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준호] 처음은 쓰고 끝은 달게

발렌타인 데이

정대만은 기분이 좋지 않았다.

당연했다. 오늘은 2월 14일이었고 발렌타인 데이였으며 권준호가 집에 없는 날이었다. 아니, 그 놈의 회사는 왜 이런 날 출장을 시키고 난리야. 2박 3일 출장 일정에 며칠 전부터 찡찡대며 준호에게 투정을 부렸다. 사람 바꾸면 안 되냐? 아님 일정이라도 좀 옮겨봐. 하지만 이 출장엔 준호가 꼭 참석해야 되는 일이었고 거래처와 회사 일정 상 다른 날로 옮길 수도 없었다. 미안, 최대한 빨리 올게. 출장 가는 13일 날 아침, 미안한 얼굴로 말하는 준호에게 찐하게 키스하고 쿨하게 배웅해주었다. 뭐가 미안해. 그냥 맘 편하게 갔다 와. 그렇게 어른스럽게 보냈지만 문이 닫히자 마자 시무룩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준호 없는 동안 집 청소도 하고 운동도 하고 방학인 학생들이랑 농구도 하고 나름 알차게 보냈지만 혼자인 집에 있자니 헛헛하기 짝이 없었다. 빈둥빈둥 준호가 없는 하룻밤을 보내고 14일이 되었다. 마침 한가해 보이는 태섭이랑 백호녀석에게 밥 먹자고 꼬셔서 불러내었다. 하지만 점심 먹고 난 후 태섭이 전화 한 통 받더니 한나가 부른다며 쏜살같이 사라졌다. 같이 농구 하던 백호녀석은 무슨 연락을 받았는지 소연이 이름을 외치곤 붙잡을 새도 없이 달려갔다. 배신자 새끼들. 농구장에 홀로 남은 대만은 눈물을 삼켰다. 치수에게는 연락하지 않았다. 준호에게 뭘 들은 건지 14일 아침부터 부르지 말라고 으름장을 놓았기 때문이었다. 안 불러, 이 자식아! 거친 답변에 치수는 초콜릿 사진으로 응답했다. 대만은 핸드폰을 침대에 던졌다.

터덜터덜 불 꺼진 집에 들어와 홀로 저녁을 챙겨 먹고 TV를 보았다. 발렌타인 데이라고 초콜릿 광고가 뜨자 채널을 돌렸다. 시끄러운 예능 채널에서 떠드는 걸 멍하니 보다가 핸드폰을 확인했다. 준호는 점심 이후로 답변이 없었다. 바쁜가. 일하는 사람에게 답변을 조르기도 뭐해서 저녁 식사 사진과 보고 싶다는 말을 보냈었다. 하지만 그 문자에도 답변이 없었다. 심지어 읽지도 않은 상태였다. 사라지지 않은 1 표시에 정대만은 버려진 농구 골대처럼 서러워졌다.

권준호 사랑이 식었어.

애꿏은 쿠션을 물어뜯으며 정대만은 울부짖었다. 그런다고 미확인 표시가 사라지진 않았고 연락 없는 이가 전화를 주지 않았다. 바빠도 밥 먹고 일해. 한참 굴러다니던 대만은 최대한 철든 어른 마냥 담담한 문자를 남기고 다시 TV에 시선을 두었다. 요란한 자막과 왁자지껄한 소리가 빈방에 울렸다. 대만은 소파에 커다란 덩치를 늘어트리고 재미없는 얼굴로 화면을 응시했다. 비어있는 옆이 허전했다.

다음엔 이즈음 맞춰서 일주일 내내 휴가 내라고 해야지. 뾰로통한 얼굴로 대만이 생각했다. 맛난 거 먹고 하루종일 같이 뒹굴 테다. 아니, 내년까지 기다릴게 뭐람. 다음 달 화이트 데이때 이거 핑계 삼아서 같이 쉬면 되잖아? 그렇게 당사자 동의 없는 일정을 짜는 사이 침울했던 기분도 좀 풀어졌다. 뭐, 예전처럼 떨어져 있던 것도 아니잖아? 출장 갔으니 피곤하겠지. 주말에 브라우니나 구워볼까? 이야, 정대만 정말 철들었다. 마지막에는 자화자찬하면서 브라우니 레시피를 검색해 볼 정도로 회복되었다.

