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술회전

[고죠유지] 캔디 보이

* 선후배 AU

* ts 소재 사용

우리 학교에는 캔디 보이라는 명칭을 가진 선배가 존재한다. 외관이 하얀 솜사탕을 닮은 그 선배는, 캔디 보이라는 명칭에 맞게 하루도 빠짐없이 사탕을 입에 물고 다녔다. 정확히는 사탕을 매일 물고 다녔기 때문에 캔디 보이라는 별명이 붙은 게 맞는 말이겠다. 선배의 사물함에는 사탕과 초콜렛 같은 달달구리한 간식들이 한가득 채워져있는 건 예사였고, 얼마나 먹어대는 건지 매일같이 매점의 간식들을 쓸어갔다. 그 정도가 어느 정도냐 하면은 우리 학교 매점의 수익은 대부분 선배의 지갑에서 나온다는 우스갯소리까지 돌 정도였다.

내가 선배를 알게 된 건 입학하고 꽤 시간이 지나고 나서였다. 2학기가 시작되고 계절이 붉은 가을에 접어들었을 무렵, 선배는 딱 보기에도 웃긴 선글라스를 쓰고 교문 앞을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소위 말하는 노는 선배. 딱 그게 첫인상이었다. 저런 사람이랑은 엮이지 않는 게 상책이지. 슬그머니 그의 옆을 지나쳐 교문을 통과하려는 이타도리의 앞에 얇은 판떼기가 길을 가로막았다. 와그작. 그는 자신의 이가 튼튼하다는 걸 자랑이라도 하듯이 저를 내려다보며 사탕을 깨부쉈다. 무슨 문제라도…? 이타도리가 고개를 들어올려 푸른색의 눈동자와 눈을 마주했다. 지극히 평범한 여고생의 말투. 하지만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평범한 건 절대 평범한 범주 안에 속하지 않았다.

"모르는 거야, 모르는 척이야. 아직 사복 비허용 기간이거든?"

고죠가 한껏 껄렁거리는 태도로 이타도리의 복장을 지적했다. 검은색의 마이 안에 빨간 후드티를 갖춰입은 이타도리가 눈동자를 데굴 굴렸다.

"아하하, 그런 줄 몰랐네."

말은 능청스러웠지만 차마 마주치지 못하고 애먼 곳을 바라보는 눈은 아주 솔직했다. 거짓말을 이렇게 티나게 해서야 쓰나. 고죠가 삐딱하게 자세를 잡고 식은 땀을 뻘뻘 흘리는 이타도리를 빤히 응시했다.

"다른 변명 뭐 없어?"

"없는데 어쩌죠…?"

"그걸 왜 나한테 물어. 네 조그만 머리로 잘 고민해 봐, 아니면 그냥 벌점 먹던가."

너무나 뻔하디 뻔해서 지루했다. 아아, 귀찮아. 스구루 자식만 아니어도 이런 짓 하는 게 아닌데. 고죠가 여태 끙끙거리고 있는 이타도리를 시시하다는 눈으로 내려다봤다. 자신보다 어린 여자애를 거칠게 다루는 취미는 없지만 저 작은 머리통이 결론을 내기까지 기다릴 수도 없는 마당이었다. 보내야겠다. 그렇게 마음 먹고 하늘색의 파일을 펼쳐 체크하려는 순간 이타도리가 고죠의 손을 덥썩 잡아왔다. 뭐야? 고죠의 눈썹이 까딱였다.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성가시다는 티가 물씬 났다. 일단 고죠의 행동을 멈춘 이타도리가 황급하게 가방을 내려놓고, 대뜸 마이와 후드티를 벗기 시작했다. 아무리 급해도 그렇지, 너 여자애거든? 고죠가 말릴 새도 없이 작은 머리통이 후드티를 통과하면서 머리를 질끈 묶고 있던 머리끈이 끊어졌다. 높게 치솟았던 분홍색의 머리가 풀어헤쳐져 어깨 위로 풀썩 내려앉는다.

아, 머리끈 끊어졌네.

실보다 얇은 머리카락이 보푸라기처럼 부스스하게 일어났다. 이러면 되는 거죠? 단조로운 목소리가 언뜻 귓가를 스쳐지나갔다. 상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제대로 듣지는 못했지만 해맑은 미소를 보고 제멋대로 답이 흘러나왔다.

"어? 어어."

참으로 멍청한 대답이었다. 무언가에 홀린 듯이 정신이 흐릿했고, 다시금 정신을 다잡았을 때엔 이미 해맑게 웃던 분홍색의 머리통이 교문을 통과하고 난 후였다. 고죠가 사탕이 다 녹고 달랑 남은 하얀 막대를 바닥에 뱉어냈다. 딱히 제 행동에 후회한 적은 없었지만 이때 문득 든 생각은 아마도 후회였다.

아, 이름 적어둘 걸.

캔디 보이 上

w. 靑

"오늘 선도 고생했어."

학생들로 득실거리는 복도, 그 틈에서 걷고 있던 고죠의 어깨 위로 묵직한 팔이 올려졌다. 아침 댓바람부터 교문에 서서 관심에도 없던 학생들을 잡아가며 벌점을 매기게 민든 원인.

"귀찮으니까 이런 것 좀 시키지 마."

고죠가 한껏 짜증이 오른 말투로, 얇은 파일을 휘두르며 무방비하게 드러난 게토의 배를 가격했다. 고작 이면지 두어 장 들어있는 종이 파일이 아플리가 없었다.

"시키면 할 거면서."

"안 한다고."

고죠가 먼지를 털어내듯 제 어깨에 둘러진 팔을 밀어냈다. 일말의 여지도 없는 단호한 말투였지만 부탁한다면 못 이기는 척 들어줄 것이 뻔했다. 고죠 사토루는 그런 사람이었다. 하나같이 입을 모아 행실이 거칠고 통제할 수 없는 학생이라고 말하지만, 그는 한 번 자기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아무리 하잘 것 없는 부탁이더라도 틱틱대면서 들어주는 사람이었다. 사람 이름도 제대로 외우지 않는 그에게 자신의 사람이라고 인식되는 것이 역경일 뿐이지.

"스구루 너 혹시,"

우리 학교 다니는 분홍색 머리 여자애 알아?

"혹시?"

"아니다. 됐어."

물어봐서 뭐 어쩌려고. 고죠가 고개를 내저으며 미직지근하게 대화가 끊냈다. 그럼에도 게토는 별달리 채근하지 않았다. 고죠는 적어도 게토의 한에서라면 필요한 이야기를 숨기는 법이 없었다. 굳이 당장 캐묻지 않아도 나중되면 알아서 풀릴 궁금증이란 뜻이다.

