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루주인] 비원
2023년 6월 아쿠네코 동화 합작 참가 연성
※ 아쿠네코 하나마루x주인♀️ 글 입니다.
화사한 복사꽃이 흐드러지게 피던 날이었다. 마을 사람들 모두가 귀한 왕의 핏줄을 맞이하기 위해 큰길로 나와 경의를 표하며 허리를 조아릴 때, 나는 떨어지는 꽃잎에 무심코 시선을 빼앗겼다. 그로 인해 나는 왕족 앞에서 고개를 들면 안 된다는 규칙을 어기고 말았다. 마을의 어른들은 우리같이 천한 것들이 하늘 같은 왕의 핏줄을 똑바로 바라보면 안 된다고 입을 모아 말하곤 했다. 하늘의 분노를 사서 제명에 살지 못한다던가. 그저 높으신 분들의 눈 밖에 나기 싫어 그러려니 했건만, 어째서인지 그분과 눈이 마주친 순간 나는 그러한 규칙이 만들어진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밤처럼 검은 머리와 한쪽 눈을 가린 안대, 홍옥처럼 아름다운 붉은 눈동자. 필시 처녀들이 닿을 수 없는 아름다운 분을 연모하다 상사병을 앓을까 그런 규칙을 만든 것이겠지. 번뇌에 찬 얼굴로 천천히 말을 몰아 제 앞에 엎드린 군중 사이로 늠름히 지나가는 왕자 저하의 자태는 너무나도 아름다워서, 나는 고개를 도로 숙이는 것도 잊은 채 입을 벌리고 그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아아, 나는 이 분을 뵙기 위해서 태어났구나.
내가 무얼 하고 있는지 눈치챈 이웃사촌이 손을 들어, 내 정수리를 꾹 누르는 바람에 곧장 바닥에 고개를 처박고 말았지만. 눈앞에 반들반들한 흙바닥만이 보이는 그 순간에도 나는 한참이나 그의 용안을 떠올렸다.
나는 그분을 다시 한번 더 뵙겠다는 일념 하나만으로 부모를 설득해 수도로 상경했다. 수도에는 작은 노점상을 하는 외삼촌이 있었는데, 명절에 삼삼오오 모이면 종종 수도로 올라와 일을 배워볼 자식이 없냐고 묻곤 했으니까. 설마 사내놈이 아니라 계집이 장사판에 뛰어들 거라곤 상상치도 못했는지, 외삼촌은 보따리를 한 아름 안아 들고 찾아온 나를 불만스레 위아래로 훑었다. 아무렴 어떠한가. 나는 일도 살림도 빠릿빠릿하게 할 자신이 있었다. 자식이 없는 외삼촌과 외숙모 마음을 사로잡기까지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렇게 지내기를 일 년 하고도 여러 달, 마침내 내게도 왕자 저하를 다시 볼 기회가 찾아왔다. 궁으로 드나들며 잡다한 일을 할 무수리들을 선발한다는 벽보가 시내 여기저기에 붙었으니까. 글을 읽을 줄 몰라 처음에는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몰랐으나, 내가 일하는 곳이 어딘가. 수도의 저잣거리는 오만가지 정보가 나도는 곳이었다. 벽보의 내용은 얼마 안 가 손님들의 입을 통해 내게도 전해졌고, 그렇지 않아도 일을 싹싹하게 잘하는 미혼의 젊은 여인이 귀한지라, 선발전을 통과하는 건 내게 누워서 떡 먹기보다 쉬웠다.
수도에 오고 나서도 왕자 저하를 뵐 순 없었기에, 나는 점점 초조해졌다. 궁에 들어오면 그래도 무언가 달라지겠다고 생각했건만. 현실은 그리 녹록지 않았으니까. 내게 처음 주어진 일은 전 왕의 애첩이 사용했다던 폐궁을 청소하는 일이었다. 그것도 왕자 저하가 기거하는 곳으로부터 아주 멀리 떨어진. 궁에 들어오자마자 그분과 운명처럼 마주치리라 낙관하진 않았지만, 그런데도 밀려드는 실망감을 덮을 순 없었다.
선임들의 이야기를 들으니 폐궁에 살았던 애첩의 폐비는 황실을 향해 반란을 도모했다가 실패해 처형당한 모양이었다. 원통해서 세상을 아직 뜨지 못한 애첩의 귀신이 아직도 폐궁 근처에서 모습을 드러낸다던가. 으스스한 이야기로 후임을 골려주고 싶어 하는 선임의 앞에서, 나는 적당히 겁먹은 척을 하며 그녀의 비위를 맞췄다. 손님의 마음에 드는 행동을 할수록 하루 매출이 달라지는 장사판에서 살아남은 내였다. 선임 한 명의 마음을 사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오랫동안 사람이 드나들지 않은 폐궁의 문을 열어젖히자, 메케한 먼지의 냄새가 콧속 깊은 곳까지 들이닥친다. 나는 소매로 코와 입을 가리며 먼지가 잦아들기를 기다렸다. 폐궁의 안쪽은 마치 폐비가 붙잡혀 끌려가던 그날의 참상을 그대로 담기라도 한 듯, 여기저기 물건이 어지러이 뉘어져 있었다.
