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구리코] 언어의 밀도
2021. 08. 07
2021년 주술회전 헤테로 합작 참가 작품
8, 9권 스포일러 있음
오키나와의 여름은 유난히 덥고 습했다. 섬나라 특유의 지독한 열기가 전신을 감쌌다. 도쿄와 별반 다를 게 없으리라고 여겼으나 공항에 발을 들인 순간부터 비교도 되지 않는 텁텁한 공기가 입을 막았다. 숨이 막혔다. 하늘이 눈이 아플 정도로 파랬다. 그것을 비추는 수면도 마찬가지였다. 위도 아래도 전부 같은 색이다. 파도가 모래에 부딪혀 유리처럼 바스라진다. 유리끼리 부딪칠 때와는 전혀 다른 소리가 난다. 깨진 조각이 발끝을 적신다. 닿는 모든 부분이 시원했다. 짠 내가 어른거린다. 온갖 감각이 수런거렸다. 나쁘지 않았다. 머리 위로 그늘이 드리워진다.
“리코.”
성이 아닌 이름을 읊는 목소리가 더는 낯설지 않았다. 고개가 저절로 들렸다. 잘 정리된 머리카락 가운데 한 가닥만 이마 가장자리에서 헤엄친다. 언제 봐도 이상하다. 양손에는 오키나와에서 가장 유명한 아이스크림이 하나씩 들려 있다. 나는 남자를 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름을 부를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남자는 명명백백하게 나보다 연상이었고 처음 만난 이후로 며칠 지나지도 않았으므로. 세간의 상식이라면 게토 씨, 하고 불러야 할 게 틀림없었으나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그럴 수 없었다. 저쪽이 아무리 친근하게 백날 이름으로 불러봤자 나는 아마나이 리코면서 동시에 텐겐님이 될 몸. 이른바 높은 사람이다. 그렇다고 게토라고 부르기도 찝찝했다. 아무튼 ‘학교에서는 평범하게’ 말하고 있으니까. ‘스구루’는 진작에 패스했다. 뭐라고 불러야 할지 고민하던 사이를 파고들고 게토 스구루가 옆자리에 주저앉았다.
“혹시 더위 먹었어?
“아니거든.”
남자가 피식 웃었다. 뭐가 그리 재밌을까. 고개를 돌린다. 다시 끝도 없이 흩뿌려진 바다를 본다. 동화까지 몇 시간 남았지. 이제는 날이 아니라 시간 단위다. 오키나와 바다가 아니더라도 아마나이 리코로서 그냥 바다를 보는 건 아마 이게 마지막이리라. 그렇게 생각하니 이 아름답고 청량한, 고민 따위는 한 점도 없어 보이는 풍경도 제법 쓸쓸해 보인다. 역시 보는 이의 시선이 중요한 법이다.
“그럼 다행이네. 쿠로이 씨는?”
“피곤하다고 방에 먼저 갔다. 그 녀석은?”
“모르겠네. 같이 있었는데 어느 순간 없어졌어.”
“그래.”
고죠 사토루를 부를 때는 거리낌이 없다. 연상이라는 인식은 있으나 눈앞의 남자에 비해서는 한결 편했다. 본인이 지금 이 자리에 없어서 그렇다고 핑계를 대기에도 너무 자연스러웠다. 어느 쪽이든 둘 다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알지만, 또 어느 쪽이냐고 하면 게토 스구루보다는 고죠 사토루가 대하기는 더 편했다. 검은 머리의 남자는 조금 거북했다. 이유는 모르겠다. 그냥 왠지 그랬다.
“오키나와 특제 소금 맛이랑 바닐라 맛 중에 뭐 먹을래?”
게토 스구루가 들고 있던 아이스크림을 보여 준다. 둘 다 하얗고, 거의 녹지 않았다. 가게가 근처였던가 몇 번이고 되짚어 봐도 그건 아니다. 블루씰이 아무리 오키나와 도처에 널려 있다고 하지만 해변을 어슬렁거리는 내내 본 기억이 없다. 게다가 손에 든 아이스크림이 네 개가 아니라 두 개인 것도 미심쩍다. 이미 호텔에 다녀온 거 아냐? 꽤 타당한 추론이 속에서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남자는 웃고 있다. 거짓말쟁이의 얼굴을 하고 있어 속을 가늠할 수가 없다. 고맙다는 의례적인 말을 건네고 소프트콘 하나를 집어 든다. 겉으로 보기에는 이게 바닐라 맛인지 소금 맛인지 모르겠다. 한 입 핥으면 텁텁하지 않은 단맛이 확 퍼진다. 바닐라 맛이었나보다. 남자도 제 몫의 아이스크림을 먹기 시작한다.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이 순간만큼은 ‘우리’가 된다.
