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퇴마권사제] 마태오복음 6장 13절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죄송합니다. 형제님."

"아뇨. 어쩔 수 없죠."

대만의 애마가 움직이지 않게 되었다. 평소처럼 파업을 하거나 상태가 안 좋은 게 아니었다. 권사제가 약식으로 축성하고 정대만이 악마를 들이받으면서 장렬하게 범퍼가 구겨지고 타이어가 터졌다. 솔직히 이게 정말 될 줄 몰랐습니다만. 대만을 낄낄 웃으며 말했다. 신실한 이만 속으로 높으신 분에게 작게 용서를 구할 뿐이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이시여 당신의 어린 양을 지키기 위해서 한 일입니다.

종교적이고 비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하고 나니 현실적인 문제가 닥쳤다. 여기는 아주 시골은 아니지만 대도시는 아닌 도시 중심에서 멀리 떨어진 외곽이었다. 새벽 두 시에 가로등 불빛도 띄엄띄엄 있는 인기척 없는 곳에 차 없이 멀뚱하게 버려진 셈이었다. 진작에 막차 지나간 대중교통은 물론이고 지나가는 차도 보이지 않았다. 콜택시 어플도 무용지물이었다. 정대만은 주변에 응답을 받는 택시가 없다는 알리는 어플을 껐다. 별로 기대도 하지 않았다. 대신 지도를 켰다. 자, 어디 보자. 이 근처에 있을 건데. 지도를 뒤져보자 다행히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대만이 찾던 것이 있었다. 대만은 고민스러운 얼굴로 차를 보고 있는 이의 어깨를 두드렸다.

"신부님. 갑시다."

"어딜요?"

"여기서 밤새울 순 없지 않습니까. 자러 갑시다."

대만이 손을 이끌었다. 가로등 불빛이 띄엄띄엄 놓인, 차 한 대도 지나가지 않는 도로 가장자리를 걸어갔다. 대만이 찾은 곳은 금방 나왔다. 풀과 나무 말고는 전봇대 하나 없는 곳에 솟아난 것처럼 덜렁 건물이 하나 있었다. 벽돌로 된 담에는 햇빛에 바래서 이제는 잘 보이지 않는 내부 시설 사진 및 홍보 문구가 잔뜩 붙어있었다. 입구에 서 있는 입간판에는 가격이 대문짝만하게 적혀 있었다. 그리고. 준호는 고개를 들었다. 창문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 건물 벽에는 번쩍거리는 채널 사인이 이렇게 외치고 있었다. 무인텔 선녀와 나무꾼.

대만은 익숙하다는 듯이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사람 그림자 하나 없는 입구에 배치된 키오스크 앞에 선 대만은 거침없이 버튼을 눌렀다. 곧 키오스크에서 열쇠 하나가 떨어졌다. 대만은 열쇠를 집어서 준호의 손에 쥐여주었다. 어? 제 손에 쥐어진 열쇠에 놀란 준호에게 대만은 태연히 손을 흔들었다.

"그럼 우리 권사제님. 안녕히 주무십쇼."

그리고 휙 돌아서더니 왔던 길로 돌아가려고 했다. 그런 대만을 준호가 잡아채었다.

"어딜 가시려고요?"

준호의 질문에 대만은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제 차로 가야죠. 걱정 마세요. 트렁크에 매트도 있고 담요도 있고 베개도 있습니다."

"차 고장 났잖습니까."

"완전히 구겨진 것도 아니고 범퍼랑 바퀴만 터진 거니 들어가서 잘 수 있습니다."

날이 많이 풀렸다고 해도 아직 이른 초 봄. 날이 추우면 마이너스대로 온도가 뚝뚝 떨어지는 것이 흔한 일이었다. 들어가서 잘 수 있다 하더라도 춥고 불편할 터였다. 신부님 저 좀 놔주십쇼. 자러 가야 됩니다만? 대만의 태평한 재촉에도 준호는 잡은 손을 풀지 않았다.

"같이 잡시다."

"네?"

이번엔 대만이 놀랄 차례였다. 저어, 신부님. 여기서 같이 자자는 이야기가 나옵니까? 저랑? 그러나 준호의 태도는 단호했다.

"선택하세요, 형제님. 저랑 차에서 불편하게 자실 겁니까. 아님, 얌전히 여기 들어가서 같이 침대에서 자실 겁니까."