"그런데 사토루."

선글라스 아래에 가려진 파란 눈동자가 게토에게로 향했다.

"너 사탕은? 맨날 당 떨어진다고 입에 물고 있더니 어쩐 일로 안 먹고 있네."

"……."

"사탕이 없을리는 없고…. 뭔데?"

"그냥 안 땡겨서. 내가 맨날 사탕만 먹고 사는 줄 아냐?"

순간 게토가 말을 잃었다. 고죠 사토루는 맨날 사탕만 먹고 살았다. 매일 먹는 건 둘째치고, 매순간 먹고 있던 사람이 지금 뭐라고 하는 거야. 어이없어 하는 눈초리가 빤히 자신을 향하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고죠는 스스로 자신의 입술을 매만지기 바빴다. 이상하게 사탕을 입에 물고 있지 않아도 입안이 달았다. 혓바닥에서 단맛이 느껴지거나 아까의 단맛이 아직까지 머물고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달았다. 너무 많이 먹은 나머지 입안에 사탕의 향이 베어버린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허나, 알 수 없는 달달함은 길게 가지 못했다. 곧 수업이 시작된 까닭이었다. 고죠는 급격하게 당이 떨어지는 것을 느끼며 책상 사물함에 박아두었던 사탕을 꺼내 물었다. 대체 어느 학교가 수업 중에 군것질 하는 것을 용인하겠는가. 하지만 선생은 그 광경을 직격으로 목격했음에도 익숙하게 묵인했다. 이래 봬도 고죠 사토루는 전교 석차 1등을 놓친 적이 없는 엘리트였다. 시야를 좀 더 넓혀 보자면, 전국 상위 1%. 흔히들 말하는 난놈 중에 난놈. 그게 바로 고죠 사토루였다.

겉보기에는 띵가띵가 베짱이마냥 노는 것 같이 보여도 명문가의 자식으로 태어난 고죠 사토루는 틀에 박힌 전통을 추구하는 고리타분한 집안 덕분에 어릴 적부터 분야를 가리지 않고 조기 교육을 받았다. 딱히 기대는 없었다. 어린 아이 같지 않은 매서운 눈초리에 어른들은 혀를 내두르기 바빴다. 그러나 모든 시야가 뒤집어졌다. 고죠 가(家)에서 그저 ‘기분 나쁜 아이’로만 여겨지던 아이는 열여섯이 되던 해, 예기치도 못하게 천재성을 발휘하며 모든 교육 과정을 끝내버렸고, 혀를 내두르던 이들은 소년을 보며 이를 바득 갈았다. 기분 나쁜 아이는 어느새 두려움의 상징이 되어있었다.

하염없이 초록색 칠판을 바라보던 고죠가 입을 쩌억 벌리며 하품을 했다.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이미 아는 내용을 다시 들어야만 하는 이 시간은 그에게 곤욕, 그 자체였다. 기계적으로 교과서를 읊기만 하는 학교 수업은 복습 축에도 끼치 못했다. 삐딱한 자세로 앉아 심드렁한 얼굴로 칠판을 바라보던 고죠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선생님, 큰 거 마려운데 화장실 좀 가도 돼요?"

물론 거짓말이다. 화장실은 가고 싶지 않았을 뿐더러, 큰 건 더더욱 마렵지도 않았다. 그러나 이 지루한 시간을 타파하기 위해서라면 무엇인들 하지 못할 것이 없었다. 그러니까 억지로 똥을 싸더라도 말이다.

"그런 건 일일이 말하지 않아도 되니까 조용히 다녀와."

"네네."

건성으로 답하며 재빠르게 교실을 벗어나는 그의 뒷모습을 본 교실에 있는 모두가 같은 생각을 했다. 그가 다시 교실로 돌아오는 일은 없을 거라고.

아아, 지루해. 뭐 재밌는 거 없나. 점차 크기가 줄어드는 사탕을 노련하게 혀로 굴리며 걸음이 닿는대로 걷기 시작했다. 아니나 다를까 이미 수업은 뒷전이었다. 나름 차별의 대상이었던 자신이 이러한 일로 출석부에 문제가 생길 리가 없을 터, 모두가 예상했던대로 그는 교실에 돌아갈 생각같은 건 일체 하지 않았다. 그것보단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설탕 덩어리가 아쉽기만 했다. 미리 사재기를 해둔 여분은 전부 교실에 있었고, 고작 사탕 몇 개 때문에 다시 그곳으로 기어 들어가긴 싫었다. 혹시 모른다는 심정으로 주머니를 뒤적이자 이미 벗겨먹고 버리지 않은 비닐 껍질이 주머니에서 나뒹굴고 있었다. 나오라는 건 안 나오고 쓰레기만 나오네. 우두커니 서서 손에 잡힌 비닐을 바라보던 고죠가 신경질적으로 주머니에 손을 밀어넣었다. 사람은 왜 이렇게 청개구리 습성이 강한 걸까. 수중에 가진 게 없다는 걸 알게 되고 나니 더 먹고 싶다는 욕구가 치솟았다.

그러나 곧 고죠는 무언가를 깨닫고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현재 제 수중에 없는 건 사탕 뿐만이 아니었다. 주머니에 쓰레기 밖에 없다는 건, 지갑도 교실에 있다는 소리였다. 오늘따라 제 뜻대로 되는 일이 하나 없었다. 에라, 모르겠다. 별다른 대책은 딱히 없었지만 어떻게든 되겠지, 라는 심보로 무작정 계단을 내리기 시작했다.

학교 1층. 주차장과 연결되는 출입구로 나서면, 바로 한쪽 구석에 자리하고 있는 자그마한 매점이 나온다. 점심 시간에는 발 디딜 틈 없이 사람이 붐비는 곳이지만 수업 시간 때면 이렇게 한가로운 곳도 없었다. 고죠 사토루는 종종 매점 앞 벤치에 누워 혼자 시간을 떼우곤 했다.

"어어!"

그런데 오늘은 혼자가 아닌 듯 했다. 웬 불청객이 와 있네. 소리가 나는 곳으로 고개를 돌리니 눈에 익은 빨간 후드티가 눈에 들어왔다. 하, 저것 봐라? 제 앞에서 호기롭게 벗어던질 땐 언제고, 교문 앞에서 어쩔 줄 몰라 끙끙대던 후배는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버젓이 후드티를 입고 있었다. 당돌하다 못해 이젠 맹랑하기까지 했다.

