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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크주인] 아주 사소한 다툼

아쿠네코 나크x주인♀️

Scarlet by 스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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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크, 바빠?"

나크는 싱글싱글 웃으며 자신의 집무실에 들어선 주인을 떨떠름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역시 기분 탓이 아니다. 주인님은 오늘 자신을 흐뜨려트리려 작정한 모양이다. 아직 훤한 대낮인데도, 그녀가 자신의 집무실에 들어온 게 벌써 네 번째 아닌가.

덕분에 나크는 저택의 자금을 계산하는 와중에 실수를 다섯 번이나 저지르고 말았다. 이런 건 자신답지 않다. 나크는 베테랑 집사답게 환한 미소를 지으며, 주인님을 향해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다정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주인에게 대답했다.

"나가주십시오."

그러지 말았어야 했나. 아니,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오늘로 벌써 세 번째, 나크는 책상에 엎드려 이마를 꾹 눌렀다. 그날 이후 주인님이 도통 말을 걸지 않으신다. 다 같이 식사하는 자리에서도, 나크가 주인님께 눈웃음을 지으면 환하게 마주 웃어주시던 평소와 다르게 샐죽, 입을 내밀곤 고개를 홱 돌려버리는 게 아닌가.

분명 그날의 일 때문이다.

'설명할 기회는 주셨으면 좋겠는데...'

나크라고 주인님과 보내는 시간을 싫어하는 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그 반대였다. 만약 주인님이 자신을 마냥 글씨나 읽고 계산기나 두들기길 좋아하는 따분한 일 중독자라 생각한다면 그건 크나큰 오산이었다. 그때는 그저 밀린 서류의 마감일이 가까웠을 뿐.

물론 평소의 나크라면 일이 밀리지 않도록 스스로 조심했을 테지만, 최근 잦아진 천사 사냥으로 진작 마쳤어야 할 서류 작업이 하나둘 밀린 게 화근이었다. 결국 서류가 잉크 얼룩 하나 없이 깨끗한 백지로 제출될 일촉일발의 이르러서야, 나크는 간신히 작업을 시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번엔 주인님이 자신의 집중력을 흩트리는 게 아닌가. 처음엔 종종걸음으로 달려와 아침 인사를 건네길래, 나크도 웃으며 그녀를 맞이했다. 특별히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주인님은 저택으로 돌아오시면 제일 먼저 한 바퀴 돌며 집사들에게 인사를 건넸으니까. 안부 인사라기엔 조금 긴 대화를 나눈 그녀는 나크의 집무실을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슬슬 집중력에 물이 오르려던 하던 순간 베리언이 새로 산 찻잎을 같이 우려 마시자며 또다시 집무실에 들이닥쳤다. 주인님은 찻주전자가 빌 때까지 나크 옆에서 어제 자신이 무엇을 했는지에 대해 종알종알, 잔뜩 수다를 떨다 돌아갔다. 이때는 주인님의 이야기를 들어드리는 척을 하며 업무에 집중했지만, 다른 사람도 아닌 주인님이 곁에 있는데 글씨가 눈에 들어올 리가. 계산을 세 번이나 틀린 나크는 주인님이 돌아가시고 처음부터 다시 예산을 다시 계산하느라 혼을 쏙 뺐다.

주인님이 세 번째 방문했을 때, 나크는 이번엔 무슨 일이냐고 여쭈었다. 별일이 아니라면 조용히 그녀를 타일러 내보낼 생각이었으니까. 그녀에게서 돌아온 대답은 "그냥 심심해서." 그 말을 들었을 때, 나크의 인내심은 한계에 다다렀다. 물론 집사인 자신이 주인님을 향해 이런 마음을 품으면 안 되지만. 그래도 제발. 자신도 집사이기에 앞서 인간이 아닌가. 오전 내내 아무것도 하지 못한 나크는 일 중독자로서의 금단 증상이 도져 매우 초조한 상태였다.

"주인님, 이 나크 내일까지 제출해야 하는 서류가 많아서... 죄송하지만 혼자 있을 시간을 주지 않겠습니까."

"진짜? 다 끝내는 데 얼마나 걸릴 거 같아?"

"오늘 안에 다 끝낼 수 있을지도 확실치 않습니다. 죄송합니다, 주인님."

자신은 그때 분명 간단명료하고 확실하게 의사를 전했다고 생각했다. 주인님은 집무실에 기어코 네 번째 방문을 강행하기 전까진.

'... 그래도 역시 문전박대는 심했던 걸까.'

그래도 집사라면 주인님이 뭐라 말씀하시는지 들어봐야 하지 않았는가. 자신은 역시 글러 먹은 인간이다. 그는 후회를 손끝에 담아 자신의 덥수룩한 곱슬머리를 쓸어올렸다.

오늘의 작업은 이미 물 건너갔다. 새초롬한 얼굴로 자신을 피하는 주인님의 모습이 아른거리는데, 대체 무슨 일을 어떻게 한단 말인가.

