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죠유지] 기호지세(騎虎之勢)
지하실 에피소드
“유우지-”
가볍게 울리지만 부드러운 음성. 사토루의 목소리에 무의식적으로 품에 안고 있던 주해를 꽉 안았다. 멀리서 이름을 불린 게 방금인데 어느새 어깨에 손이 올려져 있다. 키가 190cm을 훌쩍 넘는 이 사내는, 굳이 날아다니지 않더라도 보폭이 커서 이동이 빠르다.
어깨에 내려앉은 무게감에 온 신경이 쏠린다. 이대로라면 주력 컨트롤이 흔들릴 것 같아, 유우지는 무의식적으로 품 안의 주해에 힘을 실었다. 본인이 컨트롤을 잘하고 있는 덕분이라지만 색색, 편하게 자는 주해가 오늘따라 얄궂어 보인다. 방울이 매달리고 있는 코의 등을 괜히 콕 건드려본다.
“어서 와 선생님! 오늘 못 온다고 하지 않았어?”
그리고는 아무렇지 않은 척 뒤돌아 밝게 인사말을 던졌다. 분명 어제 ‘내일은 못 올 것 같아.’라는 말을 들었고, 일순 이유 모를 아쉬움이 밀려들었지만 호쾌하게 괜찮다며 대답을 했었다. 본인이 아쉽다고 붙잡을 처지는 아니니까. 그렇게 생각하자 입안에 쓴맛이 맴도는 것 같았지만 정말이었다. ‘최강’을 계속 붙잡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이미 사토루는 수업 외로도 유우지에게 상당히 시간을 써주고 있었다. 자신을 지키기 위해 숨겨주었고, 주력 훈련과 더불어 틈틈이 대련도 시켜주고 있다. 분명 본인의 임무도 산더미처럼 쌓여있을 테고 정규 수업도 진행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사토루는 매일 같이 지하실로 찾아왔다. 어느 순간 '어서 와'라는 말이 자연스레 튀어나오게 됐을 정도로. 계단 위를 내딛는 구두 굽 소리가 들리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영화를 보는 내내 온 신경이 등 뒤에 쏠릴 정도로.
“그랬는데- 유우지 보려고 빨리 끝내버렸어.”
난 강하니까. 어느새 옆자리에 앉아 싱긋 웃어오며 대답하는 사내의 모습에 유우지는 뒤따르듯 마주 웃을 수밖에 없었다. 일전 사토루에게 갑작스레 끌려가 후지산 머리를 한 주령과의 싸움을 견학했던 날 실감했기 때문이다. 특급이라고 견줄 만한 주령을 처음 마주한, 사내의 영역에 처음으로 발을 디뎠던 날.
이 사람은 강하다.
격이 다르다고밖에 표현할 수가 없었다. 타인을 그렇게 평가해본 건 처음이었다. 그의 말마따나 최강이니 임무가 예상보다 빨리 끝나는 일은 많을지도 모른다. 애초에 이지치 씨가 사토루의 눈치에 못 이겨 일정표를 느슨히 짰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니까, 이런 말장난에 들뜨려고 하지 말자. 사소한 농에 기뻐하지 말자.
“그럼 더 피곤하지 않아? 얼른 돌아가서 쉬어야….”
“피곤하니까, 유우지가 충전시켜줘.”
말의 뜻을 채 이해하기도 전에 손이 붙들려 그대로 끌어당겨졌다. 품에 쏙 안긴 모양새가 된 유우지는 순간 상황이 파악되지 않아 멀뚱히 눈만 끔뻑거렸다. 어라, 나 지금 안긴 건가.
“선생님, 이게 무슨 충전이야…….”
“나한테는 충전이야. 다 채우려면 멀었으니까 좀만 기다려.”
상황 파악을 마치자마자 기다렸단 듯이 화륵, 얼굴이 달아올랐다. 분명히 새빨개졌을 거야. 와중에 사토루에게는 보이지 않아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고죠 선생님….”
“으응, 유우지.”
족히 5분은 지난 것 같다. 결코 왜소하지 않은 다부진 체격을 가진 유우지는 여전히 사토루의 품 안에 얌전히 안겨있었다. 본인이 작다고는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었는데, 사토루 앞에서는 영락없이 자그마한 애다.
아무래도 선생님의 충전 방식이 이상하다. 귀엽지도 않은 제자를 끌어안는 게 어떻게 충전이란 말인가. 임무가 너무 많아서 고단했던 걸까. 멋대로 결론을 내린 유우지는 조심스럽게 팔을 들어 올려 사토루의 등에 올려두었다. 그러길 잠깐, 머뭇거리던 손이 조심스럽게 너른 등을 토닥인다.
“고생 많았어, 선생님.”
