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작1

사역마 토르티야

A타입, 1차(던전밥 au) / 11,559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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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궁의 구조가 점점 넓어지고 있었다. 아래로 내려갈수록 좁아지는 미궁은 없다지만… 히르칸이 언제부턴가 오고 가는 것을 무척 서두르게 된 것도 아마 그 때문일 것이라고, 막심은 생각했다. 미궁 탐험에 있어서는 히르칸이 막심보다 훨씬 박식했지만 적어도 구조적인 측면에서는 막심 또한 괴리감을 느꼈다. 학교에서 공부할 적에도 이렇게까지 제한된 구조를 갖고 있는 미궁은 본 적이 없었다. 깔때기를 뒤집어놓은 것처럼 한 층 한 층의 구조도 높이도 확연한 격차를 보이며 넓어지고 있다. 정작 히르칸은 미궁의 기형적 구조를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본능적으로 서두르고 있는 것 같았다.

돌벽을 짚고 나선형의 계단을 내려가다 보면 어느새 벽은 낮아지고 희끄무레한 하늘이 보였다. 미궁 속 하늘은 지상의 하늘과 달라서 미궁주의 의도에 따라 온종일 낮일 수도, 낮보다 밤이 길 수도 있었다. 예상하기로는 지상과 비슷한 패턴을 띠고 있는 것 같았다. 막심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동안 히르칸은 빠르게 계단을 내려가 흙바닥에 발을 디뎠다. 그를 쫓아 바닥에 내려선 막심은 그제야 풍경을 제대로 보았다. 이곳은… 미궁 내부라기보다도 어느 한적한 시골 마을에 가까워 보였다. 숨겨진 공간인가? 알 수 없다. 그저 햇빛에 마른 밀 색 땅과 그 위를 듬성듬성 덮은 낮은 잔디밭, 그리고 길을 따라가면 그 끝에 보이는 허름한 건물이 한 채 있을 뿐이었다. 마치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는 듯한 그 건물을 향해 히르칸과 막심은 걸음을 옮겼다. 주변은 고요했고 어디서 불어오는지 모를 산들바람이 불었다. 어떤 생각으로 이런 공간을 만들었을지 조금 의아하기도 했다.

“여긴… 성인가.”

그렇게 말하는 히르칸의 목소리는 물음에 가까웠다. 우두커니 서 있는 저 건물은 첨탑이 있어 확실히 집보다는 성에 가까워 보였지만 워낙 허름한데다 크기도 그다지 크지 않았다.

“그냥 가정집 같기도 하고요.”

그렇다기엔 주변에 그럴듯한 집 한 채 보이지 않았지만. 이 층의 넓이가 어느 정도인지는 알 수 없어도 시야의 끝을 내다보려면 야트막한 돌담이 지평선 대신 서 있는 게 보였다. 어쩌면 이 층이 통째로 어느 작은 성채를 모방해 만들어진 공간일지도 몰랐다. 히르칸은 어딘가 찜찜한 표정이었지만 막심은 별로 위험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실로 오랜만에 맡아보는 풀 내음과 차분한 바람 따위가 긴장감을 누그러뜨려 주었다. 무성하게 자라난 풀끼리 스치는 소리가 났다.

“저 집에 누가 살고 있을까요?”

“글쎄다. 살고 있으면 마주쳐서 좋을 거 없을 것 같은데.”

“하지만…….”

형편 좋은 상상을 늘어놓으려던 막심은 곧 도로 입을 다물었다. 히르칸의 말이 맞았다. 어느덧 미궁의 하층에 가까워져 있었다. 여기서 마주쳐봐야 미궁 내에 살고 있는 마물이거나, 사람이라 해도 제정신이 아닐 가능성이 높았다. 막심이 조용해지자 흘끗 그를 바라본 히르칸이 못 이기듯 입을 열었다.

“어쨌든 들어가 보자고. 일단 좀 둘러보고.”

히르칸은 그렇게 말하며 칼을 고쳐 맸다. 막심은 대답 대신 그의 뒤에 가깝게 다가붙었다. 빈손을 잡으면 히르칸은 굳이 놓지 않고 꽉 마주 잡은 채 걸음을 옮겼다.

