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죠유지] Flame

환생 AU | 모델X소방관 | 기억있음X기억없음

Adore U by 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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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부터 이상한 의무감이 있었다.

많은 사람을 구해야 한다는.

 

Flame

 

누군가 귀에 대고 지시하기라도 한 것처럼, 어딘가에 홀린 듯이 남들을 도왔다. 작게는 괴롭힘 당하는 친구를 돕는 것부터, 크게는 소매치기범을 잡아 표창장을 받기까지. 그 강박은 해가 지날수록 줄어들기는커녕 점차 강해져서, 진로를 정할 때도 별 고민 없이 소방관을 선택했다.

이상하리만큼 타고난 신체 능력도 살릴 수 있고 보다 많은 이를 구할 수 있는 직업. 적격이라고 생각했다. 단지 그 정도의 감상이었다.

평소엔 그렇게나 멀리했던 공부도 이걸 넘겨야 소방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니 어쩐지 싫게 느껴지지 않았다. 거기에 더불어 운도 따라주었다. 쏟아부은 시간 대비 일반지식과 논술도 무리 없이 통과했다. 모든 절차를 넘기고 합격증을 받아들었을 땐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꼭 이 직업을 하게 될 운명인 듯이 술술 풀려서.

마치 누군가를 도와야 하는 게 정말로 나의 업인 것처럼.

이후 소방학교에서 6개월간의 교육을 받아 현장에 투입됐다. 실전은 훈련보다 몇 배나 위험하고 급박했다. 집에 돌아오면 겨우 씻고 쓰러지듯 잠들기 바쁜 나날들. 하지만 이상하리만큼 마음은 편안했다. 까만 그을음이 가득한 얼굴을 보면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이 새어 나왔다. 어째서일까.

오전 근무를 마치고 샤워실에서 목욕까지 마친 후 멀끔히 퇴근한 어느 날. 냉장고가 텅 빈 게 생각나 장이라도 보고 갈 요량으로 인근 마트로 향했다. 매고 있는 웨이스트 백 안에 휴대용 장바구니가 있는지를 확인하고 안심한다. 이제 적지 않은 월급을 받게 됐지만, 여전히 외식보다 직접 만들어 먹는 걸 더 좋아한다. 손수 요리해 할아버지와 나눠 먹던 기억이 좋아서 그런 건지.

다음 휴일에는 할아버지 묘에 가야겠다고 생각하며 마트 내부로 들어선다. 시끄러운 광고 음성과 사람들의 소음이 가득한 공간. 그 속에서 이유 모를 평화로움을 느낀다.

인파를 헤치고 한가득 쌓인 바구니 쪽에 다다르자 장신의 남자가 앞을 막아서고 있다. 태어나 처음 보는 백발이다. 자신도 특이한 머리 색인 주제에 이런 감상을 하는 건 좀 웃긴가. 키도 큰 걸 보아하니 아무래도 외국인인 모양이다.

“저기 형, 바구니 좀 꺼낼게.”

태연히 일본어로 말해놓고 스스로도 아차 싶었다. 외국인이 알아들을 리가 없잖아. 허나 예상외로 눈앞의 사내는 잠깐 멈칫하는가 싶더니 곧장 옆으로 물러났다. 무언의 대답이나 다름없는 제 말을 알아들었다는 신호. 의아함에 저도 모르게 고개가 옆으로 살짜금 기울어졌다. 일본인인가? 아니면 일본어에 능한 외국인? 뭐, 어느 쪽이든 상관없지만.

“고마워.”

나이를 불문하고 초면인 사람에게도 말을 놓게 되는 건 예전부터 고쳐지지 않는 버릇. 예전에 할아버지에게 실컷 혼난 주제에 아직도 고치지 못했다. 별 무게감 없는 반성을 하며 팔을 뻗는다. 바구니를 집어 식료품 쪽으로 향하려다 손목이 붙들려 그대로 멈춰 세워졌다.

“…유우지?”

“어라. 날 알아?”

초면인 사내에게 이름을 불려 당황했다. 고개를 들어 위를 올려다보자 보인 건 훤칠하게 잘난 얼굴. 모자를 푹 눌러쓰고 있어 그늘이 드리워져 있지만, 누가 봐도 선이 고운 미남이란 건 알 수 있다. 태어나서 봐온 사람 중 제일 잘생긴 것 같다. 거짓말 하나 보태지 않은 순수한 소감. 그런 사람이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으니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아무리 봐도 초면이고, 목전의 사내를 본 기억이 제게는 없다.