그러자 어깨를 감싼 팔에 한껏 힘이 실려 완전히 품속에 갇혀버렸다. 귓가에 낮은 웃음소리가 퍼진 것도 같았다. 와중에 웃는 목소리는 왜 이렇게 좋은지, 속도 없이 감탄하고 만다.
세게 안겨진 탓에 숨쉬기가 힘들어 고개를 살짝 돌리자, 영락없이 가슴팍에 밀착한 모양새가 되었다. 어른임을 알려주는 듯한 시원한 향수 냄새가 코끝을 타고 들어와 사고가 흐려진다. 어딘가에서 흘러넘치고 있는 듯한 감정이 버거워 유우지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제 어깨에 실린 무게감이 너무 좋아 어쩐지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나는 이 사람을 좋아하는구나.
유우지가 계속 등 돌리던 감정에 이름을 붙인 순간이었다.
좋아하게 되었다.
단어의 울림만으로도 풋내나는 첫사랑이다. 상대는 나이도 한 바퀴를 훌쩍 넘길 정도로 많은데다, 무려 담임 선생님이며, 자칭 타칭 '최강인 사내'. 아무리 생각해도 첫사랑의 대상을 잘못 골랐다. 더이상은 부정할 수 없어 두 손 두 발 들고 마주해버렸지만, 인정하길 기다렸단 듯 하릴없이 부푸는 마음은 버겁다. 언제부터 좋아하게 된 걸까. 감정의 시작점을 뒤쫓기 위해 눈을 감고 그간의 기억을 되짚기 시작했다.
후시구로를 살리고 본인도 살기 위해 가벼운 마음으로 삼킨 손가락. 멋모르고 목구멍으로 넘긴 그 손가락의 위력을 알게 됐을 땐 겁이 났다. 저주 중에서도 왕인 놈인데다, 사형까지 거론되는 형세. 자신의 배 속에 있는 존재가 그 정도로 위험하다는 것이다. 이미 저지른 일 어쩔 수 없다지만, 거기까지 듣고 나니 예사롭지 않은 상황이란 것 정돈 알 수 있었다.
‘선생님이 져?’
‘이겨.’
일말의 고민도 없이 내려진 단언. 사토루는 망설임 없이 손가락이 모두 모인 스쿠나도 이길 수 있다고 했다. 당시엔 그 말을 확실하게 믿을 수 없어 넘겨버렸지만, 내심 안심은 됐던 것 같다. 본인도 감당하지 못할 그 ‘어떤 순간’이 오면 대신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게.
할아버지를 제외하고는 거의 처음이나 다름없는 '의지할 수 있는 어른'. 그게 무척이나 좋았다.
유우지는 외로움을 잘 탄다.
자라오면서 조부가 최선을 다해 키워주었지만, 부모의 빈자리는 채울 수 없었다. 아마 조부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가 일하러 나간 뒤에는 꼼짝없이 혼자 시간을 보내야 했으니까. TV를 좋아하게 된 것도 그때의 영향이다. 고요한 집안이 싫어 계속해서 틀어두었으니까. 집안일을 할 때도, 숙제를 할 때도, 잠에 들 때도. 이름 모를 이들의 말소리가 공백을 메꿔주었다.
이따금 복잡한 표정으로 어린 제 머리를 쓸어주던 조부를 기억한다. 굳은살 배긴 주름진 손의 굴곡, 당시의 자신은 헤아릴 수 없었던 감정들. 그렇게 마음 한구석이 허전한 상태로 자랐지만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오히려 외로움을 알기에 타인에게 더욱 다정히 굴었다.
혼자라는 외로움이, 남들과는 다르다는 게 얼마나 쓸쓸한지를 아니까. 그게 반복되다 보니 자연스레 이타적인 성격이 되었다. 그러다 조부가 병상에 누운 뒤 홀로 보내는 시간이 더욱 늘어났고, 결국엔 하나뿐인 가족마저 잃고 말았다.
쓸쓸했다.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어쩌면 지쳤던 것일지도 모른다. 더이상 자신에겐 뒷배가 없다는 깨달음은, 눌러뒀던 외로움을 끄집어내기에 충분했다. 작은 결핍이 모이고 모여 구멍을 만들었고, 한 걸음만 더 딛는다면 그 깊이 모를 어둠에 발이 빠질 것만 같단 착각이 일었다.
하지만 발을 딛을 틈도 없이 일련의 사건들을 거쳐 죽다 살아나고, 외부에는 사망 처리가 된 상태로 보낸 두 달. 그 시간 동안 유우지는 사토루와 많은 시간을 보냈다. 함께 영화를 보고 감상을 나누기도 했고, 지하실에서 완자 듬뿍 넣은 나베를 끓여 먹기도 했다. 훈련 외에도 사토루는 거리낌 없이 본인의 여가 시간을 전부 유우지에게 써주었다.
