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eling of Love

필링오브러브 01

♬ Paramore - Ain't It Fun

빠앙-!

귓구멍에 때려박히는 경적소리에 수희는 문득 정신을 차렸다. 청각에 집중되었던 신경을 분산시키자 이내 제 앞에서 큰 소리로 반복해서 경적 소리를 울리는 버스가 보였다. 거 학생! 안 타고 뭐해! 그제서야 수희는 제가 차에 타지 않은 마지막 사람인 것을 깨달았다. 다급히 이어폰을 빼며 스쿨버스에 올라탔다. 얼마 남지 않은 공간을 눈으로 훝으며 겨우 자리를 잡으니 차가 출발했다. 작은 한숨이 새어나왔다. 답지 않은 실수였다. 마음을 추스르고 창 밖으로 고개를 돌리니 아직 새 잎조차 돋아나지 않은 나무들의 앙상한 가지들이 눈에 들어왔다. 하긴, 3월은 봄이라기엔 생각보다 춥지. 마이 카라를 만지작 거리며 생각했다. 새 교복의 뻣뻣한 촉감은 매번 낯설고 오묘한 기분이었다. 귓가가 허전했다. 수희는 차에 탄다고 주머니에 아무렇게나 쑤셔넣은 이어폰을 다시 꺼냈다. 귀를 막고 음악을 재생하니 끊겼던 파라모어의 곡이 다시 울려퍼졌다.

3월의 바람은 그다지 매섭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부드럽다거나 따뜻하지도 않았다. 수희는 눈꺼풀을 헤집고 불어와서는 가볍게 뺨에 앉았다 떨어지는 변덕스러운 공기의 흐름을 느끼며 목도리를 여몄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추위를 잘 타는 저에게는 그저 겨울 날씨일 뿐이다. 조잡하게 얽힌 두꺼운 털실 사이로 흰 입김이 피어올랐다. 주변을 둘러보니 당연하게도 같은 교복을 입은 사람들밖에 없었다. 흘러가는 사람들을 따라 수희는 같은 곳을 향했다.

 

아마 매년 같은 말을 반복해서 외쳐댔을 교장의 훈화를 들으며 수희는 생각했다. 이번엔 얼마나 오래 있을 수 있을까. 부모님의 이전을 따라 잦은 전학을 거듭했던 수희는 스쳐지나가는 인연과 이별에 익숙해졌다. 덕분에 그는 적당한 거리를 두는 법을 일찍히 터득했다. 웃어주고, 인사를 나누고, 너무 가깝게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무리에 끼어들지 못 할 정도는 아니게. 저는 모두와 친했지만 누구와도 친밀해지지는 못했다. 어쩌면 올해도 별반 다를게 없는 일 년을 보내게 될 지도 모른다. 적당히, 언제나처럼 적당히 그냥 그렇게. 그렇지만, 고등학교니까. 정말 새로운 시작이잖아. 조금은 정착하게 될 지도 모르는 일이고. 응. 여러가지 잡다한 생각들이 머릿속을 굴러갔다. 그럼 이상으로 학생 여러분들의 본교 입학을 환영합니다... .... 환영의 박수가 강당에 울려퍼졌다. 꾸벅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고는 모두 발을 동동구르며 투덜거렸다. 강당 존나 추워. 끝났으면 빨리 반에나 가게해주지. 또르르 눈알이 굴러갔다. 서로 아는 얼굴이 많나봐. 친해보여. 수희는 선생님들의 지시를 기다리며 신발코로 애꿎은 강당 바닥을 톡톡 건드렸다.

인도에 따라 교실로 도착하니 벌써부터 삼삼오오 무리를 지은 애들끼리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야 어디갈래? 당빠 뒷자리지 빨리 가! 자리를 선점하려는 묘한 눈치게임의 흐름이 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 수희는 흐름을 따라 적당한 자리를 모색했다. 사실 그보다는 그냥 남는 자리에 대충 들어가는 것에 가깝긴 했다. 창가 제일 앞자리가 비어있었다. 그래 뭐. 복도쪽보다야 창가쪽이 조용하기도 하고, 나름 사각지대이기도 하고... 공부에 집중하기도 좋겠네.

"안녕! 와 너 진짜 잘생겼다아."

가방을 걸고 짐을 정리하는 도중에 목소리가 들려 왔다. 고개를 돌리니 검정 단발의 여자애가 제 책상 앞에 쪼그려 앉은 채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수희는 눈을 꿈뻑 감았다 뜨며 불쑥 제 눈앞에 나타난 인물을 파악하고자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곧장 만연한 미소로,

"고마워, 너도 귀여워."

"왐마야! 얘들아 얘 좀 봐! 이거 혹시 작업, 뭐 그런거야?"

"그러려던 건 아니었는데, 나 그정도로 매력있어?"

"얘들아 얘 요물이다!!!"

그러더니 곧 손을 파닥이며 누군갈 불렀다. 손짓을 따라 시선을 돌리니 느릿하게 제 쪽으로 다가오는 사람이 보였다. 사탕을 물고 목에 하늘색 헤드셋을 걸친 머리가 긴 다른 여자애가 옆에 와서 섰다. 갑작스런 상황에 수희는 눈 앞에 있던 애와 다가온 사람을 번갈아 가며 쳐다봤다. 채 파악을 하기도 전에 다시 앞에서 조잘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녕, 나 은정이. 이은정! 얘는 정윤화. 그리고 저기 입에 들어간거 다 먹지도 않았는데 빵 또 입에 쳐넣으면서 오고 있는 게 최도재. 걍 돼지야 돼지."

"야. 니 또 내 험담까고 있었지."

"어쩌라고. 친히 자기소개 대신해주는데 감사합니다는 못 할 망정?"

"와 졸라 뻔뻔해. 새친구야, 니가 봐도 이건 좀 아니다 싶지 않아? 초면에 막 뒷담을 까네?"

