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없음)
추석
낡은 책이 가득한 책방에서 간간이 책을 빌려보곤 하는 젊은 학자가 있었다. 대부분 젊은 학자들은 뜻은 있으나 금전적으로 여유롭지 못하니, 책을 사기보단 값을 지불하고 읽을 수 있는 만큼 그 자리에서 읽고, 머리에 넣은 뒤 돌아가는 편이었다. 그리고 최근들어 이곳에 자주 오기 시작한 회색 머리의 여인이 하나. 사내처럼 옷을 입고 갓도 썼다고는 하나 얼굴을 보면 영락없는 여인이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학자였고, 동료들에게 어느 정도 신임도 받기 시작했으며, 오늘도 이 책방에 들러 부지런히 책을 읽고 있었다.
“누구요? 루듭기?”
그런 그녀와 학술적 대화를 나누고자 옆에 왔던 다른 이는, 학문적인 것 외에 소문에도 밝은 편인지라. 그가 오늘도 저잣거리의 소문을 가져와 들려주면, 대충 알아듣고도 테트라는 모르는 척 말을 흘리곤 책을 마저 읽었다.
“아니, 루드빅. 루드비히 와일드.”
“있는 출신을 써먹지도 못하는 작자 말입니까?”
그 말에 옆에 있던 이는 쉿, 쉿, 그렇게 소리를 내며 조용히 하라는 듯 굴었으나, 테트라는 고개를 느리게 내젓기만 했다. 알고 있다. 명문도 아니고 돈으로 벼슬을 한 집안, 그리고 그 집안의 서자. 방탕하기 짝이 없다 소문이 났던데. 그런 이가 요즘 들어 이 주위를 배회하고 있다는 말에 주의를 준 것이었으나, 테트라는 코웃음만 쳤다.
“어허, 어디 가서 그렇게 입 함부로 놀리다가 큰일 난다니까!”
“누가 듣나, 뭐.”
책 읽기도 바빠죽겠는데. 듣고 싶은 소문이 있긴 해서 들었지만, 정작 그건 들려오지도 않고. 그렇게 궁시렁거리던 테트라는 책에 집중하느라, 뒤에 다가오던 인기척을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
“엿듣는 게 예의가 아니라곤 하지만은.”
귓가에서 바로 울리는 낮은 목소리. 뒤에 온 것도 모를 정도로 은밀하게 다가와, 귓가에 나지막하게 말하는 사내가 그녀의 뒤를 차지하고 있었다.
“학자님께서 누구 얘기를 그리 하시는지 궁금해서 말입니다.”
키득이는 소리가 멀어지고 나면 테트라는 그제야 고개를 뒤로 돌려 그가 누군지 확인했다. 서자라고는 해도 비단옷을 두르고, 번지르르한 얼굴로 웃으면서 그녀를 내려다보는 눈이 속눈썹 탓인지 금빛을 띠는 것 같기도 했다.
“있는 출신을 써먹지도 못하는데, 좀 엿듣는다고 흠이 되겠습니까.”
얼씨구, 부채까지 펼치고. 한량이 따로 없다. 방금 그의 얘기를 하던 이는 이미 자리를 슬쩍 뜬 지 오래였으나, 테트라는 읽던 책을 마저 읽었다. 명백한 무시였다.
“보통 사과를 해야 할 터인데.”
그 무시에 테드 파워즈, 정확히는 서자기에 루드비히 와일드라는 이름을 가진 이가 물었다. 진정으로 사과를 바란다기보다는, 테트라의 반응을 마저 보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럼 뭐, 반응 정도는 해드리죠. 테트라는 고개를 들어 루드비히의 눈을 똑바로 보곤 말했다.
“사실을 말한 것에 이죽거리며 덤벼드는 이와 말싸움을 해봤자, 흠만 될 뿐 아니겠습니까.”
호오. 일부라 제가 했던 말과 비슷하게 돌려주는 것에, 루드비히는 흥미로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저런 눈을 바란 것은 아니었는데. 테트라는 그가 저에게 관심을 꺼주길 바랐다. 아쉽지만 오늘 이 책을 더 읽는 것은 포기해야겠다. 그렇게 생각하며 주인장에게 돌려주려 하면, 그는 고개를 내저었다. 아까 저 양반이 책값을 내었으니, 가져가도 좋다고 하면서. 책이냐, 자존심이나. 조금 고민하던 테트라는 일단 그 책을 가져갔다. 빌렸다고 치고, 후에 돌려줄 생각이었다.
