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준호] 비 내리는 날 / 검은 하늘 아래서 / 벚꽃이 지고
벚꽃 구경
[미안해.]
"…네가 미안할 게 뭐가 있어."
대만은 삐죽 나오려는 입술을 집어넣으려 하며 최대한 덤덤하게 말했다. 저녁 제때 챙겨 먹어. 너무 무리하지 말고. 알았지? 대만은 준호에게 다시금 저녁 잘 먹으라는 말을 남기고 아쉽게 전화를 끊었다. 후유. 식탁을 바라보았다. 찬합 세 개가 놓여있었다. 찬합 하나에는 죽순을 듬뿍 넣은 죽순밥이 다른 찬합에는 데친 깍지 콩을 곁들인 도미구이가 마지막 찬합에 벚꽃 절임을 얹은 두부와 두릅튀김, 데쳐서 볶은 시금치나물, 예쁘게 손질한 딸기가 담겨 있었다. 화려하고 맛있어 보이는 도시락을 실망한 얼굴로 바라보다 뚜껑을 닫았다.
"열심히 만들었는데."
한숨처럼 서운함이 담긴 목소리가 입술 사이로 새었다. 시무룩하게 찬합을 차곡차곡 냉장고에 넣어놓고 밖을 바라보았다. 창밖 하늘은 흐렸다. 마치 지금이라도 비가 올 듯한 하늘이었다. 창밖에서 그 모습을 보던 대만은 깊은 한숨을 내쉬곤 소파에 풀썩 몸을 기대였다.
오늘은 준호와 벚꽃 구경을 가기로 했었다. 하지만 준호 회사에서 급한 일로 예정되어 있던 약속이 취소되었다. 서운하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대만은 입술을 삐죽이며 TV를 켰다. 마침 저녁 뉴스 마지막 즈음이었다. 리포터가 창밖과 마찬가지로 흐린 하늘을 배경에 두고 서 있었다. 그 하늘 아래 강가를 따라 흐드러지게 핀 벚꽃들이 점점이 꽃잎을 떨어트리고 있었다. 흐린 날에도 벚꽃을 보려는 사람들이 길가에 잔뜩 걸어가고 있었다. 내일부터는 전국적으로 많은 봄비가 예상되어서 많은 시민들이 벚꽃을 구경하러 나와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벚꽃을 못 보게 된 대만은 뚱한 얼굴로 화면을 노려보았다. 올해만 날이 아니고 내년도 있다지만 어제의 꽃이 오늘과 다르듯이 대만은 올해 같이 보고 싶었다. 그런데 내일이면 다 지겠지. 불만스러운 시선을 창밖에 던졌다. 왜 비가 오고 난리야. 한참 꿍얼거리다가 결국 TV를 껐다. 조용해진 집 안에서 떠오르는 건 한 사람 뿐이었다.
권준호, 우산은 제대로 챙겨 갔을까. 현관에 놓인 검은 장우산을 보았다. 벚꽃, 비, 우산.
불연듯 대만의 머릿속에 번뜩이는 이미지가 스쳐 지나갔다.
비 오네.
자주 빗나가던 기상청 예보는 이번엔 정확하게 맞아들어갔다. 예상에 없던 야근은 길어지다 못해 회사에서 하룻밤을 꼬박 보내게 되었다. 급하게 터졌던 일을 겨우 다 수습했을 땐 이미 늦은 오후였다. 내일은 쉬어도 되다고 했지만. 내리는 빗방울을 보았다. 봄비치고는 제법 굵은 빗방울이었다. 이 비가 오늘 그친다고 해도 벚꽃은 이 비에 사그라들듯이 지고 새잎이 나올 터였다. 마지막 통화가 떠올랐다. 제법 잘 숨겼지만 어절마다 아쉬움이 묻어난 목소리가 다시 들리는 듯했다. 대만이랑 벚꽃 보고 싶었는데. 준호는 아쉬운 한숨을 삼켰다. 어쩔 수 없지. 저녁이나 같이 먹자고 연락해 볼까. 그렇게 생각하며 핸드폰을 들 때였다. 성큼 다가온 그림자가 머리 위에 드리워졌다. 고개를 들었다.
"권준호."
커다란 장우산을 든 대만이 서 있었다. 어라. 나 아직 연락 안 했는데. 의아해 한 얼굴을 읽은 건지 대만이 씩 웃었다.
"비 오길래 기다렸어. 우산 안 가져갔지?"
실제로 우산이 없었다. 적당히 근처 편의점에서 우산을 사서 돌아갈 예정이었다. 그 것 때문에 기다렸구나.
"자, 가까이 붙어."
오른손으로 어깨를 잡아 당겨서 저를 옆에 두고는 우산을 왼손으로 들고 버튼을 눌렀다. 팡. 우산이 경쾌하게 펼쳐졌다. 그리고 펼쳐진 우산 아래서 벚꽃잎이 와르르 떨어졌다. 갑자기 검은 우산 아래서 흰 벚꽃 비를 맞은 준호는 놀란 얼굴로 대만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대만은 태연한 얼굴로 준호 머리에 올라 앉은 벚꽃잎을 보며 씩 웃었다.
"이야, 역시 미인한테는 꽃이 따라붙네."
이쁘다, 준호야. 벚꽃 구경 갈 필요도 없네! 바로 옆에 벚꽃이 있는데. 그렇게 능청스럽게 말하는 이의 머리, 어깨 위에도 벚꽃잎이 내려앉아 있었다. 가자, 꽃구경 했으니 도시락 먹으러 가야지. 내가 기가 막히는 도시락 만들어 놓았거든. 그렇게 말하며 준호의 손을 잡아 끌었다.
"이건 어떻게 한 거야?"
준호의 질문에 대만을 아무 것도 모르겠다는 얼굴로 눈을 깜박였다. 글쎄-.
"너랑 벚꽃 보고 싶다고 기도 드렸더니 생긴 거 아닐까. 역시 사람은 착하게 살아야 해."
태섭이 들었으면 인상을 쓰고 치수는 한숨을 내쉬었을 발언을 내뱉었다. 그 말에 준호는 그저 웃었다. 우산 안쪽에는 아직 붙어 있는 벚꽃잎이 두 사람의 발걸음에 따라 한 두 장 씩 팔락팔락 떨어졌다. 흐린 하늘 배경으로 검은 우산 아래 희고 부드러운 벚꽃잎은 마치 오려내어 붙인 꿈처럼 아름다웠다. 준호는 손을 뻗어 떨어지는 벚꽃잎을 잡았다. 꽃잎은 손쉽게 손바닥 안에 들어왔다. 가볍고 부드럽고 간지러운 감촉을 느끼며 준호의 제 옆에 있는 이의 손을 꼭 마주 잡았다.
"내년엔 꼭 벚꽃 같이 보자."
"그럼 누구랑 볼 생각이었어?"
"음, 올해의 MVP 농구선수?"
"…씁. 이거 열심히 해야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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