대화의 폭이 이리저리 크게 튀는 탓에 조금 얼떨떨했다. 어느샌가 길죽한 남자애가 입에 빵을 문 채로 다가오고 있었다.

"아 됐어! 무시해 친구야. 야, 이제 너 빼고 얘랑 다닐거다 돼지야."

자신을 이은정이라 소개한 여자애가 남자애한테 혓바닥을 쭉 내밀어보이더니 이내 제쪽으로 붙었다. 뭐래, 어짜피 니 앞집이 나다 땅딸보야. 아 저 새끼가 키를 건드리네? 여자애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남자애한테 성큼 다가가더니 뭐라 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말티즈 같기도 하고... 수희는 옆에서 한바탕 벌어지는 논쟁을 얼떨떨하게 지켜보다가 슬금 의자를 끌고와 제 뒷 자리에 자리를 잡고 앉은 다른 애와 눈이 마주쳤다. 아까 정윤화라고 했었나. 그 애는 소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저를 쳐다보더니 제 앞으로 불쑥 손을 들이밀었다.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저도 모르게 흠칫 몸을 떨었다. 정윤화는 그 모습을 가만 보다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 반가워. 정윤화. 너는?"

아. 맞다. 너무 소란스러운 까닭에 자기소개하는 것도 까먹고 있었다. 아, 나는 수희. 설수희. 반가워. 조금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럽게 손을 맞잡았다. 쟤들 맨날 저래. 별로 신경 안 쓰는 게 속 편할 거야. 어, 응... 수희는 살짝 흔들리는 손을 바라보며 멋쩍게 웃음지었다. 윤화는 손을 풀고 와그작 사탕을 씹었다가, 눈동자를 한 바퀴 굴리더니 제게 질문했다. 너... 여기 사람 아니지. 수희는 제가 느와르 영화의 한장면이라도 찍고있었나 싶었다. 무슨 의미인가 싶어 멀뚱히 바라보니 옆에서 밝은 목소리가 다시끔 들려왔다.

"어 맞아! 나 친구 너 처음봐서 말 걸었던 거거든! 너 여기 근처에 살던 애 아니지?"

"어? 응 맞아. 어떻게 알았어?"

"여기 근처에 중학교가 별로 없어서 거의 다 아는 얼굴이거든! 근데 너는 진짜로 처음보는 얼굴이길래."

내가 또 우리 동네 인맥왕이거든. 히히. 저쪽에서 투닥거리다 어느새 저와 윤화 사이에 있는 책상을 잡고 쪼그려 앉은 은정이 저를 올려다보며 해맑은 웃음을 지어보였다. 그 위로 불쑥 나타난 손이 은정의 머리를 꾹 눌렀다. 너 공부 안 하고 맨날 놀러만 다녔단 소리를 자랑스럽게 한다. 아! 누르지 말라고! 키 안 큰다고! 넌 이미 끝났어. 은정의 말을 가볍게 무시한 최도재가 저를 바라봤다. 얘가 너랑 친구하고 싶대. 잘 부탁해. 빵 먹을래? 걔는 곧 손목에 걸려있던 검은색 봉지를 제게 열어보였다. 어어... 나 괜찮은데. 친구 기념이지. 싫어하는 빵 있어? 어? 아니 딱히 싫어 하는 건 없어. 그럼 초코 소라빵? 최도재가 제 손에 소라빵을 안겨주었다. 그거 뇌물이니까. 너 우리랑 같이 다녀야 해. 어?

"수희라고 했지? 수희야 나, 아니 우리랑 친구 해주라!"

"어어?"

은정은 제 머리위의 손을 떨쳐내고 강아지처럼 눈을 반짝이며 저를 바라봤다. 당혹스러움에 고개를 돌려봐도 마주치는 건 사탕을 씹으며 저를 가만 바라보는 정윤화의 시선이나 어깨를 으쓱하며 제 손위의 빵을 가르키며 실 웃는 최도재 뿐이었다. 응? 안 돼? 어어 그래... 수희는 파도처럼 밀려오는 세 사람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와아! 아... 근데 맨 앞자리는 조금 그런데... 이미 떠드느라 자리 다 뺐겼어 앉아. 설수희는 오른쪽, 뒤, 대각선 뒤까지 전부 포위당했다. 한차례 폭풍이 지나간 것 같았다. 수많은 전학과 입학식 중에서도 오늘만큼 강렬한 날은 또 없을 것이라 수희는 생각했다. 담임 선생님의 말을 듣는 동안 수희는 책상 밑에서 초코 소라빵을 만지작 거렸다. 친구... 생겼네. 이게 맞나 싶지만 결과적으로는 뭐어... 잘 된 거려나. 낯선 곳에서 처음 맞는 새학기라 긴장했던게 무색할 지경이었다. 입술 사이로 웃음이 비집고 새어나왔다. 옆자리에 앉은 은정은 눈이 마주치자 웃으며 손을 흔들어보였다. 수희는 따라 마주 손인사를 해주었다.

필링오브러브 Feeling of Love 01

그러니까, 그동안 수희는 걱정했던 것이 부질없을 만큼 문제없고 평범한 학기의 시작을 보내는 중이었다. 이은정은 저를 보면 매번 오래된 친구처럼 웃으며 뛰어와 팔짱을 끼며 안겼고, 정윤화나 최도재 역시 처음 만난 사이치고는 저를 편하게 대했다. 친화력이 정말 좋은 애들이구나 싶었다. 그도 그럴게 동네 인맥왕이라던 이은정의 말은 거짓이 아닌지 복도를 지나는 같은 학년 애들부터 선배들까지 은정만 보면 다들, 어 은정이 안녕~ 하며 인사를 건내는 것이었다. 너 진짜... 발 넓구나... 엥? 아냐 우리 동네 별로 크지도 않으니까 그렇지~ 설수희 그거 왜 그런지 내가 말해 줬었잖아. 얘 맨날 밖에 놀러 싸돌아다녀서 그런 거라니까? 아! 좀! 수희야 쟤가 자꾸 시비털어! 하하... 최도재와 이은정은 매번 이렇게 싸우곤 했는데, 윤화의 말처럼 그냥 습관적인 일인 것 같았다. 처음에는 살짝 걱정하기도 했는데 신경 쓸 필요가 없음을 깨달은 건 얼마 안 가서 알았다. 며칠간 들은 말로는 둘은 유치원에 가기도 전부터 알고 지낸 소꿉친구 사이인 것 같았고, 이렇게 싸우는 것 처럼 보여도 둘은 항상 꼭 붙어다녔다. 미운 정이라고 하잖아. 그런 거 아닐까. 그게 아닐 수도 있고 뭐. 윤화가 사탕을 굴리며 말했다.

