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크주인] 악몽
2023 나크 생일 축전글
※ 해당 글은 공식 설정을 차용하지 않았습니다. 순전히 필자의 날조로 이루어진 IF 2차 창작입니다.
※ 캐붕으로 느껴질 수 있습니다. 주의하고 열람해주세요.
"신부는, 신랑에게 영원한 사랑을 맹세합니까?"
주례가 던진 질문에, 면사포를 곱게 얼굴 위로 내려쓴 여인이 예, 하고 고운 목소리로 대답한다. 신부의 대답을 들은 주례는 그녀의 오른편에 서 있는 남성에게로 시선을 옮긴다. 주례의 엄숙한 눈과 마주치자, 나크 슈타인은 목이 타는 것을 느낀다. 저도 모르게 안절부절못한 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주례의 시선을 부자연스럽게 피하는데도, 주례는 그런 그의 마음을 눈치채지 못한 건지 같은 질문을 던진다.
"신랑은, 신부에게 영원한 사랑을 맹세합니까?"
나크 슈타인은 어차피 '아니오,' 라고 대답할 수 없으니까. 이 식장에 있는 모든 시선이 자신을 향하고 있으니. 데이트 한번 해본 적 없는 옆에 서있는 여성을 나크가 진심으로 사랑하는가, 사랑하지 않는가는 중요치 않다. 오직 '예,' 그것만이 나크에게 주어진 답이다.
말해야 하는데, 말해야 하는데.
어릴 적부터 툭하면 자기 발목을 잡아 온 양심이란 놈은 이번에도 쿡쿡 자신의 마음을 들쑤신다. 아무리 거짓으로 점철된 자신의 인생이라지만 결국 영원을 함께할 동반자마저 거짓이라니, 참으로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안 그래? 나크 슈타인.'
어쩐지 자신을 쏙 빼닮은 듯한 목소리가 킥킥, 그를 비웃으며 귓가에 속삭인다.
"저는..."
쿨럭-
나크가 대답하려던 그때, 그의 더딘 맹세는 기침 소리 때문에 중단되고 말았다. 자신이 아니다. 소리를 쫓아 시선을 왼쪽으로 돌리자, 자신의 바로 옆에 멀쩡히 서 있던 신부의 드레스와 부케가 그녀의 입에서 튄 피로 붉게 물들어 있었으니까. 그는 그 자리에서 쓰러지려는 신부를, 파리해진 안색으로 재빨리 끌어안았다. 아니, 정확히는 끌어안으려했다. 그의 팔이 허공을 휘젓기 무섭게, 그녀는 순식간에 사막의 모래처럼 흩어져 부서져 버렸다.
신부와 신랑을 축복하기 위해 순백의 색으로 아름답게 꾸며진 결혼식장은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샌가 꾸물거리는 핏빛의 색으로 물들어져 있었다.
네가 죽인 거다, 나크 슈타인.
하객들이 그리 말하며 일제히 나크를 손가락질한다. 저주한다, 슈타인이라는 그 이름을. 하객 중에 한때 자신의 목표물이었던 이들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나크의 안색이 순식간에 새파랗게 질린다. 하객들의 인영은 좀비처럼 그를 향해 팔을 뻗으며 천천히 걸어오는가 싶더니, 이내 흐물거리며 검은 덩어리로 무너져 내렸다. 유일하게 형체를 잃지 않고 끝없이 늘어나는 그들의 팔만이 마치 그를 지옥으로 함께 끌고 가려는 듯, 그의 사지를 붙잡아 당기기 시작했다.
"내 약혼자는... 그녀는 나와 상관없었습니다! 그녀도 저도 서로 사랑한 적조차 없는데.. 어째서.."
무고한 사람까지 목숨을 잃어야 하는 겁니까? 그리 말하려 했지만, 차마 목에서 말이 튀어나오지 않았다. 그야 그렇지. 숱하게 사람을 세상에서 지워온 대가로 부와 명성을 축적한 그가 무슨 염치로 그런 말을 하겠는가.
나크는 조용히 입을 닫고, 눈을 감았다. 꾸물렁거리는 팔들이 자기 피부를 죄이며 천천히, 자신을 심연으로 끌어내린다. 어차피 삶에 미련은 없었다. 자신이 죽여온 망자의 원혼이 자신이 지옥에 떨어지는 걸로 풀린다면 차라리 홀가분할 테니.