이렇게 특별한 외관을 잊을 수 있을 리가 없는데.

의아함과 경계심을 품고 지켜보기를 한참.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자신을 보던 사내는 점차 얼굴을 일그러트리기 시작했다. 표정이 풍부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무렵, 사내의 눈가에 점차 물기가 서리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렌즈라도 낀 건가 생각이 들 정도로 하늘처럼 빛나는 눈동자에, 눈물이 그렁그렁 매달려 있다.

“너무, 너무 잘 알지…….”

“엣, 형 혹시 울어?”

차분히 기다려준 끝에 더듬거리며 돌아온 말은 울음에 젖어있었다. 뭉개지듯 이어지는 대답에 가슴께 어드메에 찌릿한 통증이 일었다. 생전 처음 보는 이가 우는 모습에 아픔이 느껴지는 건 어째서인지. 이유를 찾지 못해 그저 넋을 놓고 있길 잠깐, 고운 얼굴에 물길이 생겨나는 걸 보고서야 불현듯 정신을 차렸다. 장정 둘이 초입을 막아서고 있는 건 다른 사람들에게 민폐다.

급한 대로 바구니를 도로 내려놓고 사내를 끌어 구석으로 향했다. 군말 없이 훌쩍이며 뒤따라오던 사내는 잡힌 손목을 빼내더니 제 손을 잡아 왔다. 꼬옥, 조심스러운 손길로 힘을 실어서. 마치 엄마를 놓치기 싫은 아이처럼. 울고 있는 모습도 꼭 아이 같다 싶어 상황에 맞지 않게 실소를 터트렸다.

“우선 이걸로 닦을래?”

“…유우지가 닦아줘.”

인적이 드문 화물용 엘리베이터가 몰린 구석. 가방에서 손수건을 찾아 사내에게 건네자 돌아온 말은 터무니없었다. 어느새 울음을 그쳤는지 턱에 고인 물방울들을 아무렇게나 닦아내며 그런다. 찰나 동안 얼마나 운 건지 여전히 훌쩍이는 모습에, 약간은 불안정한 호흡.

결국 유우지는 한숨을 한 번 포옥 쉰 다음 사내에게 다가가 물 자국들을 지워나갔다. 여전히 한 쪽 손은 붙잡힌 채로. 와중에 자신을 붙든 손이 미약하게 떨리고 있어서, 사내의 심리 상태가 불안정하다는 것 정돈 알 수 있었다.

뭐가 그렇게 불안한 거야.

“형, 이름은 뭐야?”

“사토루. 고죠 사토루.”

“그럼 고죠 씨네.”

“아니, 사토루가 좋아.”

“어째서? 뭐 상관 없지만.”

“고죠는 전에 유우지한테 실컷 들어봤고, 이제 이름을 불려보고 싶달까….”

“저기, 우리 오늘 초면이지? 나는 고죠 씨를 부른 기억이 없는데.”

기다란 속눈썹에 엉겨있는 물방울들을 닦아내며 유우지는 내심 감탄했다. 꼭 인형 같은 사람이라고 할까. 그런 사내가 자신을 아는 것처럼 말해오니 여간 당황스러운 게 아니다. 얌전히 얼굴을 맡긴 채로 있는 모습은 어쩐지 좀 귀여운 것 같기도 하고. 저보다 한 뼘은 넘게 큰 사내가 귀엽게 여겨지다니, 여러모로 이상한 일 투성이다.

“유우지. 정말 기억 못 하는 거야?”

아, 또다. 푸른 샘에서 다시금 눈물이 퐁퐁 샘솟아 오른다. 이쪽은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울어버리니 꼭 잘못이라도 저지른 것만 같다. 어찌할 바를 몰라 얼굴에서 손을 떼자, 곧장 큰 손이 뻗어와 도로 잡아끌렸다. 얼결에 사내의 뺨을 어루만지는 모양새가 되어 당혹감이 스민다.

이 사람, 초면에 거리감이 너무 가까운 거 아닌가.

