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토주인] 종막
아쿠네코 라토x주인♀️
*해당 포스트는 아쿠네코 메인 스토리 2부(한섭 미출시)에 관한 스포일러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해당 포스트는 죽음과 관련된 소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열람시 주의해주세요.
"오늘부로 인류는 천사의 위협으로부터 자유로워졌음을 선포합니다."
민중의 환호 소리가 에스푸아르의 거리를 메운다. 수천 년간 이어진 전쟁의 종식 소식에 사람들은 저마다 기뻐하며, 눈물을 흘리며, 악마 집사들을 향한 찬사를 내뱉으며 기쁨을 만끽한다. 그 군중 틈에서도 미동조차 하지 않고 귀족들의 선언을 무미건조하게 바라보던 남성은, 검은 후드를 푹 뒤집어 눌러쓰며 그 어떤 감정조차 얼굴에 내비치지 않고 조용히 뒤 돌아서 물결처럼 밀려드는 군중 사이를 유유히 빠져나갔다.
"오늘은 기쁜 날이니, 꽃을 추가로 얹어드릴게요."
새하얀 국화꽃 사이사이에 들어선 장미꽃은 잘 익어 탐스럽기 그지없었다. 그 녀석이 떠올라서 장미꽃은 별로 사고 싶지 않았는데. 매일 같이 한 손에 갓 키운 장미를 들고 다니던 한 청년의 얼굴이 떠올라, 남자는 쓰게 웃었다. 평소라면 거절할 법도 하건만, 상인의 말대로 특별한 날이니 받기로 할까. 남성이 후드 안쪽에서 은화를 꺼내 들어 계산대에 올려두자, 상인은 흉터투성이인 남자의 손 위에 거스름돈을 올려주었다. 후드 안쪽에 거스름돈을 푹 찔러넣던 찰나, 눌러썼던 후드가 들썩이며 그의 철쭉 색 머리칼이 조금 삐져나왔다. 실낱같은 단서로 꽃을 팔던 남성은 그의 정체를 알아보았는지, 토끼처럼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니, 형씨는…."
쉿. 청년이 남성의 입가에 손가락을 올렸다. 마치 자신의 정체를 아무에게도 알리고 싶지 않다는 듯. 비밀, 지켜주실 거죠. 그의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미성에 홀리기라도 한 듯, 남성은 자신도 모르게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으며 고개를 끄덕여버렸다.
"그, 저기, 제가 큰 건 못 드려도 뭐라도 더 얹어주고 싶은데..."
상인이 두툼한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그에게 조심스레 말하자, 남자는 고개를 저었다.
"괜찮습니다. 여기서 꽃을 더 들기엔 손도 부족하고요."
후드를 뒤집어쓴 청년은 고개를 숙여 짤막한 인사를 남기곤, 그 큰 후드를 휘날리며 조용히 군중들 틈으로 사라졌다. 상인은 마치 그곳에 존재한 적도 없었던 것처럼, 구름 밑으로 자취를 감춘 그림자처럼 순식간에 남성이 사라진 자리를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남성은 흥얼흥얼, 경쾌한 곡조를 부르며 무덤가를 걸었다. 수십 개의 볼록한 흙무덤을 지나칠 때마다, 그는 꽃다발에서 하얀 국화꽃 뽑아 들어 하나씩 무덤 옆에 떨어뜨렸다. 그러다 한 무덤 앞에선 잠시 머뭇거리곤 국화꽃이 아닌 붉은 장미를 꺼내 들었다.
"네겐 그게 어울리겠지."
솔직히 말해서, 맞는 자리인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무덤의 비석은 이미 풍화되어 누가 잠들었는지 읽을 수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놈을 닮아 채찍처럼 길게 굽이치는 가시덤불이 무덤을 덮고 있는 걸 보니, 아마도 맞겠지. 남성은 그리 생각하며, 계속해서 전진하며 흰 꽃을 뿌렸다.
그 많은 국화꽃이 다 떨어져 꽃다발이 앙상해졌을 즈음, 남성은 깎아내리듯 가파른 절벽 앞에 있는 무덤 앞으로 나아갔다. 무덤에서 길게 뻗어 나온 십자가 비석은 절벽 아래로 펼쳐진 마을 에스푸아르를 향해 손을 뻗어 비호하는 것처럼 보였다. 청년은 그 비석 앞에 다가가, 손에 얼마 남지 않은 국화와 덤으로 받은 장미꽃들을 모두 내려놓았다. 옷매무새를 한번 다듬은 그는 가슴에 손을 올리고 꾸벅, 앞에 있는 흙무더기에 깊은 조예를 표했다.
