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환대협/마키센] 혐관로코 보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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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남 낚시꾼 by 란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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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협이 고등학교 시절에 잠깐 사겼다가 헤어진 여자친구 있었는데 그 여자애의 오빠가 이정환인거...

대협이는 그냥 무난하게 헤어졌다고 생각했는데 여자애는 첫사랑이기도 했고 대협이보다 좋아하는 마음이 더 컸어서 엄청 아프게 받아들였던거.

이정환은 그 여자애의 오빠인데 그당시에는 유학가서 대학생활 하고 있었던 거임. 그래서 여동생이 매일 시차고 뭐고 무시하고 전화해서 엉엉 우는거 들어줄 수밖에 없었음. 그러면서 사진으로만 본 윤대협을 두고보자고 벼르게됨. 수면부족은 사람을 미치게 합니다...

그리고 n년 후, 윤대협은 회사에 취직하는데, 옆팀 팀장이 묘하게 자기를 싫어하는 느낌이 나서 어색해함. 나는 저 팀장님을 처음 보는데...내가 뭐 크게 잘못한 건 없는거 같은데 왜 이렇게 나를 노려보고 있는 거 같지?? 하고 고민함. 같은 팀의 안영수한테 물어봐도 그냥 "니 자의식 과잉 아니냐? 다른 팀 팀장이 왜 너한테 신경을 써?" 하는 반응이고. 그래서 윤대협 머리만 긁적이다 말았을듯.

그러다가 몇개 팀 단체 회식하는 날에 사고치면 좋겠다. 윤대협 다른팀 여직원들한테도 인기 쩔어서 주변에서 대협씨 이거 먹어볼래? 대협씨 술 잘해? 이러면서 물어보는거 웃으면서 받아주고 있었을 거임. 그리고 이정환은 그거 보면서 '저 자식 고등학교때도 저래서...!!'하고 속으로 극대노함.

그리고 이정환은 윤대협 쪽 좀 줄 생각으로 앞에 앉아서 술을 먹이기 시작하는데....

-

근데 윤대협이 생각보다 술을 너무 잘 받아마시는 거임.. 약간 배경음으로 술이 넘어간다 쭉쭉 이런 노래가 흐르는 거 같기도 하고. 윤대협은 또 자기한테 쌀쌀맞던 옆 팀장이 와서 술을 따라주는데 거절할 수가 없는거임. 주는 대로 마시면 좀 누그러질까 싶기도 하고. 문제는 윤대협이 그렇게 마시고 정환의 잔을 채워주고 또 마시고 잔을 채워주고...그러다보니 둘이 존나 마시게 된거임. 지나가던 부장님이 둘이 무슨 주량 대결하냐고 물어보는 바람에 일이 더 커짐. 주변에서 이미 취한 사람들이 '대결'이라는 말에 꽂혀가지고 응원까지 하기 시작함.

약간 멀리 떨어져 앉은 안영수, 신준섭, 백정태, 황태산 (죄다 입사동기)은 그거 보면서 고개 절레절레 하고 있음. 둘이 왜 저러는 거냐. 모르지...

결국 한참 후 다른 팀장들이 전부 달려들어서 말린 후에야 두 사람은 그 말도 안되는 음주 대결을 멈출 수 있었음. 비교적 멀쩡해보이던 대협의 고개가 아래로 푹 꺾이고 정환은 거보라는 듯 피식 웃음.

"...내 승리인 것 같네."

그렇게 말한 정환이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몸을 일으켰음. 아니, 일으키려고 했음. 정환은 그 후의 일은 기억하지 못했음. 왜냐하면 그대로 필름이 끊겨버렸기 때문에... 마지막으로 정환이 기억하는 건 김수겸 팀장이랑 마성지 팀장이 그를 바닥에 내팽개치며 하던 대화였음.

방 따로 잡을 필요 없겠지?

사내놈들끼리 무슨.. 알아서들 잘 하겠지.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윤대협은 자신이 살아있다는 사실을 저주한 적이 없었음. 존나게 감사하거나 그런 건 아니라도, 그냥 살아서 나쁜건 없구나, 항상 그런 자세로 지내왔음. 그렇지만 그가 겪고 있는 숙취는, 사람은 왜 술을 마시고도 살아야 하는가 따위의 고찰을 하게 만들 정도로 지독했음. 대협은 두통과 메슥거림으로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물통을 찾아서 손을 더듬거렸음.

그런데 이상하게 기억하는 것보다 침대가 넓은 느낌임. 아직 술이 덜 깼나 하면서 팔을 좀 더 뻗었는데 뭔가 단단하면서도 따뜻하고, 핏줄도 좀 서 있고... 그런 원통형의 무언가가 만져짐. 숙취로 깨질듯한 머리로 그게 사람의 팔뚝이라는 걸 깨닫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음. 적어도 팔뚝의 주인이 잠에서 깨서 신음을 흘릴 때까지는 깨닫지 못했음.