여전히 눈물은 그치지 않은 채로, 뺨에 얹은 손 틈새로 차츰 물기가 젖어 들어간다. 체온보다 더 뜨거운 물방울로 인해 뺨의 온기를 알 수 없게 된다. 얇은 가림막으로 막힌 느낌에 형용할 수 없는 답답함을 느꼈다.

“그리고, 고죠 씨가 아니었어.”

“아니면?”

“고죠 선생님이라고 불러줬잖아.”

“에, 고죠 씨 선생님이야?”

“사토루 씨라니까. 그리고 지금은 아냐.”

연신 이어지는 알 수 없는 사내와의 뜻 모를 대화.

어떻게 할까. 고심 끝에 유우지가 내린 결론은.

 


 

“맛있어! 엄청 오랜만에 먹어보네.”

“다행이네. 나베 간만이야?”

“간만이지. 유우지가 만든 나베는.”

또 의중 모를 말을 한다. 닭고기 완자를 반 갈라 입 안으로 밀어 넣으며 유우지는 작금의 상황을 곱씹었다. 초면에 제 앞에서 엉엉 운 사내를 집에 들여 밥까지 함께 먹고 있는 이 상황을.

울음이 진정되고도 사토루는 자신의 손을 놓지 않았다. 외려 한껏 힘을 실어 왔다. 놔줄 생각이라곤 손톱만큼도 없어 보이는 사내를 보면서, 무턱대고 떼어내긴 어렵겠단 생각이 들었다. 초면에 실례일 법한 행동을 해도 싫지 않게 느껴져 신기했다.

그런고로 떼어내는 대신 같이 식사하지 않겠냐며 제의했다. 장을 봐서 돌아가기로 마음먹었으니 자신의 집에서 함께 먹는 것으로. 만난 지 몇 시간도 채 되지 않은 사내를 집에 들이기로 한 건,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다고 삽시간 내에 판가름을 내렸기 때문이다. 우는 모습이 맘에 걸리기도 했고. 그에 돌아온 건 반짝이는 눈망울과 몇 번이고 끄덕이던 고갯짓. 꼭 대형견 같았다.

이후 함께 장을 보고 사이좋게 짐을 나눠 든 채로 나란히 귀가했다. 명색이 손님이니 소파에 앉아있게 하고, 대충 식재료를 정리한 뒤 주방에 섰다. 간단하지만 대접하는 느낌이 나는 덴 나베만한 게 없다. 반죽한 완자를 숟가락으로 둥글리고 있는데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돌아보니 사토루가 요리하는 자신을 빤히 지켜보고 있었다.

왜? 하고 묻자 그리워서, 라고 돌아온 대답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저기, 유우지는 무슨 일을 해?”

“소방관.”

“또 위험한 일을 하는 거야….”

“또? 요즘 순직률도 많이 낮아졌는데. 나는 경방과라 위험은 있지만, 그만큼 보람 있어서 좋아. 만족해.”

“정말, 유우지의 그런 점….”

얼굴을 맞대한 채로 식사를 이어나가다 말고 질문을 받았다. 그러고 보니 통성명만 겨우 한 사이였음을 복기한다. 입에 밥을 잔뜩 집어넣었던 참이라 가볍게 대꾸하자 우려 담긴 대답이 되돌아왔다. 비단 위험한 일만은 아니라고 바로 정정해주긴 했지만, 자신을 걱정하는 게 느껴져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사토루 씨는 직업이 뭐야?”

“모델이야. 얼굴이 얼굴이니까? 썩혀두긴 아까운 것 같았고.”

“에, 거짓말이지. TV에서 본 적 없는데.”

“매체 타는 게 싫어서 잡지 촬영 위주로만 하거든. 인터뷰도 지면으로만 하고. 유명해지는 건 피곤하니까.”

“흐음, 그렇구나.”

직업이 모델이면서 유명해지는 건 피곤하다니. 신기하긴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게 된 이유가 있겠지 싶어 굳이 입 밖으론 내지 않았다. 수북이 쌓아 올린 밥을 젓가락으로 집으며 제 앞의 사내를 살핀다. 번듯한 겉모습처럼 식사 예절도 좋고 젓가락질도 단정하다. 음식을 씹을 땐 입을 열지 않는 모습을 보며 기본적인 예의가 몸에 밴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와 더불어 예쁜 얼굴과 상반되게 크고 투박한 손은, 저도 모르게 아까 포개졌던 무게감을 떠올리게 한다.