성은 관리를 받지 못한 흔적이 여실했다. 건물은 모서리가 부스러졌거나 이끼가 껴 있고, 건조한 땅 군데군데 짙은 색을 띤 잡초가 우악스럽게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두 번째 모퉁이로 돌아섰을 때 막심은 자기도 모르게 작은 탄성을 내뱉었다. 사람의 손이 닿은 지 오래된 뒤뜰에는 풀이 무성했는데, 한 해 살이 꽃들이 잔뜩 번져 피어나서 넓은 꽃밭이 되어 있었다. 정적을 평화롭게 채우던 풀잎이 스치는 소리가 바로 이곳에서부터 나는 것이었다. 빽빽한 잔디와 잎 사이로 울타리가 세워져 있다가 시간의 흐름을 이기지 못하고 허물어진 흔적이 보였다. 막심은 히르칸보다 앞서 나가 그를 이끌고 꽃밭 안에 발을 들였다. 제 고향과는 판이한 풍경인데도 어쩐지 집에 돌아왔다는 기분이 드는 평화로운 광경이었다. 어느샌가 미끄러지듯 손을 뺀 히르칸은 허리를 숙이고 꽃들을 유심히 살펴 보고 있었다. 그가 손을 뻗어 무언가 집는 것을 보던 막심은 가까이 다가갔다.

“히르칸, 뭐해요?”

“벌레 줍는데.”

“…….”

히르칸이 손바닥을 펼치자 그 위에 앉아 있는 메뚜기 한 마리가 보였다. 그것이 예고 없이 튀어 오르는 통에 막심은 자기도 모르게 흠칫 눈을 감았다 떴다. 바닥에 착지한 메뚜기를 히르칸이 다시 집었다. 그 손길에 한 치의 망설임도 느껴지지 않았다.

“튀겨줄게.”

“아뇨… 괜찮아요.”

어쩐지 맥이 빠졌다. 새삼스럽지만 이런 광경을 전혀 즐길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막심은 목소리를 가다듬고 애써 의연하게 대답하며 슬그머니 자리를 피했다. 그 자리에 서 있다간 히르칸이 또 자신을 설득하려 들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막심의 의사와는 별로 관계없었는지 히르칸은 다시 채집을 이어 나갔다. 저녁으로 벌레를 먹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막심도 무언가 찾아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리를 스치는 야생화들 사이를 누비며 걸음을 옮기다 보면 꽃이 비교적 듬성듬성하게 피어 있는 곳이 보였다.

가까이 다가가면 그 안에는 제법 많은 수의 나비가 모여 앉아 있었다. 하기야 꽃이 있는 곳엔 나비도 있는 법이었다. 이것도 마물일까? 미궁 안에 있는 모든 생명체는 마력을 띤 마물이라는 걸 알면서도 막심은 왜인지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 광경이 너무 아름다웠기 때문에. 종잇장을 접어 만든 것 같은 수십 쌍의 날개와 그 날개마다 박혀 있는 검고 둥근 원형의 무늬. 그 기묘한 광경을 홀린 듯 보고 있다 보면 어린아이가 민들레 홀씨를 불듯 그 군집을 장난스럽게 흩어버리고 싶었다. 그러면서도 왜인지 한 편으로는 그것을 건드리는 게 꺼려졌다.

어쨌거나 지상에서도 좀처럼 보기 드문 광경이었다. 히르칸을 불러 보여줄까 고민하던 막심은 곧 마음을 고쳐먹었다. 미궁에서 꽃밭을 발견했는데도 벌레를 찾는 데에만 몰두하던 히르칸이 떠올랐다. 저 나비들을 보면 더 이상 오늘 저녁 거리를 찾아다닐 필요 없으니 잘 됐다고 할지도 모른다. 가끔 날개를 파닥거리는 나비 군집을 뒤로 하고 막심은 몸을 돌렸다. 아무래도 저 마물들이 서식지를 꾸려놓아서 그 주변 풀들이 듬성하게 내려앉은 모양이었다. 사실 그 주변만이 아니라 이 꽃밭에 있는 꽃들은 전부 멀리서 보면 화창히 피어 있는 것처럼 보여도 가까이서 보면 조금씩 시들어 가고 있었다. 보통 이렇게 평지에 자라는 꽃들은 고작 한 해를 살고 시드는 꽃들이니까. 걸어온 길을 천천히 되돌아가던 막심은 손을 뻗어 꽃 한 줄기를 조심스럽게 쓸어보았다. 마른 잎 한 장이 그 손길에조차 스쳐 떨어져나갔다. 그 때에 불현듯 한줄기 불길한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히르칸도 분명 이렇게 금세 죽어버릴 거라고…….