고죠 사토루도 그렇지만 이타도리 유지 역시 교칙을 잘 지키는 착실한 학생은 아니었다. 이타도리 유지에게 학교란, 친구들과 어울려 즐겁게 놀기 위한 공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지금 하고 있는 꼬락서니만 봐도 그녀의 학교 생활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다. 말로는 교과서를 들여다본다고 하지만 공부와는 이미 담을 쌓은 지 오래였고, 교문에서 벌점을 먹을 뻔 했으면서도 이리 태평하게 땡땡이를 치고 있을 수 있는 이유 또한 같았다. "재미없는 건 하기 싫어." 그렇다고 해서 허튼 짓을 하고 돌아다니는 막나가는 학생은 아니었지만.

"혹시 나인 거 봤나…?"

고죠의 인영을 보고 당황한 이타도리가 허둥지둥대다 후드를 뒤집어쓰고 자신의 얼굴을 가렸다. 까짓 거 벌점 좀 먹고 선생님한테 잔소리만 들으면 끝날 일인데, 왜인지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이런다고 제 몸이 숨겨지지 않을 걸 알면서도 벤치에 등을 돌리고 앉아 몸을 잔뜩 웅크렸다. 발소리가 가까워질수록 긴장한 가슴이 더욱 세차게 뛰었다. 이러다 입밖으로 심장 튀어나오는 거 아니야? 이타도리가 슬며시 두 손으로 제 입을 가렸다. 아니, 가렸다는 표현보다는 막았다는 표현이 맞았다. 혹시라도 제 심장이 입밖으로 달아나는 일이 없게 두 손으로 입을 단단히 막았다. 하지만 여기서 이타도리가 간과하고 있는 사실이 여러가지 있었다.

첫째, 고죠는 선도부가 아니라 단지 게토의 부탁으로 일일 선도부를 선 거라는 것.

둘째, 원래 고죠는 다른 사람의 동향에 그리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는 것.

셋째, 본인 뿐만 아니라 고죠도 지금 땡땡이를 치고 있는 중이라는 것.

위 사실을 모르고 있던 이타도리는 지금껏 긴장한 것이 허무하게 고죠가 말을 거는 순간 맥이 빠져버릴 수밖에 없었다.

"야 너 돈 있냐?"

***

따스하게 내리쬐는 햇빛과 살갗을 스치고 지나가는 시원한 바람. 그리고 적당히 안정감을 가져다주는 사람들의 목소리.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감고 있던 두 눈 위로 어두운 그림자가 졌다. 사토루, 땡땡이 좀 그만 쳐. 그다지 달갑지 않은 음성이었다. 여유로우면서도 익숙한 목소리가 나른한 휴식을 방해하자 고죠가 미간을 찌푸렸다. 지금 누가, 누구 보고, 그런 말을 하는 거야.

"그러는 너는."

"뭐, 이런 날도 있어야지."

게토가 어깨를 들썩이며 털썩, 고죠의 바로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짦게 한숨을 내쉰 고죠가 느지막히 상체를 일으켰다. 이미 깨져버린 휴식. 누워있고 싶다는 생각이 아예 사그라들었다. 조회대에서 운동장은 한눈에 들어왔고, 기다란 다리를 대충 척, 척, 벌리고 앉은 고죠가 감흥이 없는 눈으로 운동장을 응시했다.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빨간색의 체육복을 입은 1학년들이 ㅡ 체육복은 1학년은 빨간색, 2학년은 연두색, 3학년은 하늘색으로 색상이 나뉜다.ㅡ 넓디 넓은 운동장을 떠들썩하게 만들고 있었다.

"청춘이네."

게토가 흘리듯이 하는 말에 고죠가 고개를 끄덕였다. 고작 열아홉인 자신들이 할말은 아니었지만 저건 정말 열일곱만이 겪을 수 있는 청춘이었다. 그래서 자신들도 저런 열일곱의 청춘을 즐겼냐하면은, 그건 또 아니었다. 각박한 집안에서 자라, 여지껏 청춘이라는 건 모르고 살았다.

'아무리 청춘이래도 어떻게 수업이 즐거울 수가 있어.'

고죠의 사고로는 이해할 수 없는 회로였다. 체력 단련 시간이었는지 한참 달리고 있는 빨간 체육복 사이, 홀로 교복을 입고 있는 익숙한 분홍 머리가 보인다. 같은 학교, 성별이 다른 후배. 다른 이들에 비해 딱히 특별한 점이 있는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자꾸 눈에 밟혔다. 얼마 전에도 그랬다. 이름도 모르던 후배에게 사탕 값을 돌려주겠다고 무작정 1학년 층 복도를 돌아다녔을 때에도. 저 아이만 유독 눈에 들어왔다. 한참 늦은 타이밍이었지만 그제서야 잊고 있던 이름을 물었더랬지.

이타도리가 빠르게 달리기 위해 힘차게 발을 구를 때마다 주름진 치마가 펄럭인다. 치마를 입고 있는 주제에 참 열심히도 달렸다. 저렇게까지 열심히 하는 이유가 대체 뭐야. 고죠는 못마땅한 눈초리로 계속해서 이타도리의 인영을 쫓았다. 이렇게까지 남에게 관심을 가지는 자신이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이런 쪽으로 경험이 전무했던 고죠는 관심을 끊어내는 법을 몰랐다.

한참동안이나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니 보고 싶지 않은 것들도 보였다. 후드티가 자신의 살가죽이라도 되는 양 입지 말래도 바득바득 입을 땐 언제고, 얻다 갖다 팔았는지 하얀 와이셔츠가 땀으로 흠뻑 젖어 검은색 속옷이 적나라하게 비쳤다. 쟨 여자애가 왜 저렇게 조심성이 없어? 다른 사람이었다면 신경쓰지도 않을 일이었다. 누가 저러고 있든 말든,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냐며 무심히 지나쳤을 광경이었다. 그런데 지금의 고죠는 뭔가 달랐다. 뭐가 그리 불안한지 눈살을 찌푸린 채 다리까지 떨면서 그 모습을 지켜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조금 빠른 걸음으로 그녀에게 향했다.

"너 체육복은 어쩌고 이러고 있냐?"

"어? 선배?"

갑작스런 그의 등장에 당혹스러웠다. 범상치 않은 선배라는 거야 진작 알아챘지만, 수업 중에도 불쑥 제 앞에 나타날 거라고는…. 이건 정말 생각해 본 적 없는 시나리오였다.

"선배가 땡땡이치는 거야 상관없지만…, 저희 아직 수업 중인데요."

던진 질문과 연관성이 전혀 없는 답변이었다. 왠지 모르게 심사가 거하게 비틀렸다. 고죠가 눈에 힘을 바짝 주고 이타도리를 내려다보며 낮게 깔린 목소리로 다시금 질문을 던졌다.

"체육복 어쨌냐고."

"빨아놓고 가져온다는 걸 깜빡했어요."