“저기, 유우지.”

“응?”

“밥 먹는데 그렇게 보면 좀 부끄러운데.”

“에, 아, 미안!”

사토루의 말에 정신을 차린 듯 유우지는 시선을 바로 밥그릇으로 내리깔았다. 후후, 부끄럽단 말과 상반되게 기분 좋은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그에 흘끔, 제 앞의 사내를 바라보자 기쁜 듯이 웃고 있다. 만난 지 몇 시간도 되지 않은 사이인데 왜 이렇게 편한 걸까. 말이 오가지 않는 대화의 공백도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이상했다. 꼭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인 듯한 기분이 들어서.

냄비를 두고 마주 앉아 나눠 먹은 나베는 어째서인지 그리운 맛이 났다.

 


 

첫 대면에 함께 식사까지 해 버린 그 날을 기점으로, 이따금 연락을 주고받는 사이가 되었다. 분명히 당혹스러운 처음이었지만 그런 것쯤은 넘겨버릴 정도로 두 사람은 잘 맞았다. 대화는 핑퐁 치듯 매끄럽게 이어지고, 시간 가는 줄 모르겠단 말을 처음 실감했을 정도로 함께 있으면 즐거웠다. 영화 감상이라는 공통의 취미도 있단 걸 알게 되어 때때로 같이 보게 됐다.

오늘도 그런 날 중에 하나. 몸이 잠식될 것처럼 푹신한 소파에 나란히 앉아 관람에 몰두하고 있다. 사람 많은 영화관은 싫다는 사토루를 배려해 영화는 항상 그의 맨션에서. 역시 모델이라 그런지 사는 곳도 고급 맨션인데다가, 거실엔 영화관 부럽지 않은 커다란 TV와 스피커까지 있다. 영화를 엄청나게 좋아하나보다, 하고 안일하게 생각했다.

캔을 집어 들어 목구멍으로 탄산 가득한 콜라를 넘기면서, 유우지는 이 집에 처음 왔던 날을 떠올렸다. 맨션 근처의 로손 편의점에서 간단히 감자칩과 콜라를 사 들고 왔더니, 보란 듯이 이미 식탁 위에 올려져 있어 당황했던 기억이 있다. 눈만 끔뻑이는 자신을 보고 사토루는 ‘집에서 영화 볼 땐 감자칩에 콜라잖아?’라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야 그렇긴 한데. 이런 것까지 비슷한가 싶어 신기하다고 볼을 긁적였던가, 뒷목을 매만졌던가. 무튼 그랬다.

잘 맞고 말고를 떠나, 마치 자신에 대해 모든 걸 알고 있는 듯한 느낌이 생경하게 다가왔다. 이유 모를 답답함에 애먼 쿠션만 괴롭히고 있을 때, 이쪽을 빤히 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유우지는 영화 볼 때마다 쿠션을 안고 있네.”

“아, 뭘 안고 보는 게 편하더라고. 안정된달까. 손을 얹어둔단 느낌에 더 가깝긴 한데.”

“…그렇구나.”

느닷없는 지적에 별 고민 없이 대답을 돌려준 뒤 다시금 화면에 집중했다. 지금 보고 있는 작품은 로맨스하면 이거지, 하고 손에 꼽힐 정도로 오래된 외국 영화. 워낙 유명한 작품이라 들어보긴 했지만 본 적은 없었던 작품이다.

영화의 개봉연도를 반증하듯 선명하지 못한 화질. 결말에 히로인이 죽는다는 걸 들어버리긴 했지만, 그런 걸 상쇄시킬 정도로 배우들의 연기력이 출중해 저도 모르게 작품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걸 고른 거려나.

감상할 영화를 고르는 건 언제나 사토루다. 함께 볼 영화는 자신이 고르고 싶단 말에 유우지는 흔쾌히 선택권을 넘겼다. 그렇게 알게 된 사토루의 취향은, 이렇게 표현하긴 뭐하지만 조금 올드하달까. 아무래도 고전 명작을 선호하는 것 같다.