빼어난 데다 외모까지 출중한 어른이 그렇게까지 잘해주는데 어찌 좋아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애초에 제 사형을 무기한으로 연기시켜준 것도 사토루다. 출장으로 인해 동행할 수 없을 땐 믿을 수 있는 어른을 붙여주었다. 친구를 잃고 주술사로서의 마음을 다잡을 때는 조언과 함께 곁을 지켜 주었다.
어쩌면 당연한 수순일 지도 모른다. 외로운 내면의 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사내를 좋아하게 된 것은. 기억의 흐름을 가만히 따르다 보면 처음 지하실에서 단둘이 저녁을 먹은 날에 다다른다. 지하실에 머무른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어서 오란 말이 입에 붙기 전의 어떤 날.
‘힉. 이게 다 뭐야?’
‘유우지 밥은 잘 챙겨 먹어야 하니까!’
요란한 소리와 함께 테이블에 장바구니 두 개가 내려앉았다. 아니, 손에서 떨어졌다는 표현이 맞으려나. 지친 표정으로 손을 터는 이지치 씨를 잠깐 보고 장바구니로 시선을 되돌렸다. 한가득 차 있는 내용물을 살펴보니 생고기부터 채소, 감자칩에 콜라까지 종류도 다양했다.
“보통 남고생이 요리해 먹을 거란 생각 못 하지 않아?”
제 물음에 사토루는 어깨를 으쓱이며 가볍게 대답했다. 그야, 유우지가 요리 할 줄 안다고 했는걸. 이어진 대답에 탄식과 함께 도쿄로 오던 날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신칸센에서 이런저런 가벼운 질문을 받다가 요리를 할 줄 안다고 했던 것도 같다. 정말 스쳐 가듯이 나온 얘기였는데 그걸 기억하고 있었단다. 선생님은 기억력이 좋구나. 유우지는 사내의 기억력에 감탄을 표하며 장바구니를 뒤적였다.
조부와 둘이 자란 데다 으레 혼자 있는 시간이 길었기 때문에 요리는 자연스럽게 익혔다. 덕분에 대단히 거창한 건 못 만들더래도 어느 정도는 할 줄 알게 되었다. 당장 자신은 외부에 사망 처리가 되어 있으므로 나가서 끼니를 때우기엔 무리가 있다. 그런 유우지를 배려해 이지치 씨를 시켜 한가득 장을 봐오게 한 모양이었다.
지친 기색이 역력한 이지치 씨가 터덜터덜 돌아가고, 사토루는 그의 뒤를 따르는 대신 소파에 벌렁 드러누웠다. 주체 되지 않는 긴 다리가 소파 밖으로 한참이나 빠져나오는 모습을 보며, 여러모로 규격 외의 사내라고 생각했다.
‘배고파 유우지! 요리해줘!’
그러고는 대뜸 밥을 먹고 가겠다며 떼를 부려왔다.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하니 확실히 배가 고플 시간이긴 했다. 하지만 요리를 가르치면 가르쳤지, 온전히 남에게 해주는 건 익숙하지 않다. 유우지가 대답을 망설이자 사토루는 더 큰 소리로 떼를 썼다. 그러면 결국엔 한숨과 함께 ‘맛없어도 불평하지 마.’라며 대답하게 되고 마는 것이다. 장바구니를 집어 드는 유우지의 손길에 약간의 긴장감이 서려 있었다.
'뭐 만들어 줄 거야?'
'음, 닭고기 완자가 들어간 나베. 만들기 쉽거든.'
'헤에, 유우지 대단하네.'
완자의 재료를 한데 뭉쳐가며 둥글리고 있을 때, 제 어깨에 턱을 걸쳐오던 무게감을 기억한다. 원래 이렇게 거리감에 오류 난 것처럼 행동하는 사람인가. 후시구로, 네가 말한 ‘이런 경향’이 이런 거였냐고. 몰려오는 당혹감을 감추기 위해 아무런 말이나 내뱉었던 것 같다.
‘그러고 보니 내 맘대로 잔뜩 넣었는데, 선생님 생강 괜찮아?’
‘응응, 좋아해.’
어째서 ‘좋아해’라는 말에 일순간 숨쉬기가 힘들어졌을까.
지금에 와서는 알게 되었지만 그때는 이유를 몰랐다. 왜 사토루가 가까이 올 때마다 심장 박동이 이상해졌는지. 본인이 만든 요리가 맛있다고 해준 사람이 처음이 아닌데도, 사토루의 맛있단 말에는 유난히 기쁜 마음이 들었다. 다음엔 다른 요리도 만들어주고 싶단 우스운 생각을 품을 정도로.
“아니 이거, 생각하면 할수록….”