이번에는 다른 말없이 원하는 답변을 내어줄 수밖에 없었다. 이타도리가 결코 먹이사슬 아래에 존재하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상위 포식자인 고죠의 앞에선 도토리따위나 줍고 다니는 작은 다람쥐에 불과했다. 딱히 겁을 먹은 건 아니었다. 다만 흔들림없는 저 시퍼런 눈동자가, 제가 거역이라도 하면 무슨 일을 저질러도 크게 저지를 것 같았다. 개개인의 체력 단련 시간이었다고 하나, 엄연히 수업 중이었던 이타도리는 주변의 눈치를 보며 눈동자를 도륵 굴렸다. 이런 상황에서 선생님을 맞닥뜨리게 되는 경우, 선배야 도망가면 그만이겠지만 난처한 건 자신이었다.

"저 이제 가봐야 되는데."

대충 얼버무리며 보내려 하는 순간, 고죠의 검은 가쿠란이 이타도리의 어깨 위로 둘러졌다.

"거슬리게 하지말고 입어."

품이 넉넉한 가쿠란이 자연스럽게 이타도리의 어깨를 감싸안았다. 저도 모르게 달리느라 엉망으로 흐트러진 머리칼로 손이 향했다. 어깨에 아슬하게 걸쳐졌던 교복이 스르르, 흘러내리려 하자 이타도리가 재빠르게 옷깃을 쥐어잡았다. 멈칫. 고죠가 뻗었던 손을 거두고 곧바로 등을 돌렸다. 오랜 경험으로 이곳에 더 자리해봤자 쓸데없는 대화만 오고 가리란 걸 잘 알았다.

고죠는 다시금 조회대로 돌아가는 동안 제 손을 빤히 쳐다봤다. 하마터면 잔머리가 비죽 솟은 머리를 쓸어넘길 뻔 했다. 순간 이타도리가 움직이지 않았다면 제 손은 그대로 머리를 쓸어넘겼을 거고, 그 다음은……. 글쎄. 모르겠다. 그 후는 예측되지 않았다.

"뭐."

"아무 말도 안 했어."

말이야 안 했지. 하지만 고죠가 조회대에서 벗어나는 그 순간부터 다시 돌아오기까지의 모습을 전부 지켜보던 게토가 새까만 눈동자를 반짝 빛냈다. 도덕적인 관념은 고사하고, 오로지 자기자신만이 세상의 구축인 고죠 사토루가 남에게 신경을 쏟는다. 그의 성정을 잘 아는 죽마고우로서 참으로 구미가 당기지 않는 주제일 수가 없었다.

"사토루 저 1학년한테 관심 있어?"

"그런 거 아니야."

그런 게 아니긴. 고죠는 단칼에 여지를 잘라냈지만 어느 누가 관심도 없는 사람에게 제 옷을 벗어주겠느냐 말이다. 이런 와중에도 고죠의 시선이 제 옷을 걸치고 있는 이타도리에게 향해 있었다. 이타도리는 어느새 단추를 전부 채운 채 운동장을 활보하고 있었다. 게토는 끈덕지게 그녀의 자취를 좇는 고죠를 보며 인상을 찡그렸다.

‘어떻게 이렇게 티날 수가 있지?’

세상 사람이 다 아는 걸 고죠만 몰랐다. 정확히는, 알면서도 제 감정을 의심하는 중이었다. 고죠는 누구에게나 벗겨 먹어보고 싶은 사탕같은 존재였다. 되먹지 못한 성격을 겪고 나서 질린다며 떠나는 사람도 있었지만 화려한 외모를 보고 다가오는 사람도 많았고, 까칠한 것이 매력이라며 좋아해주는 사람도 있었다. 절대 주변에 둘러볼 사람이 없던 게 아니었다. 그런데도 정작 제 관심을 이끄는 건, 고작 후줄근한 후드티를 입은 같은 학교의 평범한 여학생이었다. 믿기지 않는 게 아니라, 믿고 싶지 않았다.

  

***

"어? 그 가쿠란, 고죠 선배 거잖아?"

"어? 누군지 알아?"

"유지, 아무리 연애에 관심이 없다 해도 고죠 사토루 선배 정도는 알고 있는 게 어때?"

최근 몇 번이나 마주친 전적이 있었지만, 이름까지는 몰랐는데. 이름이 고죠 사토루였구나. 매번 본인 할말만 하고 사라지는 선배한테 물을 시간도 없었지만, 설마 다음이 있겠냐며 안일하게 생각한 저도 단단히 한몫했다.

"그런데 너 선배 이름도 모르면서 가쿠란은 어떻게 입고 있는 거야? 그러고 보니, 저번에도 너 찾아오지 않았어?"

그렇긴 하지……. 이타도리가 말끝을 흐렸다. 어쩌다보니 많이 마주치긴 했지만 그간 동선이 많이 겹치나보다 정도로 생각했지 별다른 생각은 없었다. 하루에도 학교에서 수많은 사람과 마주치는데 의의를 두는 게 더 이상했다. 그저 스쳐지나가는 인연. '다음'이라는 기약이 없는 사이. 하지만 우리에게는 지금 '다음'이라는 기약이 생겨버렸다. 이타도리가 제 몸을 두르고 있는 가쿠란의 가슴팍을 매만졌다. 얇은 실들이 겹겹이 쌓여진 까슬한 감각 위로 오돌토돌 새겨진 글자가 느껴졌다. '고죠 사토루' 품이 넉넉한 가쿠란 주인의 이름이 손가락 끝으로 전해졌다.

"흐음. 그 선배가 누구한테 호의를 배풀고 그런 사람이 아닌데 이상하네. 유지, 혹시 너한테 관심 있는 거 아니야?"

"응? 에이, 그럴리가."

쿵, 쿵, 쿵. 어라. 체육시간은 한참 전에 끝났는데도 심장이 요동쳤다. 볼이 후끈 달아올랐다. 생에 처음 겪어보는 낯선 감각이었다.

***

가능한 한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사람과 얼굴을 마주하는 것이 껄끄럽게 느껴지긴 처음이었다. 단 한 번의 경험이었지만 그때의 감각이 떠오를 때면 속이 울렁거렸다. 선배의 백발이 눈에 보이기만 해도 다시금 되새겨지는 감각에 자동적으로 몸을 숨기기 급급했다. 다급하게 화장실로 뛰어들어간 이타도리가 슬쩍 고개를 내밀고 복도를 살폈다.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선글라스를 낀 선배는 입에 사탕을 문 채 새하얀 와이셔츠만을 입고 복도를 거닐고 있었다. 눈을 꿈뻑거리며 선배의 동향을 지켜보다, 순간 매섭게 빛나는 시퍼런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헙. 이타도리가 공격 받은 거북마냥 빠르게 고개를 집어넣었다. 아무리 막무가내여도 여자 화장실까지 처들어오진 않겠지? 긴장감이 감돌았다. 심장이 세차게 뛰고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놀란 가슴을 부여잡고 동향을 살피기 위해 다시 한 번 고개를 빼꼼 내밀자, 타이밍 좋게 선배가 유유히 제 앞을 지나쳐갔다.