'삼촌네 노점상 창고도 이렇게까지 지저분하진 않았는데, 궁이라도 사람 사는 곳은 다 똑같은 건가.'
그렇다면 치우는 방법도 같겠지. 처음 수도에 상경해 삼촌네 툇마루를 매일 벅벅 문질러 닦아 이쁨을 받으려 애썼던 나였다. 나는 소매를 어깨까지 걷어 올리고, 마른 헝겊에 살짝 물을 묻혀 바로 앞에 보이는 문갑부터 뽀득뽀득 닦기 시작했다. 내동댕이쳐져 금이 간 화분이나 깨진 도자기는 구석의 한꺼번에 모아두고, 쓸만한 것들은 하나하나 정성스레 닦아 원래 있었을 자리에 돌려두며 차근차근 방을 치워나갔다.
혹시라도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치울 것이 있을까 싶어, 나는 가구 아래로 밖에서 꺾어온 얇은 나뭇가지를 넣어보며 꼼꼼히 쓸어보았다. 나온 것이라곤 오랜 보금자리를 침범당해 걸음아 나 살려라 달아나는 벌레뿐이었지만. 그렇게 여기저기 헤집고 다니던 중, 침대 아래서 '캥'하는 쇳소리와 함께 무언가 나뭇가지에 걸렸다. 침대 아래로 빼꼼 고개를 숙여 안을 살피자 둥그스름한 형체가 보였다. 나는 침대 아래 지옥이 쌓인 먼지 사이로 손을 뻗어 그 물건을 끄집어냈다.
그건 제법 세월을 탄 녹슨 요강이었다. 아마 방의 옛 주인이 밤에 변소를 가는 대신 사용했을 물건이리라.
'설마 내용물이 들어있는 건 아니겠지?'
나는 미심쩍은 눈으로 요강을 흔들어 보였다. 다행히 안에서 이물감은 느껴지진 않았다. 애초에 무언가 들어있더라면 이 방에서 먼지 냄새가 아니라 오물 냄새가 진동했을 터이니.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나는 용기를 내어 뚜껑을 열어보았다. 아니, 정확히는 열려 했다. 그러나 요강의 뚜껑은 안쪽에서 걸리기라도 한 듯 힘을 주어 당겨도 열리지 않았다. 나중에 선임께 부탁해서 열어볼까. 그리 생각하며 겉이라도 멀쩡하게 만들어 볼까 싶어, 나는 행주로 뽀득뽀득 요강을 문지르기 시작했다.
달그락-
방금 그건 무슨 소리지? 자신이 헛들은 게 아니라면, 그건 분명 꿈쩍 않던 요강의 뚜껑 쪽에서 들려온 소리였다. 설마 안에 쥐새끼라도 숨어있는 건가? 그리 생각하며 다시 뚜껑을 잡아당겨 확인하려던 그 순간, 이번에는 움직이지 않던 뚜껑이 너무나도 손쉽게 뻥 하는 소리와 함께 뽑히는 게 아닌가. 그리고 그 안에서 튀어나오는 건, 마치 요강 안에서 큰불이라도 난 건지 끝을 모르고 솟구쳐 나오는 연기였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영문을 몰라 멍하니 주저앉은 사이, 방 안을 채우기 시작한 희뿌연 연기는 이내 자욱한 안개처럼 시야를 가렸다.
그때였다. 분명 자신밖에 없을 터인 이 방에서 누군가에게 손목을 잡힌 건. 기분 탓인가 싶어 자기 손이 있을 방향을 내려다보니, 희뿌연 연기 속에서 내민, 다른 누군가의 손이 자기 팔목을 똑똑히 잡고 있었다. 꿀꺽. 나는 침을 삼켰다. 왜 하필 이럴 때 선임이 해준 죽은 애첩의 원혼 이야기가 생각나는지. 오싹오싹한 기분이 마치 뱀처럼 목에서 척추까지 스르르 타고 내려갔다.
"어이쿠... 이건 또 처음 보는 얼굴이네."
그 긴장을 깬 건 요염한 애첩의 목소리라기엔 굉장히 낮고 능글거리는 목소리였다. 목소리가 들려온 쪽에서 고개를 내민 이는 여인이 아닌 훤칠한 키에 옷고름을 가슴팍까지 풀어 헤친 붉은 눈동자의 사내였다. 눈을 둘 곳을 찾지 못해 슬그머니 시선을 피하니, 그는 이내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다시 자신과 눈을 마주쳐 왔다.
"이런이런,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아낙이구먼. 하긴, 이 몸처럼 수려한 사내를 볼 일은 흔치 않을 테니. 자, 맘껏 봐도 좋네. 내 허락하지."