선생님 탓 아냐? 사토루가 두고 간 지방의 관광 잡지를 팔락이던 유우지는 불현듯 깨달음을 얻었다. 소파에서 뒹굴거리며 하염없이 TV만 보기를 몇 시간, 더이상 볼만한 프로그램도 없어 테이블 위에 올려진 잡지를 구경하던 참이었다. 정적이 싫은 건 지금도 마찬가지라 TV는 계속 틀어둔 상태로.
교류회를 기점으로 복귀하기로 했고, 일주일을 남겨둔 이 시점에서 유우지는 지하실을 떠나 사토루가 마련해준 방에 임시로 머무르고 있었다. 지하실에도 침대나 조리 시설이 있어 그다지 불편하진 않았는데, 사토루는 무턱대고 ‘다른 데로 옮기자!’라며 자신을 들쳐 매고 순식간에 이동했다. 복귀를 목전에 두고 왜 갑자기 거처를 옮기는 건지 영문은 알 수 없었지만, 사내는 늘 그런 식이었다. 처음엔 하나하나 이유를 따지려 들었으나 지금은 포기했다. 결과적으로는 늘 유우지를 위한 것들이었으니까.
“무슨 생각?”
“힉.”
기다렸다는 듯 뒤에서 의문을 던져오는 목소리에 유우지가 깜짝 놀라 들고 있던 잡지를 내던졌다. 아무것도 아냐. 대답과 함께 뒤를 돌아보니 임무가 끝나고 집에 들렀다 온 듯 편한 스웨터 차림의 사토루다. 숨어 지내는 두 달 동안 사토루의 사복 차림은 여러 번 봤지만, 볼 때마다 멋있다고 생각한다. 직관적이지만 이보다 분명한 감상도 없다. 민무늬의 스웨터도 태가 나게 느껴지는 건 역시 본판이 잘나서인지. 그런 사토루의 뒤편에 매달려 있는 벽시계가 저녁을 지나 밤으로 저물고 있음을 알려준다.
“선생님 밥은 먹었어?”
“아-니. 유우지는?”
“나도 안 먹었는데. 먹고 싶은 거 있어?”
“유우지가 해주는 건 다 좋네요.”
매번 이런 식이다. 분명 본인의 입맛이 있을 텐데도 사토루는 유우지가 만든 것이라면 다 좋다고 한다. 실제로 몇 번이나 직접 만든 음식을 나눠 먹었고, 그때마다 사토루는 맛있다며 기분 좋은 감상을 돌려주었다.
뭐 맛있다고 해주니 상관없나. 우선 손부터 씻을 요량으로 소파에서 일어나 주방 싱크대 앞에 섰다. 핸드워시를 두어 번 짜 손을 씻으려는데 소매가 너무 길어 걸리적거렸다. 너른 통의 소매가 맥없이 팔락인다. 명색이 숨어있는 신세라 사토루의 옷들을 빌려 입고 있기 때문이다.
‘어라, 이거 다 처음 보는 옷들인데.’
‘내 거니까.’
‘에?
당장 입을 옷이 없었을 때 사토루가 제 방에서 옷을 챙겨다 주었다. 반팔 티에 후드집업, 속옷 한 장과 바지 한 벌. 단출하기 그지없는 구성이었다. 왜 여러 벌이 아니고 딱 하루 입을 옷인 거지. 봉투를 받아들고 의아함이 스멀 피어올랐지만, 상황이 상황인 지라 우선은 감사하게 받아 입었다. 나중에 몰래라도 다녀와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선생님한테 심부름을 시켜서 미안하네. 머쓱하게 웃으며 감사를 표한 날 밤, 사토루는 양손에 봉투를 한 아름 들고 찾아왔다. 기숙사에서 더 챙겨다 준 건가, 하고 들여다본 봉투 안에는 낯선 옷이 한가득했다. 출처를 묻자 자기 집 옷장이라고 대답하던 사내는 뻔뻔하다는 말이 딱이었다. 물음표 가득한 표정으로 바라봐도 사토루는 별다른 대답 없이 싱긋 웃을 뿐이었다.
‘너무 크다, 선생님. 그냥 내 방에서 옷 갖다주면 안 돼?’
사토루의 옷을 처음 입어본 유우지는 새삼 덩치 차이를 실감했다. 키가 크고 신장의 대부분이 다리 길이란 건 알고 있었지만, 체격도 다르다는 게 여실히 와닿았다. 품은 한껏 주름질 정도로 컸고, 소매는 손이 다 가려질 만큼 길었다.
그냥 자신의 옷을 갖고 와달라는 유우지의 말에 사내는 별말 없이 웃었고, 다음날엔 본인의 옷을 더 갖다줬다. 옷이 부족하단 뜻이 아니었는데. 선생님은 그럴 맘이 전혀 없구나. 어느새 서랍장에 수북히 쌓인 사토루의 옷들을 보며 유우지는 체념했다. 애초에 옷은 입을 수만 있으면 되니 어찌 돼도 상관없다.