하아. 안도의 한숨과 함께 이타도리의 어깨가 추욱 늘어졌다. 지금까진 이런 식으로 어찌저찌 넘어갔지만 계속해서 이렇게 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런 허술한방법으론 금방 들통나겠지. 평생 피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이러한 나날을 벌써 며칠이나 반복되고 있었다.

"유지,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돼? 너 어차피 선배한테 옷도 돌려줘야 하잖아."

"으응, 그렇긴 하지."

친구의 말이 맞았다. 선배가 계속해서 저를 찾아오는 것도 아마 이 때문일 거다. 달랑 와이셔츠만 입고 다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빨리 줘야된다는 자각은 있지만 그게 생각처럼 쉽게 풀리지 않았다. 차라리 선배가 없는 틈을 타 슬쩍 교실에다 두고 오는 것도 생각해봤지만, 그건 저를 도와준 사람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아 그만두었다.

"그래서 어떡하려고?"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제가 느끼기에도 정말 책임감 없는 대답이었다. 역시 직접 갖다주는 수밖에 없겠지. 가슴이 답답했다.

***

샤워를 마친 이타도리가 머리의 물기가 채 마르기도 전에 침대에 풀썩 누웠다. 짧은 반바지와 헐렁한 끈나시 밖으로 늘씬한 팔다리가 쭉 뻗었다. 누군가를 피해 도망치는 건 생각보다 체력적으로 피곤한 일이다. 이타도리는 최근 그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어디가서 체력으로 꿀리지 않을 자신 있었는데. 남의 눈치를 보며 도망다니는 게 이 정도로 지치는 일인 줄 몰랐다. 처음엔 저도 모르게 행동한 거였지만 한 번 피하기 시작하니 계속 피하는 게 버릇이 됐다. 힘들면서도 가장 편한 방법이었다.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며 오늘 일어났던 일을 되집었다. 와이셔츠 차림으로 돌아다니던 모습. 분명 나 때문에 피해 많이 봤겠지? 선도부까지 서던 사람인데 자신 때문에 흠이 생겼다고 생각하니 가슴 한 켠이 따금거렸다. 사람이 너무 양심적으로 살면 안 된다던데. ……이럴 때 쓰는 말이 아니겠지. 이타도리의 시선이 자연히 교복이 있는 방향으로 돌아갔다.

흐어어. 방 한구석에 자리한 쇼핑백을 보기만 해도 힘이 쭈욱 빠져나갔다. 깨끗하게 세탁된 가쿠란은 며칠 째 주인에게 돌아가지 못하고 제 방에 있는 옷장 손잡이에 걸린 쇼핑백 안에 고이 보관되고 있었다. 그나저나 선배는 진짜 날 못 본 걸까. 가쿠란을 보자 다시금 오늘의 일이 떠올랐다. 내가 화장실에 숨기 직전까지 선배는 나를 보지 못했다. 이건 확실했다. 하지만 제가 화장실에 숨어 고개를 내밀고 복도를 살폈을 때, 선배는 나와 눈을 마주쳤음에도 그냥 지나쳐 가버렸다. 이 부분이 자꾸만 마음이 걸렸다. 정말 제 착각일 뿐일까? 눈이 마주치기가 무섭게, 차갑게 식어버린 눈동자까지 내 착각이라고.

"분명 눈이 마주친 것 같았는데……."

알면 알수록, 정말 알 수 없는 것들 투성이었다.

***

오늘은 반드시 전해주고 말겠다는 일념으로 가쿠란이 든 쇼핑백을 들고 한참을 선배의 교실 앞에서 서성였다. 마음 같아선 후딱 돌려주고 가고 싶었지만 아직 등교를 하지 않은 건지 선배의 모습이 보이질 않았다. 수업 시간이 다가오면 다가올수록 애간장이 탔다. 슬슬 가야 되는데. 결국 시간에 쫓겨 발을 동동 구르던 이타도리가 자신의 교실로 돌아가려 몸을 돌리는 순간, 애꿎은 곳에서 고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야?"

이타도리가 등 뒤에서 들려오는 음성에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선이 얇고 날카로운 얼굴. 그곳엔 제가 기다리고 기다리던 고죠가 교복을 번듯하게 차려입고 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확실히 찔리는 부분이 있어서 그런지, 그간 저를 괴롭히던 속 울렁거림보다 양심이 더 아파왔다. 그리고 거기엔 검은 가쿠란도 포함이었다.

"그 옷은…."

"너, 나 피해다니는 중 아니었어?"

"아, 그……."

작은 입술이 옴싹달싹 움직이다 입을 닫는다. 역시 눈을 마주친 건 제 착각이 아니었다. 선배는 제가 피해다니는 걸 알아챘으면서 그대로 저를 지나쳐 간 것이다. 따져도 모자랄 판국에 어째서? 친구를 통해 들은 이야기로는 도저히 저를 배려해서 한 행동이라고 생각되지 않았다. 그럴 사람도 아니었고. 하지만 또다시 돌아오는 선배의 말에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유지. 나는 성질머리가 좋지 못해서 나 싫다는 사람 붙잡고 있을 사람이 못 돼. 무슨 말인지 알겠어? 이제 굳이 힘들게 피해다닐 필요 없다는 소리야. 그 교복은 버리든지 가지든지 네 마음대로 해."

선배는 언제나처럼 무심한 눈으로 저를 지나쳐, 교실로 들어가버렸다. 아니, 아니다. 언제나처럼이 아니었다. 선배는 다소 삐딱하게 말을 내뱉을지언정 단 한 번도 무심한 눈으로 나를 본 적이 없었다. 여지껏 본 적 없던 차가운 태도에 몸이 꽁꽁 얼어붙었다. 거리를 두고 싶었던 건 맞지만, 이런 식으로 사이가 틀어지길 바란 건 아니었다. 기껏 도와줬더니 피해다니기나 하고. 당연히 기분 나쁘겠지. 늦게나마 선배를 쫓아 사과하고 싶었지만 곧바로 수업 시작을 알리는 종이 울리는 바람에 붙잡을 새도 없었다. 이타도리가 계단을 내리며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결론적으로 오늘 해치우리라 다짐했던 목적을 달성하기는 커녕, 혹을 하나 더 붙여버린 꼴이었다. 이걸 정말 버릴 수도 없고. 제 손에 들려있는 쇼핑백을 볼 때마다 기분이 착 가라앉았다.