우습게도, 모든 것을 체념하고 눈을 감았을 때 마지막에 보인 것은 자기 때문에 죽은 약혼자가 아닌 다른 여인의 미소였다. 일에 방해가 될까, 자신과 불필요하게 엮여 봉변당하지 않을까, 타인에게 거리를 벌리고 살아왔던 나크가 일생을 통틀어 유일하게 사랑한 그녀. 마음 써줄 가치조차 없을 그에게도 따스하게 대해준 사람.
"주인님..."
나크는 그리 중얼거렸다.
쉰 목에서 느껴지는 칼칼한 감각과 악몽을 꾼 직후 잔뜩 긴장한 심장이 쿵쿵 뛰는 것을 느끼며, 그는 눈을 떴다. 아직도 자신을 휘감는 검은 덩어리들의 감각이 생생해서, 나크는 자신도 모르게 검은 반소매 티 아래로 드러난 흉터투성이인 자기 팔을 쓸어올렸다. 당연하게도 만져지는 것은 그의 매끈한 살 뿐이었다. 자신의 침대 옆에 놓인 탁상시계를 확인하니, 자신이 잠든 시간으로부터 고작 2시간도 채 지나지 앉아 있었다.
벌써 하루를 시작할 시간이었다. 나크는 씁쓸히 웃으며, 자신이 2시간 전에 작성했던 다이어리를 집어 들어 일정을 확인했다. 몸의 피로가 다 가지 않았는지 그의 눈꺼풀이 경련했지만, 나크는 수면 부족에 시달리는 삶에 익숙했다. 누군가에겐 지친 몸을 이끌고 침대에 몸을 뉠 수 있는 시간이, 매일같이 이런 악몽을 꾸는 나크에겐 고문당하는 것보다 지독했으니까.
몸단장을 마친 나크는 자기 주인을 깨우기 위해 그녀의 침실을 찾았다. 매일 아침 그녀를 잠에서 깨우고, 그녀가 자고 일어난 후의 침대보를 가져가 햇빛에 깨끗하게 널어두는 게 자신의 기상 후 일과였으니까. 나크는 똑똑, 깔끔하게 두 번 문을 노크했다.
"주인님, 기상할 시간입니다."
그녀를 불렀지만, 답은 없었다. 아마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신 거겠지. 나크는 방 안쪽까지 들리도록 힘차게 "실례하겠습니다," 라고 말한 뒤, 문고리를 돌렸다. 여자 한 명이 쓰기엔 거대한 퀸사이즈의 침대 정 가운데, 이불속에서 웅크리고 있는 여인이 보였다. 그녀는 푹신한 베개에 얼굴을 파묻은 채 일어나기 싫다는 듯, 인상을 잔뜩 쓰고 있었다. 그 모습이 어쩐지 갓 태어난 새끼 짐승이 꼬물대는 모습 같아서, 나크는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을 느꼈다. 어쩜 이토록 사랑스러운 분이 있을까. 마음 같아서는 그녀를 조금 더 자게 두고 싶었지만, 이 시간에 자신을 깨워달라 부탁한 사람은 다름아닌 주인님이었다. 왜 자신을 깨우지 않았냐고 양 뺨에 공기를 잔뜩 넣고 투덜거리는 주인님은 그것대로 사랑스럽지만, 나크는 두 가지 이유로 인해 그녀를 반드시 깨워야만 했다. 첫째는 그가 그녀의 명령을 충실하게 이행해야 할 그녀의 집사란 것이고, 두 번째는 그가 맡은 일을 매우 성실하게 해내는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주인님, 이제 일어나셔야 합니다. 너무 늦게 일어나면 로노 씨가 준비한 아침 식사가 차게 식을지도 모릅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녀를 퍽 귀여워하는 저택의 주방장은 그녀가 부탁하면 식은 음식을 군말 없이 데워주리라. 주인님도 그걸 아는지, 나크의 경고에도 그녀는 미동도 채 하지 않았다.
"주인님."
나크가 다시 한번 그녀를 단호히 부르자, 그녀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크, 나 열이 있는 거 같아."