-

이정환은 깨질 것 같은 머리로 생각함. 이렇게 마신 건 신입 환영회 때 5차까지 달린 이후로 처음인 것 같다. 사회 초년생일 때는 적당히 거절하는 법을 몰라서 진짜 주는대로 다 마셨고, 입사 1년이 채 되지 않아 신경성 위염을 비롯한 기타 현대인의 질병을 얻고 난 다음에는 절대로 그렇게 마시지 않았음. 그랬는데 어제 윤대협 하나를 상대하느라 진짜 리밋 풀고 마신 거임. 그 자식은 또 왜 이렇게 술을 잘 마시는 건데. 정환은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며 몸을 뒤척였음. 무슨 정신으로 어디에 와서 자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음. 대충 짐작이 가는 건 김수겸이랑 마성지가 그를 어디 숙박업체에 적당히 버리고 갔을 거라는 사실 뿐이었음. 그의 몸에 닿는 낯선 시트의 감촉이 그의 추측에 확신을 실어줬음.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며 몸을 반대쪽 방향으로 돌린 정환이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올렸음. 이쪽으로 빛이 드는 거였나. 아, 눈부시니까 머리 아프다... 그렇게 조금씩 시야를 넓혀가던 정환은 뭔가 이상한 것을 보고 눈살을 찌푸림. 왜 옆자리에 사람이 있냐. 그리고 잠시 후에 눈이 번쩍 뜨였음.

아니, 옆에 사람이 왜 있어? 나 술 먹고 뭐한 거야?

술에 떡이 되어서 뻗었다가 눈을 떠보니 옆에 웬수가 누워 있었습니다, 라는 건 꽤 흔한 미디어 소재였음. 하지만 이정환은 절대로 자신의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지. 절대로 무관한 일이라고. 영화에서 그런 일이 벌어졌을 때 보통 어떻게 하더라. 서로 목이 터져라고 비명을 지른다든가, 한쪽이 베개로 다른 쪽을 존나게 팬다든가 했던 것 같은데.

하지만 정환은 바로 일어나지 않았음. 솔직히 말해서는 머리가 아파서 못 일어나고 있는 거였지만. 아무튼 그는 그 웬수 같은 윤대협과 눈이 마주친 채 침묵하다가, 천장을 보고 누워서 낮게 중얼거렸음.

이런 빌어먹을…

그 정도만 해도 언제나 점잖은 말씨만을 쓰던 이정환에게는 큰 일이었음. 윤대협도 사정은 비슷했음. 다만 옆에 있는게 자기보다 윗사람이라 소리내서 말하지 않았을 뿐임. 절망적인 기분으로 침대에 앉아 퍼석퍼석한 얼굴을 손으로 문지르던 윤대협은 문득 침대 옆의 협탁에 시선을 두었음. 그 위에는 가장 단순한 구조의 디지털 시계가 놓여 있었는데, 검정 바탕에 녹색으로 빛나는 커다란 숫자는 한치의 오차도 없이 현재 시각을 가리키고 있었음.

오전 9시 28분.

이십팔...............

[내가, 아니 우리가 그럴 줄 알고 연차 올려놨다.]

[고마운 줄 알아.]

[스불재다, 스불재.]

영수의 옆에서 태산과 정태가 한마디씩 하는 소리가 들림. 대협은 화장실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서 고맙다...하고 거의 죽어가는 목소리로 답했음. 전화기 너머로 뭔가 시끌시끌하더니 곧 영수가 대박~ 하는 소리가 들림.

[대박. 변팀장이 오늘 그냥 쉬래. 연차 안 깎는다고.]

"와아..."

대협은 힘없이 환호성을 내뱉고는 전화를 끊었음.

한편 이정환도 상황은 비슷했음. 그는 침대에 앉아서 그의 상사인 남진모 부장에게 연신 감사하다고 말하고 있었음. 평소에도 호탕한 편이었던 남부장은 어제 마시는 꼴 보니까 못 올거 같더라고 허허 웃으며 정환에게 숙취나 잘 해소하라고 함. 한시름 돌린 정환이 성지와 수겸의 메시지에 답장을 하고 있는데 화장실 문이 열리면서 대협이 비틀거리면서 걸어나왔음. 그는 정환을 흘끗 보고는 바닥에 떨어져 있던 셔츠를 집어 올렸음. 갓 태어난 좀비 같은 꼬라지로 옷을 챙겨 입는 대협을 보던 정환이 혀를 쯧 찼음.

"윤대협 씨 선지 잘 먹어?"

"예? 예...그럭저럭요."

"그럼 가지."

정환의 말에 대협은 셔츠 단추를 잠그던 손을 멈추고 잠시 멍하니 서 있었음. 지금 저 사람이 나보고 같이 밥을 먹으러 가자고 한 건가. 평소 같으면 빠르게 처리되었을 내용이 머리에서 소화되는데 한참이 걸렸음. 머리가 이해를 하든 말든 그러는 동안에 몸은 반사적으로 상사의 말에 반응하는 그런 회사원의 몸인지라, 대협은 단추를 대강 잠그고 바닥에 놓인 그의 가방을 주워올리며 먼저 나간 정환의 뒤를 따라 나갔음.

-

비틀대며 나온 두 사람은 적당히 근처에 있는 식당을 찾아 들어갔음. 자리에 앉으면서 대협은 메뉴판을 흘끗 봤는데, 해장국 종류가 꽤 다양했음. 아까 정환의 질문에 그럭저럭 먹을 수 있다고는 했지만 사실 선지를 엄청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던 대협은 내심 안도했음. 무난하게 북어 해장국을 시킬까? 아니, 콩나물도 괜찮을 것 같아…

 

메뉴판을 보면서 고민하고 있는 동안 가게 종업원이 주문을 받으러 왔고, 대협은 고민 끝에 콩나물로 마음을 굳힌 채 자신이 먹고 싶은 걸 말하려고 했음.

 

"선지 두 개요."