‘아, 그래도 속옷은 새 거야.’
‘그거 참 다행이네….’
‘바지는 너무 길면 불편할까 봐 반바지로만 챙겼는데 괜찮지?’
유우지는 사내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긍정의 뜻으로 세차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듣던 중 다행이다. 긴 바지라도 빌려 입었다간 밑단을 세 번은 둘둘 말아 접어야 할 테니까.
사실은 옷을 빌려 입는 게 나쁘지만은 않다. 오히려 좋다고 하면 선생님은 싫어하려나. 사토루가 바쁜 일정으로 곁에 있지 않을 때도 그의 냄새가 옷에 배어있어서, 어쩐지 같이 있는 듯한 기분이 들곤 하니까. 여러 상념에 잠겨 복잡한 기분이 들 때, 소매에 고개를 묻고 있노라면 한결 진정된다. 하나같이 비싼 옷일 거라고 생각하면 부담스럽긴 하지만.
“유우지, 소매 걷어줄까?”
이런저런 생각들을 이어가며 물기 젖은 손을 아무렇게나 털고 있는데, 어느샌가 옆에 다가온 사토루가 소매를 걷어주겠다고 한다. 유우지는 긍정의 대답과 함께 냉큼 양팔을 내밀었다. 찬찬히 옷을 접어 주는 손은 하얗지만 크고 남자답다. 사토루의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유우지는 괜히 손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했다.
꼭 신혼부부 같잖아, 하는 우스운 생각이 들어버려서.
“다리에 물이 다 튀었네.”
“아, 방금 물을 털어서.”
언제 다리를 봤는지. 소매를 다 접은 사내가 제 손목을 살짝 잡더니 그런다. 물 좀 튄 게 대수인가 싶어 유우지는 별생각 없이 냉장고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고 보니 재료가 뭐가 남았더라…. 머릿속으로 남은 재료로 가능한 메뉴를 구상하고 있는데, 갑자기 종아리를 부드럽게 훑어오는 손길에 눈이 크게 떠지고 만다. 등줄기에 가볍게 소름이 일었다.
“선생님, 지금 뭐한….”
“유우지 감기 걸릴까 봐.”
내가 닦아줬어. 그리 말하고는 손바닥을 펼치며 빙긋 웃는다. 예상치 못한 터치에 유우지는 말을 채 잇지도 못했다. 아니, 물 좀 튀었다고 감기 걸릴 리가 없잖아. 그리고 누가 봐도 닦는다기보단 훑어내리는 쪽에 가까웠던 거 같은데. 멍한 제 모습에 사토루는 웃음을 잃지 않은 채 가볍게 머리를 쓰다듬어왔다.
“귀엽네, 유우지.”
“에…무슨….”
“저녁 기대할게.”
맛있게 해줘? 라는 말과 함께 유유히 거실로 향하는 사토루의 뒷모습이 어쩐지 얄궂다. 이 알 수 없는 거리감은 두 달이 되어가도 전혀 적응되지 않는다. 어째 스킨십이 더 는 것 같기도 하고. 유우지는 뒷목을 긁적이며 애꿎은 냉장고 문을 요란히 열었다. 발갛게 물든 목덜미가 들킬까 봐 손을 뗄 수가 없었다.
“근데 지하실에 계속 있어도 됐는데, 왜 갑자기 옮긴 거야?”
저녁을 얻어먹었으니 설거지는 본인이 하겠다며 사토루가 팔을 걷어붙였다. 유우지는 정리를 마친 식탁에 앉아 그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크고 투박한 손의 섬세한 움직임이 신기하다고 할까. 혼자 산 지 오래됐다고 하더니, 거품 묻은 그릇을 헹궈내는 손놀림이나 다 씻은 그릇을 건조대에 요령 있게 쌓아두는 폼이 능숙하다.
본인이 요리하는 대신 사토루가 설거지나 정리를 도맡은 건 여러 번이었지만 이렇게 자리를 잡고 앉아 구경하는 것은 처음이다. 어쩐지 간질거리는 기분에 손끝만 괴롭히기를 한참, 생각을 전환 시킬 겸 줄곧 품어온 의문을 내비쳤다. 어째서 자길 여기에 데려온 거냐고.
“글쎄, 왜일까?”
“에, 질문에 질문으로?”
“오늘 자고 갈래.”
아니, 전혀 대화가 안 되잖아. 아무래도 제 질문에 답해줄 생각이 없는 듯해 결국 포기하기로 했다. 대신 씻고 오라며 등을 떠밀려 고분고분하게 샤워도 마치고 나왔다. 반팔 티셔츠에 반바지 차림. 반팔이란 이름이 무색하게 팔꿈치를 다 가리는 7부에 가깝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침대에서 같이 자는 거야?”
