀란 듯 휘둥그레 눈을 떴다.
"왜? 혹시 내가 유한을 불편하게 만들었어?"
주인의 말에 유한은 뒤로 펄쩍 뛸 뻔했다. 어째서 그의 주인은 아랫것들을 탓하지 않고 항상 자신의 허물을 먼저 돌아본단 말인가. 물론 그 모습에 반해 충성을 맹세하기로 다짐했건만. 혹시라도 주인이 오해를 할까 싶어, 그는 황급히 손을 내저으며 주인에게 설명했다.
"그럴리가 없지 않습니까. 주인님은 제가 섬긴 그 어느 주인보다 훌륭하고... 다정하신 분입니다."
마지막 말은 덧붙이지 말걸 그랬나. 유한은 긴장감에 침을 꼴깍 삼켰다. 자신의 마음을 자각하고 나니 저도 모르는 새 말에서 애정이 묻어나갈까 염려되었다. 사랑에 빠진 부하 병사들이 여인 앞에서 삐걱이는 모습을 볼 때마다 참으로 우습다 생각했건만, 지금의 자신이 딱 그 짝 아닌가. 오히려 그들보다 심하면 심했지, 덜하지는 않으리라.
"그럼 어째서?"
주인의 질문이 유한의 정곡을 찌른다. 가끔 주인은 그 누구보다 핵심을 잘 짚어내곤 해서, 그녀가 정말로 순수한지 아니면 모르는 척을 하는 것인지 의뭉스러울 때가 많았다. 상대방의 의중을 모를 땐 직접적인 언급을 피하고 에둘러 말하는게 나았다.
"제가 나약하기 때문입니다.
나약하다, 라. 주인은 그 단어를 곱씹었다.
"혹시 무슨 일 있어?"
"... 죄송합니다."
주인이 걱정스레 물었지만 유한에게서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아마 주인은 이해할 수 없겠지. 왜 자신이 이런 말을 하는지. 물론 자신도 주인에게 괜한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지만, 감히 자신의 입으로 그녀에게 거짓을 고하거나, 그녀를 연모한다는 말을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유한 주인에게 대답 대신 깊이 고개를 숙이고 사죄함으로서 입을 열지 않겠다는 단호한 의지를 내비쳤다.
"말할 수 없는 고민이야?"
"그렇습니다."
"내가 묻는 질문에 간략하게 예, 아니오로도 대답 해줄 수 없어?"
주인 또한 그의 굳은 의지를 느꼈는지 타협안을 내놓았다. 입을 계속 다물고 있는 것도 무례해보일까 싶어, 유한은 그녀의 말에 예, 대답했다. 그의 대답을 들은 주인은 가느다랗게 눈을 떴다. 마치 함정에 걸린 사냥감을 바라보듯, 한순간에 그녀의 눈동자에서 이채가 깃들었던건 기분탓일까.
"유한은 좋아하는 사람이 있구나."
그러나 이어진 그녀의 첫 질문에, 유한은 자신이 본 것이 헛것이 아니었단 사실을 깨달았다. 있구나, 라고 끝난 어미는 마치 유한이 사랑에 퐁당 빠졌단 사실을 이미 확신하는 투였다. 마치 그의 마음을 꿰뚫어보기라도 하듯. 유한은 자신이 스스로 함정에 걸어들어갔단 사실에 절망하면서도, 스스로 예 아니오로 대답하겠노라 한 말을 취소할 수 없기에 속으로 한탄을 흘렸다.
"... 예."
"품을 수 없는 사람이려나."
마치 그 상대가 누구인지 알기라도 하듯, 주인의 질문은 숙련된 화백의 붓질처럼 거침이 없었다. 답을 알면서 자신을 놀리고자 하는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 그렇습니다."
"이해해... 나도 사랑하면 안되는 사람을 사랑하고 있으니까."
주인이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단 말에, 유한은 한 순간 심장이 짓이겨들어가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마치 몸 속에 연결된 실이 한꺼번에 끊어지듯, 한순간이나마 무릎으로 무너질 뻔했던 그는 가까스로 신음을 삼키며 서 있는 자세를 유지했다. 그리고 이어서 파도처럼 몰려오는 수치스러움에, 그는 주먹을 꽉 쥐었다. 이미 다른 이를 품고 있는 주인에게 방금 전까지 자신의 속내를 모두 털어놓은 스스로가 너무나도 부끄럽고 수치스러워서, 유한은 어디론가 도망가고 싶은 마음을 애써 억눌러야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주인이 되지 않을 인연에 미련을 품고 있는 자신을 정신차리게 해준건가 싶어 조금 후련한 기분도 들었다. 스스로 떼어내지 못한다면 불로 지져내서라도 말끔히 떼어내는게 낫지 않은가. 유한은 그 사실을 작게나마 위로삼으며, 주인에게 집사로서의 심심한 위로를 건넸다.
"그것 참 힘드시겠습니다."
"맞아, 게다가 그 사람이 날 자꾸만 피하려고 해서 곤란해."
심지어 주인님의 외사랑이라니. 누군지는 몰라도 죽어다오. 아니, 죽어라. 할 수만 있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주인을 곤란하게 만드는 그놈을 광장에 매달고 싶었다. 대체 어느 주제도 모르는 놈이 감히 그의 사랑스러운 주인에게 외사랑의 고통을 안겨다 준단 말인가. 유한이 속으로 욕짓거리를 짓이겼다.
"내가 할 수 있는거라곤, 주인이라는 나의 위치를 빌어 곁에 있어달라고 명령하는 것 뿐이야."
주인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유한의 고개가 살짝 기울어졌다. 방금 그건 무슨 뜻으로 받아들여야하는거지? 명령이라면, 설마 그 사내가 집사들 중에 있는건가? 고장이라도 난듯, 얼어붙은 유한에게 주인은 사뿐하게 한걸음씩 다가왔다. 창 밖에 지고 있는 노을에 비쳐 그녀의 뺨이 일순간 발그레해보였던걸까. 그게 아니라면...
"그러니까 조금만 더, 내 담당집사가 있어주면 안될까? 유한아."
주인은 그리 말하며 유한이에게 손을 뻗었다. 되려 용기를 내어 그에게 구원의 손길을 뻗고 있는 그녀 앞에서, 유한은 그만 꿀먹은 벙어리가 되고 말았다. 주인을 올바른 길로 이끄고자 했던 충신은 어디갔는가. 유한은 내밀어진 그녀의 손을 쳐내지 못하고 홀린 듯이 그 위로 입을 맞추었다. 설령 주군과 신하라는 관계의 선의 모호해지는 한이 있더라도, 수 백번 다시 물어도 유한은 오늘 주인이 내민 달콤한 유혹을 이겨내지 못하리라. 유한은 자조섞인 웃음을 흘리며, 자신의 뺨을 감싸오는 주인의 손길에 몸을 맡겼다.
* 밑의 결제선은 채널에 문제가 생기거나 사라지더라도 작품을 영구 소장하고 싶은 분들을 위해 만들어진 결제란입니다. 아래엔 아무것도 없습니다. 소장본의 금액은 글자수에 맞춰 책정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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