주인님이 열이 난다고? 그녀의 말에 당황한 나크는 재빨리 그녀에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열을 확인하기 위해 손에 낀 매끄러운 실크 장갑을 벗자, 단정한 옷매무새와는 이질적일 정도로 흉터투성이인 그의 손이 드러났다. 매끈한 그녀의 이마에 손을 올려보니, 펄펄 끓을 거로 생각했던 그녀의 이마는 생각보다 미지근했다. 혹시 지금 자기 손이 뜨거워서 열이 느껴지지 않는 건가 싶어, 나크는 다른 손을 자기 이마에 대보았다.
"주인님, 아무래도 열은 없는 것 같습니다. 혹 다른 불편한 증상이 있으십니까? 제가 루카스님께 보고를..."
쪽.
나크의 말은 말캉하고 부드러운 감촉이 손에 닿는 바람에 그만 멎고 말았다. 나크의 손가락에 가볍게 키스를 한 주인은 능글맞게 웃으며 메롱, 혓바닥을 내밀었다. 속았지. 그녀는 키득거리며 작은 손으로 나크의 손 사이사이로 손깍지를 껴왔다.
"주인님…."
"나크의 손, 따뜻하다. 조금만 더 이러고 있으면 안 돼?"
그녀의 부탁에 나크는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 최근, 주인님이 자신을 향해 치는 장난의 수위와 빈도가 조금씩 심해져 가는 건 느끼고 있었다. 운동 직후 몸에 힘이 없다며 제 허리를 끌어안아 오며 그대로 기대서 쉰다던가. 아니면 일부러 자신이 썼던 빨대로 음료를 마신다던가. 아무리 라므리에게 눈치가 느리다며 핀잔을 듣는 나크였지만, 그런 그도 알 수 있었다. 주인님은 확실하게 제게 호감의 신호를 보내고 있단 사실을.
나크가 주인에게 관심이 없는지 묻느냐면, 천만에. 주인은 나크의 보물이었다. 그녀가 세상의 모든 꽃향기를 맡고 싶다고 한다면, 나크는 기꺼이 내일 당장이라도 짐을 챙겨 저택을 떠나, 온 세상을 구석구석 뒤져서라도 식물도감의 A부터 Z 페이지 까지의 모든 꽃을 긁어오리라.
그렇지만 아직도 눈을 감으면 약혼자가 피를 쏟으며 자신의 품으로 쓰러지는 그날의 장면들이 이어 붙인 여러 장의 사진처럼 빠르게 스쳐 지나간다. 그저 정략결혼 상대여서 데이트 한번 제대로 해본 적 없었던 약혼자도, 자신과 허울뿐인 관계를 맺었다는 이유만으로 그렇게 허무하게 젊은 나이에 목숨을 잃고 말았다.
그래, 아무리 눈치가 느린 나크여도 그것만큼은 알 수 있었다. 자신은 누구도 사랑해선 안 된다는 사실을. 그가 직접 거둔 영혼들이 자신에게 똑같은 피눈물을 흘리게 할 그날만을 기다리고 있단 사실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이가 목숨을 잃기 전에 그 사실을 깨달은 건 나크에게 천운이었다.
그렇지만 언제부터일까, 바위의 갈라진 틈새로 뿌리를 내리며 점차 파고드는 식물처럼, 주인님은 어느샌가 그의 마음을 서서히 침투했다. 구제할 수 없는 자신에게도 한없이 다정한 그녀에게 나크는 끌렸다. 아마 자신뿐만이 아니리라. 저와 같은 방을 쓰는 동료들도 주인님의 이상형 이야기가 오갈 때면 귀를 쫑긋 세우곤 했으니까.
그래서 나크는 더욱 그녀의 호의가 불편했다. 자신이 아니더라도 주인님을 사랑해 줄 좋은 사람은 많았다. 이 저택에 있는 사연있는 악마 집사 중에서 누군가를 고른다고 하더라도, 떳떳하게 양지에서 자신의 고난과 역경을 헤쳐온 이들은 많았다.
그래, 자신과는 다르게 말이다. 그래서 자신은 더더욱 그녀의 마음을 받을 수 없었다.