제 잘못은 사과를 하면 된다. 하지만 선배와의 사이는 그것만으로 복구되지 않으리란 걸 직감적으로 알았다. 어디서 엉킨 건지도 모를 실타래를 따라 시초를 찾아야했다. 단순하게 흘러가는대로 놔두던 제 방식과는 정반대의 방식이었다. 정말이지, 대략난감한 상황이었다. 이대로 그만두자기엔 무심하게 지나치던 선배의 얼굴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어떻게 해야 될까.

"선배 사탕 좋아해." 

"응?"

"너 고죠 선배 때문에 이러고 있는 거 아니야?"

수업 시간 내내 교내를 돌아다니다 쉬는 시간이 되어서야 슬금슬금 교실에 기어들어온 이타도리를 보고 친구가 한 말이었다. 힘없이 추욱 처진 어깨를 하고서 품에는 쇼핑백을 끌어안고 있었다. 돌려주고 오겠다며 들고 나간 쇼핑백이 그대로 품에 안겨있다. 이걸로 유추할 수 있는 건 단 하나. 교복의 주인인 고죠 사토루와 무슨 일이 있었다는 것.

"…사탕이면 되려나?"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흐지부지 넘어갔다. 선배가 괜히 캔디 보이겠어? 라는 말로 말이다. 그러고 보면 고죠 선배는 보는 사람의 뒷골이 당길 정도로 항상 사탕을 물고 있었다. 캔디 보이. 꽤 잘 어울리는 별명이라고 생각했다. 근데 캔디 보이가 원래 그런 뜻이었나? 작은 호기심이 일었지만 이내 아무렴 어때, 식으로 넘겨버렸다.

매점에 들려 얼마 안 되는 용돈을 사탕으로 탕진했다. 사탕으로는 부족할 것 같아 갖가지 주전부리도 사고 나니 쇼핑백이 간식거리로 가득 차 있었다. 끙, 다음 용돈까지 아직 며칠이나 남았는데…. 텅 비어버린 지갑을 보며 속이 조금 쓰렸지만 제가 한 일에 비하면 비교적 싼값이라고 생각했다. 아까보다 훨씬 묵직해진 쇼핑백을 들고 학교 이곳저곳을 탐방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여태까지 봐 온 고죠의 성향을 생각해보면 한 곳에 우직하게 붙어있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차라리 정처없이 떠도는 것이 그를 마주칠 확률이 더욱 높았다. 그리고 지금까지 마주친 게 우연이 아니라는 듯 복도 끝에 홀로 우뚝 솟아있는 큰 키가 눈에 들어왔다.

"선배!"

모두가 돌아볼 정도로 크게 소리를 질렀지만 당사자인 고죠만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설마하니, 복도에서 우렁차게 부르는 게 자신일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몇 번의 외침에도 고죠는 여전히 자신을 부르는 소리인 줄 모르고 제 갈 길을 가기 바빴고 계단으로 향하는 코너를 돌려고 할 때,

"고죠 선배!"

그의 성을 외쳤다. 더는 그가 부정할 건덕지따위 없었다. 익숙한 목소리다 싶었지만 정말 자신을 부르는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고죠가 가던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았다. 이타도리가 이때다 싶어 급히 달렸다. 너무 급하게 달린 탓인지 재빠르게 움직이던 발이 그의 코앞까지 다다라서 꼬여버리는 불상사가 일어났다. 넘어진다…! 제 몸이 중심을 잃고 앞으로 갸우뚱 기울자 이타도리가 두 눈을 꼭 감았다. 그러나 이타도리를 반기는 건 차갑고 딱딱한 바닥이 아니라 따뜻하고 단단한 그의 품 안이었다. 결코 작지 않은 체구였음에도 고죠의 품에 쏙 안겨들어갔다.

"으아, 죄송해요!"

이타도리가 놀라 휘둥그래진 눈으로 올려다보며 사과하자 고죠가 이타도리의 가느다란 허리를 단단히 감싸안았다. 자신이 무얼 하고 있는지 자각하지 못할 정도로 지극히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싫다는 사람에게 매달리지 않는다는 굳건한 이성과는 달리, 스스로 제 품으로 들어온 이 아이를 놔주고 싶지 않다는 본능.

“…선배?”

이타도리의 얼굴이 당황으로 물든다. 쿨하게 보내주려 했건만 아예 자신의 품으로 뛰어들어올 줄이야. 아주 맹랑한 후배라니까. 제 품을 벗어나려 낑낑거리고 있는 이 토끼 같은 후배에게 당장 묻고 싶은 게 한두 개가 아니었다. 일단 다른 건 둘째치고.

"너, 내 이름 알고 있었어?"

"어쩌다보니 알게 됐어요. 선배 되게 유명하던데요?"

"다른 사람은 알아도 너는 모를 줄 알았는데."

"네? 왜요?"

당연했다. 그간 이름을 물으려 한 적도 없었고,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저에게서 도망치겠다고 난리법석을 피우던 너였으니까. 제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너, 나한테 관심 없잖아."

관심이라는 단어 선택은 고죠의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싫어하잖아. 라는 말 따위 뱉고 싶지도 않았고, 인정하고 싶지도 않았다. 하물며 이타도리가 제 말에 수긍하기라도 한다면 제 자존심은 크게 상처를 입을 것이었다.

"그건 그렇죠……."

아니나 다를까 이타도리가 고죠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한다. 수 초간 정적이 흘렀다. 잘록한 허리를 쥔 손아귀에서 점점 힘이 빠져나갔다. 머리로만 알고 있는 것과 말로 확인 사살 당하는 건 천지 차이였고, 이타도리의 단 한마디로 고죠는 밑 빠진 독마냥 기운이 줄줄 새어나갔다.

"저기, 이거ㅡ."

이타도리가 손에 들린 쇼핑백을 내밀었다. 버리든지 가지든지 하라니까 아예 안을 채워왔다. 그것도 제가 좋아하는 달달한 것들로.

"그, 교복 빌려입은 주제에 도망다녀서 죄송합니다. 조금 불편해서 그런 거지, 절대 선배가 싫어서 그런 건 아니에요."

"……."

"지금은 선배한테 관심도 꽤 있는 편이고."