막심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자기도 모르게 한쪽 귀를 손으로 덮었지만 그건 사실 귓가에 들린 소리가 아니었다. 마치 누군가가 머릿속에 속삭여 불어넣은 듯한 생각이었다. 오싹한 기분에 애꿎은 귓전을 문지르던 막심은 걸음을 재촉해 히르칸의 곁으로 돌아갔다. 그새 히르칸은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는지 천주머니에 손 안에 든 것을 털어넣고 있었다. 왜 주머니가 혼자 움직이는지, 그 안에 무엇을 넣었는지 별로 물어보고 싶지 않아서 막심은 자신이 본 것을 모른 체했다. 주머니를 제대로 여미고서야 히르칸이 고개를 들었다.

“뭐 좀 찾았냐?”

“아뇨, 그냥. 꽃이 어디까지 있나 궁금해서… 저 멀리까지 다녀왔어요. 은근히 넓더라고요.”

둘러대려다 보니 말이 길어졌다. 제 뒤편을 가리키며 조금 두서없이 떠들던 막심은 문득 그의 시선에 말을 멈췄다. 히르칸이 막심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괜한 것 가지고 거짓말을 했나, 괜히 가슴 한 켠이 콕콕 찔려 무슨 말이라도 하려던 차에 히르칸이 불쑥 손을 뻗어왔다. 그러나 그는 막심을 건드리는 대신 머뭇거리다 손을 거뒀다.

“…왜요?”

“아니, 그냥…….”

말꼬리를 흐리던 그가 입을 열었다.

“네 어깨에… 나비가 앉아 있어서.”

*

성 내부는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었지만 외부와 마찬가지로 사람이 오랫동안 묵지 않은 듯했다. 그런데도 막심은 문을 열 때마다 자기도 모르게 조금씩 긴장하게 됐다. 문 너머에서 인기척이 느껴지는 것 같다는 착각 때문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빠르게 수색을 마친 히르칸은 마침내 여기엔 아무도 없으며, 오늘은 여기서 쉬어가자는 결론을 내렸다. 아까까지의 염려와 불안감이 조금 해소되는 기분이었다. 또 오랜만에 침대에 누울 수 있다고 생각하니 기대가 되기도 했다.

다른 방은 내버려두고 가장 큰 침실과 주방만 사용하기로 했다. 아마 성에 거주하는 부부의 침실이었을 그 방은 두 성인 남자가 누워도 불편함 없을 만큼 침대가 넓었으며, 이불과 베개는 먼지만 조금 털면 덮고 자도 될 만큼 오염된 구석 없이 깨끗했다. 덕분에 번거롭게 짐을 펼쳐놓는 일 없이 가방을 내려놓고 나온 막심과 히르칸은 주방에 있는 식탁에 잠시 앉았다. 겸사겸사 아궁이에 불을 때고 남은 버터버 찻잎을 우려서 각자의 잔에 따라놓자 나름 분위기가 좋았다. 두 사람은 잠시 말없이 차를 홀짝이며 모처럼 주어진 평화를 즐겼다.

그렇게 찻잔을 반쯤 비웠을 때쯤 히르칸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너한테 줄 게 있다.”

평소라면 곧장 뭐냐고 물어봤을 텐데. 히르칸의 목소리에 오늘따라 어쩐지 무게가 느껴졌다. 바로 되묻지 못하고 망설이며 히르칸의 표정만 살피는 막심을 바라보던 히르칸이 식탁 아래로 손을 내렸다. 무언가 묶여 있는 걸 푸는 손짓이었다. 이윽고 히르칸이 손에 쥔 것을 들어 올렸다.

그가 허벅지에 늘 차고 있던 스틸레토였다. 히르칸은 그것을 식탁 중앙에 턱 내려놓고선 다시금 입을 축였다. 그리고 담담하게 중얼거렸다.

“당장 줄 수 있는 건 이것밖에 없어. 나가면… 더 괜찮은 걸 줄게.”

“그 말은…….”

“만나보자. 지난번에 제대로 말을 안 한 것 같아서.”