 

그렇지만 정환은 그런 기회조차 주지 않고 제멋대로 선지 해장국 두개를 시켜버림. 대협은 어이가 없어서 입을 벌리고 있다가, 그래도 윗사람이 사준다는데 입 닥치고 먹어야지…하는 기분으로 찬물만 홀짝였음. 생긴 건 어디 가서 맨날 스테이크만 썰 거 같이 생겨서는. 대협은 정환을 보면 항상 그런 느낌을 받았음. 한마디로 부잣집 도련님이라고나 할까. 실제로 패션에 눈이 밝은 태산에 의하면 정환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명품을 입는데, 그것도 매일 다른 걸 꺼내입고 온다고 했음. 시계랑 구두 포함. 그들이 다니는 회사의 페이가 확실히 세기는 하지만, 그렇게 명품으로 치장하고 다닐만큼 좋지는 않음. 이정환이 그렇게 꾸미고 다니는 돈은 분명 다른 곳에서 나왔을 수밖에 없었음.

 

대협은 밤새 구겨진 정환의 브랜드 명 모를 고급 와이셔츠를 노려보면서 생각함. 저기 해장국 국물이라도 튀면 어떻게 되는 걸까. 솔직히 그게 궁금해서 음식이 빨리 나오기를 바랐는데, 앞에 뚝배기가 놓이고 나자 정환은 아주 우아하게 테이블에 놓인 종이냅킨을 펼쳐서 셔츠 목깃에 걸었음.

 

"……"

"식기 전에 먹지."

 

그렇게 말하고 먹기 시작하는 정환에 대협도 숟가락을 들었음. 뜨거운 국물이 위로 들어가자 계속해서 울렁이던 것이 어느 정도 진정이 되기 시작했음. 대협은 아까보다 씩씩하게 밥을 떠서 먹고는 국물을 또 한숟갈 떠 먹음. 아무 말 없이 밥을 반 쯤 먹었을 때, 정환이 윤대협씨는, 하고 불렀음.

 

"...네?"

"윤대협 씨는 외동이야?"

"예? 예에..."

 

갑자기 왠 호구조사야? 대협은 미간을 가볍게 찌푸렸다가 대답했음. 정환은 고개를 대강 끄덕이고는 국물에 남은 밥을 말았음. 대협은 숟가락에 걸리는 선지 덩어리를 옆으로 치워내다가 물었음.

 

"그…팀장님은요?"

"여동생 하나."

"그렇군요."

 

팀장님 닮았으면 미인이겠네요. 대협은 정말 아무런 의도 없이 그렇게 말했음. 왜, 보통 다들 그러잖아. 상사가 가족 자랑하면 ㅇㅇ님 닮아서 똑똑하겠네요/잘생겼겠네요/키가 크겠네요 그런 말들. 대협은 진짜 그런 말들 중 하나를 매우 교과서적으로 했을 뿐임. 그렇지만 이정환에게는 어쩐지 빈정거리는 것처럼 들린 거임. 그 여동생을 찬 녀석이 윤대협이라는 것을 알고 있고, 이미 그 사실로 삐딱하게 보고 있는 상태에서는 뭘 들어도 곱게 들릴 리가 없었음.

 

"윤대협 씨 여자친구 있어?"

"…지금은 없는데요."

"그럼 옛날엔 있었고?"

"고등학교 때 몇번…"

 

몇번이라는 말에 정환의 눈이 뾰족해졌음. 대협은 그 변화를 눈치채지 못한 듯 반찬으로 나온 깍두기를 뒤적이고 있었음. 이놈의 쇠젓가락은 왜 이렇게 미끄러운 거야?

 

"그렇군…특별히 기억에 남는 여자친구 있었어?"

 

정환의 질문에 대협이 시선을 올려서 그를 마주봄. 그 때 대협은 도저히 이정환을 알 수가 없었음. 이유 없이 자기를 미워하던 팀장이 어제 술을 그렇게 먹이고는 이제 호구조사도 모자라서 여자친구 이력까지 물어보고 있는 거임. 대체 나한테 원하는 게 뭐지? 대협은 불편함을 숨기지 않으며 떨떠름하게 대답했음.

 

"글쎄요, 딱히 없는거 같은데요."

 

대협의 대답에 정환의 표정이 더 안 좋아졌음. 정환이 여동생을 막 미친듯이 싸고 도는 시스콤 같은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여동생이 엄청 아파했던 걸 생각하면 입안이 썼음. 물론 그 바람에 매번 잠을 설친 시간도 고통스러웠고. 그랬는데 그 고통스러운 시기의 원흉이 되는 윤대협에게 여동생과 사귀었던 건 큰 의미도 없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자 분노와 동시에 허탈함 같은 것이 느껴졌음. 이 녀석한테 차인 여동생이 말하던 허전함이라는 것이 이런 걸까 싶고. 대협은 정환이 손을 멈추고 자신을 뚫어져라 보고만 있는 것이 신경이 쓰였음. 갑자기 자신에게 너무 관심을 보이는 것도 부담스러웠고. 그래서 이리저리 머리를 굴려보던 중에 어떤 생각이 떠올랐음. 설마.

 

"팀장님, 저기 혹시."

"…왜."

"저희…"

"……"

"잤어요?"

-

윤대협의 질문을 소화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렸음. 같이 잤냐고? 당연하지, 한 침대에서 같이 일어났잖아. 멍청아, 그런 뜻의 '자다'가 아니라는 건 알고 있잖아? 그 정도는 나도 알고 있어! 정환은 간신히 정줄을 잡고 내면의 혼란스러움을 정리했음. 대협은 심각하게 정환을 바라보며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음. 정환은 손에 들고 있던 숟가락을 내려놓고는 헛기침을 하며 목을 가다듬었음.