그렇게 틀어놓은 TV를 배경음악 삼아 이것저것 알아보다가 소파에 기대 잠들었다. 설핏 잠에서 깬 것은 11시가 넘을 때였다. 예능은 이미 끝났고 지나간 다큐멘터리를 틀어주고 있었다. 핸드폰을 보았다. 아직도 답변이 없었다. 설마 그대로 호텔에서 쓰러져 잠든 거 아냐? 준호는 가끔 너무 피곤하면 옷도 안 벗고 허수아비처럼 쓰러져 자곤 했다. 전화 받을지 모르겠지만 전화 해봐야겠다. 쯧. 권준호, 나 없으면 안 된다니까. 그런 말을 중얼거리고 있을 때였다. 조용한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 깜짝 놀라 돌아보자 문을 열고 한 사람이 들어왔다. 대만이 생일 선물로 사주었던 트렌치코트를 걸치고 있는 이는 방금 전까지 걱정하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준호야?"

멀거니 이름을 부르자 준호는 손에 들고 있던 서류 가방과 쇼핑백 등을 내려놓고 대만에게 성큼 다가갔다.

"대만아-."

안 자고 있었어? 와락 달려드는 사람의 옷깃에는 차가운 공기가 묻어났다. 피로가 더덕더덕 붙어있었지만 환한 얼굴이었다. 대만은 어리둥절하면서 준호를 마주 안았다.

"너 출장 내일까지라면서."

대만의 물음에 준호는 빙그레 웃었다.

"일찍 끝내고 바로 달려왔어."

그래도 급하게 일정을 당겨서 보고서랑 서류처리 때문에 내일도 근무지만. 베실베실 웃는 이를 보며 대만은 눈을 껌벅였다. 아니, 그것 때문에 이때까지 연락이 없었던 거야? 그리고 이 밤중에 운전해서 여기까지 왔다고? 의아해 하는 대만을 두고 준호는 내려놓은 쇼핑백 중 작은 것 하나를 들고 왔다.

"아직 발렌타인 데이지?"

12시 안 지났으니까. 그리고 그 쇼핑백 안에서 하얀 상자를 꺼내었다. 상자에 묶인 리본을 풀고 뚜껑을 열자 여섯개 초콜릿이 보였다. 그리고 그 초콜릿 하나마다 이렇게 적혀 있었다.

대만은 문구가 적힌 초콜릿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분명 바빴는데. 출장 가기 전에는 출장 준비로 분주했고 주말에도 같이 붙어있었으니 이런 걸 사거나 준비하는 건 본 적 없었는데.

"이건 언제 준비한 거야?"

"지난주에. 그냥 집에 둘 수도 있는데 직접 주고 싶어서."

놀라 멍하니 바라보는 대만에게 준호가 초콜릿을 하나씩 가리키며 설명했다. 직접 만든 건 아니고 주문한 거야. 이거 각자 맛 다르다? 이건 커피고 이건 라즈베리고 이거는- 조잘조잘 설명하는 걸 듣던 대만은 '사' 글씨가 들어간 초콜릿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입에 넣고 저를 바라보는 이에게 입 맞췄다. 조용한 가운데 혀 끝에 녹아내리는 초콜릿만이 달고 끈적거렸다. 하. 대만은 입술에 묻은 초콜릿을 핥으며 씩 웃었다.

"이건 딸기네? 이야, 맛있다."

"……나 내일 출근이야."

응. 알아. 방금 말했잖아. 그러면서 대만은 태연하게 초콜릿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아직 12시가 되지 않은 시곗바늘을 가리켰다.

"그래도 아직 발렌타인 데이잖아. 초콜릿은 마저 먹어야지."

5개 남았다? 이거 나 주려고 산 거잖아. 그치? 그렇게 말하고 초콜릿을 입에 물었다. 자, 얼른. 초콜릿을 물고 재촉하는 얼굴에 준호는 멍하니 있다가 결국 웃음을 터트렸다. 좋아. 오늘은 발렌타인데이니까. 체온에 녹은 초콜릿이 부드럽게 혀끝에 감겼다. 카카오의 씁쓸함과 향미가 터지고 설탕의 달콤함이 스르륵 녹아내렸다.

완벽한 발렌타인 초콜릿이었다.

+

"그런데 이거 뭐냐."

"응? 그거? 거래처랑 아는 사람들한테 받은 거야."

"…뭐가 이렇게 많아."

"하하. 다 그냥 예의상 주는 초콜릿이야. 출장 와서 수고한다고 주신 분도 계시고."

"……예의 초콜릿에 개인번호도 적어주고 말이지."

"응? 뭐라고 했어?"

"나 이거 먹는다."

"잠깐, 대만아. 그거 답례해야-."

"정대만이 먹었으니까 정대만한테 답례 받아 가라고 해."

"대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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