매번 고심 끝에 골랐다고 라인을 보내올 때마다 함께 첨부해주는 영화 포스터는 화질에서부터 연식이 느껴진다. 덕분에 지금이 몇 년도인지 모르겠다고 한 번씩 웃어버리게 된다. 그게 싫다던가, 하는 건 결코 아니다. 굳이 따지자면 오히려 좋은 쪽에 가깝다. 모르던 작품들을 알게 되는 것도, 시대적 배경 등의 이해가 부족해 보충이 필요한 장면마다 잇따르는 사토루의 설명도 전부 좋아한다. 그래도 스포는 좀 자제해줬으면 하지만.

이야기는 적당한 시련을 넘기고 흘러가, 어느덧 죽음을 목전에 둔 히로인을 끌어안은 주인공이 연신 눈물을 쏟으며 잊지 않겠다 약속하는 대목이다. 저렇게나 사랑한 사람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눈물이 핑 돌고 코가 찡해져 킁 하고 훌쩍였다. 결말까지 미리 들은 주제에 우는 건 역시 부끄러운데. 눈을 연거푸 깜빡여가며 차오른 눈물을 말려보려 노력한다. 이미 들켰으려나 싶지만.

“유우지도 저런 상황이 오면 잊지 않겠다고 할 거야?”

갑작스레 훅 들어온 질문에 고개를 돌려 질문을 던진 사내와 눈을 맞췄다. 평소 가벼운 언동을 일삼던 사토루에게서 처음 보는 진지한 모습에 당혹감을 느낀다. 이쪽도 진지하게 대답해줘야 하는 건가 싶어 으음, 하고 작은 신음을 내며 고민했다.

자신은 스무 살이 다 되도록 누굴 좋아해 본 적이 없다. 따라서 이해할 수 없는 감정과 상황이지만, 만약 저런 순간이 온다면 어떻게 할까. 으레껏 잊지 않겠다고 생각하지 않으려나. 겪어보지 못한 일을 어림잡아 헤아려보는 건 역시 어렵다.

“그럴 것 같은데. 사랑하는 사람을 어떻게 잊겠어.”

“…거짓말.”

“응?”

“잊었잖아.”

알 수 없는 말과 함께 자신을 보는 사토루의 눈에도 물기가 어려있었다. 영화가 슬펐던 걸까. 그렇게 넘기기엔 어딘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 여태껏 사토루는 어떤 슬픈 작품을 보고도 운 적이 없으니까. 처음 만났던 날 대뜸 눈물부터 보였던 터라 울음이 헤픈 타입인가 생각하기도 했었지만, 그것도 아니다. 전 국민을 울렸다던 고전 영화도 눈물 한 방울 없이 감상한 사내다. 다른 이유가 있을 거라고 어림잡아 헤아릴 뿐이다.

어느새 영화가 끝났는지 화면이 전환되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간다. 시야 너머로 보이는 스크린 자막을 무시한 채, 유우지는 제 앞의 사내만을 응시했다. 가만히 시선이 뒤얽힌다. 언젠가 바다처럼 예쁘다고 칭찬했던 그 눈동자가 파도치며 자신을 잠식하는 것만 같다.

톡, 채 말리지 못한 눈물 한 방울이 유우지의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어째서인지 애처로운 기색이 역력한 사내에게 묻고 싶어졌다.

자신이 잊은 게 뭔지.


 

“바쁜가…….”

며칠째 새 메시지가 띄워지지 않는 사토루와의 대화창을 원망스럽게 바라본다. 다음 시즌을 준비하는 때라 촬영이 연달아 있다고 했던가. 일정이 바빠 한동안 연락이 뜸해질 거라고 했다. 연락의 빈도수에 대해 미리 일러준다는 게 낯간지러우면서도 별수 없이 기뻤다.

그렇지만, 매일같이 보내주던 메시지가 뚝 끊기게 된 것에 서운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가 없다. 혹여나 바쁜 그를 방해하는 일이 될까 먼저 연락하기도 망설여진다. 요 며칠 사이 부쩍 의존도가 높아진 핸드폰 액정을 톡톡 두드린다. 알림도 울리지 않는 화면을 몇 번이고 켜가며 확인하는 일이 늘었다. 고작 연락 하나로 이렇게나 신경 쓰고 있다는 게 스스로도 이해되지 않는다. 아무 사이도 아니면서.

