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료

[라므주인] 인어의 노래

2023년 6월 아쿠네코 동화 합작 참가 연성

Scarlet by 스깔
10
0
0

※ 아쿠네코 라므리x주인♀️ 글 입니다. 

※  해당 글은 불쾌하게 느껴질 수 있는 요소를 담고 있습니다. 유의해서 열람해주세요.

오늘도 허탕인가.

단전부터 힘을 모아 끌어 올린 그물엔 오늘도 시장 가치가 없는 잡생선과 갑각류만 가득하다. 평소 같았더라면 다음엔 잡히지 말라며 안녕을 빌고 다시 바다의 요람에 돌려보냈겠건만, 요즘같이 매일 허탕을 치면 하루를 견딜 식삿값이라도 아껴야 한다. 나는 해초와 푹 고아 잡탕 죽이라도 끓여 먹을 심산으로 고기를 하나하나 떼어 텅 빈 양철 양동이에 던져넣었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그물을 손질해 말려두고, 평소와 달리 병맥주가 아닌 독한 압생트 병을 들고 바다 뒤편으로 향했다. 집세를 상환할 날짜는 다가오는데, 벌써 일주일째 팔 수 있는 고기가 잡히질 않았으니까. 꽉 막힌 듯한 이 속을 어떻게 맥주로 달랠 수 있을까.  값 싸다는 장점 이외엔 아무것도 없는 이 지독한 술은 오늘 같은 날에 딱 어울렸다.

무릎까지 닿던 풀들은 어느덧 듬성듬성 사라지고, 염분을 머금은 무거운 공기가 풀어헤쳐진 내 갈색 머리카락 사이로 스며든다. 울퉁불퉁 암초가 솟아있는  해안가가 보이자, 샌들과 발바닥 사이로 까끌까끌한 모래가 비집고 들어온다. 유쾌한 감각은 아니기에, 나는 해져가는 가죽 샌들을 벗어 양손에 하나씩 집어 들곤 사뿐사뿐 모래사장을 밟았다. 파도가 밀려드는 해안선까지 나아가자, 발가락 사이사이로 밀려 들어온 물결이 모래만 취하고 내게서 다시 멀어져간다. 유일한 돈벌이 수단인 물고기들과 천생 뱃사람들이었던 내 아비와 어미까지 빼앗은 것으로 모자라, 발밑의 모래까지 훔치려 드는 바다가 어찌 그리 얄궂던지. 꼴도 보기 싫어서 바다를 향해 뻥 발길질하자,  시원하게 뻗은 내 다리를 따라 물길이 하늘로 치솟고는 후드득 떨어진다. 참으로 의미 없는 분풀이를 하는구나. 고요한 바다서부터 불어와 살랑거리며 요염하게 뺨을 간질이고 지나가는 바닷바람이 그리 비웃는 기분이 들었다.

근처의 암초에 걸터앉아 공기 중의 염분을 안주 삼아 압생트를 벌컥벌컥 병째로 들이마시니, 목과 위장이 타는 듯이 뜨겁다. 독해서 순간 헛구역질이 올라올 뻔했지만, 조금 지나니 혈관에 알코올이 돌며 몸이 후끈 달아오른다. 자신도 한때 적당히 화목한 가정에서 평범하게 인생에 실족하며 살던 시절이 있었는데. 비극은 쥐도 새도 모르게 다가와 눈 깜짝할 새 자신의 가정을 파탄 내고 지나갔다. 그날도 바다는 오늘처럼 고요했다. 새로운 배로 고기를 잡고 싶다며, 컨디션이 저조했던 자신을 두고 바다에 나갔던 부모님은 그 길로 다시는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내게 가족을 잃은 뒤의 슬픔을 추스를 시간은 주어지지 않았다. 부모님이 그동안 모아둔 돈을 전부 긁어모아 새로운 배를 산 직후란 사실을 깨닫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으니까. 아, 빌어먹을 인생. 신세를 한탄하며 다시 한번 독한 술로 목을 축이자, 알코올이 홧홧 식도를 달군다. 저도 모르는 새 눈물이 차오르며 이내 뺨을 타고 흐르는 것도 느껴진다. 혹여나 누가 볼세라, 무릎에 얼굴을 파묻은 채 감정을 추스르고 있던 그즈음이었을 것이다. 마치 변성기가 오지 않은 소년이 노래를 부르는 듯한 미성의 음색이 귓가에 들려온 건.