“왜, 싫어?”
“아니… 싫은 게 아니고…….”
막 씻고 나와 발그레해진 볼을 한 유우지는 진심으로 당황했다. 자고 가겠다고 하길래 당연히 이불을 깔아뒀으려나 생각했는데. 욕실에서 나와보니 거실이 한없이 휑한 게 아닌가. 방에 깔았나 싶어 열린 문 사이를 빼꼼 들여다보자 사토루는 천연덕스럽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 긴 몸을 당연스럽게 침대에 뉘인 채로. 물론 바닥에도 이불은 없었다.
“머리 말려줄까?”
“엣, 괜찮은데.”
“사양하지 말고.”
물음과 함께 몸을 일으켜 얼른 이리 와서 앉으라며 옆을 토닥인다. 대체 드라이기는 언제 찾아온 건지, 대답도 하지 않았는데 코드부터 꽂고 있다. 그 모습을 보던 유우지는 결국 체념한 듯 침대맡으로 향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물기 어린 발이 지나간 길을 알리듯 옅은 자국을 남긴다.
침대 앞에 자릴 잡고 앉자 사토루의 손이 머리 위에 살풋 내려앉았다. 수건으로 물기를 마저 닦아내고, 바람이 뜨거울까 멀찍이 띄워놓고 말려주는 행동들에서 배려심이 묻어났다. 선생님은 사실 생각보다 훨씬 다정한 사람인 걸까. 따뜻한 바람에 손길까지 더해지니 어쩐지 나른해져 졸음이 밀려온다. 눈을 깜빡이는 움직임이 점차 느려지기 시작했다.
“머리 만져주니까 졸린가 보네.”
“응, 졸려…. 선생님은 안 씻어도 돼?”
“나는 올 때 집에서 씻고 왔지.”
아무래도 사토루는 애초에 자고 갈 요량으로 왔던 모양이다. 치밀함이 느껴져 유우지는 못 말린다는 듯 웃고 말았다. 두 달 동안 가까이 붙어있던 탓에, 아무래도 외로움을 잘 탄다는 걸 들킨 모양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제자가 머무는 곳에 부러 자고 갈 이유가 없지 않나.
“이제 잘까?”
“응. 잘래.”
몰려오는 졸음에 눈가를 아무렇게나 부빗대며, 느적느적 침대 위로 올라가 구석으로 향한다. 혼자 잘 때는 넓다고 생각한 침대가 오늘따라 유독 비좁게 느껴진다. 덩치 있는 남자 둘이 누워있으니 당연한 일인가. 마주 보고 눕기도, 등을 지고 눕기도 애매한 것 같아 유우지는 고민 끝에 바로 누운 채로 천장만 멀뚱히 바라보고 있었다.
“유우지, 이 쪽 봐봐.”
사내의 말에 잠깐 고민하던 유우지는 몸을 빙글 돌려 얼굴을 마주했다. 턱을 괴고 옆으로 누운 채 빤히 자신을 보고 있는 눈빛이 진득하다. 일순간 숨 쉬는 것도 잊을 정도로, 형용할 수 없는 빛을 발산하고 있는 눈동자가 아름다웠다.
사토루의 맨눈을 보는 게 처음이 아님에도 어째서인지 낯설게 느껴진다. 아마 잔뜩 빛나고 있는 눈동자 일면에 감춰진 게 무엇인지 알 수 없어서다. 그리고 문득, 숨겨진 일면을 알고 싶다고 생각해버리고 만 자신을 깨닫는다.
“선생님. 할 말 있어?”
“이야, 유우지는 눈치가 없는 것 같다가도 한 번씩 빠르다니까.”
“저기… 그거 욕인 것 같은데.”
“유우지.”
“응?”
제 이름을 불러오는 음성에 물음표를 띄운다. 사토루는 대답 없이 유우지의 허리에 팔을 두르고는 그대로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또다. 지나치게 가까운 거리감. 들이쉬고 내뱉는 숨결까지 느껴지는 거리. 몸을 뒤로 빼지도 못하게 단단히 붙들렸다. 당혹감에 스멀 내려앉고 있던 졸음은 흔적도 없이 날아간 지 오래다. 어찌할 바를 몰라 그저 눈앞의 사내를 가만히 마주 보기만 했다.
“오늘 나 좀 이상하지 않아?”
“으음, 지나치게 가까운 것 같긴 한데.”
“왜 그런 것 같아?”
“모르겠어.”
대답과 함께 하루를 가만히 되짚어보니 사내의 말마따나 종일 이상했던 것 같다. 유달리 집요했던 시선과 묘하게 가까웠던 거리감. 맞춰볼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퍼즐들이 하나 둘 자리를 찾아간다.
“유우지가 의식해줬으면 좋겠어서.”
“의식?”