"이봐요, 윤대협 씨."

"네?"

"제가 미쳤습니까? 당신 같은 사람이랑 자게."

정환의 반응에 대협의 미간이 찌푸려졌음. 정환이 자기를 이상하게 미워하는 건 알고 있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저건 아니지. 그가 좋은 연애상대인가 아닌가랑은 별개로, 솔직히 윤대협은 자기가 인기가 많은 걸 알았음. 모를 수가 없지. 그 키에 그 얼굴에 넉살 좋은 성격에. 윤대협 좋다고 쫓아다니는 사람이 남녀 불문하고 과장해서 이 해장국집을 다 채울 수도 있을 거였음.

"아니, 뭐 저라고 팀장님이랑 잔게 좋았을 거 같아요?"

"뭐라고요?"

"괜히 사람 트집 잡아대고 시비만 거는 사람을 좋아하면 내가 호구새끼지."

같이 잔 거 아니라니까 다행이네요. 대협은 그렇게 말하고는 뚝배기를 들고 국물을 벌컥벌컥 들이켰음. 그러고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음.

"제 밥값은 제가 낼게요."

대협은 그렇게 말하면서 지갑에서 지폐를 몇 장 꺼내 식탁 위에 올려둠. 정환은 어이가 없어서 입을 벌린 채 대협을 바라봄. 대협은 돌아서서 나가려고 하다가 다시 정환을 향해 몸을 돌렸음.

"그리고 저 선지 싫어하거든요. 50대 아저씨도 아니고 뭐야, 진짜."

그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게를 나갔음. 이정환은 코웃음도 안나오는 상황에 그냥 자리에 앉아 있었음. 대협이 남기고 간 뚝배기 안에는 진짜 선지 덩어리가 그대로 남아 있는게 보였음. 아니, 싫으면 싫다고 첨부터 얘기를 하든가. 물어볼 땐 먹는다면서. 정환은 밥을 몇술 더 뜨다가 짜증이 나서 숟가락을 내렸음. 그는 대협이 두고 간 지폐를 챙겨서 주머니에 넣고, 자기 지갑을 꺼내 두명 분의 식사를 계산했음. 애초에 자기가 사준다고 한 건데 지폐는 나중에 다시 돌려주든가 할 생각이었음. 

"내가 돌았구나..."

대협은 집으로 가는 지하철에 앉아서 머리를 싸맴. 늦은 아침에 출근도 안하고 지하철에 앉아서 머리를 싸매고 있는 젊은 사람이 이상한지 그의 주변으로는 사람들이 가까이 오지 않았음. 그러거나 말거나 대협은 시간을 되돌리고 싶다는 생각 뿐이었음. 아직 술이 덜 깨서 그런 거였다고 하면 되지 않을까? 아니 근데 그 인간이 먼저... 그래도 상사인데... 어차피 우리 팀도 아니잖아? 팀 간에 교류와 협력이 많이 필요하기는 했지만, 어차피 대협이 자주 대화하는 상대는 그와 동기인 신준섭이었지 이정환은 아니었음. 이정환이 그에게 그렇게까지 미운 티를 낸 게 이상한 거였지.

[(황태산 대신 보냄) 야, 윤대협 살아있냐?]

그 때 대협의 핸드폰에 진동과 함께 메시지 하나가 날아왔음. 번호는 안영수인데. 대협은 메시지를 보다가 답장을 보냄. 죽지 못해 산다. 영수가 뭐라고 하려는지 ...표시가 떠 있는 걸 보다가 대협은 지하철 의자에 기대 눈을 감았음.

[퇴근하고 단골집에서 치맥하려는데 올래?]

잠시 후 다시 진동이 울리면서 답장이 들어왔음. 대협은 치'맥'이라는 말에 잠깐 머뭇거렸지만 맥주만 안 마시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음. 영수가 말하는 단골집은 대협의 집 근처에 있는 가게로, 싸고 맛있고 양 많고의 삼박자를 다 갖추고 있는 곳이었음. 입사 초기에는 정태랑 영수도 같은 동네에 살아서 퇴근하고 자주 들렸던 곳이었지만, 영수가 자취집을 바꾸고 난 후로는 그렇게 모이는 일이 별로 없었음. 대협은 잠깐 고민하다가 결국 '갈래' 하고 답장을 보냈고, 영수는 그럼 7시에 보자고 대답했음. 대협은 메시지를 확인하고는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음. 일단 집에 들어가서 빨리 씻고 자고 싶었음. 그는 남은 정거장의 갯수를 속으로 세면서 다시 눈을 감았음.

-

대협이 졸음이 다 안 떨어진 눈을 비비며 가게 안으로 들어갔을 때, 태산과 영수, 정태는 이미 테이블을 잡고 앉아 있었음. 대협은 자신의 것을 제외하고도 수저 한벌이 더 있는 것을 보고 잠깐 멈췄다가, 화장실 쪽에서 준섭이 걸어오는 걸 보고 안심했음. 준섭은 윤대협을 보고는 안쓰럽다는 표정을 짓고는 빈 자리에 앉았음.

 

"어떻게 살아 있었네?"

"진짜 죽는 줄 알았다..."

 

놀리듯 던지는 영수의 말에 대협은 손을 내저었음. 그가 자리에 앉자 태산이 따라뒀던 콜라를 건네줬고, 대협은 그걸 단숨에 반쯤 들이켰음. 차가운 콜라가 목을 톡톡 쏘며 내려가는 감각에 아직 가물가물하던 정신이 번쩍 돌아옴. 준섭은 그런 대협을 흥미진진하게 보고 있었음.