이따금 마을에 큰 축제가 있을 때마다 곱게 차려입은 성당의 합창단이 아름다운 성가를 몇 번 들은 적 있다. 그때 내 귓가에 들린 노랫소리는 음악을 잘 모르는 내게도 오랜 시간 합을 맞춰온 합창단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매혹적인 멜로디였다. 무릎 속에 파묻혀 있던 내 얼굴은 마치 꽃향기에 끌린 꿀벌처럼 자연스레 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좇았다. 그리고 그곳에는ㅡ

인간의 상반신과 물고기의 하반신을 가진 존재가 멀리 떨어지지 않은 암초 위에 앉아있었다.

나는 그 생명체가 무엇인지 머리로 알고 있었다. 실제로 본 적 없지만, 어부들 사이에서 전설처럼 회자되는 존재ㅡ 인어.  귀족들 사이에서 고급 약재로 거래되기에 한 번만 잡아도 인생이 역전된다는, 태어나서 한번 마주칠까 말까 한 바다의 황금. 순간 꿈을 꾸는 것인가 싶어 잠시 눈을 비비고 다시 게슴츠레 암초 위를 바라보니, 그 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환청처럼 귓가를 맴돌던 노랫소리도 어느샌가 사라져있었다.

'... 요즘 많이 피곤했나. 평소엔 이렇게 빨리 취하진 않는데.'

이러다 암초 위에서 곯아떨어지겠어. 슬슬 집에 돌아갈까 싶어 일어나려던 찰나, 계속 잔잔했던 바다에서 거센 파도가 내가 앉아있던 암초에 부딪혀 왔다. 난 물에 빠진 생쥐처럼 해수를 듬뿍 뒤집었다. 눈과 코가 따가운데도 해수로 해수를 씻어낼 순 없는 노릇이니. 나는 새어 나오는 눈물과 콧물이 조금이나마 염분을 씻어내길 기다리며 콜록댔다.

"괜찮아요?"

자신을 걱정스레 부르는 미성의 목소리에 따가운 눈을 떠보니 어디서 튀어나온 건지 한 남성이 저를 걱정스레 내려다보고 있었다. 네, 괜찮습니다. 그리 대답하려던 것도 잠시, 나는 이내 그가 상체에 아무것도 걸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가족이 아닌 남성의 맨가슴을 볼 일이 없어 시선을 어디 두어야 할지 몰라 나도 모르게 눈을 내리깔던 찰나,  그의 허리에서부터 인간에겐 없을 녹색의 비늘이 잔뜩 돋아있는 것을 발견했다.

"흐흥~ 그렇게 빤히 바라보면 부끄러운데."

그가 장난스레 웃으며 지적하자, 나는 귓가까지 확 열이 오르는 것을 느꼈다. 다물지 못한 입을 헤 벌린 채 그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음에도, 그는 딱히 불쾌하진 않았던 모양이다. 오히려 그는 어둠 속에서도 빛을 발하는 심해의 생물처럼 선명한 에메랄드빛 눈으로 자신을 흥미롭게 살피다 진주처럼 뽀얀 손을 내밀어 내 손을 서슴없이 붙잡았다.

"비늘 만져볼래요? 자, 사양하지 않으셔도 돼요!"

남자- 아니 그 인어는 내 손을 자기 비늘로 가져갔다. 소싯적부터 일을 하느라 굳은살이 잔뜩 박인 나의 손과 달리, 인어의 흰 손은 부드럽기까지 했다. 그가 내 손을 잡고 본인의 허리 언저리 위에 가져가자, 손가락 끝에서 점액이 덧칠된 매끈한 그의 비늘이 느껴졌다. 조금 전까지는 술 때문에 몽롱해서 꿈을 꾸는 듯한 기분이었는데, 그 이질적인 감각에 이성이 번뜩 돌아왔다.