“응. 지금처럼.”
알 수 없는 말을 늘어놓으면서 유우지의 볼을 부드럽게 쓰다듬는다. 주령을 제령할 때면 아무렇지 않게 초월한 술식을 펼치는 이 손이, 지금은 제 앞의 소년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보여주듯 살살 어루만지고 있다.
분명 투박하고 거친 손인데도 이렇게나 부드럽고 다정하다. 수많은 목숨을 구해낸 손이라 따뜻한 걸까. 유우지는 제 뺨에 내려앉은 온기를 느끼며 가만히 눈을 감았다.
“유우지.”
“응.”
“좋아해.”
사토루의 입에서 튀어나온 세 글자를 채 이해하기도 전에, 유우지의 입술에 온기가 스몄다. 입술이 맞닿았다가 떼어짐과 동시에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자신을 좋아한다고 했다. 그 말과 함께 첫 키스도 삽시간에 뺏겼다. 사내의 영역에 들어서기라도 한 듯이 생각이 정리되지 않아 말조차 나오질 않는다.
그런 유우지의 모습을 본 사토루는 귀엽다는 듯 웃으며 이번엔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다음엔 미약하게 떨리고 있는 속눈썹 위에, 살짝 붉어진 콧잔등에, 통통한 볼에 차근차근. 가볍지만 무게 실린 입맞춤을 남겼다.
“유우지는? 유우지는 어떤지 대답해줘.”
사내의 말에 가만히 생각에 골몰했다. 좋아한다고 말하고 나면, 그 다음은?
손가락을 다 삼키고 나면 자신은 죽어야 한다. 당초 그 구실로 붙잡은 목숨줄이었다. 처형을 집행할 사람은 아마 사토루가 될 것이다. 자신을 죽여야 할지도 모를 사람과 사제 이외의 관계를 맺는 건 이기심이 아닐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정신이 들어 황급히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들떠 있었다. 애초에 이런 감정을 가진 것부터가 문제였다.
우선 밖에 나가서 머리를 식히고, 생각을 정리하고 돌아오자. 그대로 뒤돌아 일어서려고 할 때, 손목이 붙들려 도로 눕혀졌다. 양 손목이 붙들린 채로 사토루가 위에 올라탄 모양새가 되었다. 어라, 자세가 이상한 것 같은데.
유우지는 진심으로 당황했다. 살면서 제 힘을 과시해본 적은 없지만, 그렇다고 약하다고 생각해본 적도 없다. 그런데도 본인의 손목을 그러쥔 힘이 너무 강해 빠져나갈 틈이 보이질 않는다. 이제는 아플 정도라 저도 모르게 미간이 찌푸려졌다. 정말이지 규격 외의 사람이다.
“선생님, 아파. 놔줘….”
“왜 피하려고 하는데?”
“잠깐만. 좀 이따 얘기해.”
“아니. 지금 말해줘.”
유우지 맘이 어떤지. 그리 말하며 자신을 내려다보는 사토루의 눈빛은 처음 보는 것이어서, 일순간 숨 쉬는 것도 잊은 채 눈앞의 사내와 시선을 마주했다. 화가 난 듯하면서도, 애가 타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늘 풍기던 여유로운 기색조차 지금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어째서 자신에게 이런 표정을 지어주는 건지 모르겠다. 이러면 정말 기대하게 되잖아. 그 와중에 어둠 속에서도 발산하듯 빛나고 있는 눈동자가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어서, 유우지는 눈을 돌려 시선을 피했다.
“…선생님, 나는 언제 죽을지 모르고.”
“주술사는 다 그래. 나도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야.”
“선생님이 죽을 리가 없잖아.”
“유우지도 안 죽어.”
“그렇지만 나는, 손가락을 다 먹고 나면.”
“내가 유우지를 죽게 놔둘 것 같아?”
일말의 망설임도 없는 대답에 입이 다물려졌다. 눈동자를 굴려 슬쩍 본 얼굴은 어디 그딴 소리 더 해봐, 라는 표정 같기도 했다. 다음으로 이을 말을 고민하고 있자니, 문득 처음 만났던 날이 떠오른다.
원하는 지옥을 골라보라는 터무니없는 말을 들었던 날. 이 사람은 단어 선택이 이상하네, 하고 생각했었다. 질문에 대한 감상은 그 정도가 다였고, 그 후엔 큰 고민 없이 지금의 길을 골랐다. 다음엔 뭐라고 말했더라. 손가락은 다 먹어주겠지만, 그 뒷일은 나도 모르겠다고 덤덤히 대답했던가. 하지만 그때도 어렴풋이 생각은 했다. 다 먹고 나면 죽겠지. 그러다 한 번 죽다 살아난 지금은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겠다고 생각한다. 이런 상황이니 미래가 그려질 리 없다. 당장 내일조차 확신할 수 없는데.