아니면 여기서 노숙을 해도 됩니다. 저 서울역에서 노숙자 분들과 노숙도 해봤습니다. 같이 붙어서 자면 어느 정도 따뜻하게 잘 수 있을 겁니다. 모텔을 앞에 두고 나오는 발언에 대만은 아찔해졌다. 아니, 본인이 제 입으로 잊으라고 했지만 술김에 고백도 하고 미수긴 했지만 뽀뽀도 할 뻔했던 사람하고 같이 자자는 발언이 태연히 나오다니. 대만의 심란한 심정을 알 길 없는 준호는 대만의 팔을 잡아끌었다. 밤이 늦었습니다. 얼른 들어오세요.

아니, 이 이분은 왜 이렇게 힘이 세셔? 저를 잡아 끄는 손에 저항했지만 거침없는 신부님의 인도에 따라 대만이 반쯤 끌려가듯이 모텔 안에 들어가게 되었다. 조도가 낮은 등이 띄엄띄엄 놓인 어둑한 복도를 거쳐 방까지 왔다. 저, 그냥 가면 안 됩니까? 문을 여는 이에게 애원하는 어조로 말했지만 돌아오는 건 매서운 눈길 뿐이었다. 자, 들어가세요. 어린양의 이끄는 목자께선 야무지게 사람을 열린 문 안으로 몰아넣었다.

어두운 내부를 더듬어 불을 켰다. 스위치를 누르자 오렌지 빛을 띄는 불빛이 방안에 떨어졌다. 그리 넓지 않은 방 안에는 깔끔하지만 묘하게 낡아 보이는 침구가 깔린 큰 더블 침대와 작은 탁자와 의자 그리고 티슈가 놓인 협탁이 있었다. 벽에 걸린 걸이대엔 옷걸이에 걸린 가운 두 개가 보였다. 침대 맞은편 벽걸이 TV도 그렇고 전형적인 모텔의 풍경이었다. 전국을 돌아다니고 이런저런 조사 때문에 익숙하게 본 풍경이 새삼스럽게 아찔하게 다가왔다.

문까지 야무지게 잠근 권사제는 대만을 절대 보낼 생각이 없는 듯 입구에 서 있었다. 그 단호한 모습을 보고 대만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포기한 얼굴로 침대 모서리에 걸터앉았다.

"먼저 씻으십시오."

"…저 씻는 동안 도망가실 생각은 아니시죠?"

"도망가면 잡으러 오실 거 아닙니까."

저도 이 새벽에 추격전 두 번 하고 싶진 않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벽에 걸린 가운을 침대 위에 놓았다. 저 돌아앉아 있을 테니 얼른 씻으십쇼. 신부님이 씻으셔야 저도 씻고 잘 거 아니겠습니까. 정말 안 가실 겁니까? 그, 제 옆에 어슬렁거리는 신이라도 걸까요? 그렇게 대만에게 확답을 받은 후에야 씻을 준비를 했다. 로만칼라를 벗는 것을 보고 대만은 바로 돌아앉았다. 등 뒤에서 옷이 서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대만은 최대한 그 소리를 안 들으려 애썼다. 다 벗고 씻으러 들어간 건지 문 열리는 소리와 함께 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타일에 떨어지는 경쾌한 물소리를 흘려 들으려고 에쓸 때였다. 어. 난처한 목소리가 타일을 타고 울려 퍼졌다. 잠시 후, 물 떨어지는 소리가 멈추더니 자박거리는 발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저, 대만 형제님."

"…무슨 일이십니까."

"비누가 없어서. 혹시 거기에 있습니까?"

그 말에 대만은 침대 옆 협탁에 놓인 작은 부직포 가방을 열고 안에 있는 물건을 꺼냈다. 일회용 칫솔과 작은 치약, 클렌징폼, 포장된 작은 비누 그리고 여성의 실루엣이 그려진 번쩍거리는 붉은 색 포장의 젤과 은색 포장지로 된 네모나고 동그란 것이 두 개 침대 위에 떨어졌다. 원래 이런 곳에 비치되어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런 상황에서 마주하니 당황스럽기 짝이 없었다. 대만은 칫솔과 치약, 비누만 두고 나머지를 황급히 부직포 가방에 쑤셔 넣었다. 그리고 비누를 주기 위해 고개를 들었다.