구태여 누가 말로 꺼내지 않아도 이미 기정사실화된 관계였다. 그럼에도 그 약속이 형체를 갖고 눈앞에 나타나자 처음 고백을 들은 것처럼 가슴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말을 잇는 히르칸의 목소리가 조금 멋쩍어하는 것도 같았다. 그러나 늘 그렇듯 히르칸은 말꼬리를 흐리는 일 없이 차분하게 말을 맺었다.

“네가 기껏 고향에까지 같이 가자는데… 맨입으로 이야기하기도 그렇고.”

막심은 뺨이 뜨거워지는 걸 느끼며 스틸레토를 집어 들었다. 반들반들하게 길이 든 가죽 칼집에서 스틸레토를 뽑아 들면 반듯하게 날이 세워진 검신이 드러났다. 히르칸이 당장 어제도 이 스틸레토를 꼼꼼히 갈고 닦는 걸 보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막연히 자주 쓰지 않아도 저렇게 신경을 쓰는구나, 그렇게만 생각했었는데.

무언가라도 돌려주고 싶었다. 그러나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막심의 소지품 중에 히르칸이 쓸 만한 건 없었다. 하다못해 장신구 하나라도 있었더라면 증표 삼아 교환했을 텐데. 고민하는 기색이 역력한 막심을 보며 히르칸이 조금 웃었다.

“왜?”

“저도 뭔가 드리고 싶어서요.”

“넌 안 줘도 되는데.”

“주고 싶어서 그러죠…….”

앓는 듯한 소리로 중얼거리며 막심은 스틸레토의 손잡이를 만지작거렸다. 그리고 길지 않은 고민 끝에 그만이 만들 수 있는 것을 떠올려 냈다.

“당신 전투를 도와줄 사역마를 만들어 줄게요.”

“사역마? 그런 것도 만들 줄 아냐?”

“네. 신체 중 일부만 들어가면 돼요. 머리카락이나 피 같은 거…….”

그리고 발그레하니 붉어진 얼굴로 히르칸을 힐끔거리던 막심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만들어 줄 테니까… 잠깐 들어가 있으면 안 돼요?”

“왜?”

“혹시나 실수하면 부끄럽잖아요.”

“뭐? 이제 와서…….”

그야말로 황당하다는 얼굴이었다. 뒷말을 덧붙이지 않았지만 그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대충 예상은 갔다. 막심이 히르칸 앞에서 실수를 한 게 어디 한두 번이던가. 초반에는 마물들과 함께 히르칸을 한 줌 재로 만들어버릴 뻔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이건 선물인데. 똑같이 마법을 쓰는 일이라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기분의 문제였다……. 수줍은 얼굴을 하고 눈을 내리깐 채 히르칸을 힐끔거리자 그가 결국 못 이기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막심을 한 차례 슥 돌아본 히르칸이 침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이윽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그제야 막심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굳이 그를 들여보낸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마지막으로 사역마를 만든 게 몇 년 전이었다. 그나마 만들어주겠다고 이야기할 수 있었던 건 수업에서 우수한 성적을 받았던 기억이 있기 때문이었다. 먼저 식탁을 손수건으로 한 번 더 훔친 막심은 히르칸의 스틸레토를 뽑아 들었다. 제 뒷덜미를 더듬다 잘 안 보이는 부분의 머리카락을 한 꼬집 끊어내어 내려놓았다. 그리고 손끝을 살짝 베어 머리카락 위에 핏방울을 뚝뚝 떨어뜨리면 준비는 끝이었다. 막심은 눈을 감고 나지막이 영창하며 만들고자 하는 형상을 눈꺼풀 아래로 그려보았다. 막심이 만들고 싶은 사역마의 모습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조금 전 히르칸과 떨어져 꽃밭을 헤집고 다닐 때 보았던 나비 군집을, 정확히는 그 나비 한 마리를 만들어낼 생각이었다. 처음 보았던 광경 그대로 여러 마리가 모여 있으면 더 예쁘겠지만 사역마의 수를 늘리면 그 부하를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한 마리 한 마리의 생김새를 떠올리기 위해 눈을 감고 집중하면 어렵지 않게 그 모양을 그릴 수 있었다. 가느다란 몸통과 손바닥만한 날개. 특히 그 날개에 있던 원형 무늬만큼은 이상하리만치 기억이 또렷했다. 새까만 동공과 그 바깥을 감싸는 녹색 테두리. 그리고 그 모든 것을 한 번 더 덧그리는 검고 짙은 띠… 마치 사람의 눈동자를 닮은 무늬. 그 모습이 어찌나 생생하게 떠오르는지 눈을 뜰 때쯤에는 그 앞에 지난번의 나비가 앉아있으리라는 확신까지 들었다. 그러나… 막심은 개운치 않은 기분을 느끼며 얼굴을 찌푸렸다. 부피가 없는 생물이라 그런지 바람과 달리 구현이 썩 쉽지 않았다. 부피가 있는 생물이었다면 그냥 손으로 빚으면 되는데… 나비가 내려앉아 있는 자세도 어딘가 기울어진 것 같았고, 왼쪽 더듬이가 오른쪽 더듬이보다 아주 조금 더 짧아 보였다. 히르칸을 들여보내서 다행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나비를 세 마리나 만들고서야 막심은 간신히 그럴듯한 결과물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나비 세 마리가 가지런히 테이블 위에 앉아 있게 되었다. 막심은 한 걸음 뒤로 가서 그 날개의 모양새를 살폈다. 멀리서 보니 꼭 여러 쌍의 눈동자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았다. 기묘한 기분을 느끼며 막심은 입을 열었다.