정윤화는 중학교 친구라고 했다. 나한테도 그랬어. 한 나흘정도 같이 지내다가, 급식을 먹고 매점으로 뛰쳐간 두 사람을 기다리던 도중 문득 그런 말을 건냈다. 뭘? 너한테 그런 것 처럼 불쑥. 그래? 음... 은정이는 친화력이 엄청 좋네. 뭐어, 그런거지. 그런 애더라고. 사탕 먹을래? 윤화가 사과맛 막대사탕을 꺼내 건냈다. 아, 고마워. 멀리서 최도재의 목소리가 들렸다. 정윤화 너 또 사탕 가져왔냐? 이빨 다 난리나겠는데. 치과 진료비 니가 내주기로 했으니까 괜찮음. 최도재... 너... 윤화 지갑이야? 헐, 그럼 윤화야 오늘 떡볶이 사줘! ㅇㅇ. 쟤한테 계산하라 해. 아니 뭐래?! 앗싸! 수희야 오늘 떡볶이 먹으러 가자! 은정이 달려와서는 스스럼없이 제 오른쪽 팔에 매달렸다. 그런 나날의 연속이었다. 설수희는 생각보다 물렁한 사람이라, 낯설면서도 이런 순간들이 내심 즐거웠을 지도 모르겠다.

삼인방과 수희네 집은 거리가 있는 편이었다. 애초에 설수희는 스쿨버스를 타고 등교했으며, 셋은 걸어서 학교를 다녔다. 그탓에 당연히 등하교는 저 혼자 할 수밖에 없었다. 떡볶이 맛있었다! 와... 내 지갑 다 털렸음... 수희 잘 가! 어어... 가냐? 설수희 잘 가라... 최도재는 힘없이 손을 펄럭였다. 윤화도 고개를 살짝 까닥여 인사했다. 은정이 손을 방방 흔들며 멀어졌다. 골목을 돌 때까지도 계속 팔을 휘젓는 모습이 조금 귀여웠다. 버스 정류장에 선 수희는 그에 맞춰 은정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어줬다. 세 사람이 떠난 거리는 평소보다 더 고요했다. 수희는 골목 끝을 빤히 보다가 다시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수희는 맨날 뭐 들어?"

등굣길에 와락 등 뒤로 메달려 온 은정이 물었다. 뒤에서 느껴지는 무게감에 이어폰을 빼던 수희가 얼굴에 물음표를 띄웠다. 수희도 노래 듣는 거 좋아해? 좋아하는 가수 있어? 아니면 설마... 너 공부하는 거냐! 혼자 조잘대던 은정이 이것저것 이야기를 하다가 마지막 문장을 내뱉으며 펄쩍 뛰며 제게서 떨어졌다. 그 뒤로 입에 식빵을 문 채 걸어오던 최도재 역시 과장된 표정을 지었다.

"너... 설마 등하교길에 영어듣기하고 막 그러니? 너 사실 전교에서 열 손가락 안에 꼽는 우등생이라던가 그래?!"

"바보들아."

윤화가 두 사람의 뒷통수를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보면서 다가왔다. 수희는 가볍게 웃었다.

"그런 거 아냐. 그냥 노래 듣고 있는 거지. 심심하니까..."

"엥 수희 많이 심심했어?! 나로는 부족했던건가!"

크윽, 하며 제 심장을 부여잡곤 과장된 포즈를 취한 은정이 저를 다시 한번 껴안았다. 미안해 수희야 내가 널 만족(?)시킬 수 있도록 더더 노력할게...! 은정의 무게에 몸이 밀리는 걸 정윤화가 받쳐줬다. 이은정 조심해. 수희 넘어트릴 작정이야?

"아니아니, 그렇다기 보다는 뭐라고 하지... 그러니까 약간 습관 같은 거라서."

은정에게 손을 내밀어 휘젓다가 조금 멋쩍어져 이어폰의 고무를 만지작거렸다. 수희는 생각이 많을 때나, 혹은 생각이 없을 때면 귀에 이어폰을 꽃았다. 시간의 공백을 때우기에 음악만한 게 없기도 했다. 수희는 무리지어 다닐 때보다는 혼자일 때가 많았고, 아무리 익숙하다고 해도 혼자인 순간들은 제법 적막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는, 이렇다 저렇다 해도 사춘기를 지내는 청소년이기도 했다. 사소한 일도 복잡한 일도 잊고 싶을 때가 있는 법이었다. 물론 이런 속사정까지 늘어놓기에는 부끄러워 금방 입을 다물고 웃어보였다.