내 눈앞에 있는 건 진짜 인어다. 비늘을 계속 달여 마시면 수명이 늘어난다는 최상급 약재. 거기까지 생각이 들었을 때, 가장 먼저 나의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장면은 중산층의 아가씨들처럼 프릴이 풍성한 드레스를 입은 자기 모습이었다. 트레이에 생크림이 잔뜩 올려진 디저트를 종류별로 쌓아 올려 올려두고, 무얼 먹을까 행복한 고민을 하며 우아하게 트레이로 손을 뻗는.

"아하하, 기분은 좀 나아졌어요?"

인어가 해맑게 웃으며 그리 묻고서야 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지금 내 걱정을 해주는 건가? 조금 전에 떠올린 달콤한 상상 탓일까. 양심이 콕콕 찔려서, 나는 그의 맑은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고 그만 피해버렸다.

"... 덕분에."

"다행이다~ 요즘 매일 여기 나와서 울고 계셨잖아요?"

그의 말에 나는 얼굴이 화끈거리는 걸 느꼈다. 매일 내가 나와서 우는 모습을 봤다고? 그런 모습을 누군가에게 들켰을 뿐만 아니라, 처음 보는 남자- 아니, 심지어 인간도 아닌 인어에게 동정받았다는 생각에 부끄러움이 밀물처럼 치밀어오른다. 왜 남이 우는 모습을 몰래 훔쳐보는 건데? 그렇게 따지고 싶은 마음이 굴뚝만큼 들었지만, 상대방은 그런 제 마음도 눈치채지 못한 채 계속 쉬지 않고 조잘거렸다.

"역시 용기 내서 말을 걸길 잘했다! 조금 더 일찍 얘기해 볼걸. 있죠, 제 친구는 맨날 인간은 위험하다니, 절대 다가가지 말라니 그런 얘길 해서... 나참. 인간들에겐 상어 같은 이빨도, 복어 같은 독 가시도 없는데 뭐가 그리 무섭다는 건지~ 뭐, 그 녀석은 옛날부터 겁이 참 많긴 했어요! 그렇지만 제법 심미안은 있어서, 녀석이 만들어 주는 산호 화환은 굉장히 예뻐서 인어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좋아요. 아~ 오늘 이렇게 당신과 말을 하게 될 줄 알았더라면, 녀석이 만든 화환을 하나 챙겨오는 건데! 아쉬워라~"

나는 쉬지도 않고 자신의 이야기를 쏟아내는 인어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 상어 같은 이빨도 복어 같은 독 가시도 없는 인간이 널 보면서 가장 먼저 팔아치워야겠다고 생각했단 사실을 알면, 대체 무슨 표정을 지으려나. 순진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속속 털어놓는 인어를 보고 있자니 어쩐지 묘하게 불편한 기분이 들었다.  내 몸만 한 참치의 목을 칠 때는 이렇게 언짢지 않았는데. 생각했던 것 보다 미물보단 인간의 모습에 더 가까운 이 생명체의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어쩐지 가슴이 답답한 기분이 들었다.

"진짜로 제가 위험한 인간이면 어쩌려고 그래요?"

대체 그때 왜 그런 말이 툭 튀어 나갔는지 모르겠다. 잘 구슬려도 부족할 사냥감에게 어째서 그런 삐딱한 질문을 했는지. 그 순진한 모습에 얄팍한 동정심이 들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가슴을 무겁게 짓누르는 이 불편한 기분 때문일까. 그 질문을 들은 인어는 제 비늘만큼인 영롱한 에메랄드빛을 띠는 눈동자로 자신을 빤히 바라보다가, 이내 제게 빙그레 미소 지었다.

"그랬더라면, 처음부터 다가오지 않았을 거예요. 전 감이 제법 좋거든요."

자신 있는 인어의 말투에, 내 입가에는 씁쓸한 미소가 번져나갔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거 못 써먹을 감인데.