“히르칸, 이제 나와도 돼요.”

그러자 문이 열리는 소리와 동시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투덜거리는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뭐 대단한 걸 만든다고 방에 들어가 있으라고까지 한 거야?”

그리고 성큼성큼 다가온 히르칸도 곧 테이블에 줄 지어 앉은 나비들과 마주쳤다. 그는 그 나비의 정체를 금세 알아보았다.

“네 어깨에 앉아 있었던… 그거네.”

“네. 사역마는 기능이 중요하지만… 기왕이면 예쁜 게 보기도 좋으니까.”

“뭐… 예쁘면 좋지. 근데 세 마리나 만든 거냐?”

“그게.”

헛기침을 한 막심은 조금 전보다 작은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첫 번째 건 더듬이가 짝짝이였고… 두 번째 건 무늬가 제 마음대로 안 돼서요. 가장 오른쪽에 있는 게 당신한테 줄 사역마예요.”

말을 맺으며 막심은 슬그머니 히르칸의 표정을 살폈다. 히르칸은 막심이 말한 차이가 도무지 눈에 안 들어오는 모양이었다. 세 번째 나비의 앞에 손을 살짝 뻗으면 나비가 가느다란 다리로 막심의 손을 타고 올라왔다. 히르칸에게 내밀자 히르칸이 손등에 그 나비를 옮겨 받았다. 히르칸이 나비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모습이 어쩐지 무척 흡족했다. 막심은 괜히 둘러대듯 손을 내저으며 말을 이었다.

“근데 아까 본 나비가 더 예쁜 것 같아요. 똑같이 만드는 게 영 어려워서…….”

“그거 말인데, 나비가 아니라 나방이야.”

히르칸이 막심의 말을 끊었다. 막심은 눈을 깜빡였다. 히르칸은 아직 손에 앉은 나비, 아니, 나방을 유심히 살펴보고 있었다. 얇고 연약한 날개를 손끝으로 조심스럽게 건드려 보던 히르칸이 다시 입을 열었다.

“생각해 보니까 더듬이 모양도 다르고, 주둥이도 그래. 그간 아마 나방일 거다.”

나비는 마음에 드는데 나방이라고 하니까 어쩐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막심은 조금 떨떠름한 기분이 되었다.

“그래요…?”

“응. 여러 마리가 모여 있으면 인분 때문에 환각을 보는 경우도 있으니까 모여 있는 걸 보면 가까이 가지 마라.”

환각이라. 불현듯 나방 군집과 처음 마주쳤을 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 모습을 홀린 듯 지켜보고 있을 때 문득 머릿속에 들려왔던 불길한 속삭임… 그것도 마물들의 인분 때문이라고 생각하면 얼추 이해가 갔다. 말 못 할 불안감이 그제야 조금 해소되는 것 같았다. 환각을 일으킨다면 환청도 일으킬 수 있는 거겠지… 막심이 그런 생각에 잠겨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있으면, 히르칸이 침묵의 뜻을 오해했는지 달래는 투로 덧붙였다.