"... 오랜만입니다, 주인님."
그리 말한 남성은 상체를 들고 후드를 벗었다. 흐드러진 진분홍의 긴 머리칼이 부채처럼 펼쳐지며, 절벽 위의 거센 바람에 나부낀다. 상인을 대할 때와 달리, 서리처럼 시리도록 파랗던 그의 벽 안은 흙무덤의 주인을 향한 경의와 애정을 듬뿍 담아 한껏 부드러워져 있었다.
"그동안 잘 지내셨나요. 저는 잘 지냈습니다."
그는 주인의 무덤 앞을 나긋이 거닐며 운을 떼었다. 오늘은 좋은 소식이 있어서 주인님을 찾아왔다고.
"마침내, 그 지긋지긋한 천사 놈들이 세상에서 단 한 마리도 남기지 않고 사라졌단 소식이랍니다. 설마 살아서 이런 순간을 맞이하리라곤 생각도 못 했는데. 그 누구도 아닌 제가 말입니다."
과거의 혈기 왕성한 자신을 떠올리니 어쩐지 조금 우스워서, 남자는 푸흐흐 웃음을 흘렸다. 주인이 만난 집사 중에 제일 빨리 요절한 게 자신이 아니란 사실이 아직도 신기할 따름이었다. 특히 그는 삶의 전부였던 주인보다 오래 살 생각 따윈 없다고, 입버릇처럼 주인에게 속삭이곤 했으니까.
"그게 제가 당신을 사랑하는 방식이었으니까요."
가진 게 없던 남자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줄 수 있는 것은 목숨과도 맞바꿀 수 있는, 당신과 영원히 함께하겠노라는 맹세뿐이었다. 주인이 없는 삶에서 뭣 하러 더 살아야 하나. 그녀는 지긋지긋한 삶 속에서 영위되어오던 그의 흑백뿐이던 세계에서 처음으로 세상이 이토록 아름답고 빛난단 사실을 처음 깨닫게 해준 이였다. 그녀가 그의 세상에 처음으로 빛을 준 태양이라면, 그리고 그는 마치 그녀를 낮이고 밤이고 좇는 해바라기였다.
그녀가 그런 그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사랑한다는 말도, 보고 싶을 거란 말도 아니었다. 그날의 기억은 어제 일처럼 아직도 생생했다. 당장이라도 죽을 것처럼 숨을 헐떡이며, 그녀의 파들거리는 창백한 입술 끝에서 흘러나온 말.
꼭 이겨.
주인은 그 세글자를 마지막으로 숨을 달리했다. 아마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하고 싶은 말을 모두 담아내어 뱉어낸 것이겠지. 그 뒤로 그 세글자에 매달려 얼마나 복수 귀처럼 살았던가. 이성을 잃고, 천사들을 벨 때마다 솟구치는 아드레날린에 몸을 맡기며 그는 몸을 사리지 않고 전장에 뛰어들었다. 어쩌면 자신은 주인의 유언을 핑계로 간절히 그녀에게 닿길 바라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마 목숨이 아까운 인간이었더라면 그런 미친 짓 따윈 하지 않았을 테니까.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아직도 그가 사지 멀쩡히 걸어 다닐 수 있단 사실이 신기할 지경이었다.
"... 저는 오늘 당신에게 한 약속을 지키러 왔습니다."
남자는 그리 말하면서 허리춤 안쪽에 숨겨져 있던 단도를 꺼내 들었다. 오랜 시간 그와 함께 적을 함께 넘겨 베어온 무기는, 마치 그의 피가 쏟아지길 기다리는 짐승처럼 예리한 이빨을 주인의 목에 대었다. 누군가 보았더라면 말릴 만도 했건만, 무덤가엔 남자와 잠시 머물다 금세 스쳐 지나가 버리는 바람 말곤 아무도 없었다. 이대로 검을 꾹, 살갗 아래로 밀어 넣으면 그의 길고 길었던 목숨도 순식간에 스러지리라.
"죽음의 문턱까지 당신을 따라가겠다는 제 말은 아직 유효하답니다, 주인님."