“유우지…. 이제 나 좀 봐.”
애원하는 듯한 사토루의 말에 유우지는 고개를 돌려 시선을 마주했다. 올곧은 눈빛이 자신을 압도한다.
그런데도, 다 아는데도 이 사람 앞에 있으면 살고 싶어진다. 계속해서 살아남아 미래를 그려보고 싶다고 꿈을 꾸게 만든다. 구체적인 해결책이 제시된 것도 아니고, 당장 본인이 죽지 않을 방법은 없는데도. 아직도 사형 이외의 선택지가 있을 거란 생각은 들지 않지만, 사토루의 말을 믿고 싶어진다.
이 사람이라면 가능하지 않겠냐는 기대감이 스멀 올라온다. 믿어도 되지 않을까. 지상에서 가장 강한 남자가 본인을 죽게 놔두지 않겠다고 하는데.
“다른 건 다 제쳐두고, 유우지 마음만 알려줘.”
재차 대답을 종용당한다. 정말 말해버려도 괜찮을까. 그간 계속 누르고 눌러 온 말이라, 막상 꺼내려고 하니 쉽게 나오지 않았다. 걱정 어린 표정으로 위를 올려다보자 자신을 내려보고 있는 얼굴은 한없이 다정했다.
그 다정함에 위로받아 결국엔 말보다도 눈물이 먼저 터지고 만다. 뺨을 타고 멀건 물방울들이 직선을 그려 낸다. 부끄러움을 견디고 작은 목소리로 나온 대답은, 사실은 몇 번이나 말하고 싶던 것이었다.
“나도… 좋아해, 선생님.”
“드디어 넘어와 줬네!”
대답과 동시에 사토루의 얼굴에 해사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손목을 그러쥐었던 손이 유우지의 뺨에 내려앉아 물 자국들을 지워낸다. 그대로 손이 타고 내려가 울음을 참기 위해 질끈 깨물린 입술 위를 맴돈다. 조심스레 매만져주던 손이 멈추고, 시선이 마주침과 동시에 다시금 두 사람의 입술이 맞물렸다.
부드럽게 입술을 빨아들이던 사토루는 엄지로 유우지의 아랫입술을 문질러 입을 열게 했다. 그 틈을 비집고 혀가 밀려 들어가고, 어쩔 줄 몰라 굳어있는 혀를 톡톡 건드리다 가볍게 휘감았다. 낯선 감촉에 유우지는 움찔대면서도 팔을 들어 올려 사토루의 목을 천천히 감쌌다. 그 모습이 너무나도 사랑스러워서 맞닿은 입술 틈새로 미소가 지어지고 만다.
아아, 정말이지. 귀여워서 전부 먹어버리고 싶다.
“유우지, 키스할 땐 코로 숨 쉬어.”
“…으응….”
아마도 처음일 키스인데다가, 운 탓인지 유우지의 호흡이 불안정한 게 느껴져서 잠깐 입을 떼고선 숨부터 쉬게 한다. 제 말에 바로 후우, 하고 숨을 들이쉬는 아이가 사랑스러워 사토루의 입꼬리가 한없이 치솟았다. 살풋 감겨 있는 눈두덩이를 가만히 쓸어준다. 붉어진 눈시울이 어쩐지 야하게 느껴져서 감탄이 나올 뻔했다. 여기서 더 했다가는 일을 치르게 될 것 같아 가벼운 입맞춤을 한 번 더 남겨주는 것으로 마무리한다.
“오늘은 일단 여기까지.”
욕망이 진득하게 달라붙은 눈빛을 해놓고서는 참아주겠다고 한다. 누구의 것일지 모를 타액을 삼키며 유우지는 사내의 눈에서 채 분출되지 못한 흥분을 읽었다. 그와 동시에 제 눈빛도 별반 다르지 않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얼굴에 느껴지는 숨결도, 볼을 감싸온 손도, 그 온기를 전달받듯 잔뜩 열이 오른 자신의 얼굴도. 어느 것 하나 뜨겁지 않은 게 없어서 그저 열에 달뜬다. 좋아하는 사람과 닿는 게 이렇게 기분 좋은 거라고 알려줘 놓고 벌써 그만두는 건 너무하잖아. 조심스레, 그러나 한껏 힘을 실어 사내의 옷을 부여잡는다.
“…한 번만 더 하자, 선생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다시금 서로의 입술을 찾아들었다. 아까보다 더 급하게, 깊이 혀를 섞고 빨아들인다. 채 삼키지 못한 타액이 유우지의 턱을 타고 흐르고, 사토루의 손은 어느새 아이의 옷 속을 파고들고 있었다. 탄탄한 복근의 굴곡을 만끽하며 사토루는 속으로 생각했다.
호랑이를 잘못 건든 것 같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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