“…네 나비가 더 낫다는 말이었어. 네가 나비를 생각하고 만들었으니까 이건 나비지.”

“그럼 다행이긴 한데…….”

어쨌든 나방이라는 소리에 내심 풀이 죽었던 것도 사실이다. 히르칸의 위로도 나름 도움이 되었다. 뒤늦게 유순한 목소리로 대답하던 막심은 말꼬리를 조금 흐리며 나머지 두 마리 나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근데 저 남은 두 마리는 어떻게 하죠?”

“…그러게.”

그리고 짧은 정적이 찾아왔다. 히르칸과 막심은 쓰이기도 전에 제 쓸모를 다 하고 죽은 듯 앉아있는 사역마를 한참 말없이 바라보았다. 침묵이 길어지자 히르칸의 손등에 얌전히 앉아있던 사역마가 날개를 두어 번 접었다 폈다.

사역마라 생김새는 나비처럼 생겼어도 사역마로서의 원활한 기능을 위해 나비의 단점은 거의 제거되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날개를 만져도 인분이 묻어나오지 않고, 보통의 나비에 비해 그 강도가 강해 조리가 가능하다. 먼저 사역마의 날개를 떼어내어 가볍게 기름을 두른 팬에 넣으면 머지않아 그 부피를 배로 늘리며 바삭하게 부풀어 오른다. 위 날개와 아래 날개를 합해 한 마리당 총 네 개의 날개 칩을 건질 수 있다. 잘 튀긴 날개들을 따로 건져놓고 이번에는 그 기름에 찻잎을 넣어 향을 입힌다. 향이 충분히 배었다고 생각되면 그 기름에 그대로 메뚜기와 애벌레들을 넣고 물컹거리는 느낌이 가실 때까지 바싹 볶아준다. 3분 정도 지나 겉이 황금빛을 띠면 건져내어 기름을 잘 털고 접시에 옮겨 담는다.

“주방이 있으니 편하긴 하네.”

“그러게요…….”

막심은 체념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히르칸이 벌레를 몇 마리씩이나 집어먹는 동안 막심은 줄곧 애꿎은 나비 날개만 깨작거리고 있었다. 눈앞에 노릇노릇하게 튀겨져 있는 메뚜기를 보고 있으면 저걸 먹긴 해야 한다는 사실에 자꾸만 우울해졌다. 이건 사실상 마물식도 아니라는 생각이 가시지 않았다. 지금까지 먹었던 건 그래도 요리를 마치고 나면 원래의 형태는 별로 남아있지 않아서 눈을 감으면 먹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건…….

히르칸이 메뚜기 하나를 포크로 찔렀다. 자기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뜬 막심은 히르칸이 그걸 입에 집어넣기 전 마지못해 목소리를 쥐어짜냈다.

“사실은요… 곤충은 진짜 먹기 싫었는데…….”

“근데 먹을 게 없어.”

그리고 히르칸이 즉답했다. 그가 정답을 말하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순순히 대답하기가 싫었다. 대답하면 메뚜기를 먹어야 하니까. 막심의 표정이 좀처럼 나아지지 않자 히르칸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별로 역겹지 않아. 그냥 바삭바삭해. 돼지 껍데기 튀긴 느낌이야.”

그의 타이르는 듯한 목소리는 늘 듣기 좋았다. 하지만 이건 맛이 아니라 정말로 기분의 문제라고… 그렇게 말하려던 막심은 결국 히르칸을 설득하는 대신 포크를 집어 들었다.

*

고요한 밤이었다. 막심은 눈을 떴다.

고개를 돌려 보면 히르칸은 곤히 잠들어 있었다. 평소에는 번갈아 불침번을 서야 했기 때문에 이렇게 가까이서 그의 잠든 얼굴을 보는 건 드문 일이었다. 아니, 어쩌면 지금 같은 순간에도 볼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가 막심보다 깊게 잠들어 있는 일은 웬만해서는 없을 테니까. 오늘이 아니었다면……. 베개에 머리를 대고도 잠이 오지 않아 막심은 한참을 깬 채로 있었다. 평소라면 그가 굳이 내색하지 않아도 먼저 잠이 안 오냐며 물어왔을 텐데, 히르칸도 오랜만의 침대가 반가웠던 걸까.