선물이라도 드리면 기분이 좀 나아지실까? 나크는 당이 떨어질 때를 대비해 만들어두었던 수제 오랑제트가 얼마나 남았는지 확인하기 위해 딱딱한 집무실 의자에서 일어섰다.




똑똑. 노크하자 "들어와," 하고 주인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크가 주인의 방문을 열고 들어서자, 방문객이 누구인지 확인한 주인은 생긋 웃으며 말했다.

"나가줄래?"

멈칫. 나크의 구두가 문턱을 넘기 전에 허공에서 멈췄다. 그리고 그대로 다시 구두가 밟았던 자리를 그대로 다시 밟으며 뒤로 나가려던 찰나.

"아, 들고 있는 선물 상자는 놓고 가도 좋아."

주인의 말에, 나크는 조심스럽게 방 문턱을 넘었다. 입구 바로 옆에 있는 탁자에, 그는 자신이 곱게 포장한 선물 상자를 내려두었다.

"바쁘신 분께서 어쩐 일일까?"

"제가 주인님께 저지른 무례에 대해 사과하고 싶어 찾아왔습니다."

나크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교섭할 때 간드러진 말솜씨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간결하고 명확한 의사 전달이었으니까. 나크는 우아하게, 가슴에 손을 올리고 허리를 숙였다. 곱게 자란 도련님의 혈통을 증명하듯 흠잡을 곳 하나 없이 완벽한 동작이었다. 그러나 다른 세계에서 온 주인은 나크가 얼마나 훌륭한 예법교육을 받고 자랐는지 알 턱이 없었다. 그녀는 귀찮은 인사는 됐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무슨 얘기인지 전혀 모르겠네... 무례는 내가 저질렀지. 바쁜 회계 담당 집사님께 눈치 없게. 감히. 점심을 같이 먹자고 하다니."

그냥 좋아하는 종이쪼가리나 잔뜩 보게 내버려 둘걸. 굶든 말든. 주인의 말이 비수처럼 푹푹 꽂힌다.

역시 그날의 일이 사단이었구나. 주인의 네 번째 방문이 실은 그저 바쁜 그에게 점심시간을 알려주기 위함이었단 사실에, 나크는 목뒤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가시방석이란 건 이런 상황을 두고 하는 말이구나. 귀족 놈들이 재수 없게 말할 땐 속으로 욕지거리라도 잔뜩 뱉었지. 진심으로 섬기는 사람에게서 가시 돋친 말을 듣는 건 쉽지 않았다.

".... 어떤 말로 사죄해도 용서받지 못하리란걸 압니다. 미련한 제게 다시 한번 기회를 주시지 않으시렵니까? 이 나크, 다시는 주인님이 실망하게 해드리지 않겠습니다."

나크가 고개를 들지 않은 채마저 사과를 이어간다. 이제 곤혹스러운 쪽은 주인이었다. 그냥 좀 골려주고 싶었을 뿐인데 여기 집사들은 왜 대충하질 않을까. 다들 보스키처럼 적당히 살면 좋을 텐데. 저렇게까지 장황하게 사과하는 나크를 보니 어쩐지 자신이 고용인을 괴롭히는 못된 주인이 된 기분이 들어 양심이 콕콕 찔렸다.

주인도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는 알고 있다. 그날 나크의 책상에는 서류가 평소보다 더 두툼히 쌓여있었으니까. 실제로 루카스에게 쌓인 일이 많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기도 했고.

'.... 하지만 나도 간만에 쉬는 날이었단 말이야.'

자신이 살던 세계와 집사들의 세계에 오가며 바쁜 나날을 보내던 주인에게, 그날은 간만에 주어진 휴일이었다. 그래서 오랜만에 나크와 시간을 같이 보내고 싶었는데, 오전 내내 심각한 얼굴로 책상에 앉아서 자신에게 방문 한 번 하지 않으니 조바심이 났다. 그래서 그날따라 더욱 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자꾸만 나크의 집무실을 찾고 말았다.

사과는 그가 아닌 오롯이 그녀의 몫이었다. 그런데도 자신에게 고개를 숙이고 있는 나크를 보고 있자니 답답하면서도 미안한 마음에 얼마 남아있지도 않은 앙금은 그새 풀리고 말았다.

"... 오랑제트지? 잘 먹을게."

"어, 어떻게 보지도 않고 내용물을 아셨죠?"

당연하다. 그녀만큼 나크를 주의 깊게 관찰하는 사람이 이 저택에 또 있을까? 기껏해야 집사들을 통솔하는 베리언이나 하우레스 정도겠지.

그렇지만 그들이 과연 네가 책 페이지를 넘기기 전에 무심코 페이지 끝을 엄지와 검지로 살짝 비비는 습관이 있단 사실을 알까. 집중하고 있을 때 콧잔등을 찡그리는 습관은? 펜을 잡고 쓰기 전, 왼쪽으로 펜을 빙그르르 한 바퀴 돌린다는 걸 알고 있을까.