그렇구나, 하고 제 얼굴을 가만 바라보던 은정이 마침 생각이 났다는 듯 뒷말을 덧붙였다. 윤화도 좋아하는데 노래! 제 이름이 불린 윤화가 화들짝 놀라며 은정의 입을 틀어막았다. 너... 내가... 아니다 거기까지만 말해. 읍읍! 잘한다 정윤화! 은정은 윤화에게 붙잡힌 채로 옆에서 부추기는 최도재를 흘겨봤다. 수희는 그 풍경을 잠깐 동안 바라보다 뒷목을 긁적이곤 살짝 웃어보였다. 지각하겠다 얘들아, 들어가자. 겨우 윤화의 손을 떼어낸 은정이 무언갈 깨달은 듯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외쳤다. 아 맞다! 나 어제 영어 숙제 덜했는데! 오늘 영어 1교시인데. 으악! 얘들아 빨리 가자! 그래 그래. 수희는 다급한 은정을 따라 발걸음을 맞춰주려다 제 옷깃을 잡는 손길에 움직임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윤화가 옷을 잡고 있었다. 설수희, 쟤 말 다 들어주지 마. 숙제 안 한 건 자긴데 혼자 알아서 해야지. 미묘하게 평소보다 뚱한 목소리였다. 뭐어? 이러기야? 은정은 눈썹을 한껏 늘어뜨리며 불쌍한 얼굴을 했으나 통하지는 않았다. 결국 발을 동동 구르다말고 너어 정윤화 두고봐라! 라고 외치더니 먼저 교실로 뛰어갔다. 멀어지는 뒷모습을 끔벅이며 바라보고 있으니 곧 옷을 잡아끌던 힘이 사라졌다. 가자. 정윤화는 짧은 말을 건네고 성큼 발걸음을 옮겨 앞섰다. 흔치 않게 귓가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눈알을 도르르 굴리다가 옆에 서있던 눈이 마주친 최도재는 어깨를 으쓱이며 남아있던 마지막 빵 한 입을 입에 털어넣었다. 안 가? 늦겠다며. 어어, 가야지. 수희는 뒤를 따라 마저 걸음을 옮겼다. 뭔가 한바탕 지나간 것 같긴 한데. 음, 윤화는 쑥쓰러움을 좀 타는 타입인가보다. 안 그런 줄 알았는데. 실없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볍게 지나갔다.

결국 숙제를 못 끝마친 은정은 영어에게 대차게 깨진 이후로 쭉 풀이 죽은 상태였다. 그러게 숙제는 제때제때 하라 했잖아. 하지만 진짜 있는 줄 몰랐다니까. 말이라도 좀 해주지... 자기가 수업시간에 집중 안 한 걸 남탓으로 돌리네. 히이잉. 인형에 얼굴을 박고 웅얼거리는 탓에 말소리가 선명하지 못했다. 수희는 멋쩍은 미소로 심심한 사과의 말을 건넸다. 미안, 난 네가 알고있는 줄 알았어. 말해줄 걸 그랬네. 아니야 수희야 내가 바보 똘추 빡대가리여서 그래... 비적거리며 겨우 인형 사이에 파묻혔던 얼굴을 드러낸 은정이 말없이 정윤화쪽을 바라봤다. 뭐 왜. 힐끗거리며 미묘하게 윤화와 어긋난 어딘가의 허공을 응시하는 은정의 얼굴이 아련하다. 저거 또 헛소리 떼쟁이 시동걸린 것 같은데. 누군가(라고 해봤자 이런 말 할 사람은 최도재밖에 없었다)의 작은 목소리가 흘러가듯 귀를 지나갔다.

"아... 윤화가 노래 불러주면 기운 날 것 같은데..."

아 노래방 가고 싶은데... 다른 사람이 불러주는 위로와 응원이 듣고 싶은데... 다같이 가서 날 위로해주면 좋겠는데... 속이 뻔히 보이는 말을 꿍얼거리는 목소리가 전혀 밉지 않았다. 엎드린 자세 그대로 슬금슬금 제 쪽으로 다가온 은정은 비밀스러운 이야기라도 하듯 잔뜩 목소리를 낮추며 분위기를 잡았다. 수희는 은정의 목소리를 제대로 듣기 위해 허리를 숙여보였다. 수희도 노래 좋아한다고 했잖아. 같이 갈 거지? 오늘 학원 없는 날인 거 다 알아. 은정은 제 옆구리를 쿡 찌르며 씨익 웃어보였다. 같이 노래방 가자는 얘기를 비밀 접선 하는 것 마냥 이렇게 은밀하게 하는 거야? 어허! 그런 사소한 건 신경쓰지 말고! 이 조그만 말괄량이 소녀는 아무리 엉뚱한 짓을 해도 얄밉게 보이지 않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그러고보니 이번에는 한번도 가 본 적이 없구나. 가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깊게 생각 할 이유도 없지 않은가. 수희는 고개를 짧게 끄덕이며 답했다. 좋아, 갈게. 수행평가 말고 남들 앞에서 노래 불러본 적은 없어서 조금 부끄럽긴 한데, 괜찮겠지 뭐. 와! 오늘 저녁은 그럼 노래방인거다! 제가 긍정적인 답을 내놓은 게 맘에 들었는지 은정은 자리에서 상체를 벌떡 일으키곤 바로 뒤를 돌았다. 수희 간대! 괜찮지? 다들 갈 거지? 아, 중간에 먼저 빠져도 괜찮다면. 최도재가 고개를 끄덕였다. 은정은 마지막 참가자의 답을 듣기 위해서 몸을 쭉 빼밀고 다가갔다. 이미 확신이 옅게 깔린 미소를 지은 은정이 윤화를 바라봤다.

"윤화도 갈 거지? 우리 입학하고 나서 노래방 한 번도 못 갔잖아. 노래방 가는 거 좋아하잖아."

응? 응? 답변을 종용하듯 은정의 눈빛이 반짝인다. 혹시라도 불편한 거려나, 싶어서 수희는 윤화의 얼굴을 살폈다. 당황은 해보이지만 딱히 불편한 눈치는 아닌 것 같았다. 하긴, 나보다는 이은정이 정윤화에 대해서 더 잘 알고 있을 거고. 주제넘은 걱정이었나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갈 때 정윤화와 눈이 마주쳤다. 정윤화는 저를 보고는 흠칫하는가 싶더니 금방 시선을 돌렸다. 흐음, 나 때문인가. 이해는 갔다. 잘 모르는 사람 앞에서 노래 부르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니까. 노래방 가는 건 다음으로 미룰까. 아니면 뭐, 평소처럼 혼자 가면 되는 일이고. 그런 생각으로 결정을 무르려던 참이었다.