"아, 웃으니까 더 예쁘네요!"

인어는 그리 말하며 손을 뻗어 염분과 땀으로 내 얼굴에 거미줄처럼 말라붙어 있던 잔머리를 한올 한올 잡아 천천히 귀 뒤로 넘겨주었다. 분명 아까 인어의 허리를 만졌을 땐 인간보다 훨씬 체온이 낮다고 생각했는데, 어째서 지금은 이 인어의 손길 하나하나가 뜨겁게 느껴질까. 영문을 알 수 없는 기분에 사로잡혀 가슴이 다시 답답해지는 것을 느끼고 숨을 깊게 들이마시던 찰나, 초여름의 햇살처럼 맑게 웃고 있는 그의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어쩐지 당장이라도 꿀이 떨어질 것처럼 다정한 눈길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남자ㅡ 아니, 인어를 보고 있자니, 가슴 한구석이 간질거렸다.

"저기... 이름을 알려주지 않을래요? 내 이름은 라므리예요. 당신은요?"



"그게 인어의 비늘이라는 보장이 있어? 당신 같은 사기꾼을 한두 명 보는 줄 알아? 그까짓 거에 관심 줄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니, 정 돈을 받고 싶으면 살이 통통하게 오른 물고기를 잡아 오는 게 댁에게 더 좋을 거요."

약재상은 코웃음을 치며 손에 쥔 것을 제게 돌려주었다. 약재를 다룬다면서 인어의 비늘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몰라? 그리 묻고 싶은 마음이 목 언저리까지 차올랐지만,  내 초라한 옷차림을 보고 나를 낮잡아 보고 있는 이 남성이 과연 자신의 이야기가 통할까. 나는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조용히 돌아서서 가게의 문지방을 넘었다. 인어의 비늘을 알아볼 만한 상점은 전부 찾아다녔지만, 나와 오랫동안 고기를 거래했던 상인도 이번만큼은 안 된다며 손을 내젓는 것을 보고 깨달았다. 인어를 사냥하지 않고 비늘만 떼서 파는 건 불가능하겠구나. "나를 잘 따르는 인어가 있으니, 그에게서 비늘을 하나씩 떼어서 팔고 싶다." 같은 소리를 했다간 사기꾼에 이어 허풍쟁이란 말을 들으며 쫓겨나겠지. 라므리와 헤어지기 전, 그의 허리춤에서 몰래 뜯어낸 에메랄드빛 비늘 조각이 굳은 살이 잔뜩 박인 손안에서 구겨지는 것을 느꼈다.

불로약을 알아보지도 못하는 멍청이들. 아무도 사지 않는다면, 자신이 달여 마시면 그만이다. 이깟 인생 오래 산다고 해서 뭐가 좋은진 모르겠지만. 그리 생각하며 거리로 나오니, 하늘에선 제 맘도 모르고 추적추적 비가 내리고 있었다.

"하... 지붕 수리도 다 못했는데."

얼마 전부터 천장이 조금씩 내려앉는 바람에 벌어진 틈 사이로 햇빛이 들던 나의 작은 집을 떠올렸다. 지금 제집을 비집고 들어오는 것이 햇빛이 아니라 빗물일 거란 상상만으로 벌써 골이 아프다. 나는 서둘러 빗속을 뛰어갔다. 상체까지 밟은 진흙이 튈 정도로 제법 빠르게 뛰어왔지만, 갑자기 내리기 시작한 폭우는 이미 마룻바닥과 집에 하나밖에 없는 침대를 흠뻑 적신 뒤였다. 조용히 욕지거리를 뱉은 나는 구석이 찌그러진 철제 양동이를 들고 와 이불을 꼭꼭 짜냈다. 하지만 손으로 물기를 제거하는 데는 역시 한계가 있었다. 이 습도에 이 날씨면 곰팡이도 금세 필 텐데.

'... 지긋지긋해.'