 

"아니, 근데 어제 너 그러고 집은 어떻게 들어갔냐? 팀장님들이 알아서 한다길래 우리는 그냥 빠졌는데..."

"나?"

 

대협은 조금 떫은 표정을 지었음. 테이블에 앉은 다른 네명은 궁금하다는 듯이 그를 쳐다보고 있었음. 대협은 목덜미를 긁적이다가 대강 사정 설명을 했음. 모텔에서 눈을 뜬 것이나, 옆에 이정환이 누워 있었다는 거, 그리고 이정환이랑 해장국을 먹으러 갔었던 것까지. 

 

처음에는 그냥 궁금해서 물어봤던 동기들의 표정이 점점 혼란스러워지는 것을 보며 대협은 정환과 나눈 대화까지 공유할까 고민했음. 아무래도 한명의 머리보다는 여러명의 머리가 이 상황에 대한 이해가 쉽지 않을까 싶었음.

 

"아무튼…그래서 같이 밥을 먹으러 갔는데, 자꾸 물어보는 거야."

"뭘?"

"외동이냐, 여자친구는 있냐,  기억에 남는 연애가 있었냐...뭐 그런 거."

"...왜?"

 

나도 모르지… 대협은 목이 타는 듯 콜라를 들이켰음. 그러고는 치킨 다리를 하나 집어서 뜯고 있는데 가만히 앉아 있던 태산이 입을 열었음.

 

"혹시…너한테 관심 있는거 아니냐."

 

그와 동시에 시끌벅적하던 테이블이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음. 그 정도로 반응이 나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던 태산이 당황하며 수습을 하려고 하는데 영수가 말을 꺼냈음.

 

"에이, 둘이 뭐 얼마나 본다고."

"매일 8시간씩 5일이나 같은 층에 있잖아."

"하긴…윤대협 전에 너 그런 말 하지 않았어? 이정환이 너 이유 없이 싫어하는 거 같다고."

"아니- 무슨 초딩이야? 좋아해서 괴롭히고 그러게?"

"그 얼굴에 초딩은 아니지…"

"신준섭, 너는 어떻게 생각해?"

 

갑자기 자신에게로 돌려지는 화살에도 불구하고 준섭은 깜짝 놀라지도 않았음. 그는 차분하게 맥주잔을 내려놓고는 대협을 한번 쳐다봤음.

 

"사실 팀장님 타입은 아닌 거 같은데."

 

준섭도 사실 이정환이 좋아하는 타입은 잘 몰랐음. 상사의 이상형 같은 건 알 필요도 없었고 알고 싶지도 않았음. 그래도 팀원들 사이에서 몇번 얘기가 나온 적은 있었는데, 이정환이라면 조금 더 서구적인 타입을 좋아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은 있었음. 그런데 윤대협은 객관적으로 서구적인 인상은 아니었음.

 

"와- 뭔데 윤대협이 타입이 아니냐? 얘가 지금 사내 인기 넘버 원일건데."

"……"

 

아, 어쩌란 말이냐. 준섭은 영수의 반응에 어이가 없었지만 그냥 넘어가기로 함. 원래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안영수 백정태 윤대협 이렇게 셋이 근처에 살아서 유난히 친했던 건 알고 있었음.

 

"그냥 궁금했을 수도 있겠지. 누구 소개 시켜줄 생각이었을 수도 있고."

"아…그러고 보니까 여동생이 있다고 그런 거 같은데."

"그거네!"

 

대협이 문득 정환의 말을 떠올리자 사방에서 깨달음(?)의 탄성이 터져나왔음. 그거네, 여동생. 여동생 소개 시켜주려고 했나 보네. 그렇게 결론을 내린 영수와 정태, 태산은 속 시원하다는 듯이 건배를 하고 맥주를 들이켰음. 그 건배에 동참하지 않은 건 콜라를 마시는 윤대협과 그들이 헛다리를 짚고 있다는 걸 알고 있는 신준섭이었음.

 

 

 

 

 

팀장님 여동생, 3년 전에 결혼했을 건데…

-

이정환의 여동생에 대한 오해는 그 모임으로부터 몇달이 지난 후에 풀렸음. 그 동안에는 정말 아무 일도 없었음. 이정환은 다시 원래의 깐깐하고 이상하게 윤대협에게만 차가운 남자로 돌아갔고 윤대협은 또 마이웨이로 돌아감. 어느 한쪽이 유난히 신경을 쓰고 피하려고 하는 건 아니었는데, 이상하게 복도나 화장실에서라도 마주하는 일이 거의 없었고, 정환이 3주 정도 길게 출장을 갔다오면서 그 회식날의 기억은 대충 흐릿하게 잊혀져갔음.

이정환이 출장에서 돌아온지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날, 퇴근하던 사람들은 화사한 인상의 미녀가 회사 로비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모습을 볼 수 있었음. 몇몇 사람들은 어디서 본 거 같은 느낌에 '이상하다, 많이 본 인상인데'라고 생각하며 지나갔음. 그렇게 몇 그룹의 사람들이 지나가고, 그 미녀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려서 보안 게이트를 통과하는 이정환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났음.

"오빠!"