망치로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머리가 멍했다. 교복이야 멋대로 벗어준 거니 상관없었지만, 그 뒷말이 문제였다. 고죠의 미간에 주름이 잡힌다. 관심 없다는 말에 수긍해서 사람 기운 빠지게 만들 땐 언제고, 지금은 또 관심이 있단다. 그래, 관심. 생길 수도 있지. 여기서 중요한 건 그게 어떤 류의 관심이냐는 것이었다. 제가 다가설 때는 한사코 물러서더니, 밀어내려고 하니 다가온다. 으레 있는 경우였다. 본인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관심을 보이는 경우. 과연 네가 말하는 관심은 어느 쪽일까. 사람들이 말하는 고죠 사토루와, 사람들이 모르는 고죠 사토루. 궁금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괜히 물어봤다가 혹여 기회를 놓쳐버릴까봐.

고죠 사토루에게는 생소한 고민이었다. 남에게 마음을 내어준 것도 처음일 뿐더러 마음에 드는 상대가 자신한테 관심을 주어도 마냥 좋아할 수 없는 건 처음이었다. 그만큼 상대에게 진심이라는 소리겠지. 그렇게 깊은 고민에 빠져버린 고죠는 점심 시간의 끝을 알리는 종소리마저 듣지 못하고 이타도리의 허리를 단단히 감싸고 있었다. 단 한 치의 흔들림 없이 말이다.

"선배!"

자세가 영 불편했던 이타도리가 고죠의 어깨를 꽉 쥐며 크게 소리치고 나서야 흐려졌던 시야가 초점을 되찾았다.

"나랑 사귀자."

속으로 되뇌이던 말을 무심코 내뱉었다. 뇌를 거치지 않고 튀어나온 말에 되레 본인이 더 놀랐다. 차라리 아무 대답도 하지 말아주길, 그래도 무슨 말이라도 해주길, 그게 거절만은 아니길. 속에서 수많은 감정들이 교차했다. 그리고 이타도리는 너무 당연하게…….

"미안해요, 선배."

거절했다.

***

교문에 기대어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고죠를 발견한 이타도리가 양 팔을 흔들며 해맑은 얼굴로 달리기 시작했다. 가슴께까지 늘어진 분홍색이 감도는 머리칼이 바람에 휘날린다. 문득 첫만남이 떠올랐다. 이타도리가 머리를 풀어헤친 건 처음의 우연을 제외하고는 좀처럼 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많이 기다렸어?"

"일찍 일찍 좀 다녀라."

최근 이타도리와 같이 등교하겠다는 일념으로 선도부를 자처하던 그였다. 아무런 명목없이 교문에서 기다리는 건 제가 봐도 의아스러운 행동이었기에 한 선택이었다. 만약 이타도리가 일찍 등교해서 먼저 들어가버리면 곤란한 건 고죠 사토루 본인이면서 민망함을 숨기려 괜히 틱틱 거린다. 그리고 고죠의 성향을 어느 정도 파악하기 시작한 이타도리는 무작정 피해다니던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아주 능숙하게 되받아쳤다.

"일찍 등교하면 왜 일찍 왔냐고 난리칠 거잖아."

고죠가 입을 다물었다. 정곡이었다. 얼마 전 고백 사건이 일어났던 날. 둘 사이에 있었던 일은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나름대로의 첫 실연으로 충격을 받은 고죠는 알겠다며 돌아섰고, 그런 그의 팔뚝을 이타도리가 붙잡았다. "나는 아직 잘 모르겠어." 이타도리가 우물쭈물 고죠의 눈치를 보며 내뱉었다. 유예기간을 요구하는 말이었다. 별다른 선택권은 없었다. 더 좋아하는 사람이 지는 거라더니. 고죠는 긴 고민할 것도 없이 그대로 승낙했다. 자신이 갑이었을 땐 애매모호한 관계만큼 재미있는 게 없었는데, 을이 되어보니 이만큼 곤욕인 것 또한 없었다. 머리 묶은 게 더 예쁘다는 말 한마디 못할 정도로.

"선배 듣고 있어?"

"어. 나 그런 거 필요 없어."

"그래도 생일이잖아. 진짜 가지고 싶은 거 없어?"

돈이라면 있을 만큼 있었다. 살면서 단 하루도 통장 잔고를 확인해본 적 없을 정도로. 원하는 게 생기면 별다른 고민 없이 지를 만큼 있다는 뜻이었다. 그런 나한테 가지고 싶은 게 있을리가 없었다. 굳이 따지자면 돈으로 살 수 없는 너뿐이었다.

"없다니까."

이타도리는 그래도 한 번 생각해보라며 어느덧 도착한 제 교실이 있는 복도를 총총 걸어갔다. 그리고 이타도리의 뒷모습을 보며, 이 학교에 다니는 3년동안 없던 불만이 처음으로 생겼다. 교복이면 단정해야 되는 거 아냐? 치마가 왜 저렇게 짧아. 고죠의 삐딱한 시선이 향한 검은색의 교복 치마 아래로 탄탄한 허벅지가 시원하게 드러나 있었다. 고등학생임에도 키가 190에 달하는 고죠에 비하면 다소 작아보이지만, 이타도리는 여자 중에서는 꽤 큰 편에 속했다. 무려 170이었으니까. 그래서 제 사이즈에 맞는 치마를 입으면 허벅지가 훤히 드러날 정도로 길이가 짧았고, 활동적인 이타도리는 그게 불편해서 항상 안에 레깅스를 갖춰입고 다녔다.

그런데 왜.

겨울이 다가오는 이 때에.

안 입은 거냐고.

 

"야."

고죠가 쪼르르 교실로 들어가려는 이타도리의 발걸음을 멈춰 세웠다. 저 상태로 오늘 하루를 생활한다고 생각하니 배알이 꼴렸다. 저같이 너저분한 흑심을 가지고 있을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고, 제일 거슬리는 건 저 꼬라지를 남들도 본다는 사실이었다. 큰 보폭으로 단숨에 이타도리의 앞까지 다가간 고죠가 또다시 가쿠란을 벗어 이타도리의 얄쌍한 허리에 둘렀다.

"뭐예요?"

"더워서."

말도 안 되는 핑계였지만 이타도리는 고죠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다. 선배 몸에 열이 많구나? 하면서. 눈치가 없는 것도 정도껏이지. 다른 건 잘도 알아채면서 자기자신에 대한 건 무감각했다. 말해봤자 내 입만 아프지. 고죠는 대신해서 다시 한 번 가쿠란을 꽉 조였다.

"이번엔 가지고 도망 가지 마."

 

***

징징-. 오랜 진동 끝에 화면 위로 빨간 수화기 모양의 부재중 표시가 떠올랐다. 연이어 같은 이름으로 채팅 어플의 알림이 울리고 고죠가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넘겼다. 복잡했다. 지금의 심경을 뭐라고 표현해야 될까. 그래, 착잡했다. 속에선 울화가 치미는데 머릿속은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차갑게 식었다.

[선배 화난 건 알겠는데 전화 받아봐.]