"아! 그래 그래, 알았어! 간다고 가! 그만 좀 떨어져 이은정. 그렇게 쳐다보지도 말고!"

제 목소리보다 윤화의 대답이 빨랐다. 갑작스러운 외침에 놀라 앞을 바라보니 양 손을 뻗어 은정의 얼굴을 뒤덮은 윤화의 모습이 보였다. 입술을 쭉 빼밀고 저를 힐끔거리다 무어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평소답지 않게 수줍은 목소리가 귓볼을 타고 흘러들어왔다.

"좋아하는 거지 잘 부른다고는 한 적 없으니까… 막 기대같은 거 하지 말아줬으면 하거든."

너도 그랬잖아, 노래 듣는 거 좋아한다면서 남들 앞에서 불러본 적은 없다고...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모습이 낯설었다. 시선을 어딘가 고정시키지 못하고 자꾸만 힐끗거리며 저를 바라보는 모습이 어쩐지 평소의 도도하고 쿨한 이미지와는 딴판이라 신선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 간지러운 기분이 들어 웃음이 나오는 걸 참지 못하고 푸스스 웃어보였다. 맞지, 매일 노래 듣고 다닌다고 잘 하는 건 아니니까. 나도 조금 부끄럽긴 한데 못 불러도 봐주기야? 팔짱을 끼고선 의자를 살짝 당겨 윤화의 책상에 기댔다. 노래 부르는 거 좋아해? ...부르는 것보다는 듣는 쪽이 좋아. 아 하긴, 나도. 그러고보니 너도 매일 헤드셋 끼고 등교했는데. 음악 진짜 좋아하나보다. 노래방에는 자주 가는 편이야? 나도 그렇거든. 전학가면 주변이나 새로 다니는 학원 근처에 노래방이 어디있는지 찾아보는 것부터 먼저였는데. 나! 나나! 노래방 사장님이랑 친해서 서비스도 빵빵하게 넣어주신다? 음식두 먹을 수 있는 데야! 다들 이 멋진 장소를 제공해주는 나에게 감사하도록. 어느새 윤화의 손에서 벗어난 은정이 가슴을 쭉 펴고 우쭐한 표정으로 대화에 끼어들었다. 이은정 쟤네 지금 분위기 좋은데 방해 말거라. 최도재의 큰 손이 이은정의 옷깃을 쭉 잡아당겨 자리에 착석시켰다. 넘어질 뻔 했잖아! 아냐아냐, 안 넘어졌잖아. 우이씨 나도 이야기 끼고 싶어... 쿡쿡거리며 그 모습을 바라보던 제게 윤화가 나즈막히 다시 물었다. ...좋아하는 가수 있어? 아니면 음악 장르라던가. 아, 나 가수는 딱히. 그냥 좋으면 다 들어. 장르도 딱히 가리는 건 없는 것 같은데. 근데 좀 밝은 음악이 좋아. 밴드 음악 같은 거. 팝송도 많이 듣고. 너는? 나는... 인디 음악. 최근에는 웨이브투어스라고 있는데... 모르겠지. 저요! 저는 아이돌 노래가 좋아요! 좋아하는 가수는 태연! 오... 여기서 그런 대중 픽을 고르다니. 이은정 탈락. 삐삑- 하는 기계음 소리를 흉내내며 최도재가 양 팔로 엑스자를 그려보였다. 그러는 지는? 아, 물론 저도 대중의 취향을 따라간답니다. 은정은 최도재의 담백한 태도에 어이가 없다는 듯 입을 벌리곤 저희를 번갈아 바라봤다. 뭐 어때, 나도 좋아해. 취향이랄 것 없이 다 듣는 편이라서 나는 오히려. 봤냐? 대중픽 무시하지 마라 돼지! 아니 나도 대중 취향이라고.... 결국 음악 토론은 점심시간까지 이어졌다. 그 노래가 좋았지, 그건 정말 명곡이었는데. 그 노래는 정말 신드롬을 일으킬 정도의 파급력이 있다, 왜 그렇게 평가절하 됐는지 모르겠다... 열띈 토론의 끝에는 플레이리스트를 공유하기까지 했다. 와 나 수희 플리 너무 맘에 드는데. 이거 보물창고야 완전... 제 폰을 꼬옥 끌어안는 은정을 보고서는 정윤화가 어이없다는 듯 나지막히 한마디를 뱉었다. 유난은... 그런 것 치고는 그쪽도 지금 엄청 검색하고 있는 것 같은데. 불쑥 고개를 들이민 최도재는 결국 안면으로 날아오는 주먹을 막지 못했다. 아니, 미친 놈아... 깜짝 놀랐잖아. 누가 그렇게 붙어서... 정윤화 주먹 존나 아파...

"수업 끝----! 얘들아! 가자!"

종례가 끝나고 담임이 교문을 나서자 마자 자리에서 이은정이 벌떡 일어섰다. 야, 시끄러워. 주변 눈치를 보는 윤화와 다르게 주위 학생들은 다들 익숙한 듯 자기 짐이나 챙기고 있었다. 아직도 행동이 이리저리 튀는 은정에게 익숙해지지 못 해서 종종 놀라는 저와는 다르게 학기 초부터 다른 아이들은 모두 이런 풍경에 익숙한 듯 했다. 주변에서는 익숙한 듯 노래방 가는 거야? 라며 은정에게 한마디씩 인사를 건네고 하교를 했다. 다시 봐도 이런 풍경은 익숙하질 않아서 수희는 묵묵히 제 짐을 챙겼다. 남이 건네는 말과 농담에는 툭툭 쉽게 반응하면서도 직접 어딘가에 적극적으로 끼는 일은 영 못했다. 그래서 늘 적당한 정도로 밖에 친구를 못 사귀었나 싶기도 하고. 첫날의 은정을 떠올리며 설수희는 실없이 웃었다.