인어를 팔면, 물이 새지 않는 집에서 집세 걱정 없이 궂은일을 도맡아 해 줄 메이드를 잔뜩 거느리고 살 수 있겠지. 나는요 며칠간 인어를 사냥할 방법을 모색하며 라므리를 처음 만난 해변에 몇 번 더 만났다. 그는 좋은 아이였다. 인어를 팔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가슴이 꽉 쥐어 들어가는 기분이 들 정도로. 사랑스럽다는 듯 자신을 바라보는 그 에메랄드빛 눈길, 매혹적인 노랫소리 같은 그 또랑또랑한 목소리, 처음 보는 인간에게도 온정을 베풀 수 있는 그 다정한 마음씨. 그에게는 사람을 끌어당기는 강렬한 에너지가 있었다. 그가 인간이었더라면 분명 속절없이 그에게 끌렸으리라. 그러나 라므리는 인간이 아니라 인어였다. 아직 자신이 그를 살려둔 건 참 이례적인 일이었다. 다른 어부들이 그를 발견했더라면 진작에 그의 숨통을 끊어 내다 팔았을 테니까. 그렇지 않아도 그 아이는 순수하니 자신이 아닌 다른 인간들에게 언제 말을 걸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이러다가 라므리가 다른 인간의 손에 들어가면 어떡하지? 내가 아닌 다른 이가 라므리를 판 돈으로 부귀영화를 누리게 된다면? 나는 고개를 들어 젖은 침대 위의 벽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내 아버지가 생전에 대형 어류를 잡을 때 사용했던 녹슨 작살이 웅장한 자태를 뽐내며 걸려있었다. 나는 천천히 벽으로 다가가 거대한 작살을 향해 손을 뻗었다.

"역시 그건 아깝잖아."

스스로 그리 말하며, 나는 작살을 꽉 움켜쥐었다.




나는 그날 밤, 작살 끝에 달린 밧줄을 손등에 감고 기울어질 듯한 오두막집을 나섰다.  그날은 은하수가 뚜렷이 보일 정도로 별이 밝아서 낮만큼은 아니더라도 사냥하기엔 충분히 밝은 밤이었다.

작살을 던지고 나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라므리는 제법 무거워 보였는데. 손수레를 가져가야 하나. 아니, 오히려 모래사장에 바퀴가 빠져서 힘들지도. 차라리 그물에 넣어서 질질 끌고 오는 편이 좋을까.  아니, 그러면 그물이 상할 텐데. 하지만 인어를 팔고 나면 더 이상 그물은 필요 없지 않나? 그냥 편하게 작살로 잡은 참치를 들고 올 때처럼 등에 짊어지고 돌아오는게..

거기까지 상상하니 어쩐지 토기가 몰려와서, 나는 결국 그날 먹은 저녁을 전부 뒤뜰에 게워 내고 말았다. 거사를 치를 예정이라 일부러 들어가지 않는 수프를 목구멍에 억지로 처넣었건만, 라므리의 모습이 언뜻 눈앞에 환상처럼 스쳐 지나갈 때마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 녀석은 인어다. 인어. 나는 어부고. 그 녀석은 사냥감이고, 나는 사냥꾼이다.

몇 번이고 같은 말을 되뇌며, 나는 내가 살고 있는 집을 돌아보았다. 인어를 잡지 못하면 며칠 내내 내린 비로 수리도 못 한 채 엉망이 된 이 지긋지긋한 집에서 계속 살아야 한다. 무너지는 마음을 다잡으며, 나는 비틀비틀 발걸음을 옮겼다. 두근두근. 심장이 평소보다 세차게 펌프질한다. 미래를 생각하면 분명 옳은 선택인데. 해안가로 나아갈수록 까끌까끌한 모래사장이 마치 늪처럼 발목을 집어삼키는 기분이 들었다.

내가 하려는 건 그저 사냥이 맞는가?  인간의 말을 하고, 사람의 얼굴을 한 그에게 사냥이라는 말을 써도 괜찮은가?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눈앞이 흐릿해진다.

'눈 딱 감고 해치우는 거야. 눈 딱 감고 해치우면 괜찮을 거야. 분명 괜찮을 거야...'