굳이 이 관계를 정의 내린다면 지인 이상 친구 미만일까. 지인으로만 치부하기엔 가깝고, 친구라고 묶기에는 끝맛이 텁텁하다.

“역시 다른 세상의 사람인 건가….”

어디에도 들리지 않을 말을 중얼거린다. 어쩐지 힘이 빠지는 기분이라 앉아있던 식탁 위로 몸을 무너트렸다. 투박한 손가락 끝에 짧게 다듬어진 손톱과 대비되는 화려한 표지. 몇 번이고 넘겨본 잡지가 다시금 가벼이 팔락였다. 얇은 종이가 맥없이 넘어가는 모습을 멀뚱히 지켜만 본다.

이쪽 분야에 전혀 관심이 없어서 몰랐을 뿐이지, 사토루는 제 생각보다도 훨씬 유명했다. 잡지 촬영을 위주로 한다던 말을 기억하고 부러 서점에 들렀다가 깜짝 놀랐던 기억이 있다. 패션 코너에 즐비한 익숙한 누군가의 얼굴 때문에. 평소 서점과는 담을 쌓고 살았던 터라 본인만 몰랐던 모양이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사토루가 나온 건 죄다 홀린 듯이 집어 든 뒤. 거기까진 좋았으나 문제는 계산할 때였다. 물밀듯 몰려오는 부끄러움에 점원과 눈을 마주칠 수가 없었다. 아마 남자 팬이라 생각했겠지. 카드를 내밀 때 손이 조금 떨렸을지도 모른다.

서점 봉투를 달랑이며 집으로 돌아가는 길, 유우지는 불현듯 일전 들은 말을 떠올렸다. 유명해지는 게 싫어 매체에 노출되는 게 싫다던 사내의 말. 그때의 사토루는 질린 기색이 역력했다. 언젠가 가볍게 넘겨버렸던 대화를 뒤늦게 곱씹고 나니 그 이유가 궁금해지고 말았다. 물어보면 알려주려나. 그런 걸 물어볼 수 있는 사이가 되긴 한 건가, 우리. 애초에 우리라고 아울러도 괜찮은 걸까.

꽈아악. 종일 꺼졌다 켜지길 반복하며 혹사당한 핸드폰을 힘껏 그러쥐었다. 알림창 하나 띄워지지 않는 라인이 야속하다. 혹시라도 배터리가 없어 늦게 확인하는 일이 생길까 봐 충전은 전보다 더 자주하고 있다. 우습기 그지없다.

아무리 생각해도 알게 된 시간 대비 사토루의 입지가 제 안에서 너무나 견고해졌다. 자꾸 의존하고 싶게 만든다고 할까, 자신이 애써 쌓아 올렸던 둑을 가뿐히 무너뜨리고는 빙긋 웃어버리는 사람이다. 그 천연덕스러움에 아무 말도 할 수 없게 한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곧장 도쿄로 올라온 탓에, 알고 지내는 이라곤 동료들뿐이었던 제 앞에 갑자기 나타나서는.

“알 수 없는 말만 하고….”

그를 알게 된 후로 이유 모를 답답함이 계속해서 자신을 좀먹고 있다. 함께 있으면 즐겁고 잘 맞는 것과는 별개로, 가슴께에 묵직한 게 내려앉아 있는 것만 같다. 왜 매번 뜻 모를 말들을 툭툭 던지는지, 그때마다 슬퍼 보이는 얼굴을 하는 건 어째서인지. 묻고 싶은 말들로 산더미를 만든 지 오래지만, 어느 것도 입 밖에 내지 못했다. 궁금한 건 곧장 물어봐야 직성이 풀리는 주제에, 그러지 못했다.

덮어둬야만 할 것 같아서. 건드리면 안 될 것 같아서. 이상하게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지금이 몇 시더라. 잡념의 끝자락에 다다라서야 겨우 정신이 들었다.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하고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난다. 곧장 욕실로 직행하는 발걸음이 분주했다. 벌써 출근 시간이 코앞인 탓이다. 평소 나설 시간보다 일찍 준비해 소파에서 빈둥거리기 일쑤던 자신을 이렇게나 내몰 정도로, 제 안에서 사토루가 커졌음을 실감한다.