"아저씨~ 저 왔어요. 짜잔, 오늘은 새 친구도 있지롱요!"

자주 왔다는 얘기가 진짜인지 은정은 주인 아저씨께 살갑게 말을 붙였다. 제 양팔을 붙잡고 내세우길래 얼떨결에 인사를 드렸다. 아이고~ 거 참 훤칠하니 잘 생겼구만. 그죠? 저도 처음에 얼굴보고 홀렸다니까요? 이렇게 잘생긴 친구면 내가 기억 못 할 리가 없는데, 학생 여기 노래방은 처음이여? 아, 네. 처음이에요. 첫 손님 서비스 당근 주실거죠 아저씨-? 제 등 뒤에서 얼굴을 쏙 내민 은정이 씩 하고 입꼬리를 올려보였다. 주인 아저씨는 그런 은정의 애교에 허허 웃으시더니 은정학생이 이렇게 내놓으라고 눈치를 주는데 안 줄 수가 있겠냐며 6번 방으로 안내해 주었다. 앗싸-! 아저씨 감사해요! 짱! 최고! 이 친구 단골로 만들어 놓을게요! 넉살좋게 윙크를 날리는 모습이 자연스러웠다. 윤화 역시 짧게 목인사를 하고서는 저를 끌고가는 은정을 뒤따랐다. 최도재 역시 '음료 고르고 갈게-'라며 먼저 들어 가라며 손짓했다. 그러다가 멈칫 한 도재는 저들의 뒷통수에 대고 외쳤다. 그러고 보니 설수희는 뭐 마시고 싶어--? 멀어지는 목소리에 대고 반사적으로 답했다. 어, 나는 아이스티-! 힐끗 돌아본 뒤쪽에서는 머리 위로 들어올린 최도재의 오케이 사인이 보였다.

"자자 첫 곡은 뭘로 할래 다들?"

은정은 언제나 첫 스타트를 끊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자리를 잡고 가방을 내려놓은 은정이 리모컨을 들어올린 채 앞에 서서 물었다. 화면의 오른쪽 귀퉁이에는 2시간이 띄워져 있었다. 딱 떠오르는 곡이 없어 눈알만 도륵 굴리고 있을 때 방문을 열고 들어온 도재가 마이크를 뽑아들었다. 가방을 한쪽으로 던져놓고는 마이크에 커버를 씌우곤 마이크 테스트를 하는 모습이 익숙해 보였다. 힐끔 나머지를 쳐다본 최도재가 턱을 치켜들고 손가락으로 이상한 제스쳐를 취해보였다.

"원래 첫 곡은 힙-하게 시작하는 게 국룰이지."