그 뒤로, 그와의 만남은 원하지 않는 상황과 시간에 찾아왔다. 늦게까지 토론을 하다 보니 시간이 늦어져서. 그래도 달이 밝아 다행이라며 걸음을 재촉하던 그때, 운 나쁘게도 강도를 만났다. 강도라기엔 계획적으로 제 뒤를 밟은 듯했으나, 물건을 빼앗으려 했으니 강도가 맞겠지.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강도는 그녀가 가지고 있던 책을 요구했다. 그 목소리를 들었을 때 그녀는 그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아차렸으나, 모른 척 보내었다.
「생각보다 멀리 달아나진 못했군요.」
그 뒤로 그 강도는, 정확히는 빌려준 책을 가져간 이는 또다시 테트라가 자주 가는 책방에 찾아와 그렇게 속삭였다. 단순히 물건을 빼앗아갈 이의 복장도, 눈빛도 아니었다.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도 진짜였다. 그런데 왜 이렇게 이유도 뭣도 없이 자꾸 찾아오는지. 테트라가 그렇게 속을 썩이던 그때.
“그 소문 들었소? 달의 악단이 곧 이곳에 온다더구만!”
드디어 그녀가 원하는 소문이 들려왔다. 달의 악단. 사당패와 비슷하다고는 하나 그것과는 조금 다른 집단이었다. 사람들에게 꿈과 같은 시간을 선사한다지. 그러나 뒤에서는, 나랏님의 더러운 일을 쥐도 새도 모르게 처리하는 용병이라는 이야기도 있었다. 그들의 사정은 알 바가 아니다. 그들이 다루고 있는 것에 대해 알 필요가 있었기에. 그렇게 잠복을 하던 테트라였으나, 안타깝게도 오늘도 그녀의 뒤를 밟고 방해하는 이가 있었다.
“아, 깜짝이야! 뭐예요?!”
“쉿.”
루드비히 와일드. 갑자기 뒤에서 나타난 그는 저를 보자마자 소리를 빽 지르는 테트라의 입을 슬쩍 막았다.
“목소리 낮추세요. 여기 있다고 알릴 작정이 아니라면.”
확 물어버릴까. 그런 생각을 하는 눈에 루드비히는 금방 손을 떼긴 했지만, 테트라의 바람대로 떠나줄 것 같진 않았다.
“당신도 저곳에서 팔고 있다는 신비한 약초에 관심이 있던 것 아닙니까?”
대체 어디까지 알고 있는가. 테트라는 제가 원하던 것을 콕 집어 말하는 그의 얼굴이 얄밉게만 보였다. 밤에 그런 야행복을 입고 뭘 하고 다니는지 알 수 없는, 낮에 보이는 한량의 모습도 연기인지 알 수 없는 그런 사내. 그런 사내가 약초에 관심을 왜 보이는 것인가.
“우연이군요. 저도 그게 필요한지라.”
“향락에 쓰인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요.”
“그게 다른 방향으로 쓰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걸, 당신이 아는 것 같아서. 조금 흥미가 생겼을 뿐입니다.”
정확히는 테트라 지오메트릭에게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이긴 했으나, 당사자는 그것은 알지 못하고 일단 그를 경계했다. 이미 다 들켰으니 발뺌할 수도 없겠죠. 그냥 내키지 않기도 하고, 달의 악단의 단장이라 불리는 이가 따로 의뢰한 것도 있어서 적당히 청소를 하던 와중에 당신이 걸린 것이긴 하지만.
“뭐, 조금이지만 연이 좀 있기도 하고.”
이쪽이 더 재미있을 것 같으니 이쪽에 거는 걸로 할까요. 루드비히 와일드는 제대로 숨지도 못하고, 결국 달의 악단에 다가가지도 못한 그녀를 보며 비웃었다. 비웃음이긴 하나 앞으로 제게 늘어날 즐거움에 대한 웃음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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