그 소리에 1층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이정환에게로 쏠렸음. 헐, 왠지 어디서 본 거 같더라. 1년 365일 어디서 따로 썬탠이라도 한 듯 까무잡잡한 피부를 가지고 있는 이정환이랑은 다르게 피부가 하얀 편이기는 했어도, 진한 쌍꺼풀에 이국적인 인상은 확실히 이정환이랑 닮아 있었음. 정환은 자신의 여동생을 보고는 잠깐 멈칫했다가 출입카드를 찍고 나왔음.

"무슨 일인데 회사까지 왔어?"
"이제 슬슬 연말이잖아. 선물 사러 가자고."

정환은 한손으로 얼굴을 감쌌음. 시간이 벌써 그렇게 됐나? 출장이니 뭐니 정신이 없어서 시간이 가는 걸 까맣게 잊고 있었음. 정환의 어머니는 연말에는 꼭 온 가족이 모여서 저녁을 먹고 덕담도 하고 선물교환식도 하고......그런 것들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했음. 아버지는 그냥 그 흐름에 몸을 맡기는 사람이었고. 정환은 유학을 하는 동안에도 그 시기가 되면 집으로 돌아가거나 아니면 화상통화라도 해야 됐음. 진짜 이도저도 안된다고 거절했다가 무슨 영정 사진처럼 까만 틀 액자에 들어간 자신의 사진이 식탁 자리에 놓여 있는 걸 보고 왠지 기분이 이상해져서 그냥 한번씩은 챙기기로 했음. 아무튼 그래서 선물 말이지. 작년에 했던 거랑은 다른 걸 해야 되잖아. 정환은 갑자기 피곤해지는 걸 느끼면서 얼굴을 문지름.

"일단 백화점이라도 가자. 가서 보면 생각나겠지."
"...매제는?"
"나 여기 내려주고 갔어. 자긴 이미 준비했대."

정환은 삐걱거리며 고개를 끄덕였음. 여동생은 그런 정환을 보면서 웃다가 문득 그의 어깨 너머 보안 게이트 쪽으로 시선을 줬음. 그쪽으로 사람들이 계속 다니는 바람에 관심을 안 주기가 어려웠음. 그리고 잠시 후 어? 하는 소리를 냄.

"윤대협?"
"......어? 이정연?"
"너 여기 다녀?"
"어...너는?"
"나는 오빠가--"

퇴근하는 길에 만두맛집에서 만두를 사서 돌아갈 생각을 하며 나오던 대협은 익숙한 얼굴에 멈칫했고, 그 옆에 서 있는 사람을 보고 정색했음. 등을 돌리고 서 있던 이정환은 여동생의 반응에 몸을 돌렸고, 윤대협을 보고 미간을 구겼음. 윤대협은 완전히 믿을 수가 없다는 듯한 얼굴로 이정환을 봄.

"오빠라고?"
"응, 친오빠."

여동생은 정환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툭 치며 말했음. 이정환은 윤대협이랑 눈을 마주치는 것도 싫다는 듯한 표정으로 그를 흘겨보고는 '가자'하고 말했음.

"진짜 오랜만이다--있지, 내가 나중에 연락할게. 커피라도 한잔 하자."
"어어, 그래."

윤대협은 이정환이 자신을 또 한번 흘겨보는 거에 부담감을 느끼며 대답했음. 두 남매가 로비를 나가고 (여동생이 이정환을 거의 질질 끌고 나갔음) 윤대협은 방금 자신이 알게 된 정보를 처리하기 위해 그 자리에 멈춰 서 있었음. 그리고 잠시 후 간신히 정보를 받아들이고 이리저리 처리한 뇌가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음.



와, 이정환 그런 거였냐고, 이 쪼잔한 인간아!!!

-

"...윤대협이랑 다시 만나는 거 괜찮은 거야?"
"응?"

정환의 질문에 그의 여동생은 의아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음. 다시 못 만날게 뭐야? 정환은 미간을 좁혔음. 윤대협 없으면 못 산다고 학교도 안 갈 거라고 엉엉 울면서 새벽에 전화하던 애가. 물론 시간이 많이 흐르기도 했고, 결혼도 했으니 (남편은 윤대협이랑은 다르게 작고 귀여운 스타일이었음) 심경의 변화가 있기는 하겠지만 이렇게까지 아무렇지 않아할 줄은 몰랐음.

"아니, 그냥... 너 그 자식이랑 헤어졌을 때 엄청 힘들어 했잖아."
"아- 그거."

여동생은 라떼를 한모금 마시면서 어깨를 으쓱했음.

"그거야, 이미 고등학생 때 일이고. 첫사랑이었어서 그런 거지."
"......"
"그때 한 몇달 난리치고 나니까 아무렇지 않던데."

그 몇달 동안 난 죽는 줄 알았다... 정환은 깊은 한숨을 쉬며 손으로 머리를 짚었음. 자신이 윤대협에게 편견을 가지고 있던 것이 멍청한 짓이라는 것을 깨닫자 부끄러움과 후회가 밀려오기 시작했음. 그렇게 자기반성의 시간을 가지며 말 없이 앉아 있는데, 여동생이 조심스럽게 그를 불렀음.

"근데 오빠."
"...왜?"
"파르페 안 먹을 거면 나 먹을래."
"안돼. 아까 시킬 때 먹을 거냐고 물어봤더니 싫다고 했잖아."
"...쪼잔한 새끼."