그리 생각하는 사이, 귓가에 파도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차라리 라므리가 오지 않았으면 좋았을 텐데. 불행히도, 저 멀리 암초에 걸터앉아 평소처럼 자신을 기다리는 라므리가 보인다. 자박자박, 모래를 밟는 소리를 듣고 그가 환하게 웃으며 돌아본다. 자신의 초췌한 모습을 담은 그의 녹안이 어둠 속에서 짐승의 눈처럼 이채를 띄며 환하게 빛난다.

"왔어요? 늦어서 걱정했잖아요!"

아무것도 모르고 상체를 내밀며 나를 반기는 그의 허리춤에는 색이 화려한 산호 조각들이 잔뜩 걸려있었다. 내가 말없이 그의 허리춤을 내려다보자, 라므리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앗, 제가 저번에 말한 산호 화환이요! 기억나세요? 제 친구가 제법 잘 만든다고 말씀드렸던 그거예요! 예쁘죠? 괜찮으시면 제가 직접 씌워드려도 될까요?"

그리 말하며 그는 제게 맑게 미소 짓는다. 라므리. 나는 네 숨통을 끊을 생각으로 이 자리에 나왔는데, 너는 오늘도 내게 한없이 다정하구나. 라므리, 나는 어쩌면 좋을까.

"우와, 근데 손에 든 그건 뭐예요? 인간의 도구인가요? 엄청나게 크네요? 이건 대체 어디다 쓰는 건가요?"

작살을 발견하고 눈을 반짝이며 순수하게 질문을 던지는 그를 보고 있자니, 발끝부터 무너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손이 덜덜 떨리고 숨이 가빠온다. 여기까지 와서 나는 대체 무슨 겁을 먹고 있는 건지. 사냥감의 눈조차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는 자신이 한탄스러워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 입에선 어느새 자조 섞인 웃음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 ○○님?"

그제야 평소와는 다른 내 상태를 눈치챈 듯, 라므리가 걱정스레 제 이름을 부른다. 차라리 부르지 말지. 내 이름 따윌 친근하게 부르지 않았더라면 더 좋을 텐데. 작살에 들어간 손에 힘이 들어간다.

'눈 딱 감고... 딱 한 번만 저지르는거야.'

그리 생각하며 작살을 쥐고 치켜들던 그 순간이었다. 바들바들 떨리던 다리가 고꾸라지고 시야가 뒤집힌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자각조차 하기도 전에, 나는 라므리의 품 안에 안겨있었다. 머리가 빙빙 돌고, 처음부터 심장이 가슴이 아니라 귓가에 있었던 것처럼 쿵쾅쿵쾅 미친 듯이 내달리는 심장 소리가 들린다. 눈앞이 새까맣게 물들기 전, 마지막으로 본 것은 자신을 단죄하듯 내려보는 수많은 별과 이런 자신의 이름을 다급히 외치는 라므리의 아름다운 목소리였다.




"○○님, 제발 눈을 떠보세요... "

이마를 쓸어올리는 부드러운 감촉을 느끼며 나는 게슴츠레 눈을 떴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어슴푸레한 새벽빛과, 자신을 걱정스레 내려다보는 녹색 눈동자였다. 마치 심연 속의 포식자처럼 어둠 속에서도 반짝이는 라므리의 녹안은 좋게라도 인간의 것이라고 부를 순 없으리라. 그러나 그의 이질적인 눈동자를 보니, 이상하리만큼 안도감이 몰려왔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구나. 멍청하게 기절했어.

그 허름한 집으로 돌아가 곰팡내 나는 침대에 몸을 뉘면 아마 오늘 있었던 일을 후회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만큼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감격스러워서, 나는 그만 왈칵 눈물을 쏟고 말았다.

"우, 울지 마세요, ○○님!"

라므리는 그런 저를 보고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는 듯 허둥지둥거리며 눈물이 내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족족 양손으로 급히 훔쳐낸다. 울고 있는 건 난데, 아무것도 모르면서 왜 본인이 더 울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지.

"○○님이 울면 저도 마음이 안 좋아요. 무엇이 그렇게 ○○님을 힘들게 해서, ○○님은 볼 때마다 항상 울고 계신 거죠?"