위험하다.

언제나 자신을 현장에 달려가게 만드는 사이렌 소리가 어딘가에서 위잉위잉 울리고 있는 것 같다. 이럴 땐 어디로 달려가야 하는 걸까.

 


 

다치는 건 익숙하다. 직업이 직업이고 경방과 소속이니 크고 작은 부상은 피할 수가 없다. 피할 생각을 할 거였다면 애초에 이 직업을 고르지 않았을 거고. 게다가 자신은 언제나 현장에 가장 먼저 뛰어들고, 제일 나중까지 뒤처리를 도맡는다. 출동만 나가면 누구보다 바쁘게 뛰어다녀 집에 돌아오면 언제나 녹초가 되지만, 많은 사람을 구한 날일수록 이상하게 안심이 된다. 해야 할 일을 마쳤다는 느낌. 업이니 당연한 이야기인가 싶으면서도, 보다 근본적인 과업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유 모를 구원받는 듯한 기분마저 느낀다.

그래서 멈출 수가 없다. 모두가 두려워하는 불길 속으로 내딛는 걸음을.

“이타도리. 병원 안 가도 되겠어?”

“이 정돈 그냥 두면 나아.”

동료의 걱정 어린 물음은 고맙지만 역시 병원에 갈 정도는 아니다. 괜찮다고 손을 휘적대며 소방서를 빠져나왔다. 오늘 출동했던 현장에서 진화작업을 하다 손에 가벼운 부상을 입었다. 용이한 움직임을 위해 보호 장갑의 손가락 부분엔 방열재가 적게 들어가기 때문에, 경미한 화상은 의외로 자주 있는 일이다.

그런고로 치료 대신 칼 같은 퇴근을 선택했다. 정도가 심한 것도 아니고, 다친 곳도 주로 쓰는 오른손이 아닌 왼손이니 괜찮겠지. 평소 더 도울 건 없나 하고 퇴근 시간 이후로도 미적대던 유우지에겐 드문 정시 퇴근이었다. 열감이 올라 화끈거리는 왼손을 흘끔 보고는 이내 모른 척했다.

“유우지?”

귀갓길에 노래라도 들을 심산으로 주머니에서 이어폰을 찾던 유우지의 움직임이 뚝 멈췄다. 익숙한 음성이 들려왔기 때문이다. 이렇게나 다정히 이름으로 자신을 불러주는 건 한 사람뿐이다.

“사토루 씨? 여긴 어쩐 일이야?”

“…지나가던 길. 유우지는 퇴근 중?”

“에? 아, 응.”

갑자기 예상치 못한 인물을 만난 탓에 유우지는 양손을 휘적거리며 허둥댔다. 사내의 굳은 얼굴이 낯설다고 생각하던 찰나 왼손을 붙들렸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고통이 몰려와 윽, 하고 작은 신음을 내뱉었다. 잔뜩 예민해진 피부가 고통을 호소한다.

“유우지 이건 뭐야? 다쳤어?”

“응. 오늘 현장에서 조금.”

“치료는?”

“굳이? 치료받을 정도는 아닌….”

채 말을 잇지 못하고 끝을 흐리고 만 것은 사토루의 눈썹이 보기 좋게 찡그려졌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맘에 들지 않는 모양이다.

“우리 집 가자.”

“에?”

채 대답하기도 전에 붙잡혀 있던 왼손이 풀리고 바로 오른손을 잡혔다. 아, 언젠가 포개졌던 크고 투박한 손이다. 맞닿아오는 온기가 마냥 좋아 제멋대로 끌려가는데도 반항 한번 하지 못했다.

이 온기가 좋다. 비단 온기뿐만은 아니다.

손의 열감이 얼굴로 번져버린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 유우지는 앞장서 가는 너른 등을 바라보기만 했다.


 

“유우지는 말이야, 이번에도 자꾸 다치기만 하네.”

치료에 능하다는 듯이 유려한 사토루의 손놀림을 빤히 지켜보던 참이었다. 뜻을 되물으려던 유우지는 반쯤 열었던 입을 도로 닫았다. 제 손에 연고를 발라주는 사토루의 표정에 속상하단 기색이 역력해서. 꼭 자신이 다치기라도 한 듯한 표정이다. 오늘도 띄우지 못한 물음이 하나 더 늘었다. 켜켜히 쌓인 의문이 마음을 무겁게 짓누른다.