그런 게 어디있냐며 툴툴 거리면서도 은정은 자연스럽게 버튼을 눌렀다. 46679. 익숙한 전주가 노래방에 깔림과 동시에 조명이 어두워졌다. 노, 노, 노. 손가락을 박자에 맞춰 좌우로 흔들어 보인 최도재의 표정이 심각했다. 겨우 이정도로는 '흥'이란 게 살지 않는단다? 템포 업 하도록. 지랄... 어이없는 표정을 한 윤화가 낮게 읊조린 말에도 타격없이 도재는 은정의 리모콘의 버튼을 꾹꾹 눌렀다. 한층 더 경쾌한 속도로 빨라진 박자에 비장한 표정을 지은 최도재는 노래가 시작하자마자 기깔난 입놀림을 보여주었다. 상처를치료해줄사람어디없나가만히놔두다간끊임없이덧나사랑도사람도너무나도겁나혼자인게무서워난잊혀질까두려워... 이것이 오프닝의 격이다... 노래가 끝나고 마이크를 툭 떨어트리곤(전원도 끄고 소파 위에 안전하게 떨어졌다) 되도 않는 폼을 잡으며 목소리를 깐 도재를 은정과 윤화가 어처구니 없는 얼굴로 쳐다봤다. 나는 맨날 쟤가 굳이굳이 최고 속도로 노래 부르는 게 정말 어이없다고 생각해. 훗, 하지만 나는 다 알고 있지. 너희가 더 이상 평범한 외톨이로는 만족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이미 이몸의 노래에 길들어져 버렸잖냐? 아 젠장! 은정이 머리를 감싸쥐며 외쳤다. 쟤 말이 진짜라서 더 짜증나! 은정의 표정은 진심으로 억울한 듯 보였다. 낄낄 웃으며 최도재가 은정에게 마이크를 넘겼다. 마이크를 넘겨받은 은정은 큼큼, 하고 목소리를 가다듬더니 너네도 빨리 예약해 놓으라며 재촉했다. 언제 예약을 끝냈는지 다음 곡이 이어서 나오고 있었다. 윤화 역시 언제 가져갔는지 손에 마이크를 들고있었다. 자, 노래 고르고 있어. 윤화가 건네준 리모콘을 받아들었다. 밝고 청량한 반주와 반짝이는 조명 사이에서 불쑥 일어선 은정은 노래를 시작했다. 전해주고 싶어 슬픈 시간이 다 흩어진 후에야 들리지만 눈을 감고 느껴봐 움직이는 마음 너를 향한 내 눈빛을... 은정의 발랄한 목소리와 윤화의 차분한 목소리가 잘 어울렸다. 어느새 최도재는 탬버린을 챙겨 흔들고 있었다. 점차 흥이 오르는 지 몸으로 박자를 타던 은정은 첫번째 후렴구에서 몸을 살짝 흔들더니 춤까지 추고 있었다. 남들보다 작은 체구임에도 은정의 몸짓에는 동작 하나하나에 힘이 있었다. 한껏 웃으며 숨을 몰아쉬는 모습은 즐거워 보였다. 춤을 추는 은정을 구경하다 다음 곡 선정을 놓칠 뻔 한 걸 최도재 덕분에 제 시간에 예약할 수 있었다. 오- 실력 안 녹슬었는데- 라며 박수를 해주는 최도재의 얼굴에 브이를 날린 은정이 자리에 털썩 앉으며 마이크를 제게 건넸다. 아, 오랜만에 노래방이라고 들떠서 처음부터 달려버렸다. 다음 곡 뭐야? 수희 뭐 골랐어? 마지막에 급하게 누르느라 생각나는 데로 예약했는데. 화면을 바라보자 알파벳 네게가 화면에 떠있었다. 전주가 짧아 마이크를 받아들고 얼마 않아 수희는 입을 땠다. 평소에는 어떻게 불렀더라. 남들은 내 목소리를 어떻게 들으려나. 쓸데 없는 생각을 하고 있으면 옆에서 입을 가린채 눈을 동그랗게 뜨고 신난 듯 발을 동동 굴리는 은정이 보였다. 헐! 나 이 노래 좋아해! 진짜로! 그 모습을 본 윤화가 말없이 마이크를 건넸다. 같이 불러도 괜찮지? 수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곧 은정의 목소리가 제 위로 겹쳐지는 것이 느껴졌다. 하긴, 어떻게 들리는 지는 별 문제 될 것이 없었다. 심취한 듯 가슴에 손을 올리며 노래를 부르는 은정의 모습에 수희는 웃어보였다. 한껏 편안한 기분이었다. I think I'm ugly And nobody wants to love me Just like her I wanna be pretty... 제 목소리 말고도 다른 누군가의 목소리가 겹치는 게 낯설면서도 싫지는 않아서 즐거웠다. 제 노래가 끝나면 다른 사람의 선곡이 시작되고, 발라드였다가, 댄스곡이었다가, 팝송이었다가, 드라마의 ost이기도 했다가, 제 차례가 돌아오면 또 노래를 불렀다. 혼자서, 둘이서, 가끔은 모두가 한껏 목소리를 높여 같이 노래를 불렀다. 정윤화 너 부르고 싶은 거 불러! 은정이 윤화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나만 아는 거 불러 봤자... 괜찮아, 부르고 싶은 거 부르는 거지. 수희의 대답에 슬그머니 윤화가 리모컨을 가져갔다. 다른 사람이 혼자 부르는 노래를 가만히 듣고 있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은정의 목소리는 맑고 또랑했고, 윤화의 목소리는 차분하면서도 깊었다. 말하듯이 부르지만 울림이 있었다. 최도재는 곡의 분위기에 맞춰서 휙휙 목소리를 바꾸는 게 신기했다. 원곡자의 모창을 하기도 했는데, 그것마저 잘 해서 웃기기 보다는 오히려 대단할 지경이었다. 최도재 너 가야한다고 하지 않았음? ㄴㄴ. 나 지금 삘타서 못 돌아감. 20분만 더 있다 가지 뭐. 그럼 아슬하게 학원 도착할 수 있을 걸? 너네 어머니가 뭐라 하셔도 모른다? 이럴 때가 아니라니까. 빨리 빨리 다음 곡 넘어가자. 어느새 한 시간을 훌쩍 넘겼다. 은정은 최도재를 미심쩍은 눈빛으로 노려봤지만 도재는 다음 타자에게 마이크를 넘길 뿐이었다. 화면을 슬쩍 확인한 윤화가 말을 덧붙였다. 이건 누구곡? 수희는 손을 들어올리곤 답했다. 아, 나! 내가 골랐는데.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는지 손에 마이크를 쥔 건 저 뿐이었다. 조금 멋쩍은데. 수희는 뒷목을 살짝 문질렀다. 그러나 그게 부담스럽다는 뜻은 아니었다. 충분히 이 장소에서 설수희는 편안함을 느끼고 있었다. 일렉 기타의 반주와 낮고 차분한 전자음, 일정한 박자가 노래방에 울려퍼졌다. 수희는 자세를 고쳐 마이크를 붙잡았다. 자주 들었던 곡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숨을 쉬고 강세를 주는 부분이 어딘지 전부 알았다. 좋아하는 곡이기도 했다. 눈 앞의 화면에 가사가 띄워지지만 그런 것 쯤 보지 않고 부를 수도 있었다. 수희는 첫 숨을 내뱉었다. 한 껏 편안했고, 가벼웠으며, 모든 것들에서 위화감을 느낄 수 없었다. 부끄럽지도 않았고, 어떤 어긋남 없이 목구멍에서 목소리가 뻗어나왔다. 어느새 추가된 드럼 소리에 뒤쳐지지 않게 목소리를 높혔다. 마지막 단어를 내뱉고, 문득 설수희는 정신을 차렸다. 와아아... 나 지금 쪼금 부끄러울지도... 답지 않게 제 볼을 손등으로 문지르며 말 끝은 흐렸다. 쥐구멍에 숨고 싶은 부끄러움이랑은 다른 결이었지만 아무튼 그랬다. 은정이 입을 꾹 가린 채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수희 너... 진짜 천재같...

쾅-

그 때 방문이 벌컥 열렸다. 방 안의 모두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마이크를 쥐고있는 설수희가 문을 열었을 리는 당연히 없고. 저기 탬버린을 치다가 굳어버린 건 최도재. 그 옆에서 감명 깊은 얼굴이었다가 갑작스러운 침범에 눈망울을 크게 뜨고 끔뻑거리고만 있는 건 은정. 그렇다면 정윤화구나 싶겠지만 정답은 X였다. 왜냐면 걔는 노래방에 들어오고나서부터 단 한번도 나간적 없으니까. 리모컨을 쥐고 제 옆에 쭉 앉아있었는데. 정말 대~단한 노래실력! 매력이 넘쳐요~ 누가 실수로 버튼을 한번 더 눌렀는지 노래실력을 칭찬하는 과장된 목소리가 방안에 울려퍼졌다.

"찾았다."