[이건 톡으로 말할게 아닌 것 같아서 그래.]

[그냥 톡으로 해]

답장하기가 무섭게 진동이 울린다. 이번엔 진동이 끊기기까지 기다릴 것도 없이 전화를 끊어버렸다. 받고 싶지 않았다.

[받으라니까.]

[이제 내 목소리 들으면 화난다 이거야?]

[그 반대야.]

[유지 목소리를 듣고 내가 어떻게 화를 내.]

여기서 네 목소리를 들으면 단숨에 화가 식어버릴 것 같아서 받고 싶지 않았다.

[가족이야.]

[이타도리 스쿠나. 내 쌍둥이 남매라고.]

항상 사건의 발달은 우연과 우연이 겹쳐 만들어낸다. 하필이면 오늘 집에 구비해뒀던 간식들이 바닥을 드러냈고, 마침 좋아하는 디저트 가게에서 신메뉴를 출시하는 날이었다. 워낙 고집이 센 파티셰 겸 사장 덕분에 작은 규모로 운영되던 가게는 배달 서비스를 지원하지 않았고, 디저트마다 하루 한정 갯수가 정해져있어 빠르게 가서 사와야했다. 평소 입소문을 많이 타던 곳이니 신메뉴는 금세 품절되겠지. 고죠가 주말이라고 침대에 늘어져있던 몸을 일으켜 나갈 채비를 했다.

겨울이 코앞으로 다가와 바람이 시린대도, 주말의 시내 거리는 휴일을 맞이해 놀러 나온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사람이 많은 건 딱 질색이었다.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몇 번이나 어깨를 부딪히는 건지, 디저트만 아니라면 절대 나오지 않았을 거다. 그런 식으로 시내를 나온 게 근 한 달만이었다. 우연도 이런 우연이 없을 거다. 간만에 나온 시내, 그것도 제가 좋아하는 디저트 가게 앞에서 마주칠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그것도 다른 남자와 함께 있는 너를. 처음엔 뇌가 굳었고, 그 다음엔 열이 솟구쳤다. 시간 없다며 자신을 밀어낸 이유가 다른 남자와의 약속 때문이라니. 디저트 가게의 문을 열다 만 상태로 굳어버린 고죠와 이타도리의 눈이 마주쳤다. 토끼 같은 얼굴. 네가 놀랐을 때 보이던 얼굴이었다. 곧장 뒤돌아서 집으로 돌아왔다. 어이없고 부아가 치밀었지만 네가 온전히 내 소유가 아니라는 점에서 더 화가 났다. 당장 너에게 따질 수도 있었지만 내 것이 아닌 네가, 내 것인 양 쩔쩔매는 꼴을 봤다가는 제가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몰랐다. 그대로 돌아서는 것이, 그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그런데 쌍둥이 남매라니. 패닉이었다. 조금만 더 자세히 봤어도 알아챌 수 있는 부분이었다. 그럼 그런 일도 없었겠지. 젠장. 고작 너 하나로 눈 돌아가서 주변도 제대로 못 봤다는 사실에, 새삼 내가 너를 좋아한다는 걸 깨달았다. 다시금 핸드폰 진동이 세차게 울린다. 계속해서 돌리던 너의 전화였다.

- 선배 지금 좀 만나.

다른 의미로 머리가 복잡했다. 제 집 앞으로 오겠다는 너의 말에 황급히 옷을 추스리고 밖으로 나왔다. 네가 오기 전까지 찬바람에 머리를 식혀야 될 것 같았다. 하지만 모두 쓸데없는 노력이었다. 저 끝에서부터 숨차게 뛰어오는 네 모습을 보자마자 내부에서 울컥 무언가가 치고 올라왔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예쁜 거야.’

남들처럼 예쁘게 꾸민 것도 아니었다. 아무런 꾸밈 없는 얼굴과 평소처럼 질끈 올려묶은 머리, 그리고 무난한 디자인의 회색 트레이닝 복.

"미안, 많이 기다렸어?"

제 앞에 도착한 네가 미안하다며 머쓱한 얼굴로 웃어보인다. 아아, 그래서 예쁜 거였구나. 언제나 숨김없이 드러내는 네가 너무나 예뻐서, 그래서 짜증이 났다.

"유지, 나는 내가 너에 대해 잘 모른다는 사실이 정말 짜증나. 고작 가족 관계를 몰라서 이렇게 헤매인 것도 짜증나고 네가 누구에게나 다정한 사람이라는 것도 짜증나. 그 다정함이 진심이라는 것도. 진심이든 다정함이든, 나만 알면 안 돼? 남들이 아는 것 뿐만이 아니라, 남들이 모르는 부분부터 네가 모르는 너의 모습까지 전부 나만 가지고 싶어."

"……."

"이런 내가 싫어?"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분명 울고 있는 게 아닌데도 모든 감정이 응축된 말들과 잔뜩 일그러진 얼굴에서 왠지 모르게 짠내가 묻어났다.

"싫다고 해도 어쩔 수 없어. 내가 널 놔줄 생각이 없어졌으니까."

고죠가 가까스로 손을 뻗어 이타도리의 작은 손을 감싸쥐었다. 웃기게도 내뻗은 손이 떨렸다. 겨우 두서 없는 고백 한 번 했다고 이렇게 떨린다. 고죠 사토루의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이타도리는 잠시 머뭇거리다 고죠의 커다란 손을 맞잡고, 차분히 운을 떼기 시작했다.

"아까, 선배 선물 사러 간 거였어. 선배는 필요 없다고 했지만 내가 챙기는 첫 생일이잖아. 그래서 그냥 지나칠 수가 없더라고."

"그런 거 필요 없다니까."

"생일 때 선물 주면서 고백하고 싶었단 말이야."

이타도리가 놀란 고죠의 손을 꽉 맞잡은 채로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미 자신의 계획을 공개한 마당에 더 지체할 이유도 없었다. 그건 자신을 기다려준 사람을 더욱 기다리게 만들 뿐이었다.

"선배, 나 선배 좋아해."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른다. 다만 속이 울렁거릴 정도로 기분 나쁘던 생소한 감각이, 이제는 기분 좋은 떨림이라는 걸 알았다.


우리 학교에는 캔디 보이라는 달달한 명칭을 가진 선배가 존재한다. 매일 같이 사탕을 먹는다고 해서 장난스레 붙여진 별명이었지만, 본래 캔디 보이는 잘 어울리는 연인, 혹은 달달한 염장 커플을 나타내는 은어라고 한다. 그간 여러 사람들에게 벗겨먹고 싶은 사탕같은 존재였던 선배는 이제서야 별명의 본래 뜻을 찾아갔다. 단 한 명에게만 달달한 캔디 보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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