그럴 리가. 그건 오롯이 주인만의 소중한 보물이다. 마치 눈 여겨둔 짐승을 사냥감을 둔 포식자처럼, 나크를 집요하게 관찰한 끝에 얻어낸 그녀의 전리물이었다.

"척 보면 척이지. 하나 먹게 상자를 이리 가져와 줘."

나크가 재빨리 주인에게 오랑제트가 담긴 상자를 가져왔다. 그가 직접 만든 간식은 머리카락보다 얇고 고급스러워 보이는 종이 포장지 안에 고이 싸여있었다. 평소에 그렇게 예산이 없다고 집사들에게 잔소리를 하더니. 주인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여기 있습니다."

나크가 상자를 내밀자, 주인은 손을 뻗는 대신 나크를 향해 조막만 한 입을 벌렸다. 나크는 그런 주인의 반응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뭐해? 빨리 안 넣어주고. 턱 빠지겠어."

"하지만..."

방금 전까지 멀끔한 예의 바른 청년은 어디 갔는지, 그의 눈동자가 어디 두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속절없이 떨린다. 아마 또 "제가 어찌 감히 주인님께," 같은 말을 하려는 거겠지. 슬슬 그 레퍼토리에도 변화를 줄 때도 되지 않았나.

"... 나크는 이번에도 내 말을 들어줄 생각이 없구나."

그 얘기를 지금 꺼내는 건 반칙이지요. 나크가 곤란한 듯 이마를 쓸어올렸다. 그러나 이 이상 주인의 성미를 건드릴 수도 없기에, 꼴깍 마른 침을 삼킨 나크는 주인이 바라는 대로 면장갑을 낀 손으로 그녀의 조그마한 입에 오랑제트 한 조각을 가져갔다. 자신이 설탕물에 직접 재우며 정성스럽게 만든 오랑제트를 그녀의 앵두 같은 입술이 앙 베어 문다. 쫀득한 오렌지를 꼭꼭 씹으며 오물거리는 그녀의 탐스러운 입술에서 묘하게 시선을 뗄 수 없어, 나크는 한참이나 그녀를 바라보았다. 마지막으로 입 주변에 묻은 초콜릿까지 탐스럽게 혀로 훑는 모습까지 홀린 듯이 바라보다가, 그녀가 남은 반을 먹기 위해 다시금 입을 손에 가까이 가져오고 나서야, 그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대체 자신은 주인을 상대로 무슨 생각을. 도둑이 제 발 저려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고 시선을 피해버리자, 주인은 흥미롭다는 듯 그의 반응을 살폈다.

조금 장난을 쳐볼까.

그녀 나크의 손에 여전히 들려있는 조금 남은 오랑제뜨를 먹으며, 주인은 자연스럽게 그의 손가락 첫마디까지 앙, 물었다. 찌르르, 나크는 손가락에서부터 전해진 전류가 팔에서 심장까지 관통하는 것을 느꼈다.

"주인님..."

나크가 신음을 뱉듯 가까스로 끌어낸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음에도, 그녀는 아무것도 듣지 못한 사람 마냥 장갑 너머에 있을 그의 손가락을 잘근잘근 씹었다. 얼어붙은 그의 손에서 흰 면장갑을 앙 물은 채로 당겨내자, 흉터투성이인 그의 손 위로 자신이 만든 잇자국이 보였다. 손가락 마디 위로 반지처럼 선명히 남은 자국에, 주인은 만족스럽다는 듯 웃더니 입에 물고 있던 장갑을 뱉고 그 위로 쪽 입을 맞추었다.

"잘 먹었어, 나크."

그녀의 감사 인사에, 발그레해진 얼굴로 오도카니 서 있던 나크는 들릴 듯 말 듯한 실례한다는 말만 남기고 도망치듯 자리를 떠났다. 항상 계산적이기만 하던 그의 뇌에 부하가 온 걸까. 아니면 귀까지 잔뜩 달아오른 자기 모습을 보여주기 싫었던 걸까. 어찌나 부리나케 도망가던지, 그가 차마 줍지 못한 면장갑은 여전히 그녀의 발치에 떨어져 있었다. 주인은 장갑을 주워 향을 맡았다. 아아, 잉크 냄새. 참으로 그다운 향이었다.

"'또 건방지게 굴기만 해봐.'

그때는 더욱 확실히 마음을 전해버릴 것이다. 다신 제게서 도망치지 못하도록.


* 밑의 결제선은 채널에 문제가 생기거나 사라지더라도 작품을 영구 소장하고 싶은 분들을 위해 만들어진 결제란입니다. 아래엔 아무것도 없습니다. 소장본의 금액은 글자수에 맞춰 책정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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