막심은 히르칸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다 손등으로 가볍게 쓸었다. 그가 잠결에 미간을 찌푸렸다. 잠귀가 밝은 편이었다. 역시 이대로라면 금방 깨버릴 거야. 막심은 망설임이 남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다 고개를 숙여 그의 이마에 입술을 가까이 했다. 속삭임에 가깝게 주문을 읊으면 잠시 흐트러졌던 그의 숨소리가 다시 규칙적으로 가라앉았다. 이제 히르칸은 밖에서 폭발이라도 일어나지 않는 한 아침까지는 깨지 않을 것이다. 미안해요. 금방 올게요. 속으로 중얼거리며 침대에서 나온 막심은 로브를 어깨 위에 두르고 지팡이를 챙겼다. 침대에서 부스럭거리며 일어나 문을 열고 나가는 순간까지도 히르칸이 잠에서 깨는 기색은 느껴지지 않았다.

낮에 그 마물 군집을 제대로 살펴보지 못한 게 마음에 걸렸다. 일련의 사건을 겪고도 막심은 그 마물의 습성이 무엇인지, 어떤 특징이 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히르칸조차 별다른 설명을 덧붙이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모든 마물은 이유가 있기 때문에 그곳에 존재하는 것이다. 규칙적으로 해가 뜨고 지는 것처럼 보이는 하늘조차 사실 미궁의 주인의 바람이 반영된 것이다. 지금 이 현실과 구분하기 힘든 밤하늘도. 막심은 로브의 옷자락을 좀 더 당겨 여미며 쌀쌀한 밤바람을 피해 걸음을 좀 더 재촉했다. 풀밭에 들어서자 나직한 풀벌레 소리와 여전히 끊이지 않는 바람 소리가 정적 위로 흘렀다. 허물어진 울타리를 지나서도 좀 더 걸어야 다다르는 곳에 바로 그 마물의 군집이 있었다.

나방들은 낮보다도 활발히 날개를 움직이고 있었다. 낮에도 느꼈던 충동적인 감각이 또 다시 피어올랐다. 이 빽빽한 군집을 전부 날려 보내고 싶으면서도 좀처럼 가까이 다가가고 싶지는 않았다. 하나가 되어 살아 움직이는 듯한 군집을 응시하며 고심하던 막심은 손을 뻗는 대신 다른 방법을 택하기로 했다. 나방들을 지팡이로 가리키고 가벼운 바람을 일으키는 주문을 읊자 로브 자락이 가볍게 펄럭이며 그의 의도대로 나방들이 일시에 날아올랐다. 그러나 미처 예상치 못했던 건 다름 아닌 인분이었다. 단순히 나방의 인분이라기엔 빽빽하고 자잘한 가루들이 바람과 함께 훅 흩날렸다. 달빛에 부딪혀 온 사방이 반짝거렸다. 히르칸이 낮에 해줬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날개에서 떨어지는 인분을 들이마시면 환각을 볼 수도 있다고. 막심은 급하게 소맷자락으로 코와 입을 틀어막으며 나방들이 날아오른 자리를 내려다보았다. 그 아래에는 마물로 보이는 것의 시체가 뼈대만 남아 있었고, 그 뼈대를 따라 반투명한 우윳빛 알이 빼곡히 붙어 있었다. 그 모습에 메스꺼움을 느끼며 자기도 모르게 뒷걸음질치던 막심은 앞에서 들려오는 또 다른 기척에 깜짝 놀라 눈을 들었다. 그리고 눈앞에는…

어떤 남자가 서 있었다. 막심은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끼며 숨이 막히는 목소리로 입술을 달싹였다.

“…누구세요?”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남자의 머리는 달빛 아래서도 차츰 그 색이 하얗게 바래가는 게 보였고, 눈가와 입가에는 나이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 있었다. 그리고 그의 옷차림은… 그건 도무지 모험가의 옷차림이 아니었다. 이를테면 히르칸과 막심이 묵고 있는 그 성 내의 방문을 열고 나와도 어색하지 않을 법한. 마치 이곳에 오랫동안 살아온 듯한 옷차림이었다.

막심은 깨달았다. 지금 눈앞에 서 있는 남자는 이 미궁을 만든 장본인이다.

그리고 남자가 부드러운 웃음을 지어 보였다. 마치 막심과 히르칸의 당도를 일찍이 알고 있었다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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