억.

대만은 욕설을 뱉을 뻔한 혀를 깨물었다. 욕실 입구는 전면 유리창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위쪽과 아래쪽은 투명했고 불투명하게 코팅 된 부분은 가운데 부분 뿐이었다. 그 정도로 사람 모습은 충분히 가려졌지만 벗고 있는 이의 실루엣은 충분하게 보였다. 게다가. 반사적으로 시선이 아래쪽을 향했다. 투명한 아래쪽으로 희게 드러난 발과 종아리가 보였다. 늘 긴 수단에 가려져 있는 부분이 물기에 젖어 조명 빛에 희게 빛나고 있었다. 대만은 제 입술을 깨물며 비누를 황급히 입구에 내려놓았다. 거기, 거기 있습니다. 그리고 황급히 자리를 떴다. 등 뒤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잠깐 들리더니 다시 타일 바닥에 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이어졌다.

돌아선 상태로 다리를 불안하게 떨었다. 지금이라도 튈까? 그런 생각이 머릿속을 감돌았다. 그러나 대만이 갈 곳은 정해져 있고 튀면 저 고지식한 신부님을 진짜로 쫓아올 터였다. 한숨을 길게 내뱉었다. '도와주리?' 귓가에 익숙한 목소리가 속삭였다. 대만은 고개를 번쩍 들어 허공을 노려보았다. 뭘 도와줘, 이 미친 신이. 허공에 대고 무언의 욕을 퍼붓자 까르르 웃는 소리가 귓가를 스치고 사라졌다. 대만은 자리에 다시 앉아 다른 생각을 하기 위해 애썼다. 그러고 보니 권사제님이 이런 때 뭐라고 기도 하곤 했는데. 대만은 몇 번 들어본 기도문인지 성경 문구인지를 기억 속에서 더듬었다. 하늘에서 임하시고 어쩌고저쩌고 서로 용서하고 저희 잘못을 용서하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고 하고-

"다만 저희를 악에서 구하소서."

뒤늦게 샴푸 향기가 뒤에서 덮쳐왔다. 가까이 다가온 이에게서 묻어나오는 온기와 습기가 어깨를 부드럽게 적셨다. 놀라 돌아보자 저를 쳐다보는 눈과 마주쳤다.

"뭐 있었습니까? 왜 마태오복음은 읊고 계신 겁니까?"

봤을 때 이상한 것은 없었는데요. 그렇게 말하는 이에게서 시선을 뗐다. 얇은 가운만 걸친 탓에 무방비하게 드러난 가슴이 언뜻 보였다. 입술을 깨물었다. 다른 건 아니고 저에게서 무럭무럭 자라고 있는 번뇌 때문에 중얼거렸다는 말은 할 수 없었다. 대신 씻고 오겠다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피곤하실 테니 먼저 주무십쇼. 저는 천천히 씻고 나오겠습니다."

태연하게 말하고는 후다닥 욕실로 뛰어 들어갔다. 욕실 안은 향기와 습기 그리고 따뜻한 온기로 가득했다. 방금 전까지 여기 있었을 이의 체취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 젠장. 누굴 향하는 지 모를 욕설을 작게 내뱉으며 주저앉았다. 아직 벗지 못한 바지 안쪽이 빠듯해졌다. 입술을 깨물며 대만은 속으로 애국가와 군가와 경문을 중얼거리며 한참 앉아있었다.


느적느적 씻고 나오니 말한 대로 먼저 자는 건지 침대 한 쪽이 둥글게 올라와 있었다. 벗은 안경은 침대 옆 협탁에 얌전히 놓여 있었다. 조용히 가까이 있는 이에게 다가갔다. 완연히 잠든 얼굴로 새근새근 낮은 숨을 내쉬고 있었다. 이불 아래 걸치고 있는 것은 모텔 로고가 새겨진 얇은 가운 하나 뿐이었다. 무방비하기 짝이 없네. 내가 뭘 어떻게 할 줄 알고. 침대 위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끼익. 체중이 실린 침대가 낮게 울었다. 반쯤 덮치듯이 올라앉은 대만은 제 밑에 있는 이를 내려다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저를 막듯이 몸을 감싸고 있던 수단도 목을 덮는 로만칼라도 없었다. 제가 마음만 먹는다면 이 이불을 젖히고 가운을 묶은 끈을 풀고 이 사람에게 원하고 욕망하는데로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착한 사람은 그 행동에 대해 원망하지 않을 거라는 것도 알았다. 하. 짧은 한숨이 세었다.