“잠깐 걸을까?”
게토 스구루는 손을 내민다. 누군가에게 손을 뻗는 게, 아주 자연스러웠다. 오로지 타인을 돕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듯한 신체의 일부가 어딘가 못마땅했다. 나는 그것을 잡지 않았다. 잡고 싶지 않았다. 한 번 잡고 나면 영영 놓지 못할 것만 같았다. 혼자 힘으로 일어선다. 그는 민망한 기색도 내비치지 않고 손을 내린다. 사람이 좋은 건지 아니면 숨기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다. 차라리 후자이기를 바랐다. 그렇다면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대등할 터이니. 대등한 관계라고 부를 만한 게 내게는 그닥 많이 남아 있지 않다. 성장체와 수발 담당. 성장체와 텐겐님. 학교 친구들을 제외하면 텐겐님과 동화할 ‘성장체’로서 쌓은 대등하지 않은 이해관계가 전부다. 성장체가 얽히기 시작하면 그 어떤 관계도 균형을 잃는다. 남자와의 관계도 거기에 속한다. 성장체와, 경호 담당. 그렇지만 한 번쯤은 성장체라는 이름을 버리지 않고도 타인과 같은 선상에 있고 싶었다.
우리는 나란히 해변을 거닌다. 게토 스구루는 키가 커 자칫하면 놓칠 것만 같아 신경이 바짝 곤두선다. 남자의 걸음이 그렇게 빠른 편이 아닌데도 그랬다. 내 속을 읽었는지 그가 몇 번이고 내 보폭을 살폈다. 신경을 쓰고 있는 기색이 역력했음에도 얼굴은 전혀 그렇지 않아 보였다. 그게 또, 괘씸했다. 그러나 불쾌하지는 않았다. 그를 따라 발을 옮길 때마다 발이 푹푹 빠지고 샌들 사이로 모래가 파고들어 온다. 까끌한 느낌이 싫지 않았다. 나를 둘러싼 모든 감각이 소중했다. 모래에 닿은 파도가 무너져 거품이 된다. 먼 곳으로부터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났다.
“모처럼 오키나와까지 왔는데, 리코는 하고 싶은 일 같은 거 없었어?”
짧지도 길지도 않은 정적 끝에 그가 말을 붙인다. 남자의 질문에 나는 걸음을 멈춘다. 쉽지 않은 질문이었다. 적어도 내게는 그랬다. ‘하고 싶은’ 일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아무리 목록을 빼곡하게 채워도 내가 할 수 있을 리가 없으므로. 이 장소 또한 마찬가지였다. 원래는 절대로 올 수 없는 곳이었다. 여행은 내게 허락되지 않았다. 부모님을 잃은 이후로 지금까지 십 여년동안 나를 계속 돌봐준 쿠로이는, 내가 원했던 대부분을 이뤄줬다. 예외가 있었을 뿐이었다. 여행이 그랬다. 쿠로이의 의지는 아니었을 것이다. 쿠로이 미사토는 결국 대대로 성장체를 모셔 온 가문의 일원이었으므로 그들의, 또 주술계 상층부의 뜻을 따라는 게 당연했다. 탓할 생각은 없다. 나는 그걸 알면서도 휴가철마다 그녀에게 조르곤 했다. 이번 방학 때는 유럽에 가고 싶어. 아니면 오키나와라도 좋아. 그러면 쿠로이는 곤란한 듯이, 눈썹을 내리고 웃어 보이는 것이다. 나는 그 얼굴이 좋았다. 아가씨는 오키나와에 가면 뭘 하고 싶으세요? 블루씰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어. 하겐다즈로는 안 될까요? 블루씰이 좋아. 그런 날이면 어김없이 간식으로 하겐다즈 아이스크림이 나왔던 걸 기억한다. 그건 무슨 맛이었더라.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아이스크림을 먹는 나를 보던 쿠로이의 표정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우리는 오키나와에 왔다. 채 다 먹지 못한 아이스크림이 녹아 간다. 내가 오키나와에서 하고 싶던 건 무엇이었을까. 알 수 없었다.