정환의 여동생을 한번 마주친 뒤로, 대협은 자신의 회사 생활이 뭔가 평소와는 조금 달라졌다는 걸 깨달았음. 일단 출근하자마자 팀장석 쪽에서 느껴지는 시선이 없었고, 이상하게 모든 긴장감이 전부 사라진 듯한 기분. 마치 이정환이 출장을 갔을 때와 같은 그런 편안함? 그런데 이정환 팀장 출장 간다는 얘기 없었던 거 같은데? 이상한 느낌은 그의 자리에 놓여 있는 캔커피를 보고 확실해졌음. 대협은 출처를 알 수 없는 캔커피를 노려보다가 슬그머니 모니터 뒤 쪽으로 밀어놓고는 자리에 앉았음.

"좋은 아침..."
"영수야, 이거 네가 놨어?"
"뭔 소리야, 나 지금 출근 했는데."

안영수는 윤대협이 가리키는 커피캔을 보고 미간을 찡그렸음. 또 너 좋다는 누가 두고 간 거 아니냐? 그 말에 윤대협은 좀 떨떠름한 표정을 지음. 입사 초에 그걸로 다른 직원들에게 소리를 좀 들은게 많았어서 별로 좋은 추억은 아니었음. 대협이 그렇게 있자 영수는 자리에 앉아 의자를 굴려서 옆으로 다가왔음.

"근데 뭔가 되게 올드한 감성이다."
"그런가. 이상하네."

대협은 캔을 들여다보다가, 자리로 돌아오던 이정환이랑 눈이 마주쳤음. 이정환이 조금 굳은 얼굴로 그에게 까딱 목례를 하다가 대협의 손에 들린 커피에 시선을 주는 것이 보였음.

"...드실래요?"
"...아뇨. 윤대협 씨 드시죠."

정환은 그렇게 말하고 자리에 앉아서 일을 시작했음. 뭐지 그럼 왜 쳐다본 거야. 대협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캔을 대충 책상 한쪽에 치워놓은 뒤 일 할 준비를 시작함.




그리고 한시간 쯤 지났을 까, 정환이 사내 메신저로 대협에게 메시지를 보냈음.

[점심 때 약속 없으시면 같이 식사하실래요?]

-

정환은 초조하게 메신저 화면을 쳐다보았음. 분명 자신의 메시지를 윤대협이 읽은 건 맞는데, 30분째 답장이 없었음. 거래처랑 대화할 때도 이렇게까지 안달을 내본 적은 없었는데. 정환은 윤대협의 자리 쪽을 흘끔 봤지만 윤대협은 평상시의 멀끔한 얼굴로 자기 일만 하고 있는 것 같았음. 나 읽씹 당한건가? 이정환은 기분이 살짝 나빠지는 것을 느끼며 키보드에 손을 올렸음. 그리고는 몇마디를 치려다가 다시 지우기를 반복함. 그러다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돌리려는 순간 띠링, 하는 소리와 함께 답이 왔음.

[싫습니다.]

정환은 대화창을 한참 노려보다가 답을 보냈음.

[선약 있어요?]
[없는데 싫어요.]
[왜?]

정환이 모니터에서 시선을 떼고 대협을 봄. 대협도 그 쪽을 보고 있었는지 둘의 시선이 마주쳤음. 정환이 어이없다는 듯 눈썹을 치켜올리자 대협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다시 키보드를 쳤음.

[점심은 편하게 먹고 싶어서요.]

아니 그럼 내가 불편하다는 거야? 라고 이정환은 생각함. 우리 팀은 나랑 밥 못 먹어서 난리인데...라고 근거도 어떤 뒷받침도 없이, 어딘가에 있을 법한 중년의 꼰대 상사 같은 생각을 하면서 정환은 키보드 위의 손가락을 가볍게 두드렸음. 싫으면 말고, 하고 보내려다가 정환은 자신이 점심을 먹자고 한 이유를 다시 떠올림. 윤대협에 대해 오해하고 있던 사실을 사과하기 위해서였지. 여기서는 내가 을이다. 정환은 대협을 보면서 키보드를 침.

[내가 오해한 부분에 대해 사과하고 싶습니다. 시간 내주면 고맙겠어요.]

대협은 모니터 화면을 보고 있었기 때문에 메시지도 바로 볼 수 있었음. 그는 입을 쭉 내민 채 정환이 보낸 말을 읽었음. 그러고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알겠습니다'라고 한 마디를 쳤음. 드디어 얻어낸 대답에 정환은 승리의 표시로 작게 주먹을 쥐었음.

그리고 그런 모습을 보고 있던 마성지는 김수겸에게 메시지를 보냈음.

[이정환 윤대협이랑 사내연애하냐. 둘이 왜 저렇게 불태우면서 메신저를 하고 있대.]





윤대협은 조용한 레스토랑 안을 둘러봄. 회사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가게는 대협이 처음 와보는 곳이었는데, 아기자기하고 조용한 분위기가 꽤 마음에 들었음. 팀에서 밥을 먹으러 가게 되면 횟집이나 해산물 요리를 주로 먹으러 가는 편이어서, 회사에서 멀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곳이 있는 줄은 몰랐음. 한참 메뉴판을 들여다보고 있는데 손을 씻고 오겠다던 정환이 다시 자리로 돌아와 앉았음.

"먹고 싶은 거 다 시켜요."
"메뉴판에 있는거 전부 다 달라고 해도 돼요?"
"다 먹을 수 있으면."