마침내 고개를 들어올린 여자가 단 하나의 목표를 향해 시선을 고정시켰다. 눈 한번 깜빡이는 사이 다른 아이들을 전부 제치고 성큼 제 앞으로 다가왔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제 두 손이 상대의 손 안에 모아진 채였다. 소중한 보물을 쥐듯 간절하게 손을 감싸는 손길이 간지러웠다. 역광에 잘 보이지 않던 얼굴이 시야에 불쑥 들어왔다. 눈빛이 부담스러울 만큼 반짝였다. 환희에 가득찬 눈빛, 한가득 솟아오른 어깨, 볼록 솟은 광대와 한껏 올라간 입꼬리. 최초로 신대륙을 발견한 탐험가같은 기쁨이 서린 얼굴을 하고선 자신을 바라본다. 수희는 저도 모르게 긴장한 나머지 침을 꼴깍 삼켰다. 모든 것들이 폭풍처럼 몰아치는 바람에 겨우 머리를 굴려 낯선 침입자에게 첫 마디를 꺼냈다.

"아니, 저, 그, 누구...? 신지...?"

"부디 나랑 함께해주지 않을래? 응?"

너는 내가 추구하는 가장 완벽한 이상형이야!

설수희, 방년 17세, 웬 초면의 여자에게 노래방에서 친구들이 보는 가운데 공개 고백을 받다.

헉. 누군가가 숨을 참는 목소리가 귓가에 들린 것 같다. 와우, 멋진데. 담담한 감탄 한마디를 마지막으로 공간이 고요했다. 당혹감은 사고를 멈추게도 한다고 했었나. 뇌가 정보를 입력하는 것을 거부하기라도 했는지 수희는 그 말에 알맞은 대답을 찾아낼 수가 없었다. 설수희는 하마터면 그 환한 미소에 속아 넘어갈 뻔한 정신을 다잡고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이거 도믿걸 같은 거 아니지? 신천지?사이비? 장기 매매? 납치? 옆에 친구가 3명이나 더 있는데 무슨 자신감으로? 상황을 따라가지 못하는 머리가 멋대로 이야기를 꾸며내기 시작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눈 앞에 들이밀어진 얼굴이 너무 눈부셔서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사르르 떨어지는 머리카락이 눈에 밟혔다. 시선을 돌리기 위해 한번은 모든 자극과 신경을 차단시켜야 할 것 같아서 눈을 꾹 감았다. 사고회로를 정비할 필요가 있었다. 저, 그러니까... 무어라 답을 하기 전에 저를 잡고있던 손이 멀어짐이 느껴졌다. 순식간에 멀어지는 온기에 설수희는 반사적으로 눈을 떴다.

"아, 죄송합니다. 관리를 소홀히 한 저희 잘못이예요."

여자보다 머리 한 개는 더 작아보이는 다른 사람이 여자의 목덜미를 잡아채고 있었다. 복실거리는 머리카락과 동그란 눈매, 왜소한 체구와 다르게 말투가 지극히 딱딱했다. 어디서 난 힘인지 제게 달려들었던 여자가 별 저항도 못하고 들려있었다. 즐거운 시간을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이 바보에 대해서는 잊어주세요. 모두에게 시선을 마추치며 정중히 고개를 까딱였다. 아, 그치만 들어봐 도영아? 진짜로... 거기까지 하세요 선배. 웃는 얼굴이었지만 목소리가 굳어있었다. 손에 힘을 더 주었는지 목덜미의 옷깃이 한껏 더 쭈글해지는 게 보였다. 헙. 여자는 눈치를 보듯 눈알을 데구르 굴렸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정말로 실례했어요. 여자는 키차이가 나는 바람에 허리를 굽힌 채로 질질 글려나가야 했다. 너는 진짜 완벽해. 최고야! 관심있으면 연락처 받으러 와 주라! 여자는 끌려나가면서도 저를 향해 무어라 외쳤다. 아 선배 제발 좀요. 화장실 갔다가 하도 안 돌아오길래 데리러 와보길 잘했지 진짜... 짜증이 섞인 목소리가 멀어졌다. 한차례 폭풍이 지나간 자리에 수희는 멀뚱히 앉아 눈을 끔뻑였다. 오... 오우? 이것도 멋진 경험... 이라면 경험 아닐까? 수희 인기 짱이다! 침묵을 뚫고 은정이 양 엄지를 치켜세워보였다. 최도재가 은정을 따라 엄지를 들어보였다. 도재의 폰에서 알람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 시간 됐다. 나 이제 가야 함. 최도재는 아까 전까지 아직 10분 남았다, 라며 시간을 끌었던 게 거짓말인 듯 미련없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어엉, 잘 가. 너네도 잘 놀다 가도록. 손가락을 이마에 붙였다 때며 최도재는 방을 나섰다. 자, 자! 우리 아직 시간 남았으니까! 남은 시간 채우고 가자! 은정이 운을 띄우며 리모컨을 다시 들었다. 대답하듯 정윤화가 고개를 끄덕였으나 아직 얼떨떨한 상태인 수희는 닫힌 문쪽만을 멍하니 바라봤다. 진짜... 이상한 사람이었지. 설수희는 푹 턱을 괴고 아직도 갈무리 되지 않은 생각을 정리했다. 한참을 그러느라 결국 남은 시간 동안은 제대로 노래에도 집중할 수가 없었다. ...갑작스럽긴 했지만 그렇게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던 것 같긴 한데. 같은 생각이 들자마자 좌우로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아니 내가 미쳤나. 정윤화가 최도재를 볼 때 짓는 표정으로 저를 바라보는 게 느껴졌다. 그제야 얼굴에 화끈 열이 올라 양 손등으로 볼을 꾹꾹 눌러 식혔다. 아, 정말이지 이상한 경험이야. 허실 웃으며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뭐 결국에는 순간일 뿐이니까. 이런 경험도 했다 치는 거지. 생각을 떨쳐버린 수희는 다시 웃으며 마이크를 쥐었다.

그러니까, 그 사람을 다시 만나게 될 줄은, 심지어 같은 학교 학생으로 다시 만날 줄은 꿈에도 예상치 못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수희가 부른 노래는 이 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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