"라므리는 알지 못하는 게 나을 텐데."

"그럴 리 없어요! ○○님에 대해 조금이라도 더 알고 싶은걸요. 그, 그렇지만 힘들게 말씀하실 필요는 없고...!  저는 준비될 때까지 기다릴 수 있어요."

라므리는 그리 말하며 나의 뺨을 타고 흐르던 나의 마지막 눈물을 닦아냈다. 그의 가슴에 기대자, 인간의 심장처럼 콩콩거리는 심장 소리가 들린다. 아아, 내가 눈 딱 감고 저지르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지 않은가. 지금만큼 누군가의 포옹이 간절하게 필요한 적이 있던가. 내가 그의 품속으로 좀 더 몸을 기울이자, 어쩔 줄 몰라 굳어있던 라므리는 이내 양손으로 내 어깨를 감쌌다. 비록 인간보다 낮은 체온이었지만 그 서늘함 속에서도 분명 지울 수 없는 생명의 온기가 느껴졌다. 우리는 한참이나 그렇게 끌어안은 채 서로의 존재를 확인했다. 라므리가 침묵을 깨기 전까진.

"저기.. ○○님. 혹시 육지에 있는 것들이 ○○님을 괴롭게 만들고 있는 거라면, 저랑 같이 바다로 가지 않으시겠어요?"

그의 말에 나는 이해를 하지 못하고 눈을 깜빡이며 라므리를 올려다보았다. 라므리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 나갔다.

"저희 선조 중에는 인간을 사랑해서 인간이 되려 한 인어가 있었다고 해요. 그녀는 자신의 목소리를 다리와 맞바꾸어 육지로 올라갔는데... 사랑하는 남자와 이루어지지 못한 채 다시 바다로 돌아왔다더군요. 어린 인어들 사이에선 유명한 이야기예요. 그녀는 물거품이 되어 바다의 일부가 되었다고. 그렇지만 실은 알잖아요. 아무리 한때 인어였다 한들, 인간이 바다에 몸을 던지면 어떻게 되는지. 꼬리지느러미를 잃은 인어의 넋을 달래기 위해, 당시의 인어들은 힘을 모아 아주 강력한 저주를 만들었다고 해요. 다시는 그 어떤 인간도 사랑에 빠진 인어에게서 도망치지 못하도록, 사랑하는 인어의 입술을 훔친 이는 다시는 자기 다리로 걸어서 육지로 도망치지 못하는 저주를 받게 된다고..."

"인어와 입을 맞추면, 더 이상 인간으로 살 수 없단 말이야?"

"저도 자세한 건 몰라요. 어떠한 이유에서인지, 인어들은 아주 오랫동안 인간들에게 노출되길 꺼려왔고ㅡ 저도 태어나서 이렇게 인간을 가까이에서 보는 건 처음이니까요."

그리 말하는 라므리의 숨결이 눈꺼풀 위로 느껴진다. 그는 마치 결연한 것을 다짐한 듯한 목소리로 나직이 말을 이었다.

"저는...  육지로 나가서 ○○님을 힘들게 하는 일을 해결할 수도, 위기로부터 지켜드릴 수도 없겠죠. 그게 너무나도 절 괴롭게 만들어요. 하지만 ○○님이 저와 함께 바다로 와주신다면... 저는 절 믿고 따라와 준 ○○님을 매일 웃게 해드릴 거예요. 물, 물론 만난 지 얼마 안 된 남자에게 이런 말을 들어도 그다지 와닿지는 않겠지만... 아하, 하하하... 가볍게 하는 말은 아닌데... 그, 뭔가 좀 부끄럽네요. "

나는 부끄럽다면서도 쉬지 않고 말을 이어 나가는 라므리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참으로 이상한 기분이다. 몇 년씩이고 얼굴을 보고 살을 부대끼며 살아왔던 인간들보다 왜 이 인어의 말을 믿고 싶어지는지. 모든 것을 버리고 라므리와 함께 미지의 바닷속으로 도망칠 수 있다는 이 동화 같은 이야기가 왜 이토록 반갑게 들리는지.