"뭘 믿고 이렇게 순진한 건지."

"제가 대만 형제님을 믿으니까요."

감겨있던 눈이 반짝 뜨였다. 잠기운 없는 눈동자가 저를 향했다. 심장이 한순간 멎었다. 놀란 심장을 간신히 진정시키며 태연한 얼굴을 했다.

"아, 안 주무셨습니까?"

"제 위에서 자꾸 쏘삭거리시는데 잠이 오겠습니까."

피곤하니 이제 주무세요. 손을 잡아끌었다. 대만은 끌어당기는 손에 이끌려 옆에 누웠다. 같은 샴푸와 같은 바디워시를 썼을 텐데 먼저 누운 이에게선 다른 향기가 났다. 그 향기를 피하듯이 대만은 최대한 침대 끝자락으로 가서 누웠다. 옆에서 나직한 숨소리와 기척이 느껴졌다. 그렇게 피곤했건만 잠이 오지 않았다. 뒤척거리지도 못하고 반듯하게 누워서 어둑한 천장만 멀거니 바라보았다. 그 때였다. 옆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형제님을 시험하거나 그런 생각은 없습니다."

고개를 돌리자 자고 있을거라 생각한 이가 조용히 말을 이었다. 저는 그저 형제님이 저 때문에 불편하게 자거나 힘드시지 않길 바랄 뿐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있겠다고 해도 대만 형제님께서 저를 함부로 하시거나 제 의사를 억누르고 거친 짓을 하실 거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바스락. 이불이 스치는 소리가 나더니 안경을 쓰지 않는 얼굴이 이쪽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환하고 부드럽게 웃었다.

"대만 형제님은 정말 선하고 착하신 분이니까요."

이제 주무세요. 그렇게 말하곤 빙그레 웃던 눈이 스르륵 감겼다. 이내 가늘고 고른 숨소리가 살짝 벌어진 입술에서 흘러나왔다. 내 참.

"……그렇게 말하면 제가 뭐가 됩니까."

손을 뻗어 뒤척여서 흘러내린 이불을 슬쩍 끌어올렸다. 좋은 꿈 꾸십쇼. 작은 인사가 방 안에 작게 울려 퍼졌다. 이내 두 사람의 나직한 숨소리가 이어졌다.


음.

규칙적인 생활을 하던 준호는 늘 일어나던 시간에 눈을 떴다. 창문 없는 방안은 어둑했다. 어둠에 익숙해진 눈에 잠든 이의 얼굴이 보였다. 그렇게 긴장하시더니 잘 주무시네. 제 손 위로 크고 굳은 살이 박히고 오래된 상처가 있는 손이 가볍게 얹어져 있었다. 의도한 건 아니었을 테지만 맞댄 손에 닿는 온기가 조금 간지러웠다. 손을 조금 꼼질거리자 기척을 느낀 건지 자고 있던 이가 부시럭 뒤척이더니 잠에 겨운 눈을 끔벅였다.

"어, 몇 십니까?"

"아마 새벽 다섯 시 일겁니다."

준호의 대답에 아직 잠에 덜 깬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러더니 부스럭 소리와 함께 손이 어깨를 잡더니 품에 끌어안았다. 어? 갑작스레 껴안긴 준호는 눈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품 안에 들어갈 수 밖에 없었다. 등을 끌어안은 팔이 가볍게 토닥였다.

"더 자요. 뭘 일찍 일어나셔……."

그리곤 이내 다시 잠이 들었다. 머리 위에 들리는 숨소리에 참았던 숨을 내뱉었다. 이렇게 자는 건 어릴 때 이후로 처음인걸. 슬쩍 고개를 들어 잠에 빠진 얼굴을 보았다. 잠든 얼굴은 그저 무구하고 천진했다. 이마를 가슴에 대었다. 살갗을 타고 잠든 이의 맥박이 느껴졌다. …졸리네. 저를 감싸는 온기와 숨결 속에서 준호도 다시 잠이 들었다.

대만이 제 품에 자고 있는 신부님을 보고 기겁한 건 그로부터 네 시간 후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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