왜 이렇게까지 다정히 굴어주는 거냐고 묻고 싶다. 자꾸 이러면 착각하게 되어버린다고. 답답함에 입술만 짓이기고 있던 차에 사내의 말이 마저 이어졌다.

“사실 지나가던 길 아니었어.”

“에, 그럼?”

“일 끝나자마자 유우지가 보고 싶어서 일부러 갔던 거야.”

보고 싶어서, 일부러.

듣기 좋은 부분이 마디마디 잘려 귓가를 타고 맴돈다. 폭탄에 상응할 만한 파괴력을 지닌 말을 참으로 덤덤히도 말한다. 무어라 할 말을 찾지 못해 그저 입만 벙긋거렸다. 자신이 무슨 생각을 염두에 두고 있는지를 전부 간파해, 착각이 아니라고 일러주는 듯했다.

꼼꼼하게 연고를 바르고, 거즈를 덧대고 신축성 좋은 밴드로 손을 감아주는 모습을 보면서 손재주가 좋은 사람이구나 생각했다. 남자다운 손임에도 섬세한 움직임. 물끄러미 그를 관찰하면서, 보고 싶어서 왔다는 말을 한참이나 곱씹었다. 그러고도 개운치 않아 결국 되묻고 만다.

“보고 싶어서 온 거야?”

“응.”

“내가 보고 싶어서?”

“유우지가.”

“왜?”

연달아 던진 질문에 사토루는 대답 대신 처치가 끝난 손을 어루만져주면서 살풋 웃기만 했다. 그 모습이 아름다워 더 보고 싶다고, 문득 생각해버리고 만다. 늘 제게 띄워주는 이 미소가 좋다. 한없이 다정한 이 손길도, 항상 즐겨 뿌리는 듯한 향수의 포근하면서도 묵직한 향내도. 어쩌면 이 사내를.

“이유가 궁금해?”

“궁금해.”

“유우지가 좋으니까.”

이어서 돌아온 대답은 명확한 직구. 사내의 좋아한다는 말이 어떠한 색을 띠고 있는지 모를 정도로 싱겁지는 않다. 다만 얼떨떨함에 대답을 고르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수그렸다. 손의 열감이 얼굴로 번진 게 확실하다. 뜨끈하게 열이 오르는 볼을 달래보려 손을 뺨에 대고 지긋이 눌러 보지만 역부족이다.

“부끄러워?”

“음, 조금….”

부끄러운가,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아. 그래서 이렇게 얼굴이 달아오르는가 싶다. 결론을 내림과 동시에, 돌려 말하는 데는 소질이 없으므로 곧장 실토했다. 그에 낮은 웃음소리와 함께 사내가 제 어깨를 잡아당겨 품에 집어넣는다. 와닿는 온기를 느끼고서야 붕 떠 있던 마음이 현실감을 되찾았다.

등을 감싸오는 두꺼운 팔의 묵직함이 너무나도 좋아 코끝이 찡해졌다. 같은 기쁨을 돌려주고 싶어 마주 두른 팔에 꽉 힘을 실었다. 전해지면 좋겠다. 이 기쁨도, 잔뜩 부푼 제 마음도.

“유우지는 말이야, 불의 냄새가 나.”

“불의 냄새?”

“응.”

불에 냄새 같은 게 있던가.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어 모르겠다. 만약 있다면, 늘 가까이에 있으니 저도 모르게 스민 걸지도.

의중을 헤아릴 수 없는 말에 유우지는 대답 대신 잠연히 눈을 감았다. 사토루는 제 몸에 포개진 아이의 가슴팍에서 균일한, 하지만 다소 빠른 속도로 뛰는 심장 박동에 귀를 기울였다. 이번 생에는 유우지가 자신의 품에 온전히 있다는 걸 잊지 않으려고.

 

유우지에게선 항상 불의 냄새가 난다.

체향 어딘가에 배어있는 듯한 그을린 내음.

유우지가 살아있음을 알려주는, 자신을 안심시켜 주면서도 불안하게 만드는.

 

사토루는 아이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 가만히 냄새에 집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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