"그럼 한번 해볼까, 입맞춤."

"예에?!"

덤덤히 내가 꺼낸 말에, 라므리의 진줏빛 뺨이 순식간에 잘 익은 토마토처럼 달아올랐다. 분명 본인이 먼저 꺼낸 이야기면서 저렇게 반응하니 괜스레 나까지 부끄러운 기분이 들었다. 나름 용기를 내서 꺼낸 말인데. 나는 애써 민망한 기분을 감추려 하며 목덜미를 매만졌다.

"그... 어차피 전설일 뿐이면 아무 일도 없을 테고."

"그건 그렇지만... 그, 저, 그게, 처음이라... 아니 그, ○○님과 하는 게 싫은 건 아닌데요! 진짜 아닌데!"

그의 귀여운 변명에 픽,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래, 누가 네 발그레한 얼굴을 보고 싫다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나는 양손을 뻗어 그의 부드러운 뺨을 감쌌다.

"괜찮아, 눈 딱 감고 해버리자."

키스 한 번은 인어사냥보다는 훨씬 쉽겠지. 자신의 저돌적인 언행에 할 말을 잃었는지, 라므리는 어버버하다 에라 모르겠다는 듯 자신이 시킨 대로 눈을 딱 감아버렸다. 아, 어쩜 이렇게 사랑스러울까? 나는 아까와는 다른 느낌으로 쥐어 들어가는 심장을 느끼며 천천히 그에게로 다가갔다.



"당신과 항상 거래하던 아이는 요즘 안 보이네."

"누구?"

"왜, 그. 부모 둘 다 고기 잡으러 나갔다가 폭풍우에 휘말린 뒤로, 혼자서 열심히 고기 잡던 그 애."

"아, 그 녀석 말인가."

상인은 갈색 머리를 질끈 묶고 자신의 가게에 고기를 팔러 오던 젊은 여인을 떠올렸다. 얼마 전 그는 여인이 살던 오두막집의 주인에게서 제법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들었다. 집세를 받으러 가보니 집안은 천장에서 샌 빗물로 엉망진창인 데다가, 오랫동안 사람이 들지 않았는지 쥐랑 벌레가 들끓었다고. 집 여기저기서 나뒹굴고 있는 빈 술병 이외엔 돈이 될 만한 것도 없어서 집주인은 그녀가 돈을 내지 않고 도망갔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그러나 냉정히 생각해 보니 막상 야반도주라고 보기엔 미심쩍은 점도 몇 가지 있었다. 짐을 싸서 나갔다기엔 옷장에는 헌 옷이 전부 그대로 있고, 냄비에는 언제 마지막으로 먹었는지 모를 잡탕 수프가 그대로 곪아있어서 날벌레가 들끓고 있었다고 들었다.

고기가 잡히지 않는다며 잡생선마저 들고 와 제게 어떻게든 값을 쳐줄 수 없냐며 애처롭게 부탁하던 그녀의 모습이 스쳐 지나간다. 그 이야기를 들은 지 어연 한 달이 지나가는 지금, 이미 후회해도 소용없으리라. 남자는 그리 생각하며 다른 어부들이 잡아 온 물고기를 마저 손질했다.

"난들 알겠나. 그렇게 잘 알던 사이도 아니었는데."

가까운 친인척도  지인도 없었던 한 젊은 여인의 실종은 누구의 관심도 끌지 못한 채 그렇게 쉽게 묻혀버리고 말았다. 그 사실이 그녀에게 불행인지 다행인지는, 아마 먼바다에서 자유로이 노래를 부르며 짝과 함께 유영하고 있을 그녀만이 알고 있으리라.

* 밑의 결제선은 채널에 문제가 생기거나 사라지더라도 작품을 영구 소장하고 싶은 분들을 위해 만들어진 결제란입니다. 아래엔 아무것도 없습니다. 소장본의 금액은 글자수에 맞춰 책정하였습니다.

카테고리
#기타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