그냥 해본 말인데. 정환의 말에 대협은 고개를 저으면서 다시 메뉴판으로 시선을 내렸음. 스테이크랑 크림 파스타 사이에서 갈등하면서 고개를 들자 메뉴판에 집중하고 있는 정환이 보였음. 이정환이 누구인지 알고 나니까 어쩐지 얼굴 곳곳이 익숙함. 분명 회사에서 처음 본 것임에도 불구하고 어디서 본 거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가끔 있었는데 그 이유도 이제 알 거 같았음. 그나저나 남매가 정말 서구적으로 잘생긴 얼굴이다. 대협은 물을 홀짝이면서 생각했음.

"...메뉴 정했어요?"
"어? 아니요..."

대협이 너무 빤히 보고 있었는지 시선을 느낀 정환이 대협을 바라봤고, 대협은 바로 고개를 숙였음. 이정환의 눈을 피하려는 것은 아니었는데 어쩐지 그렇게 보였을 거 같았음. 대협은 괜히 헛기침을 하면서 메뉴판을 세워서 정환과 자신 사이에 가림막이 생기도록 했음.

어제 정환의 동생을 로비에서 마주치고 나서 집에 돌아간 대협은 몇가지 퍼즐들이 맞춰지는 것을 깨달았음. 예를 들자면, 정환이 그의 고등학교 시절 연애에 대해서 물어본 거라든가. 자신의 여동생과 사귀었던 사람이니, 어느 정도는 기억이라도 있을까 떠본 거였는데 대협은 거기다 대고 특별히 기억나는 건 없다라고 해버린 거임. 그런데 정말 기억이 안 나는 걸 어떡하냐고. 자랑은 아니지만, 대협은 고등학교를 다닐 때 정말로 많은 연애를 했음. 물론 윤대협이 적극적으로 원해서 한 것보다는 그냥 상대가 고백을 했는데 바로 거절하기가 좀 미안하다, 라는 이유에서 어영부영 받아준 것들이었음. 그러다보니 뭐 보통 애인에게 바라는 그런 행동들이 나올 수가 없었고, 그러다보니 진짜 금방 깨졌음. 그리고 그렇게 깨지고 나면 또 누군가가 고백을 해 오고. 정환에 여동생에 대해서, 윤대협은 이미 연애(?)를 많이 깨 본 경험자였고, 정환의 여동생은 대협이 첫사랑이라고 했음. 이미 시작점이나 서로에게 바라는게 너무 다른 관계였기 때문에 당연히 오래 가지는 못했고 결국 합의 하에 헤어졌음. 그래도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는 조금 더 길게 사귀었던 거 같음. 나름 신경을 써 준다고 100일에 장미꽃도 사주고 그런 걸 해보기도 했지만, 그래도 고등학교 시절의 수많은 연애 중 하나였어서, 진짜 머릿속에 담아두지 않았었음. 그게 이런 인연으로 이어질 거라고는 생각한 적도 없었고.

"주문 도와드리겠습니다."

서빙하는 직원의 목소리에 대협은 상념에서 벗어났음. 정환은 전채로 샐러드와 오징어 튀김을 시키고 본 메뉴로는 산딸기 소스를 얹은 안심 스테이크를 주문했음.

"와인 마실래요?"
"...아뇨."

마지막으로 이정환이랑 술 마신 기억이 그렇게 좋지는 않았기 때문에 대협은 고개를 저었음. 그는 크림 소스 스파게티와 레모네이드를 시키고는 작게 한숨을 쉬며 창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음.

"어제 동생에게서 얘기를 좀 들었습니다."
"...예에."
"제가 오해를 한 부분이 있더군요..."

정환은 부끄러운지 조금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얘기를 했음. 대협이 여동생의 첫사랑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는 것과, 둘이 안 좋게 깨진 줄 알고 있었다고. 그리고 그 문제로 자신이 꽤 스트레스를 받았어서 자연스럽게 안 좋은 감정을 품게 되었는데, 그것이 잘못된 행동이었음을 안다고 차분하게 말을 이어나갔음. 너무 정중한 나머지 대협은 아까 점심을 먹자는 말을 바로 거절하려고 했다는 사실이 미안해질 정도였음. 그러는 동안 직원이 레모네이드를 가지고 왔고 대협은 차가운 이슬이 맺힌 잔의 표면을 만지작거리면서 생각함. 그러니까, 대협이 늘 정환이 자신을 미워하는 것 같다고 생각한 것이 완전히 착각은 아니었던 거지. 그렇게 생각하면 조금 더 뻣뻣하게 굴어도 될 것 같기도 한데, 또 저렇게까지 저자세로 나오는데 어쩌라고요 하고 간이 배밖으로 나온 소리를 하고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음.

"-..그럴 수도 있죠. 뭐..."

결국 대협은 적당히 받아넘기기로 생각함. 아무리 그래도 이정환이 상급자인데, 회사 당장 그만둘 거 아니면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넘어가야지.

"오해가 풀려서 다행이네요."
"정말 죄송합니다."

대협은 손을 내저으며 이제 넘어가자고 했음. 정환은 그 말에 희미하게 웃었음. 그 웃음을 보는 순간 대협은 왜 이정환이 회사 직원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은지 알 거 같다고 생각함. 지금까지는 보통 무표정하거나 좀 화가 난 듯한 얼굴만 봤는데, 웃는 얼굴이 진짜 잘 생겼다는 생각이 들었음. 아니, 내가 대체 무슨 생각을. 대협은 새콤한 레모네이드를 벌컥 들이킴. 그러면서 입 안에 들어온 얼음을 혀로 굴렸음. 아까부터 왜 자꾸 이정환이 잘 생겼다고 생각하는 건지. 아무래도 정신을 좀 똑바로 차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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