“유리병 편지.”
“응?”
“유리병 편지, 써보고 싶었어.”
바다를 향해 다가간다. 파도가 넘실거린다. 게토 스구루가 내 뒤를 따랐다. 그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사박거리는 소리가 났다. 언젠가 그런 영화를 봤었다. 드라마였나? 그게 무슨 작품이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다만 봤다는 사실이 내게 남아 있었다. 남녀 주인공이 피치 못할 사정으로 헤어지고, 같이 갔었던 여행지를 각자 홀로 떠돈다. 다른 곳을 돌다가 먼저 추억이 깃든 해변에 다다른 여자는 남자가 무사하기를 바란다는 소원을 담은 편지를 유리병에 담아 떠나 보낸다. 거실 소파에 드러누운 채로 티비를 보고 있던 나는 시시하다고 생각했었다. ‘다시 만나게 해주세요.’ 도 아니고 ‘그가 건강했으면 좋겠어요.’ 라니. 만나지 못하는데 무슨 의미가 있는 거야. 그럼에도 제법 인상 깊었나 보다. TV 속 여자가 그랬듯 몸을 숙여 바닷물에 괜히 손을 적시다가 주저앉는다. 게토 스구루도 말없이 나를 따라 한다. 물은 시원했다. 그게 끝이었다. 나는 손을 뺀다.
“그치만 됐어. 지금은 아무것도 없으니까.”
“그럼 다음에 같이, 또 오자.”
“다음?”
남자가 아무렇지 않게 다음을 읊는다. 그 울림이 낯설어 남자의 입 모양을 따라 소리를 뱉었다. 그는 앞을 보고 있다. 바다는 고요하다. 한참 너울거리던 물결도 잠잠하다. 수면 위에는 아무것도 없다. 내가 볼 수 있는 건 남자의 옆모습뿐이다. 적막을 응시하는 남자의 옆얼굴에서 그 무엇도 읽어낼 수 없다.
“응. 다음.”
“이 몸은 내일부터…….”
“사람 일은 모르는 거잖아.”
게토 스구루가 내 말을 끊어 내고 그사이에 생겨난 공백을 제 말로 채운다. 내게 찾아올 리가 없는 미래를 읊는 그 뻔뻔함이 싫지만은 않다. 남자가 몸을 일으킨다. 다시 한번 손을 내민다. 나는, 이제 주저하기 시작한다. 이 손을 잡아도 될까. 모래알을 닮은 망설임이 손가락 끝을 기어 다닌다. 손에 묻은 모래를 대신 털어내 주듯 그가 손을 잡아 온다. 망설임이 녹아내린다. 손을 타고 흘러내리는 아이스크림처럼 끈적하고 진득하게.
“그러니까 또 오자. 다음에.”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어떤 말을 하지도 않았다. 손을 놓지도 않았다. 또. 다음. 그 짧은 단어들이 머릿속을 맴돈다. 손을 쥔 채로 남자가 천천히 걸음을 옮긴다. 그를 따라 발을 움직일 때마다 내 세상이 조금씩 바스라진다. 눈을 감는 게 무서워 그저 옆을 본다. 해가 수면 아래로 서서히 잠겨 간다. 태양이 토해낸 빛이 사방으로 튀어 하늘을 물들인다. 하늘을 비추는 거울 역시 같은 색을 띤다. 물결이 반짝이며 만들어내는 틈새가 온통 노을색이었다. 세상을 채운 색깔이 어쩐지 전부 그를 닮았다. 눈을 감아도 자꾸 밀려드는 검정에 노을을 섞인 오묘한 색과, 아직도 입안에 남아 있는 텁텁한 바닐라 맛과 하나의 바다가 수십 개로 쪼개질 때 내는 소리. 그리고 맞닿은 손바닥 통해 전해지는 온기. 이 모든 것을 내 기억에서 지워버리고 싶었다. 텐겐님과 공유하고 싶지 않았다. 동화와 동시에 사라지기를 바랐다. 이 순간만큼은 오로지 내 것이었으면 했다. 이대로 모든 게 멈춰 버렸으면 좋겠는데도 동시에 남자가 말한 ‘다음’을 원했다. 유리병에 담을 소원을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이제는 알 것만 같았다. 잡은 손에 아주 조금 힘을 주었다. 게토 스구루가 아주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그것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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