나크는 그녀가 붙잡고 있던 손을 빠르게 거뒀다. 전에 보여준 적 없는 단호함에, 장난기를 잔뜩 머금고 있던 주인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평소의 나크라면 이런 식의 막무가내 장난에도 곤란하다는 듯 웃으면서 적당히 어울려 줬으니까. 그렇지만 지금 제 눈앞에 있는 나크는 차가울 정도의 무표정으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생기없는 눈동자를 보고 있노라니, 어쩐지 잘 만들어진 인형을 보는 것처럼 소름이 끼쳤다.
"주인님이 이렇게 짓궂은 장난을 치실 때마다, 저는 착각을 할 것 같습니다. 한 떨기의 꽃처럼 고결하고 아름다운 주인님이 저 따위에게 호의를 품고 있는 게 아닐까 하고 말이죠."
잘 만들어진 인형의 매끄러운 입술에서 녹음한 것처럼 무미건조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나크는 타고난 사냥꾼이었고, 덕분에 암살자로서 아주 성공적인 인생을 살아올 수 있었다. 목소리의 높낮이와 분위기. 나크는 모든 것을 이용해서 제 눈앞의 사냥감을 위협하는 법을 알았다.
그를 뚫어져라 바라보던 주인은 선택해야 했다.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이 남자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 것인가. 어쩐지 평소와는 다르게 위험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어서 혀를 잘 놀려야 할 것 같단 기분이 들었다.
그렇지만 상대는 나크가 아닌가? 바쁜 와중에도 항상 자기 말을 귀 기울여 들어주는, 다정하고 상냥한 회계 집사 나크. 주인은 그런 나크에게, 정면으로 반박했다.
"착각이 아닌데?"
주인은 그리 말하며 배시시 웃기를 택했다. 어때, 이래도 정색할 거야? 그리 묻는듯한 미소에, 나크는 감정을 다스리려는 듯 한차례 눈을 꾹 감았다가 눈을 다시 떴다. 마치 방금 그녀가 한 말에, 전혀 흔들리지 않았음을 어필하려는 듯, 그의 무표정엔 미동조차 없었다.
"농담이 지나치십니다, 주인님."
"나크는, 내가 농담하는 거였으면 좋겠어?"
그리 묻는 주인님께, 돌려줄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예,' 그것만이 나크가 해야 할 대답이니까. 참으로 쉽고 단순한 거짓말. 상대를 설득하기 위해 살을 붙일 필요도 없이 단어 하나면 충분한데, 떨어져야 할 입이 도저히 떨어지질 않는다. 마치 아주 오래전, 잘 알지도 못하는 신부에게 사랑의 맹세를 읊어야 했던 그날처럼. 자신은 예나 지금이나 어쩜 그렇게 거짓말을 못 하는지.
"... 주인님은 자꾸 잊으시는 것 같습니다."
나크는 대답 대신, 그녀가 눈치채지 못할 빠른 손동작으로 가볍게 그녀의 혈을 눌렀다. 이상하게 귀 뒤쪽을 눌린 것 같은데, 그를 붙잡고 있던 팔에서 휘청 힘이 빠진다. 그대로 꼼짝 못 하는 그녀의 위로 나크가 다가와 자신의 머리 옆을 양손으로 짚고 그녀를 제 안에 가뒀다.
"보십시오, 주인님. 제가 손가락 하나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대체 얼마나 많은 인간을 제가 죽여왔을지 아직도 짐작이 가지 않으시나요. 수도 없이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저는 한때 암살자였습니다. 그것도 숱하게 많은 사람을 죽여온, 이름만 대면 누구라도 알 암살자였단 말입니다."
대체 자신의 어떤 모습에 사랑스러운 주인이 현혹당한 걸까. 그는 주인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은 원한을 산 인간인데. 암살자라는 꼬리표는 나크가 예상하는 것보다 더 오랫동안 그를 끈덕지게 따라다녔다. 아무리 시간이 지난다 한들, 잊을 만하면 나크 슈타인을 기억하는 이가 그의 앞에 나타나 망자의 저주를 퍼부었다. 그를 동료로 받아준 악마 집사들도 자신 때문에 얼마나 오랫동안 고역을 치렀는지.
"주인님은 저와 엮였다는 이유만으로 얼마나 많은 이들이 불행해졌는지 모르시겠죠. 제 약혼자는 저 때문에 죽었습니다. 누구보다 신부가 행복해야 할 결혼식 날, 하객들이 보는 앞에서 그녀는 독살당했습니다. 사랑한다는 감정 따위를 조금도 느끼지 않았을 정략결혼 상대인 저 때문에 말입니다."