저의 일방적인 선언이라, 약속이라 하긴 뭐하겠지만. 그렇지만 제가 당신에게 거짓을 고할 이유 따윈 없으니까요.
당신이 없는 삶은 참 재미없습니다. 무엇을 해도 당신이 제 곁에 있던 때와 같은 기분이 들지 않았습니다. 당신이 괜히 세상에는 빛과 색이 있단 사실을 제게 알려주어서 당신을 잃고 더욱 차디찬 흑백으로 돌아간 저의 삶은 참으로 지루하기 짝이 없었단 사실을, 당신은 알까요. 아마 꼭 이기라는 당신의 마지막 유언이 없었더라면, 저는 진작에 제 비참한 인생에 마침표를 찍었겠지요. 제겐 처음부터 세상을 구하고자 하는 대의 따윈 없었으니. 당신과 함께한 가장 찬란한 추억들만을 품에 안고, 어린 시절에 생긴 모든 상처도 미련도 훌훌 털어 내버리고, 오롯이 당신에게 안기는 꿈을 꾸면서.
그러나 조금만 더, 아주 조금만 더 주인의 마지막 말을 지켜주고자 했던 순수한 욕망으로 인해 그는 결국 천사들이 종적을 감출때까지 악착같이 살아남고 말았다. 그는 강했으니까. 강육약식의 세계에서 타고난 포식자였던 그에겐 마음먹고자 하면 살아남을 능력이 있었다.
인생이란 건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주인에게서 그 어느 집사들보다 어린 아이 취급을 받던 그는 어느새 그는 집사 중에서도 베리언 다음으로 최고참이 되어있었다. 언젠가부터 자신에게 기대어 오고 의지하는 후배들을 지도하는 이는 그의 몫이 되었다. 마치 예전에 자신도 누군가에게 그리 가르침을 받았던 것처럼.
기묘한 일이었다. 주인을 기억하는 이들조차 거의 남아있지 않은 저택에 미련 따위를 가질 수 있으리라 생각지 못했건만. 아마 주인은 여기까지 내려다본 것이겠지. 유언마저도 참 그녀답다고 해야 하나. 아마 그때 자기 삶에 마침표를 찍었더라면 이러한 감정 따윈 알지 못했을 텐데. 그녀는 살아생전에도 그러했듯, 죽고 나서도 끝내 그에게 무엇인가 하나 더 알려주고 싶었던 것이리라.
지금의 자신이라면 그녀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의 작은 깨달음 하나하나에 그녀의 애정이 스며들어있는데, 어떻게 자신 없이 계속 살아가달라고 말할 수 있는지. 참으로 잔인한 사람 아닌가. 그는 비참히 웃으며 목가에 대고 있던 단도를 손 틈새로 빠뜨렸다. 목표를 잃은 칼날이 그의 발치에 힘없이 툭 고개를 떨궜다. 그는 허리에 주렁주렁 달려있던 단도를 하나 둘 꺼내어, 처음에 내려두었던 장미꽃 옆에 가지런히 모아 내려놓았다. 주인을 다시 만날 그날까지, 당분간 그에게 흉기는 필요 없을 테니까.
죽음까지 따라가겠노라던 그의 맹세는 여전히 유효했지만, 그 전에 끝내야 할 일이 많이 남아있었다. 아마 그녀는 남자가 하고 싶은 모든 것을 끝내고 오길 바라겠지.
"... 그러니 기다려주세요. 모든 일을 끝내면 꼭 돌아올 테니까."
저는 아직도 이토록 당신을 사랑하고 있으니까. 남자는 먼지 가득한 묘비를 소매로 닦아내곤 그 위로 숭고하게 입을 맞췄다. 한 번으로 부족해서, 두 번, 세 번. 차가운 묘비를 향한 애달픈 애정 표현 끝에 주인에게 작별 인사를 마친 라토는 벗었던 후드를 다시 머리 위로 꾹 눌러 덮었다. 주인님을 만나고 온 날까지 자신을 알아본 사람들에게 영웅이니 뭐니 하며 떠받들려지는 건 사양이었으니까.
* 밑의 결제선은 채널에 문제가 생기거나 사라지더라도 작품을 영구 소장하고 싶은 분들을 위해 만들어진 결제란입니다. 아래엔 아무것도 없습니다. 소장본의 금액은 글자수에 맞춰 책정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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