수려? 지금 본인을 가리켜 말한 건가? 제 수려의 기준이 고고한 왕자 저하이기 때문일까, 눈앞의 사내는 수려함과 한참 거리가 멀었다. 막 자고 일어난 듯 헝클어진 머리와 제대로 여미지도 않은 옷고름은 오히려 한량에 더 가까워 보였으니까. 그의 말에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고 그저 빤히 응시하자, 사내는 이 정도로 싸늘한 반응이 돌아올 거라곤 예상치 못했는지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에... 농인데 그렇게까지 정색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거, 초면에 죄송하게 됐습니다. 그나저나 나리는 대체 어디서 들어온 겁니까?"
이 방에는 분명 자신밖에 없었을 터. 애초에 모두가 기피하던 장소가 아니던가. 혹시라도 그가 불온한 목적을 갖고 난리 통을 틈타 이곳에 들어왔더라면, 어쨌거나 궁에 소속된 사람으로서 자신은 수상한 이 남자를 선임에게 보고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그러나 사내는 되려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며 제게 반론했다.
"자네가 나를 이곳에 부르지 않았는가?"
"... 제가 말입니까?"
"자네 말고 여기 누가 더 있는가?"
그 말을 듣고 나서야 나는 깨달았다. 이거 완전 정신이 온전치 못한 놈이구나. 더 이상 그의 말을 들어줄 가치가 없을 것 같아, 나는 그를 제치고 방을 재빨리 나서려 했다.
"자, 잠깐, 날 두고 어디 가는 건가."
"비키십시오." 나는 내 앞을 가로막는 사내에게 앙칼진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 그대가 비원을 이루기 위해 나를 먼저 부르지 않았더냐...! 정말, 자네는 아무것도 모르고 날 불러낸 건가?"
"애초에, 불러냈다는 의미를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그저 여기서 청소를 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그러다 우연히 내가 깃든 요강을 문질렀다는 소리군. 그렇지 않은가?"
그리 말하며 그가 찡긋, 한쪽 눈을 감으며 제게 기교를 부렸다. 그 꼴이 퍽 어이없어 빤히 바라보니, 이내 자신도 선을 넘은 것을 깨달았는지 눈을 내리깔았지만.
"예, 요강을 문지르긴 했습니다. 나리가 제 눈앞에 나타나기 전까진."
"그래, 그래서 내가 나타난걸세. 나는 인간들의 비원을 이루어주는 신령이니까."
"나리는 지금 제게 그 농 같은 이야기를 믿으라 하시는 겁니까?"
"화, 화내지 말게..! 증거를 보여줄 테니. 그래, 자네 금 좋아하는가?"
그는 그리 말하며 다급히 나의 손을 잡아 왔다. 대체 구질구질하게 이게 뭐 하는 짓인지. 그에게 욱해서 한마디 해주려던 찰나, 사내와 맞닿은 손 사이에서 무언가 우글우글 덩어리 같은 것이 잡히기 시작했다. 일순간 벌레 떼가 튀어나오는 듯한 기분에 기겁해 그의 손을 뿌리쳤더니, 짜르르 짤랑하는 소리와 함께 손에 잡히던 덩어리가 사방팔방으로 튀었다. 창호 틈 사이로 비치는 햇빛이 물건에 닿자, 샛노란 빛이 반짝였다.
아아. 장사판에 몸 담았던 이라면 그 고운 빛깔, 그 고운 자태를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지. 그건 틀림없이 순금으로 만들어진 원보였다. 열대 개가 넘는 황금 원보가 바닥에 어지러이 쏟아진 것을 보니, 머리가 핑 돌 것 같았다. 이 정도의 원보만 있어도 값비싼 비단을 몸에 둘둘 두르고 말 몇 필을 사고도 남을 터인데. 나는 눈앞에서 일어난 광경을 믿을 수 없어 모든 일의 원흉일 사내를 급히 찾았으나, 그는 이미 감쪽같이 흔적을 감춘 후였다.
"이제 내 말을 믿을 수 있겠느냐."
간질거리는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 나는 펄쩍 뛰며 뒤로 물러섰다. 그곳에는 언제 이동했는지 의연한 얼굴로 요강에서 튀어나온 연기와 흡사한 아지랑이에 둘러싸인 사내가 서 있었다. 눈앞에서 황금이 솟아나는 기적과 그리고 이 신묘한 분위기를 보고도 어찌 그의 신묘함에 의문을 품을 수 있으랴.
"자, 다시 본론으로 돌아갈까."
사내는 거리낄 것 없는 당당한 걸음걸이로 제게로 다가왔다.
"내 친히 이 신통력을 써서 나를 불러낸 그대의 비원을 들어볼까 하는데, 원하는 것이 있느냐."
원하는 것이 있느냐고 물었는가. 하나 있지 않은가. 나의 비원이. 나는 주저 없이 그의 앞에 나아가 무릎을 꿇고 그에게 청했다.
"제가 연모하는 분도, 저를 연모하게 해주십시오."
* 밑의 결제선은 채널에 문제가 생기거나 사라지더라도 작품을 영구 소장하고 싶은 분들을 위해 만들어진 결제란입니다. 아래엔 아무것도 없습니다. 소장본의 금액은 글자수에 맞춰 책정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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