주인은 당연히 모를 수밖에 없었다. 나크는 과거의 치부를 그녀 앞에 일절 드러내려 하지 않았으니까. 그녀를 밀어내고 충분히 경고해야 한다는 사실을 머리로 알면서도, 그는 모순되게도 그녀에게 잘 보이고 싶었다. 나크의 아버지는 나크의 암살실력과 명석한 두뇌를 아꼈지만, 그의 우유부단함만은 항상 안타까워했다. 암살자가 되었을 때 전부 버리고 왔어야 했는데. 남몰래 마지막 양심을 어그러쥐고 꼭꼭 숨겨 온 탓에 그는 대가를 치러야 했다.
차라리 주인님이 그에게 아무런 관심도 호감도 보이지 않았더라면. 지금까지 잘 그래왔듯 이런 감정은 고이 묻고 세월의 강에 흘려보낼 수 있었을 텐데. 자꾸 그녀가 미소 지어 주며 제게 서슴없이 손을 댈 때마다, 그녀를 마음에 품지 않겠다던 다짐이 자꾸만 무너지지 않는가.
"계속 제게 다가오시면, 다음 희생자는 주인님이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자신은 더 이상 견딜 수 없으리라.
왜냐하면 이제는 더 이상, 당신 없는 삶을 상상조차 할 수 없으니까.
당신을 이 마음 깊은 곳부터 사랑하니까.
실제로 당신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은 이런 게 아니었는데. 나크의 눈물이 방울져 뚝뚝, 그의 안경 위로 떨어졌다. 주인은 격해진 감정을 삼키며 눈물을 흘리는 나크를 빤히 바라보다, 그에게 손을 뻗었다. 그녀의 가느다란 검지 손가락이 나크의 안경의 브릿지에 걸리자, 그의 안경이 힘없이 그녀의 가슴 위로 툭 떨어졌다. 그녀는 엄지로 그의 눈 아래로 난 검은 눈물 선을 따라, 그의 눈가를 쓸어올리며 눈물을 닦았다.
"나는 나크가 나크여서 좋아. 상냥하고, 성실하고, 조금 바보같고..."
아, 이건 칭찬이 아닌가. 그녀는 머쓱하게 웃었다.
"그렇지만 나를 생각하기 때문에 나와 거리를 지켜주려 하는 네가 좋아. 뭐, 늙지 않는 네겐 내가 아무것도 모르는 새파란 애송이인 내가 마냥 어리광을 부리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지."
"주인님, 저는 결코 그렇게 말하려던 게-"
"나는 가벼운 마음으로 너의 모든 것을 받아들이기로 한 게 아냐. 너의 흉터도, 과거도."
주인은 그리 속삭이며 그를 꼭 끌어안았다. 나크가 한 가지 간과한 사실은, 주인은 생각보다 그를 더 많이 아끼고 있단 점이었다. 그가 사냥꾼이었든, 암살자였던, 천하의 죽일놈이었든. 어떠한 과거를 품고 있더라도 이미 그녀의 마음을 돌이키기엔 늦었으리라곤 생각 못 한 나크에게, 주인은 그를 아무한테 넘기지 않겠다는 듯, 그녀는 그의 몸을 팔로 꼭 죄었다. 분명히 처음에는 나크가 주인을 팔 안에 가둔 모양새였는데, 이제는 주인이 몸을 잔뜩 밀착해 온 탓에 나크가 주인에게 붙잡힌 꼴이 되고 말았다.
"몇 번이고 네가 너의 죄를 다시 끄집어 내게 고백하더라도, 나의 마음은 바뀌지 않아."
그래도 싫으면 밀어내던가. 물론 거절할 거지만. 주인은 샐쭉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갈 곳 잃은 나크의 손은 한참이나 허공에 머물러있었다. 그러나 이내 그녀의 등에 살포시 내려앉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은 걸리지 않았다.
* 밑의 결제선은 채널에 문제가 생기거나 사라지더라도 작품을 영구 소장하고 싶은 분들을 위해 만들어진 결제란입니다. 아래엔 아무것도 없습니다. 소장본의 금액은 글자수에 맞춰 책정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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